아마 살면서 경험할 추석 연휴 중 가장 긴 추석 연휴가 될 것으로 보이는 이번 연휴. 적당히 쉬었으니 슬슬 느껴서는 안되는 감정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이런저런 소설을 읽었습니다. 흔히(?) 말하듯 노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있음에도 노는 것이 재미있는 것인 법이니까요(...) 점차 준비해둔 소설의 리스트가 다해가던 때, 다양한 사람들의 추천을 보고는 언젠가는 읽어야겠다고 생각해놓고는 서장만 읽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소설이 생각나 다시 펼치게 되었습니다. 아니, 다시 열었다는 표현이 더 적확하려나요. <피어클리벤의 금화>입니다. 모처럼 비평을 작성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든 글도 오랜만이군요.


https://britg.kr/novel-group/novel-posts/?novel_post_id=11110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은 대체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 공통점을 하나로 묶어낸다면 마법, 이종족, 종교, 그리고 중세 정도일까요? 물론 작품에 따라서는 근세나 미래의 기계문명을 엮어내는 경우도 있으니 마법과 이종족 정도를 판타지 장르의 가장 큰 특색이라 부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문제가 하나 남습니다. '왜?'


왜 사람들은 굳이 마법과 이종족이라는 자신도 만나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를 수 밖에 없는 존재들에 대해 소설을 읽고 쓰는 것일까요? 그냥 재미있어 보이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촘촘한 인과의 거미줄을 요구하는 허구와는 달리 주사위 놀음의 변덕에 시달린다는 것이 현실의 고약한 점이니까요. 하지만 그 변덕에 의해 망가진 거미줄을 수복하는 거짓만큼 사람의 인상에 깊게 남는 것은 없다고 했죠.[각주:1] 그렇다면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거미줄 가닥을 찾아 사유의 손끝을 더듬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우선 마법의 레종 데트르는 그리 어렵지 않게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중세란 배경은 (우리가 아는 한) 기술문명의 최전방에 선 현대의 독자들에게 너무 느린 시대입니다. 나이와 관록이 동의어로서 사용될 수 있던 시대와 그 둘은 독립적인 개념임을 실증하는 현대의 멀미나는 기술발전속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의 모든 활동에 전반적으로 속도가 붙었지요. 가령 통화기능이 달린 회중시계는 실시간으로[각주:2] 정보를 교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며, 발달된 의료기술은 질병의 (제한된) 정복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속도로 질환으로부터 회복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었죠.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판타지란 장르에서 마법의 의의는 화려한 화염구를 적들에게 날리는 극적인 긴장감에 있지 않고 회복마법으로 동료를 치료하거나 원거리의 동료와 심상으로 소통하는, 이른바 현대 기술문명의 속도에 익숙한 독자들을 위한 현대기술의 대체품이라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발달된 기계문명과 마법을 함께 다루는 것은, 마법으로 작동하는 기계들이 아닌 이상, 어떤 의미에서 자기모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계문명을 바탕으로 세워진 사회와 마법의 반석에 기초한 사회 사이의 골이 깊은 단절된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죠.[각주:3]


이종족의 존재는 아무래도 마법보다는 다소 까다롭습니다. 왜 판타지 장르에서는 귀가 조금 더 길고 수명도 조금 더 긴 사람이나 머리 한둘 정도 작고 빠르게 늘어나며 피부가 녹색인 사람(?) 등을 도입하는 것일까요? 그저 색다른 외모를 가진 자들을 추가하여 다른 세계의 이야기임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우화의 형식을 빌어 인격을 부여받은 동물들을 끌어들이는 방법도 있을텐데 말이죠.


여기서 잠시 판타지 장르에서 이종족이 다뤄지는 방식을 떠올려봅시다. 이종족은 외양이나 수명뿐만 아니라 생활 양식 또한 상당히 다른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예컨대 귀가 조금 더 길고 수명도 마찬가지로 긴 것으로 묘사되는 종족은 숲을 생활 근거지로 두고 주된 경제활동이 수렵/채집이며 마법에 대한 숙련도가 높은 것으로 묘사되기 마련이며, 머리 한둘 정도 작고 피부가 녹색인 것으로 묘사되는 종족은 마찬가지로 수렵/채집을 하지만 약탈 또한 서슴지 않으며 땅굴을 주된 생활 근거지로 갖는 것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현실 세계에서 이들과 대응시킬만한 존재를 찾는다면 이방인, 혹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있겠지요. 약간의 과장을 보탠다면, 이종족들은 타국 혹은 타 문화권의 외삽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고 합니다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대중매체나 인터넷 동영상 채널을 살펴보면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이 서로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지를 다루는 내용을 심심찮게 찾을 수 있습니다. 문화권 간의 차이가 더 벌어진다면 시각의 차이도 한껏 벌어지겠지요. 애석하게도 이 거리감을 살려낸 작품들은 많지 않습니다. <피어클리벤의 금화>를 다루는 리뷰에서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가 끝없이 호출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일 것입니다. <드래곤 라자>에서 묘사된 엘프 이루릴은 분명히 대화를 나누고 그 대화의 내용도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진, 혹은 일반인보다는 머리가 좀 더 좋은, 존재로 묘사되지만 맥락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대화에서는 영 겉돌기 일쑤입니다. 머리를 주전자에 빗대는 농을 건네는 장면에서 영 그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피어클리벤의 금화>는 용, 혹은 린트부름의 올바른 적생자, 빌리더자드가 인간 처녀를 납치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용은 절대적인 힘 혹은 신격의 현신처럼 묘사되며, 그에 걸맞는 앎을 갖추며 약속에 구속됩니다. 고블린 혹은 흐로킨의 검은 혈맹은 판타지 장르에서 널리 퍼진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게 묘사됩니다. 피부색은 묘사된 적이 없으나 검은 혈맹이라 했으니 아무래도 어두운 색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이들의 사회와 가장 유사한 이미지를 갖는 문화권(?)을 찾는다면 아무래도 바이킹을 들어야 할 듯 싶군요. 서리심의 무녀는 겨울 혹은 자연의 인격화처럼 묘사됩니다. 인격을 얻은 자연은 수목 보호 외 일절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 문장은 틀렸지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넘기기로 하죠. 류그라, 혹은 쓰러진 신목의 유배자들은 판타지 장르에서 널리 퍼진 엘프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원 본거지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유랑민족으로서 그려지며, 아무래도 떠돌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집시가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군요. 이들과의 대화는 실로 타문화간의 대화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상이한 가치관 사이의 대화로 그려집니다. 그것이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다른 특기할만한 점은 이야기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의 성비입니다. 막연한 인상비평에 불과합니다만, 이렇게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군상극에서 이야기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조타석에 올라타도록 허락받은 인물의 7할 정도가 여성이라는 것은 판타지란 장르에서 상대적으로 드문 일이니까요. <드래곤 라자>와의 또 다른 유사성인 이야기의 배경, 즉 국가의 체계가 뒤틀리기 시작하는 격동의 시기와 관련이 있는 설정일지도 모르겠지만,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이야기는 되도록이면 자제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쓰러진 신목의 유배자들은 귀가 길며 유랑민족으로서 박해받았고 그들만의 마법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 외에는 이렇다할 두드러짐을 내보이지 못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들의 발자취로 인해 다듬어진 세계관이 어떻게 타 종족과 다른지 제대로 묘사된 적이 없다고 해야겠지요. 이는 작가의 생각이 아직 거기에 다다르지 못했다기보다는 아직까지는 이야기의 전면에 내세워질 기회가 없었던 유랑민족의 비애일지도 모르겠지만요. 공교롭게도 이 비평을 적는 시점에서 소설은 118화까지 진행되었고, 이야기의 전면에 나설 기회가 없었던 류그라들이 이야기의 흐름에 영향을 끼칠 기회가 주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완결이 나지 않은 작품인만큼, 조금은 더 기대를 걸어보아도 좋겠지요.


이 즈음 해서 없는 거미줄 가닥을 더듬는 사고실험의 끝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 글의 모든 것은 밤하늘의 별들 사이를 잇는 가상의 선만큼이나 허구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별자리와 그에 얽힌 신화가 아직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아주 의미 없는 글은 아닐 것이라 약간은 자위해도 상관없으리라 자기최면을 걸어봅니다.


  1. 제 세계관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저술 중 하나인 <블랙 스완>의 저자 NNT의 견해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2. 아인슈타인이 이 문제에 골몰한 덕분에 현대물리학에서는 이 개념을 정의하는 것에 애를 먹는다는 사실은 잠시 잊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3. 하지만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해야겠지요. 가솔린 오토바이를 타고 윈체스터를 쏴제끼는 마법사가 파이어볼을 쏴제끼는 모습에 매력을 못 느끼겠냐고 묻는다면, 그만큼 취향을 관통하는 일도 별로 없겠다고 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공부하는 인간 
KBS 공부하는 인간 제작팀 지음/예담


사실은 별로 땡기지는 않았던 책이지만 알라딘 2013 양장노트에 눈이 멀어(...) 질러버린 책.[각주:1] 그나마 있던 책들 중 가장 관심사가 일치해 보이는 것으로 골랐는데 웬걸, 생각보다 괜찮다. 그리고 나는 공부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수님들께 인생은 마라톤이니 롱런하려면 스프린트 하듯 뛰어나가지 말라는 조언을 듣기는 했지만, 급할 때는 뛰어야지 뭐 별 수 있겠는가.[각주:2]


part1에서는 각국의 공부에 열정을 쏟는 사람들을, part2에서는 동양과 서양에서 공부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잘하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동양에서는 못하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언급이 상당히 재미있다. 『생각의 지도』이래로[각주:3] 동서양의 사고방식에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그리 낯설지는 않지만 그 근거들은 흥미롭다. 서양에서는 처음부터 잘할 수 있는 것과 못하는 것이 나뉘어 있다고 보는 반면, 동양에서는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


또한 동양에서 도입된 과거제도라는 혁신적인 관리선출방식이 공부의 목표를 출세로 바꾸었고, 따라서 지식의 확장이라는 희열에서 싹튼 자연과학이 발전할 수 없었다는 지적은[각주:4] 예상하기는 했지만 무심코 넘어갈 수만은 없는 부분. 결국 공부의 목표는 직접적으로 사회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실용주의적 가치관이다. 때문에 자연과학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언제까지나 자연과학은 인간에서 한 발 떨어진 대상을 다루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나라의 국가 권력상에서 사회과학의 지위를 넘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한다. 이번 계절학기때 김월회 선생님께서 지적하셨던, 문과 출신 총리는 많지만 이과에서 가장 높은 자리는 과기부 장관뿐이라는 사실도 생각나고. 결론: 대한민국에서 과학자로 성공하려면 인문학자와 인문학으로 배틀떠도 이길 정도로 내공을 갖추어야 합니다.뭐라고요?


그리고 다시 서양과 동양에서 노력에 대한 관념의 차이로 돌아와 보면 이 차이가 어떻게 보면 조금은 모순적으로 보이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의 직업관은 영단어 vocation에 잘 드러난다. voca로 시작하는 수많은 단어책들을 보셨을 여러분들이라면 눈치채셨겠지만, vocation이란 '신의 부름'을 의미한다.[각주:5] 따라서 개개인마다 신께서 마련해 주신 직업이 존재하므로 나에게 맞는 길이 따로 있는 것이며, 이 직업을 찾아 나서는 것이 사람이 할 일이 된다. 노력해야 할 것이 따로 있으니 아닌 것 같으면 바로 패를 접으라는 것. 포커든 고스톱이든 돈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전략 '딸때 많이 따고 잃을때 적게 잃자'를 인생에 적용한 것이다.[각주:6]


한편 동양에서는 과거라는 제도가 분명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노력하면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다 + 주변에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다. 그러면 결론은 노력하면 된다는 것.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정서에는 그릇에 물을 채워 달을 담고 '비나이다 비나이다'를 되읊으며 초월적 존재에 기원하는 이야기들이 서양에는 없다시피 하다는 사실도 눈에 들어온다.[각주:7] 더군다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지른 한 마디 탄식, '신이시여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맞나?)는 일단 신께서 힘을 실어 주신 다음에 그 힘을 거두어 갈 때나 할 수 있는 말 아니던가. 아르크 지방의 잔 이야기도 사실은 비슷한 구성을 가지고 있고.[각주:8]


물론 여기까지는 책의 내용을 조금 더 넓혀 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은 이 흔적이 종교관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정해져 있으니 안 되면 다른 것을 찾아 떠나라는 말은 결국 '사람은 모두 맞는 무언가가 따로 있다'는 초월적 존재의 흔적이 지워진 믿음으로 남은 모양인데, 이를 종교관에 적용해보면 '신께서 날 만나주지 않는다면 결국 난 신과 만날 운명이 아닌 것이다' 또는 '신께서 날 만나주시지 않으니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각주:9] 유럽에서 바닥을 기는 종교인 비율을 이 영향으로 설명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한편 '노력하면 된다'라는 믿음의 우리나라에서 절대자를 접하지 못한 사람들의 반응은 '내가 신을 만나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야'라는 자책으로 이어지게 되고, 결과물이 길거리의 넘쳐나는 피켓으로 구현된다는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흥미롭지 않은가? 절대자가 있었던 세계관은 결국 그 세계관 때문에 절대자를 버리게 되었고, 절대자가 없었던 세계관은 그 세계관으로 절대자를 맹목적으로 쫓게 되었다는 것이. 호프스테더가 『괴델, 에셔, 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에서 지성의 근원으로 지목한 그 이상한 고리(strange loop)의 발현이 되겠다.


다만 문제는 이 가설을 검증해볼 방법이 있냐는 것. 아무래도 과학에 좀 깊이 발 담근 사람이다 보니 이 문제가 가장 먼저 들어온다.난 어차피 검증할 방법이 전무하다시피 한 이론물리 분야로 흘러들어갈 것 같으니 미리부터 검증불가능한 이론에 익숙해지는 셈 치고 막 던져볼까?


p.s. 수업 대비로 읽어야 할 것들이 산더미인데 나는 왜 이런 것을 읽고 있는가...

  1.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앨리스로 골랐다. [본문으로]
  2. 그런데 이건 한병철 교수가 『피로사회』에서 정확하게 깐 그 내용이다(...). 그러니까 알라딘 님들 저 『시간의 향기』 저자사인본 한부만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굽신굽신 [본문으로]
  3. 생각해보니 군대에서 번역본 읽고 원서를 사두었는데 원서는 집안 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이렇게 나의 책 수집벽이 드러나는구나...(먼산) [본문으로]
  4. 과거제도에 대한 설명이 나올 때부터 대강 비슷한 가설을 세워두었는데, 책의 다음 장에서 바로 그 결론이 등장했다. 책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중간까지 읽은 내용에서 흥미로운 가설을 세웠는데 그 결론을 확인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5. voc는 '부르다'라는 의미를 갖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어원이다. vocabulary, provoke, evoke 등의 영단어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본문으로]
  6. 신영복 선생님의 『고스톱 ABC』와 같은 책에서도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말씀이 와 닿는 순간. [본문으로]
  7. 그런데 이건 한국만의 특성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 [본문으로]
  8. 주기도문이나 사도행전처럼 초월적 존재에게 기대려는 시도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설화의 범주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서양 희곡이든 설화든 누군가가 운명에게 힘을 받아 그것만 믿고 설치다가 운명이 그 힘을 다시 가져가며 몰락하는 이야기를 제외하면 떠오르지가 않는다. 아, 기사도 문학은 약간 다른 구성이긴 한데, 걔네들은 어차피 '용맹스러움을 과시하며 절대자에게 영광을 돌리세' 이런 부류가 대부분 아니던가. [본문으로]
  9. 내가 교회를 안 다니지는 않지만 불가지론자에 속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께서 절 버리셨군요'라는 일종의 트라우마인 셈. 한동안 바뀔 일은 없을 듯 싶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예수전 - 8점
김규항 지음/돌베개


이전에 Facebook에 올렸던 단평(?)




내 책 욕심은 좀 지나친 편이다. 그래서 가진 몹쓸 버릇 중 하나가 흥미로운 인용구를 보면 그 원전 찾아 읽기인데, 이 책도 그런 경로로 읽게 되었다. '왼 뺨을 맞았으면 오른 뺨을 대라'가 항거의 표현이었다는 주장이 인상깊었다.


저자와 정치 노선이 차이가 있는지라(내 성격은 매우 보수적이다. 믿기려나 모르겠지만) 불편한 구석도 있기는 하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마가복음(책에서는 천주교를 따라 마르코 복음으로 옮겼다. 사실 저자는 천주교 신자)을 당대의 사회적 맥락을 재구성하여 그 의미를 재구축한 책인데, 사회변혁운동가-묘사로는 아나키즘에 준할 정도이다-로 읽은 것이 인상적. 생각해보면 에릭 호퍼(이 사람도 흥미로운 인용구에서 원전 찾아 읽게 된 경우. 그 인용구는 '광신도의 대척점에는 전투적인 무신론자가 아니라 신의 존재에 무신경한 회의론자가 서있다' 였던가?)도 그의 첫 저서 『맹신자들The True Believer』에서 대중운동가로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종교부흥운동이랑 헷깔리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공자의 경우에도 원래는 사회개혁이론이었다만 한대에 지배이념으로 채택하면서 개혁만 빠져버린 경우. 참고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제1원인으로 지목되는 성리학도 시작은 사회개혁이론이었다. 지금은 개신교가 욕 많이 먹지만 원래 처음 시작했던 프로테스탄티즘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개혁사상이었고, 자본주의의 경우에도 욕은 오지게 먹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의 견인차 노릇을 했던 사상이다.(그리고 사실 자본주의를 욕하기도 애매한 것이, 무턱대고 자본주의 욕하는 것은 맑스주의, 맑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아나키즘-얜 이 안에서도 수만가지로 나뉜다-, 트로츠키주의, 마오이즘 구분 안하고 싸잡아서 욕하는거랑 똑같은거다. 미국에 정착한 자본주의와 일본에 정착한 자본주의가 다르고, 북유럽에 정착한 자본주의는 여기와 또 다르다. 우리나라도 다르고. 물론 자본주의는 돈 중심으로 굴러가는 사회라서 사상적으로 방어하려는 사람은 없다는 것도 싸잡아서 욕먹는 한 원인이겠지만.) 달이 차면 기운다는 것은 이걸 두고 말한 것이려나.




원래는 뒷 부분에 개인적인 글 한 문단이 더 붙어 있었는데, 그건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되어 잘라내었다.


글을 쓰는 사람은 항상 자기가 글을 쓴 의도가 온전히 전해지도록 노력한다. 문학, 특히 시의 경우는 그 글 자체의 아름다움이 의도가 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글에 담긴 의미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될까? 장자는 <천도>편을 제환공에게 '책이란 성인의 찌꺼기'라고 말하는 방망이수레바퀴 깎는 노인의 이야기로 맺는다. 말로 전해질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라는 뜻이다.


내가 보기엔 껍데기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듯 싶다. 게껍데기는 하나지만 그 안에 살아있는 생명이 꿈틀거리는지, 잘 익은 살이 놓여있는지, 짭쪼름한 간장으로 숙성되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대상이 된다. 어항바다를 활주하는 살아있는 게와 잘 익은 찜게와 정작 나는 안 먹지만 밥도둑이라는 간장게장이 같을 리는 없지 않은가.


또다른 예시


어쩌다보니 책에 대한 평가보다는 책이 놓인 맥락에 대한 평가가 되어버렸는데, 이렇게 책을 새롭게 읽으려는 시도는 분명 환영해야할 대상이다. 지금은 블로그를 때려치신 김우재님이 하셨던 말인 '창조적 오독'이랄까. 이런 글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원한다.(다만 논리적 비약과 오류는 최대한 없애주시고;;)


예수전 - 8점
김규항 지음/돌베개

Posted by 덱스터

The Ghost of the Executed Engineer (Reprint, Paperback) - 8점
Graham, Loren R./Harvard Univ Pr


소련이 가졌던 기술적 한계를 사형당한 광산학 전문가 페테르 팔친스키(Peter Palchinsky)의 삶을 통해 들여다본 책이다. 번역본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학기에 들었던 공학윤리와 리더쉽 과목에서 과제로 쓴 서평을 공유해본다. 확실히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니 원문이 한글일 때와는 다소 다른 느낌을 갖는 것이 느껴진다.[각주:1]



칼 레이문드 포퍼경은 그의 유명한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과학에서의 진보는 열린 사회에서 양육될 때에만 가장 크게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요 주장-전체주의적 정부의 악함에 대한 강한 신념-은 잠시 옆으로 치워두기로 하면, 과학의 진보에 대한 그의 논거는 매우 설득적이다. 하지만 과연 사실일까? 냉전 기간의 소비에트 연방의 급격한 발전을 고려하면 이 주장에 의문을 갖게 된다. L. D. 란다우와 같이 특출난 과학자들이 반례를 제공하지만, 로렌 R. 그래함의 『사형된 엔지니어의 유령The Ghost of the Executed Engineer』을 읽고 나면 포퍼의 선언은 합당해 보인다.


이 책은 불우한 러시아 엔지니어 페테르 팔친스키의 삶을 그린다. 팔친스키는 스탈린 치하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반역모의로 비밀리에 사형되었다. 그는 왜 혐의를 받았을까? 저자는 이 이유를 스탈린이 소비에트 혁명 이전에 교육받은 엔지니어들에 대해 가졌던 불신과 거대 산업 복합체를 지으려는 정부 계획에 대한 팔친스키의 강한 비판에서 찾는다. 이후 저자는 소련의 기술에 대한 관점과 엔지니어들이 받은 교육을 사형당한 전문가의 불운에 맞추어 설명한다.


페테르 팔친스키는 짜르 시대에 훈련받은 광산학 전문가였다. 그는 1901년 석탄 채굴량 감소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의 일원으로 우크라이나의 돈 분지(Don Basin)에 파견되었고, 노동자들을 조사하는 임무를 받았다. 노동자들의 생활환경에 관한 통계를 모은 팔친스키는 열악한 생활환경이 그들의 의욕을 꺾었다고 결론지었고, 이는 상부의 분노와 유배의 원인이 되었다. 저자는 이 경험으로 팔친스키의[각주:2] 기술만 고려해서는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믿음과 급진적인 정치관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팔친스키는 기술이 그 기술을 도입하는 사회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술이 사회적인 조건을 만들 뿐만 아니라 특정 사회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기술을 성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팔친스키와 스탈린의 기술에 대한 극단적인 견해차는 흥미롭다. 전자가 산업의 진보를 정치적, 사회적, 법적, 교육적 사안들과 분리할 수 없으며 인본주의적인 접근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한 반면 후자는 기술을 모든 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취급했다. 팔친스키는 이러한 믿음 위에서 엔지니어들이 다양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가 우세하였고 많은 비효율과 노동자의 혹사를 야기했으며, 연방에서의 교육을 받은 엔지니어들이 터무니없이 제한된 교육을 받고 새로운 지도자들이 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저자가 만난 '종이 제작기에 들어가는 볼 베어링'에 대한 공학 학위를 받은 엔지니어는 터무니없이 좁은 소련의 교육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엔지니어가 가장 큰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팔친스키의 생각은-구글은 완벽한 사례이다- 자본가들의 탐욕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자본주의 국가에서 현실화된 것으로 보인다.


슬퍼라, 선견지명이 있었던 공학자의 말년을 읽으니.[각주:3] 팔친스키는 선의에서 조국을 위해 산업체의 효용을 최대화하는 통찰을 제공해려 했으나 나라의 지도자는 사보타주로 간주하고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책으로부터 판단할 때 팔친스키는 이미 같은 이유로 투옥된 적이 있기에 공개적인 비판이 가져올 목숨의 위협을 알고 있었다고 보여지나, 결과적으로 항상 석방되었기 때문에 간과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전문가의 의무를 이행했을까? 팔친스키의 경우처럼 생사가 걸리지는 않았으나 지금도 동일한 딜레마가 경제적인 지위를 볼모로 남아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거리낌 없이 의견을 내겠지만, 솔직하게 말한다면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스탈린을 기술 도입의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측면에 대해 무지한 것으로 혹평하는 것에서 냉전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느껴지지만 팔친스키를 순교자가 된 불우한 예언가로 우상화하려 하지 않았던 저자의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의 선견지명에서 신화적인 분위기를 제거하려 노력한 저자의 노력은 사형당한 엔지니어의 걸출한 탁월로 실패해 보인다. 산업화에서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는 관점은 인적 자본 개념을 40년 가까이 앞지르며, 효율적이려면 행복한 노동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그가 살던 시대를 너무 앞질러 보인다. 가끔은 더 작은 산업체가 거대 복합체보다 효율적이다는 그의 입장에서 대기업들의 효율에 대한 미신을 반성하게 되며, 그의 신조인 엔지니어의 폭넓은 교육에서 우리의 교육정책을 재고하게 된다.


이 서평의 서두에서 한 질문으로 돌아오면, 이 책은 학문에서의 진보가 가능하더라도 이의가 없는 사회에서의 산업과 기술에서의 발전은 비효율을 낳도록 예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포퍼경의 전체주의보다 열린 사회가 우월하다는 결론은 반박을 압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나는 우리가 공학과 자연과학의 전문가들에게 열린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의 전문가들이 정치적인 견해를 발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면 공학과 자연과학 출신의 정치적 비판은 우리의 규범에서는 자연스럽지 않은 편이다. 물론 공학과 자연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정치나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반론이 가능하나, 이 또한 다른 우려를 낳는다: 우리는 미래의 공학자들에게 이 사안들을 충분히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서평을 번역해놓고 보니 제목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추가한다. 저자는 폭넓은 식견을 가졌던 팔친스키를 사형한 소련은 그의 원한에 홀렸다고 표현하였다. 책의 제목은 거시적으로 볼 수 있는 전문가의 필요성을 사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에 투영한 결과물인 것이다.


하나의 유령이 소련을 배회하고 있(었)다. 팔친스키라는 유령이.


그 유령은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는가?


The Ghost of the Executed Engineer (Reprint, Paperback) - 8점
Graham, Loren R./Harvard Univ Pr

  1. 내가 쓴 글을 내가 번역하니 무언가 기분이 이상하다. [본문으로]
  2. 영어 수사법의 특징은 동일한 말을 최대한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같은 수사법을 따를 경우 글이 깔끔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갖게 되므로 최대한 단일한 표현으로 번역하였다. [본문으로]
  3. 도치를 살리려고 살짝 무리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피로사회 - 8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이주일인가 전 쯤 강연으로 조한혜정 교수님을 만났다. 거기에서 추천해 준 책이 이 『피로사회』였다. 평소에 학교를 돌아다니다가 집히는 읽을거리가 있으면 일단 잡고 보는 성격인지라 이런저런 정보를 접할 기회가 많은데, 거기에서도 추천된 책이었어서 한번 읽어는 볼까 생각중이었는데 마침 이렇게도 추천을 받으니 읽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문해서 받고보니 웬걸, 매우 얇다.


책 자체는 쉬운 편은 아니다. 현대 철학의 세세한 흐름을 알고 있어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듯 싶은데, 애석하게도 난 후기근대 철학은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고 있어서 저자가 비판하는 그 수많은 철학자들의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세세한 비판을 굳이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생각도 든다. 철학자들을 위한 논문집으로서의 성격은 철학자들을 위한 것이고, 나와 같은 일반인들을 위한 에세이집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그처럼 자세하게 읽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정의하는 질병은 무엇일까? 책은 다소 엉뚱해 보이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근대 이전에는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들이 그 사회를 뒤흔들었다. 지금은? 우울증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다. OECD국가 중 자살율 1위라는 오명을 모두들 무심하게 받아들인다. 너무 오래 전부터 그랬으니까. 절규하다 우는 힘도 잃어버렸다. 그 옆에서는 이른바 『시크릿』으로 대표되는, "하면 된다!"의 눈부시도록 찬란한 구호가 귀를 어지럽힌다. 쌍팔년도도 아니고 안되면 되게하라는 이런 무책임한 말들이 언제부터 넘처흐르게 된 것일까.


전염병과 같은 질병들은 나와 다른 이물질에서 기원한다. 이것이 부정성이다. 저자는 이 부정성이 근대까지의 역사를 특징지어왔다고 서술한다. 이민족, 이단, 야만인 등 우리와 이질적인 것들은 우리가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다. 체내에 우리와 다른 것들, 예컨데 바이러스, 박테리아, 독소 따위가 들어오게 되면 면역체계는 그들에 대항하고 배척한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 이전은 면역학적이었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 우리는 다른 것들을 포용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는 긍정성으로 가득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책 안에서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책이 묘사하는 현대 사회의 특징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이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특징을 폭력의 주체가 부정성에서 긍정성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근대 이전의 사회는 해야 한다(Sollen)의 시대였다. 현대 사회는 할 수 있다(Koennen)의 시대이다.[각주:1] 과거가 제한, 금지, 검열과 같은 방식으로 당신을 억눌렀다면, 현재는 가능성, 비전, 독려를 통해 그대를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를 비틀어 말하면, "칭찬으로 고래를 춤추게 한다"가 된다.


여기에서 우울증이 찾아온다. 우울증이란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Nicht-Mehr-Koennen-Koennen)'의 상태로, '아무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외치는 사회에서나 병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어떤 사회는 몽정을 생기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간주해 중대한 질병으로 보았다. 그들의 무지함이 우스워 보이는가? 그들에게는 조금 드물기는 해도 '태생적으로 우울한 성격인 사람'이 환자가 되는 현대가 희극일 것이다. 실제로 우울증이 정신질환으로 인정된 것은 현대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도록 만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를 들추어내었다고 즐거워하는 듯 하다. 하긴, 이런 책을 읽을 사람이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 혹은 저쪽의 말을 빌리자면 종북 좌빨들 말고 누가 있겠는가. 지금 사회가 얼마나 불합리한지 찾아내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에게 이런 글은 좋은 자기합리화가 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현대 사회의 억압은 자기검열으로 이루어진다는 류의 해석은 그다지 적절한 독해가 아니다. 그것은 현상을 관찰한 것 뿐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부정성이 긍정성으로 바뀌어 사회를 휩쓸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망해야 한다!"식의 해석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긍정-"우리의 희망찬 미래!"-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유토피아는 지금의 디스토피아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참고로 내가 군대에 있을 척 처음 자대에 배치받았던 그 우울했던 시절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울고싶으면 울어도 괜찮아"였다. 그래, 방 구석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눈물을 훔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울고 싶으면 울어도 괜찮다. 당신은 당신으로서 빛난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건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버거운 긍정성을 자신있게 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니까.


우리는, 그저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까짓 거, 내가 쓸모없는게 어때서?


피로사회 - 8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1. Sollen은 영어의 should, Koennen은 영어의 could와 같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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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한 번역본을 잘 모르겠어서 손 대기 어려웠던 『장자』를 드디어 읽기 위해 구했다. 교수신문에서 발행하는 번역본 비평 칼럼 모음집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각주:1]에서도 추천한 오강남 해설 버전으로. 그리고 제목에 쓴 것과 같이 내용이 비어있는 책이기에(비어있다는 말은 문장 사이가 드넓다는 의미이다. 문단과 문단 사이마다 사막과 바다와 밀림이 있어 길 헤매기 딱 좋다고 표현하겠다.) 길잡이로 쓸 책도 하나 구했다. 이전에 읽었던 책들 중에서도 『장자』를 다루는 것들이 있어 다시 읽어보았고. 이 책이 이번에 구한 책이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 8점
강신주 지음/그린비


하나의 키워드로 『장자』를 관통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이론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문제의식으로 출발하여 어떻게 남과 상호작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으로 수렴한다.


이 문제의식이란건 다음과 같다. 이전에 한번 회자된 적이 있었던 『오래된 미래』[각주:2]라는 책이 있었다. 아직 세계화의 손길이 닿지 않은 라다크의 삶을 소개하는 책인데, 여기서 책의 제목 '오래된 미래'란 갈수록 공허해지는 도시의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아직 도시화되지 않은, 그러니까 과거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책에는 다음의 일화가 나온다.


언젠가 나는 열 시간 동안이나 계속 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 너무 지치고 스트레스가 쌓여 두통이 생길 정도였다. 그날 저녁, 내가 머물던 집 식구들에게 너무 일을 많이 해서 피곤하도고 이야기했더니 그들은 웃고 말았다. 내가 농담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책상 앞에 편안하게 앉아서 종이 위에 펜으로 글씨를 썼던 것뿐이었다. 이마에 땀이 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것은 일이 아니었다. 라다크 사람들은 서구사회의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스트레스나 지루함, 좌절감 같은 것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후략]


-『오래된 미래』, p.188


사무실에서 문서작업을 하느라 진이 다 빠지고 퇴근해 본 사람, 아니 초등학교 시절 일기를 쓰느라 곤혹을 치러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글을 쓰는 것이 일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다크 사람들에게 글을 쓰는 것은 단순한 취미에 불과했다. 그들은 글을 쓰는 것이 일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바탕이 되는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서로 경험하는 것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에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가슴아픈 이별을 겪은 사람들이 간혹 하는 "나는 널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라는 말이 이 문제의식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길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꽃을 피우고 있고, 노트북으로 이 졸문을 두드리고 있는 타자가 있으며, 이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이 있으니 우리는 "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남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주제가 『장자』의 중심이 됨이 이 책을 쓴 해설자의 생각이다. 남을 이해하기 위해 내면화된 선판단을[각주:3] 최대한 비워내야 하며, 이를 돕기 위해 일부러 정합적인 논리를 분쇄하는 형식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책 자체는 즐겁게 읽었으나 『장자』를 이해하는데 그렇게 많은 다양한 철학자들의 말이 필요했는지 의문이 든다. 더군다나 말이란 것은 떼어놓기에 따라 정 반대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필수적이지 않다면 굳이 이렇게 많은 말들을 끌어올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철학적인 논의에서는 말로 그 핵심을 전달하기 힘드므로 하나의 주제가 다양한 변주로 연주되며 응당 그래야 마땅하지만 소개하지도 않을 다양한 철학자들의 글을 인용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딱 니체나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정도로만 소개했으면 좋았을 것을 너무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버렸다. 제 아무리 비슷한 음악이라도 한 음악의 일부를 다른 음악에 중첩시켜 버리면 불협화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도 부록의 『장자』 연구 동향에 대해 다룬 부분은 좋았다.


다음은 이전에 구했던 책들 중 『장자』를 다룬 또 다른 책이다.


장자 교양강의 - 4점
푸페이룽 지음, 심의용 옮김/돌베개


책의 『장자』 접근은 상당히 파편화되어 있다. 그 점에서 다양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라 하겠지만, 그것 뿐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책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신영복 선생님의 책이다.[각주:4]


강의 - 10점
신영복 지음/돌베개


이 책은 『장자』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이 책의 한 장에서 해설하고 있기에 포함시켰다.(평점은 책 전체에 대한 것이다.) 이 책 역시 하나의 키워드, '반성'으로 『장자』를 꿰뚫고 있다.


'반성'이라는 핵심어가 선택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글 대부분을 사 읽는 사람으로 평한다면 그 분의 주제의식은 '관계의 회복'에 있다. 모든 글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 아닌 사회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그런 그에게 개인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 『장자』는 하나의 온전한 주제라기보다는 반동으로 읽힐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인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회를 해체시켜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도록 만들자는 것을 주제의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자』는 성경과 같이 따라야 할 책으로 그려지기보다는 앞서 소개한 『오래된 미래』와 같이 돌아보도록 만드는 책으로 그려진다.




얼마 전 우화를 하나 올렸었다. 바벨의 반역가. 영역하면 Rebel of Babel이, 살짝 잘못 읽으면 바벨의 번역가가 된다. 신이 바벨의 사람들을 다른 언어로 흩어 버렸으니 다른 언어들을 이어주는 이들은 반역가일 터이다.


이전에 '창조적 오독'이라는 구를 듣고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한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다. 칸트의 말이 이렇느니 저렇느니 언쟁하는 과정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 영향인지, 필자는 책은 저자와 독립된 개체로 분류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 권의 책이라도 그 책을 읽는 사람에 따라 그 주제가 다르다는 것이다. 책은 저자의 주제의식을 그대로 전달할 의무가 없다. 장자도 언급했듯, 책은 성인(聖人)이 남긴 찌꺼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독일의 훔볼트대학Humboldt Universität zu Berlin의 본관에는 이런 구절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Die Pilosophen haben die Welt nur verschieden interpretiert; es kommt aber darauf an, sie zu verändern.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세계)를 바꾸는 것 다음의 일이다.[각주:5]


칼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Thesen über Feuerbach의 마지막 테제이다. 괜찮은 『장자』 번역본을 구하던 중 간혹 "장자가 실제 말한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라며 그 책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경우를 보았다. 내 생각은 그렇다. 중요한 것은 장자가 하고자 했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장자의 말로부터 무엇을 얻을 것인가라고. 장자가 의도한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매달린다면, 성인이 남긴 찌거기에 매달리는 것과 다른 것이 무어란 말인가.

  1. 나에겐 읽는 책이라기보다는 자료집의 성격이 더 강한 편이다. [본문으로]
  2. '아이들은 자라기를 희구하고 어른들은 어릴적을 회구한다'는 제목으로 서평을 쓰다가 말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도 산업혁명 이후 등장하는 이른바 '자연예찬'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느꼈던지라. 읽을 가치가 없다고 평가절하될 책은 아니나 세계화와 거대도시화에 대한 반발에서 쓰인 책임은 분명하다. [본문으로]
  3.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뜻에 오염된 '선입견'이라는 단어 대신 사용하였다. 책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4. 이 책 역시 서평을 쓰다 말았다. 필자가 신영복 선생님의 영향을 꽤 많이 받은지라 이것 저것 쓰기는 많이 썼는데, 정작 중요한 책 설명이 없어서 아직 비공개이다. 책 자체는 일독을 권한다. [본문으로]
  5. 돌아다니는 번역이 조금씩 마음에 안 들어서 각각을 참고해가며 직접 번역해 보았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깨어 꿈을 꾼 기억이 있는가?


간혹 게으름에 굴복해 침대에 누워있다 보면 깨어서 꿈을 꾸게 된다. 정신은 더 없이 멀쩡하지만 육신은 꿈 속을 헤맨다. 육신을 원래의 세계로 돌려놓는 것은 핸드폰 알람이거나 밥 먹으라는 어머니의 독촉 정도. 그러고 보니 요즘 너무 게을러졌군.[각주:1]


뜬금없는 헛소리를 늘어놓은 것은 아직은 꼬리가 없는 이 소설이 그와 닮았기 때문이다. '부활의 왼손'이라는 별칭의 신비한 능력을 가진 레이즈와 그와 얽히게 된 사람들의 기이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면이 점차 융해되어 사라지는 느낌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가슴은 그 기묘한 감정의 여운에 한동안 헤맨다.


소설의 독특한 구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예는 3장 사전이다. 이미 말한 적 있듯 본인은 구상하기만 하는 소설이 꽤 많다. 그 중 하나가 「어느 역사학자의 책상」이라는 제목을 붙일 예정이었던 글인데, 이 글은 신문기사 스크랩과 녹취록 등 짧은 독립적인 글들로부터 구현되는 하나의 이야기로 생각만 했었다. 가제처럼 어느 역사학자의 책상을 훔쳐보는 듯 한 느낌을 구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갑각 나비』의 3장은 사전의 독립적인 항목들을 첫 장부터 끝까지 읽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필자가 마음에 두고 있었던 글과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형식으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꽤 커다란 충격이었다.


3장의 경우 그 실험적인 구성으로 소설의 기묘함이 더욱 두드러지나 이 글의 기묘함은 그 구성보다는 그 주제로부터 기인한다고 본다. 『갑각 나비』의 주제는 원, 정확히는 뫼비우스의 띠이다. 소설의 각 장은 크건 작건 하나의 원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각 장에서 그리던 호가 처음 시작한 위치로 돌아올 때가 되었을 때, 그 호는 뒤집혀 원점과 결합한다. 예컨데 이런 것이다. 첫 장에서 알드레는 잃어버린 왼손을 다시 얻으며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원점에서 그는 '솟는 것이 있으면 가라앉는 것도 있다'는 말처럼 무언가 다른 것을 잃어버렸다. 다른 원들은 독자께서 직접 읽으며 찾으시길 바란다.


본인은 이전에 짧은 단상을 적으며 아름다운 이야기에 대해 말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 아는가? 옛 사람들은 원을 완벽한 도형, 즉 가장 아름다운 도형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원의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는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현재 소설은 13장까지 나와 있다. 12장과 13장 사이에는 10년이라는 시간 간격이 있어서인지 분위기가 다소 다른데, 13장은 설명이 늘어진다는 느낌이다. 13장이 압도적으로 길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그 늘어지는 설명이 그 어떤 장들보다도 더욱 거대한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었다. 작가의 10년 전의 글을 더럽히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은 기우로 치부해도 좋을 것이다.


http://www.drwk.com/serial/frame.php?idx=12908&bidx=1000024

  1. 물론 헛소리다. 자고 있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개운하게 깨는 것일 뿐.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이전에 꽤나 우울하게 지내던 때가 있었다. 그 때를 묘사하는데 썼던 표현이 "벚꽃이 흩날리는 무채색의 풍경"이었으니 봄이었나 보다. 세상이 그처럼 대채로울 수 없을 때이지만 이상하게도 흑백영화 속을 걸어가는 듯한 느낌으로 괴로워했던 시절이었다. 그 때 추천받은 책이 니체였고, 그 이후로 니체 의 책을 자주 찾아 읽게 되었다. 세계에 빛이 돌아온 것은 물론이다.


글을 오래 안 쓴 블로그에 다시 활기를 넣기 위해 내가 읽었던 니체와 관련된 책들에 대한 비교글을 작성하기로 했다. 이미 쓰던 글은 많이 있지만(쓰지 않은 서평이 특히 많다) 새 술은 새 포대에 담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속담과 이 상황이 무슨 상관인지는 제쳐 두고, 책의 바다로 떠나보자.


1.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 
이진우 지음/책세상


이 책은 니체의 사상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여행기에 가깝다. 니체가 살았던 곳들을 여행하며 니체의 사상이 어떻게 자라났을까 따라가보는 책인데, 니체의 사상이 어떠한지에 대한 깊은 설명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담 없이 읽기에 좋다.


2. 『명랑철학』

명랑철학
이수영 지음/동녘


이런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처음 몇 장을 읽다가 덮어버렸다. 저자가 니체의 사상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고 설명하고 있는지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책을 표지로 평가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토록 우상을 찾아 헤매는 인간을 비판했던 니체가 이 책에서 우상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불편한 느낌 때문에 몇 장을 읽다가 덮어버리고 말았다.


3.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병권 지음/그린비


이 글을 쓸 동기를 마련해준 책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니체의 사상에 제일 가깝기도 하고, 또 책 자체가 매우 쉽게 쓰여진 편이기 때문에 니체를 한번 읽어보고자 하는 사람은 이 책을 먼저 읽는 것이 도움이 될 듯 싶다. 제목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의 새로운 번역본같다는 생각이 들어 구입을 망설였지만 알고 보니 번역본이 아닌 니체 사상 해설집이었다. 잘 모르고 있던 부분에 대한 설명도 있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내용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해설해 주어서 책 값이 아깝지 않았다.[각주:1]


위의 세 가지가 내가 읽은 책들이다. 사실 책방에 나와 있는 책들 중 니체의 사상에 대해 다룬 책들은 매우 다양하고, 내가 읽은 니체와 관련된 책들은 니체 저작의 번역본을 포함한다 할지라도 매우 소수이다. 니체에 대한 접근은 다들 자기만의 색을 가지고 있어서, 니체를 반민주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니체를 민주주의적이었다고 옹호하는 입장도 있다. 하지만 니체가 실제로 했던 생각을 완벽하게 아는 사람은 어디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모두들 그의 책을 어느 정도 오독하고 있다. 그리고 책이 저자의 펜 끝을 떠난 순간 독립적인 삶을 맞이한다고 믿는지라 그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책을 읽기로 했으면, 어느 사상을 비판하는 책을 읽기보다는 옹호하는 것을 읽어서 자기의 생각을 다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물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말이다.

  1. 정정. 나는 원래 책 값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아니니 나무가 아깝지 않았다고 해야 맞는듯.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디랙해Dirac sea를 항해하는 히치하이커들. 그들은 겔만의 팔정도Eightfold way를 가슴에 품고 파인만 도표Feynman diagram를 지도삼아 슈뢰딩거의 고양이Schrodinger's cat와 함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Heisenberg's uncertainty principle을 극복하며 나아간다.[각주:1] 그들을 위한 항해의 안내서를 공개하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 Second Creation
The Second Creation (Reprint, Paperback)
Crease, Robert P./Rutgers Univ Pr
현대 물리학이라고 하면 대부분 초끈이론을 떠올리지만 실세는 표준모형이다. 아직 초끈이론이 이론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반면 표준모형은 쏟아지는 새로운 물리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되었고 물리 현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실험적으로 검증된" 이론이다. 하지만 표준모형에 대한 교양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몇 안 되는 표준모형의 역사를 다루는 책인 Second Creation은 표준모형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항상 계산을 틀리고는 했다는 맨하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의 오펜하이머J. R. Oppenheimer, 말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디랙P. A. M. Dirac, 봉고를 치고 다니며 직관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파인만R. Feynman, 돈 벌어 먹고 살만한게 없어 물리를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주를 보였던 겔만M. Gell-Mann 등 표준모형이라는 건축물의 주춧돌을 깎아냈던 개성 넘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읽는 이의 시간을 흡입하는 마력이 있다.

더군다나 고등학교 물리 시간에 배우는 톰슨J. J. Thomson의 푸딩모형과 우리가 현재 원자력을 하면 떠올리는 원자핵이 가운데에 있고 전자가 그 주위를 도는 그림의 원인을 제공한 러더퍼드E. Rutherford의 실험들의 비화 또한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방사능의 위험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대에 고도로 농축된 방사성 물질으로부터 화상을 입어 가면서 새 물리학의 기둥을 새웠던 실험가들의 이야기와 양자역학을 태동시킨 보어N. Bohr,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 슈뢰딩거E. Schrodinger의 일화는 물리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깊게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덴마크 사람인 보어가 영국으로 유학가서 지냈던 불행한 시절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상대적으로 오래 된 책(80년대면 현대물리학에서는 근대이다)인지라 표준모형에 아직 3세대 입자, 그러니까 Top, Bottom 쿼크와 타우 입자Tauon가 도입되기 전까지의 역사까지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이론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과거와는 다르다고 해서 과거의 이해와 해석이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닌 것처럼, 누락된 역사는 이 책의 아쉬운 점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오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엘러건트 유니버스

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승산
초끈이론의 전도사라 할 수 있는 그린B. Greene의 초기작이다. 후속작이었던 『우주의 구조』는 어려워서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는데(106페이지였을 것이다) 이 책은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중학생이 소화하기에는 무리였던 것일까?

"현대물리학이란 초끈이론이구나"라는 스테레오타입을 만들어낸 장본인(그리고 미드 빅뱅이론은 이 편견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하기 쉽게 잘 쓰여진 책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괜찮은 책. 다만 현재 서점에 쏟아지는 책들이 죄다 초끈이론에 그 기반을 둔 책들인지라 새로운 관점을 원한다면 다른 책이 더 나을 것이다.


3. Concepts of Space
공간개념
막스 야머 지음, 이경직 옮김/나남출판
(원서가 없어 번역본으로 대체)
어렵다.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참고한다고 하니(칸트까지만 하더라도 시공간은 철학의 일부였다.) 그 난이도가 짐작이 가리라. 더군다나 책 중반 이후부터는 원문을 수록하는데 읽은 책이 영어였으니 수록된 원문은 불어와 독일어 등. 덕분에 인용문은 하나도 못 읽었다. 순전히 독자의 능력 부족이기는 하다만.

"공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생각부터 현대의 생각까지 상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옛 희랍 시절의 사람들이 기발한 논리로 공간을 무엇으로 정의하고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유대인의 카발라Cabala가 어떻게 기독교 세계관에 영향을 주었는지, 뉴턴의 공간에 대한 가설에 대한 당대 신학자들이 어떻게 비판하였는지 등에 대해서도 담고 있어 물리학 교양서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다. 더군다나 후반으로 갈 수록 현대물리학의 입김이 반영된 "시공간은 어떠한가"에 대한 답변은 관련 전공의 전공지식이 없으면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워진다. 불가해한 것으로 여겨졌던 문장들이 일반상대론을 조금 공부하고 나니 깨우쳐진다면 교양서로서는 낙제다.

또 다른 아쉬운 점이라면 서양쪽의 역사에 치우쳐 동양에서 공간의 개념은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나오지 않는다. 다만 현대의 시공간에 대한 관념은 거의 서양 사상이 원류가 되니 동양의 역사가 도입되면 오히려 책의 통일성만 방해할 위험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겠지.


4. Three Roads to Quantum Gravity
Three Roads to Quantum Gravity (Reprint, Paperback)
Smolin, Lee/Perseus Books Group
(번역본도 나와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이론들에 대한 책은 대부분 초끈이론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초끈이론은 미국에서 대단히 흥행하고 있는 이론이고 한국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물리학의 거장들이 활동하고 있는 다른 지역으로 렌즈를 돌리면 어떤 그림이 나오게 될까?

2차대전 이전에는 하이젠베르크와 아인슈타인A. Einstein, 슈뢰딩거 등 독일이 당대 물리학의 최전선에 서 있었고 2차대전 이후에는 그 사람들이 나치를 피해 건너간 미국에서 파인만, 겔만, 와인버그S. Weinberg 등이 현대물리학의 초석을 닦았다. 하지만 현대물리학의 거장들이 그들만 있던가. 뉴턴경Sir I. Newton의 역사를 물려받은 영국에는 펜로즈R. Penrose와 휠체어 위의 지성 호킹S. Hawking박사가 있다.

특이하게도 셋 다 중력에 대한 연구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중력의 양자화에 대한 전반적인 접근을 다루는 책이 영국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책은 제목에서처럼 중력을 양자화하는 접근법들에 대한 책이다.

중력을 양자화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잘 알다시피, 전하는 연속적인 분포를 갖지 않는다. 전자가 가지고 있는 전하량이 일정하고 이 전하량이 기본 단위가 되어 전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마치 158,259.82원짜리 핸드폰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실제 현금으로 이 핸드폰을 살 때에는 158,250원이나 158,260원으로밖에 거래를 못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식으로 물리 법칙에 근본적인 비연속성을 도입해주는 것을 양자화된 이론이라고 부른다. 플랑크M. Plank는 빛의 에너지에 비연속성을 도입해서 흑체복사black body radiation를 성공적으로 설명했고, 보어는 원자 궤도에 양자성을 도입해 수소원자의 스펙트럼을 설명하는데 성공했다. 디랙과 파인만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전자기력의 상호작용까지 양자화하는데 성공하는데, 이것을 두고 양자전자기학Quantum ElectroDynamics, 혹은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이라고 한다. 다만 아직 양자화가 완전하지 못한 힘이 있는데, 바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설명되는 중력이다.

중력에 양자성을 부여하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끈이론이 있고, 다른 하나는 약간은 생소한 루프 양자중력 이론이다. 둘의 접근방법은 약간 다른데, 초끈이론이 힘을 매개하는 입자들(보존boson이라고 부른다)의 존재에 뿌리를 둔다면 루프 양자중력 이론은 반대로 시공간이 양자화되어있을 경우 만족할 방정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마지막 한 가지 접근법은 아예 백지 상태로부터 출발해 물리 이론을 쌓아 나가는 것으로(예컨데 시공간이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지 않고 이론의 중간 과정으로 시공간을 정의하는 방식이다) 펜로즈의 트위스터 이론이 여기에 해당하나 다른 이론들도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앞서 서술한 이 세가지 이론들을 서로 비교하며 중력을 양자화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던 시공간의 다양한 측면들을 파헤친다. 초끈이론 말고 다른 현대물리학의 이론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신선한 충격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무엇이 궁극적인 중력의 양자이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저자는 현재 알려진 중력에 양자성을 부여하는 이론들은 결국 진짜 이론의 한 단면일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코끼리의 코를 만졌던 장님과 귀를 만졌던 장님의 대답이 달랐던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이론들은 맞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현실과 아예 동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의 바람처럼 수십년 이내에 중력의 양자적 성질이 전부 밝혀질 것인지 기대해 보자.

5. Programming the Universe
Programming the Universe (Reprint, Paperback)
Lloyd, Seth/Random House
(번역본도 나와 있습니다)
이미 한 번 서평을 쓴 적이 있는 책(2008/12/24 - [자연과학] 세스 로이드, 프로그래밍 유니버스)이지만 조금 부족한 것이 있다 싶어 부연설명을 단다.

다른 교양서적과는 다르게 이 책은 새로운 이론을 소개하는 책은 아니다. 단지 "새로운 해석"을 소개하는 것일 뿐. 초끈이론이 세계를 "고차원의 끈들이 공명하는 무대"로 묘사했다면 이 책에서는 우주가 "0과 1들이 벌이는 축제"로 치환된다. 이 책에서는 세계가 숫자들의 잔치라는 그림으로 그려지더라도 그 세계를 설명하는 수식들은 이전의 물리학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몬드리안P. Mondrian의 추상화에서 누구는 냉혹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구는 이성의 차가움을 느낀다는 것이 비슷한 비유이려나.

관측하는 순간 그 물체는 그 상태로 붕괴한다는 고전적인 코펜하겐 해석, 양자역학적으로 주어진 다양한 가능성들은 각기 그 가능성대로 발현한다는 다세계해석 말고 제 삼의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6. 생각의 기차
생각의 기차 1
이상하 지음/궁리
생각의 기차 2
이상하 지음/궁리
벤젠고리는 꿈에서 등장한 자기 꼬리를 문 뱀의 형상을 통해 유명해졌고, 페니실린은 열악한 연구실 환경에서 곰팡이가 잘못 자란 덕분에 여러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 비슷한 많은 사례들 때문인지 새로운 과학적 발견은 행운(serendipity)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간혹 있게 되는데, 실제 발견의 현장은 그러할까? 새로운 발견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 지는 것일까?

과학적 발견이라 하면 과학이 내딛는 걸음 하나 하나를 말한다. 지금 이 시대의 과학은 다각형과 사원소설로 우주 만물의 움직임을 설명하던 요람에서 보이지 않는 미립자들을 관측하고 수많은 괴질들을 정복하는 먼 길을 걸어왔다. 그 먼 길을 걷는 동안 남겨 놓은 발자국들이 모두 앞선 예제들처럼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가지지는 않았을 터. 그렇다면 과학이 남은 발자취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저자는 총 열 두가지 분류로 발자국들을 분류하고 그 분류를 따라 발자국들을 되짚는다. 그 발자취에는 과학이 발달하던 시대적 배경과 그 시대의 한계도 드러나고 새로이 발견된 현상들에 대한 과학자들의 대담한 가설과 보수적인 견해가 서로 배치되며 나타나기도 한다. 이 긴 여정 속에서 점차 분명해지는 것은, 으레 믿는 '과학은 천재들의 거대한 도약으로 쌓아올린 상아탑'이라는 신화가 과학이라는 빙산의 왜곡된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과학이라는 길을 걷고자 하나 자신의 능력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과학을 둘러싼 경외의 환상을 벋겨내고 자신감 있게 길을 내딛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7. Feynman's Rainbow

Feynman's Rainbow (Reprint, Paperback)
Mlodinow, Leonard/Grand Central Pub
(번역본도 나와 있습니다)[각주:2]
서점의 과학 코너에 들어가면 반갑게 맞아주는 수많은 책들로 이름을 널리 알리는 파인만씨. 그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저자는 박사과정을 막 마친 후 박사후연구원으로 물리학계의 전설 파인만과 겔만이 있는 칼텍으로 오게 된다. 낯선 환경, 잘 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만난 파인만. 이 책은 당시 항암 치료로 고생하며 젊음을 잃어버린 후년의 파인만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재구성한 것이다. 공자와 그 제자들 사이의 대화를 적은 『논어』에서 공자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책에서는 천재라는 베일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았던 파인만의 삶과 사상이 드러난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대화를 옮겨 본다.

"And what do you think was the salient feature of the rainbow that inspired Descartes's mathematical analysis?" he asked.
"I give up. What would you say inspired his theory?":
"I would say his inspiration was that he thought rainbows were beautiful..."
 
"그리고 데카르트가 수학적으로 분석하도록 한 무지개의 본질적인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해?" 그가 물었다.
"모르겠는데요. 데카르트의 이론에 불을 지핀게 무어라 하시겠습니까?"
"나는 데카르트가 무지개가 아름답다고 생각해서라 하겠어..."
p.s. 신판본도 있어 링크를 걸어둔다.
Feynman's Rainbow (Paperback)
Mlodinow, Leonard/Random House Inc


8.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
로버트 P. 크리즈 지음, 김명남 옮김/지호
우리는 왜 자연에 대해서 알기를 열망하는 것일까. 그건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에, 자연이 감추어 둔 보석을 드러내는 실험 또한 아름다울 수 밖에 없다.

책에 대한 평가는 이전에 쓴 서평으로 대신한다.(2011/06/05 - 로버트 P. 크리즈 저 김명남 역,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 부연설명은 불필요하다고 믿는다.


9. 기타
스트링 코스모스
스트링 코스모스
남순건 지음/지호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국내 과학자의 초끈이론에 대한 교양서. 얇고 무난하지만 두어 번인가 오타가 있어 신경쓰였다. 이전 서평(2009/03/24 - 남순건, [스트링 코스모스])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츠즈키 타쿠지 지음, 김하경 옮김/더블유출판사(에이치엔비,도서출판 홍)
오역만 기억나는 교양서. 소설의 형식을 차용해서 그런지 NNT의 블랙 스완이 연상되는 부분도 있다.[각주:3] 이전 서평(2009/04/14 - 츠즈키 타쿠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과학 철학
과학 철학
이상하 지음/철학과현실사
어렵기도 하고(후반부는 머리에 우겨넣는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과학철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혀 상관없는 책이다. 과학철학이 쿤의 패러다임과 포퍼의 반증가능성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다른 견해들을 접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듯. 에너지와 운동량에 대한 생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 왔는지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서평이 아직도 쓰다 만 채 보관고에서 숙성되는 모양이다.

싸우는 물리학자
싸우는 물리학자
다케우치 가오루 지음, 박재현 옮김, 전영석 감수/시공사
연예인 x파일이라는 것이 한창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물리학자 x파일이다. 물리학 교재에서 간간히 보이는 이름들의 인간적인(?) 부분을 볼 수 있다. 이전 서평(2009/03/14 - 다케루치 가오루, [싸우는 물리학자])

밤의 물리학
밤의 물리학
다케우치 가오루 지음, 꿈꾸는과학 옮김/사이언스북스
"밤의"이라는 수식어는 무림식으로 쓴다면 사파(邪派), 역사식으로 쓴다면 야사(野史). 물리학 전체 커뮤니티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가설들과 이론들을 다루는 책인데 워낙 이쪽 구석구석을 다 쑤시고 다니는지라 새로운 것은 없었다. 이전 서평(2009/01/07 - 다케우치 가오루, [밤의 물리학])



  1. 재미없는 말장난이다. [본문으로]
  2. 만 품절로 Fail [본문으로]
  3. 논리보다는 이야기가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 그런 구성을 취한다고 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얼마 전 <혹성탈출> 시리즈의 프리퀄 정도 되는 영화를 한편 봤었다. 꽤 재미있게 보았던지라 이번에는 원작이라는 책을 보기로 했다.

혹성 탈출 - 8점
피에르 불 지음, 이원복 옮김/소담출판사

스포일러를 적당히 당해서(위키에서 검색해본 것이 화근이었다) 그다지 반전이랄 것은 못 느끼게 되어 아쉽다. 1963년의 소설이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만들어진 영화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느껴졌다. 이번 서평은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이 주가 될 듯 싶다.

우선 영화부터.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은 개봉한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원작 소설과는 조금 다른 부분에서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공포를 그려낸다. GMO 작물을 둘러싼 논쟁과 마찬가지로 과학이 주된 공포의 원천이다. 마지막에 점과 선으로 표현된 바이러스의 전파는 결국 기술에 자만했던 GEN-SYS사의 실수로 일어난 것이 아니던가.

책으로 돌아와 보면 여기에서의 공포는 소설 H. G. Wells의 『타임머신』에 등장하는 종류와 비슷하다. 웰즈의 소설에서 후대 인류는 놀고 먹고 자다가 기술과 이성을 잃어버린 부르주아의 후손들인 엘로이와 지하에서 노예처럼 일만 하다가 기술과 이성만 발달해 인간성을 잃어버린 프롤리타리아의 후손들인 멀록으로 나뉘게 되고, 멀록이 엘로이를 사냥한다는 다소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있다. 불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간의 몰락 원인은 엘로이의 몰락 원인과 마찬가지로 '인생이 편해져 생각하기도 싫어하다 보니 이성을 잃어버렸다' 이다. TV 보느라 주말가는줄 모르는 사람들, 긴장하란 말이다.

소설에서는 유인원이 인류를 대체하게 되는 과정이 나오는데,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지는 잘 모르겠다. 유인원은 똑똑해지고 인류는 멍청해지면서 유인원이 인류를 쫓아낸다는 것인데 과연 그렇게 되도록 놔둘 사람들일까? 이전에 TED 강연 중 인간처럼 행동하는 보노보가 나오는 강연에 대해 쓴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쓴 것처럼 인간은 인간같은 유인원들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을까? 프랑켄슈타인 컴플렉스는 강하다.

조금 생각해볼 점은 소설에서 '이성=언어'라는 등식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언어는 논리적인 사고에 중요하다만 언어 없이 논리적인 사고가 불가능할까? 이영도의 『~를 마시는 새』시리즈에서 언어 없이 텔레파시로 의사소통하는 나가라는 종족이 등장하는데, 이 종족에게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들어 사고에 언어는 필수적이지 않다는 주장이 등장한다.[각주:1] 어릴 적부터 귀가 멀어 수화로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들도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한데, 이런데도 언어가 사고의 필수조건일까?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세계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라면, 언어가 채우지 못한 세계 또한 존재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혹성 탈출 - 8점
피에르 불 지음, 이원복 옮김/소담출판사
  1. 소설 속에는 없고 각 장이 시작하기 전 잠깐 나오는 글에 등장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 10점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이다미디어

에릭 호퍼라는 사람을 제일 처음 알게 된 것은 이 문구에서였다. 매력적(?)이지 않은가.

The opposite of the religious fanatic is not the fanatical atheist but the gentle cynic who cares not whether there is a god or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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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도의 반대는 광적인 무신론자가 아니라 신의 존재에 무심한 회의주의자이다.

-Eric Hoffer, The True Believer


결국 이 출전을 샀고, 아직 첫 두어페이지만 읽은 상태로 책장 어딘가에 방치해두고 있다. 200여쪽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책인데도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이유는, 고급 어휘를 신나게 구사하고 있어서... 그래도 서평을 써 볼까 했던 흔적은 블로그에 방치된 서평 원고로 남아있다.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 서평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반쯤 쓰다 방치해두었다.

이 책은 에릭 호퍼의 자서전이다. 원제는 Truth Imagined. 직역하면 "상상한 진실" 정도 되겠지만, 출판사에서 붙인 이름이 더 어울린다. 책에 막 관심이 커질 때 즈음 시력을 잃고, 다시 그 시력을 회복하자마자 미친듯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평생을 거의 노숙자에 가깝게 살아왔다고 덤덤히 회상하는데 마치 중세 은유시인들이 이야기를 풀어내면 그 옆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모여앉아 귀 기울이는 꼬마 아이들처럼 정신없이 읽었다. 글을 묘사하는데 우리나라 정서에는 좀 동떨어진 중세 유럽이라는 배경을 끌고 온 것은 박학하고 대재(多才)한 떠돌이라는 그의 인상을 가장 잘 묘사하는 단어가 음유시인이라 생각되어서다. 그가 남기고 간 시는 민요가 되었고 그의 조언에 농장을 괴롭히던질병은 수그러들었다.[각주:1] 어떻게 보면 한국 민담의 '지나가던 승려'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서전을 읽으며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탐독했다는 것이다. 자서전 사이 사이에 끼어 있는 잠언(aphorism)을 읽다 보면 그 예리한 날에 흠짓 놀라게 된다. 그 예리한 날은 다독이라는 단단한 숫돌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 예전에 독서를 강권하는 글에서 말하기를 "읽은 시간이 생기면 책을 읽겠다는 사람은 영원히 책 읽을 시간이 없을 것이다"라 했는데 그에 걸맞는 예라 하겠다. 요즘 들어 책을 많이 읽고는 있지만 그래도 책 읽을 시간이 없다 투덜거리곤 하는데, 살짝 부끄러운 감정이 드는 날이다.

오늘 한 번 방랑자의 방랑길을 되짚어보는 것은 어떨까.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 10점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이다미디어
 
  1. 전자는 11장의 내용이고 후자는 14장의 내용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군대에서는 할 일이 없다. 그래서 심심하기도 하니 기초적인 논리학 책이나 하나 뒤적거려 볼까 하고 질렀다.(BGM: DJ. DOC - 나 이런사람이야)

논리적 추론과 증명 - 6점
이병덕 지음/이제이북스

그래, 난 여가 때 교재를 보는 사람이다.

책은 그냥 심심하게 읽었다. 집합론이 끌어들여지면서 형식논리학이 도입되는 부분은 이전에 집합론을 재미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수강했던 <집합과 수리논리>과목에서 어느정도 기본기를 갖추어 두었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었다. 다른 부분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읽은 편.

논리학 과목을 수강해본 적이 없으니 나에게는 이 교재가 얼마나 좋은지 평가할 잣대가 없지만, 그래도 심심풀이 정도로 읽어보기에는 딱 적절한 난이도의 무난한 책이라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내가 원했던 '비형식적 오류들'은 아주 짧게 마지막 장에만 나왔다는 것. 실제 생활에서 말을 하며 나오는 온갖 오류들은 비형식적인 경우가 많은데, 거기에 대한 감각을 길러주기에는 양이 좀 부족한 것 같다. 그냥 비판적 사고와 관련된 책들을 읽어볼까?

논리적 추론과 증명 - 6점
이병덕 지음/이제이북스
 
Posted by 덱스터
트위터를 간간히 하던 시절에(요즘도 간간히 한다. 간간히의 주기가 길어서 그렇지) 했던 트윗 중 이런 것이 있었다. 찾아보니 최신 글이네.

물리학자란 자연의 아름다움을 수학으로 노래하는 시인들이다. (요즘 판타지를 너무 많이 읽었구나.)
-5월 2일 Tweet 

간간히의 주기가 1달 남짓이라는 신발견은 일단 제쳐두고(ABC마트 만세!), 난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과학자들은 알기를 원하고 자기가 얻은 앎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가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시리즈에서 말했던 적도 있고. 물론 자신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기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있다. 하지만 니체가 말하지 않았던가. "너 위대한 천체여, 네 빛을 받을 내가 없었더라면 네 빛이 무슨 소용이리"(여튼 비슷한 소리를 『차라투스트라』에서 했다) 명상은 결국 사람들에게 해줄 이야기를 얻기 위한 것이다.

그 점에서 개운하게 읽은 책 한 권을 소개하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 - 10점
로버트 P. 크리즈 지음, 김명남 옮김/지호

실험. 이론을 아름답게 여기는 부류에 더 가까운 나에겐 껄끄러운 존재이다. 학점이 잘 안 나온다는 것은 넘어가더라도, 아름다움으로 점철된 이론을 한방에 산산조각내는 가공할만한 위력을 지니지 않았던가. 실험은 항상 이론을 뒤엎을 준비만 하며 눈을 번뜩거린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실험은 이론과 친할 수 밖에 없다. "무엇을 실험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이론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론에서 보여지는 아름다움을 실험에서도 발견할 수는 없을까?

이 책의 저자는 그 질문에서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실험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아름다울 수 있다면, 아름다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래서 저자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꼽은 실험들을 모으기로 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그 실험들이 왜 아름다운지 설명해주며 그 아름다움에 동참하기를 주문한다.

절대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실험으로 꼽혔던 단 하나의 실험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아래의 실험이다. 전자는 양자역학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간섭무늬를 만든다. 하지만 전자가 간섭무늬를 만드는 것은 여러 개의 전자가 서로 상호작용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날아가면서 전자들끼리 서로 부딛치며 간섭 무늬로 내려앉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자를 하나씩 날려보낸다면 어떨까? 결과는 아래와 같다.


점차 점들이 밝아온다. 하나 둘 무작위로 쌓이던 점들은, 시간이 지나고 지날수록 스크린을 메우기 시작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무작위하게만 보이던 점들이 점차 모습을 갖추어간다. 마치 전자들이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빛이 하나 둘 밝아오는 은하의 별들처럼 조금씩 흩뿌려진 점들이 구조를 이루어 종대를 이룬다. 아름다움을 못 느끼더라도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할 수 있겠는가. 자의식조차 없는 미립자들이 무대에 하나 하나 들어서며 점차 군무를 완성해가는 발레리나들처럼 움직이는데, 누가 이 경이로움을 못 느낀단 말인가.

저자가 책을 구성한 방식은 흥미롭다. 실험을 한 가지씩 나열하면서 그 실험이 어떻게 모습을 갖추어 갔으며 왜, 어떻게 아름다운가를 설명한다. 저자가 캐번디시가 자신의 실험을 설계하고 거기에 개입할 수 있는 오류의 원인들에 집착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을 보노라면 마치 수학의 증명에서 느끼는듯한 엄격함에 소름이 돋는다. 이론과 간결한 수식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들이라면, 캐번디시의 편집증적인 엄격함에서 경외를 느낄 것이다. 하나의 실험에 대해 설명이 끝난 다음에는 간주라는 부분으로 넘어간다. 간주에서 저자는 실험의 아름다움에 대해 논한다. 실험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어째서 사람들이 실험에게서 비인간적인 것만 보는 것이 부당한지를 설명하고, 실험과 함께 살아가며 그 고된 작업을 마친 실험자들에게 바치는 찬가는 즐거움을 배가시켜 줄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다. 실험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그 간단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주변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도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 - 10점
로버트 P. 크리즈 지음, 김명남 옮김/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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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10점
이영도 지음/황금가지

처음 작가 이영도를 접하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온 뒤 어떤 친구가 텍스트 파일이 들어있는 압축 파일을 메신저로 보내준 것이었다. 요즘은 내가 여건이 안 되어서 연락이 잘 안 닿는 친구이기는 한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말할 일이 생기리라 믿어두자.

그의 소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 『눈물을 마시는 새』이다. 일반적인 환상문학(사실 판타지라고 부르는 편이 속 편하다)과는 조금 다른 독특한 설정이 두드러지기 때문인데, 그 후속작인 『피를 마시는 새』는 무언가 정이 안 간다. 내용이 꼬여 있어서 그러려나. 그래도 그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작품이라면 역시 『드래곤 라자』이다. DR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연계작으로 『퓨처 워커』가 있다. FW라고도 부르는 연계작은 뒤로 갈수록 내용을 알아듣기 힘들어서 글자가 한 눈으로 들어가 한 눈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쉬웠다.

『그림자 자국』은 근래에 출시된 DR의 연계작이다. 그 사이에 머리가 굵어진 것인지 아니면 소설 자체가 좀 더 쉽게 쓰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읽는 데 서너시간 정도밖에 안 걸렸다. 그렇다고 내용이 쉬운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택한 소재는 '그림자 지우개'라는 물건인데, 어떤 대상의 존재를 비워 버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그 물건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돌아가고, 그 허공을 다른 인과관계들이 채우도록 한다. 때문에 잘 짜여진 인과관계의 거미줄은 허물어지고, 수십 마리의 벌레를 잡아두느라 이곳 저곳 때운 곳이 많아진 거미줄처럼 소설의 흐름도 매끄럽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소설에는 읽기 쉽도록 특이한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일러두기를 보고 나서 소설을 읽으면 알겠지만, 문단에 붙어 있는 숫자와 그 그림은 조금씩 변화한다. 어떤 존재가 나타나고 사라지느냐에 따라 그림이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지는 것인데, 힌트를 주자면 맨 왼쪽은 예언자의 존재, 중간 그림은 프로타이스의 존재, 우측은 시에프리너의 존재를 상징한다. 이 표시를 생각해 가면서 소설을 읽으면 여러 개의 세계가 평행하게 진행되는 소설의 중후반부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매번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그의 소설에는 매력이 있다. 가볍게 흐르는 문체와 무겁게 흐르는 내용의 이질적인 조화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와 같은 느낌을 준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DR을 접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생소할 수 밖에 없는 내용들을 자세한 설명 없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DR을 읽어보지 않고서도 이야기 자체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지만 읽지도 않은 책 때문에 이해의 깊이가 얕아진다면 억울한 일 아니겠는가.
 
그림자 자국 - 10점
이영도 지음/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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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lack Swan (Paperback, 영국판) - 10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Penguin Books

꽤 예전 일인데, 밥을 먹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다. "난 사기꾼이 될 거야."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난 이렇게 말했더랬다. "일단 내 특성상 무언가 만들어내는 일은 못 하겠고, 다른거를 포장하거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게 될 것 같은데 그게 없는 것 가지고 만들어내는건데 그게 사기치는거지 뭐야." 거기에 덧붙인 말은 "그리고 대부분의 직업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거니까 전부 다 사기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 당시에 염두를 두고 있던 일은 소설가(말 그대로 거짓말을 팔아 먹고 사는 사람)와 이론물리학자(역시 물리적 실체가 없는 것을 팔아 먹고 산다), 정 안되면 금융공학자(설명이 필요한지?) 정도였다. 그리고 이 책이 주장하는 것은, 마지막 예시가 정말로 사기꾼-그것도 자기 자신마저 속인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블랙 스완, 혹은 검은 백조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을 상징한다. "여태까지 발견된 백조는 흰 색이었다 → 그러므로 모든 백조는 흴 것이다"라는 명제를 호주에서 발견된 흑색 백조가 갈아엎어 버린 사건에서 끌어 온 상징으로, 저자는 이 검은 백조가 왜 만들어지는지 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마치 이야기를 해 주듯 설명한다. 저자는 차가운 논리를 이용해서는 가슴에 와 닿지 않기 때문에 이런 형식을 취했다고 설명하는데, 더 없이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많은 내용을 차가운 논리로만 설명하려 했다면 그렇지 않아도 내용이 어려운 책이 더 읽기 어려워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저자는 어째서 사람들이 미래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들을 제시한다. 첫째, 사람들은 과거의 정보로부터 미래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귀납의 오류를 저지르고, 둘째로 사람들은 과거의 사건을 합리화하는데는 똑똑하지만 그 똑똑함은 미래에 대해 완전히 무능하며, 셋째로 사람들은 자신의 이론에 맞는 증거들만 모으려는 성향이 있고, 넷째로 사람들이 현재를 분석할 때 쓰는 창은 심각하게 치우쳐있는 것이다.[각주:1]


2부에서는 흔히들 말하는 "전문가들"이 얼마나 무능력한지에 대해 설명한다. 또, 제 아무리 법칙이 간단하다고 하더라도 처음 조건에서 나타나는 작은 차이가 나중에는 얼마나 크게 벌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면서(흔히들 말하는 카오스 이론이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각주:4] 그렇기 때문에 예측하는 것이 일인 이른바 "전문가들"은 전문 사기꾼이라고 단언한다. 2040년의 예측 에너지 소요량과 같은 맞지도 않는 쓸데없는 예측을(만) 하기 때문이다.[각주:5]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각종 근거를 제시해가며 금융상품의 위험도를 측정할 방법이 부재한다고 확신하는 저자는 주식시장에서 벌고 싶으면 다음과 같이 투자할 것을 주문한다. 85% 정도는 절대로 잃을 수 없는 안전한 곳에, 나머지는 높은 위험도의 고수익 상품에 분배하여 전체적인 위험도를 평준화할 것. 분배하는 이유는 어떤 고수익 상품이 대박을 터뜨릴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경우도 있고 나쁜 경우도 있을테니, '검은 백조'와 맞닥드릴 확률을 높이라는 것이다.

이후 3부에서는 보통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정규분포의 문제에 대해서 다룬다. 정규분포는 일반적인 값에서 벗어나는 검은 백조들이 훨씬 적게 나타난다고 예측한다는 것이다. 실제 많은 분포들은 80:20의 법칙(파레토 분포)을 따르는데 정규분포를 사용함으로서 1부에서 제시한 마지막 오류, 잘못 낸 창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삶의 주도권을 놓치지 말 것을 주문하며 책을 훈훈히 마무리한다.


앞서 말했듯이 저자는 논리보다는 이야기책처럼 많은 일화(anecdote)들로 구성해 보다 읽기 쉽도록 독자들을 배려하였다. 내용이 쉽지는 않기에 취한 조치인데, 더 없이 적절한 선택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말 그대로 책에 빨려들었던 것 같다. 물론 책이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쓰여있고 글씨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어서 육체가 피로를 견디지 못했던 적은 자주 있었지만 말이다.[각주:6] 3부는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별로 필요없는 내용이 되겠지만 1부와 2부의 경우에는 논리와 그 오류에 대한 내용인 만큼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누구나 경제나 그 관련 분야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 번 정도는 읽으면서 지적인 쾌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자신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가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약간의 변호를 해 보자면, 원래 학문이라는 것은 이론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기에 존 박사님(Dr. John)과 같은 헛짓거리를 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무엇을 잴 것인지는 이론이 있어야 결정할 수 있지 않은가? 또 학문은 모든 경우에 대해 맞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므로 검은 백조들에 대해 완전히 무능력하다고 해서 모든 경제학 서적을 쓰레기통으로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검은 백조들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나, 포퍼의 반증가능성이라는 과도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어 학문을 쓰레기라고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포퍼의 논리에 너무 매몰되면 책꽂이의 고전역학 책들은 초등학생의 실험만으로도 내다버려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하지만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흔히들 말하는 그 "전문가들"의 일반인과 하등 나을 것 없는 예측력은 좀 너무하긴 하다.


블랙 스완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 옮김/동녘사이언스

번역본은 번역이 개판이라는 말이 있는데, 읽어보지 못한고로 평점은 생략하겠다.
  1. "감정에 치우쳐 현실을 제대로 못 바라보는 오류"도 존재하지만, 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뺐다. 사람들은 끔찍한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암으로 죽는 사람보다 많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정 반대인데, 이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의 소식을 더 많이 듣는 것에서도 유래하지만 암보다는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이 감정을 더욱 자극하는 데에서도 기인한다. [본문으로]
  2. 게르트 기거렌처의 책『생각이 직관에 묻다』 Gut feelings를 보면 이는 오류로 처리될 수 있는 사소한 원인들에 너무 치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소한 원인들은 나중에 오류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그래서 제대로 된 예측을 하려면 사소한 원인들까지 따지기보다는 중요한 요인들만 골라내어 거기에 기반을 둔 예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직관이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는 논리보다 유용하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기거렌처는 과도한 정보는 오히려 좋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탈렙 또한 여기에 동의한다. [본문으로]
  3. 의역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본문으로]
  4. R. Feynman이 "고전역학에서는 모든 것이 운명지워져 있다"는 명제에 대해 반대했던 이유와도 같다. 초기조건 측정의 오류는 지나는 시간에 대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p.178쪽에는 당구공의 충돌로 인한 움직임을 계산할 때 필요한 정보를 제시하고 있는데, 9번째 충돌만 되어도 당구대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중력이 고려되어야 하며, 56번째 충돌에 이르러서는 우주 끝의 전자가 미치는 영향마저 고려되어야 한다. 파인만은 고전역학이 운명론적인 패러다임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모든 것을 무한히 정확히 측정할 수 없기에 자유의지를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The Feynman Lectures on Physics, The definitive edition vol.3, 2-9~2-10 [본문으로]
  5. 내 생각에 가장 쓸데 없는 예측은 "미래에 떠오를 유망한 직업"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직업들의 리스트는 변하지 않았고,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암울하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은가? 오늘도 밤을 새며 생명공학의 발전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자 피펫을 만지는 이들을 위해 맥주를 들자. [본문으로]
  6. 좀 쉽게 말한다면, 졸았다. 하지만 책이 지루한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다가도 조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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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메인 페이지에 올라왔을 때 눈여겨보았다가 얼마 전 사서 하루만에 읽어치운 책.

영단어 인문학 산책 - 6점
이택광 지음/난장이

단어를 하나 던져놓고 그 단어의 어원을 캐 들어가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렇게 어원을 캐 들어가면서 그와 관련된 일화들을 소개하고, 또 그 일화들이 어떻게 현대 서구 사회의(정확히는 영미권 사회이겠지만) 지형을 그려왔는지 설명하고 있다. 마치 셜럭 홈즈가 "한 방울의 물방울에서 나이아가라 폭포와 같은 거대한 존재를 유추"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각주:1] 단어 하나로 문화 전체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재미있게 읽었으나 뒤로 갈수록 뒤끝이 흐려지는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상대적으로 이야기를 끌어 낼 만한 단어가 그리 많지 않아서 책으로 만들 분량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단어를 우겨넣으면서 생긴 현상인지 아니면 갈수록 내 집중력이 흐려졌는지는 불명이지만, 적어도 한 단어에 할애된 페이지 수는 갈수록 점차 줄어드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단어에서는 그 단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부분의 길이가 거의 비슷하기도 하다.

아쉬운 점을 좀 더 써 본다면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이야기 『주홍빛 연구A study in scarlet』가 『주홍색에 대한 연구A study on scarlet』으로 잘못 번역되었다는 것.(206p) 주홍색은 죄악을 연상시키는 색이라고 한다. 중간 중간에 오타와 잘못된 편집이 보여 책의 완성도에는 살짝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내용을 이해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1. 셜럭 홈즈 시리즈의 첫 작품인 『주홍빛 연구』에 나오는 대사였던 것 같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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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친구 하나가 방황을 좀 하는 것 같길레 갑자기 떠올라 추천해 준 책이다.

젊음의 탄생 (반양장) - 10점
이어령 지음/생각의나무

검색해보니 이전에 꿈꾸는 공대생 이라는 글에서 덧붙이는 말에 살짝 등장시켰던 적이 있었다. 이 책을 쓰던 때가 2008 대선 그 직전 정도 되는지라 그때 한창 불던 시대적 기대감이 반영되어 있어 살짝 불편했던 기억이 나긴 하지만, Ant's Trace라는 부제가 붙은 3장의 내용만큼은 언제라도 청춘이라면 가슴에 담아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각주:1] 쉽게(?) 요약하자면 '제대로 방황하고, 방황에 자신감을 가져라' 정도가 된다. 방황은 특권이자 의무라고 해야 하나?

읽은지 너무 오래 되어서(한 2년은 되었다) 서평을 쓰기에는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일단 추천서 목록에는 올려두려고 한다. 글 내용을 너무 상세히 기억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글이 진짜 자신의 것이 되는 길은 글이 자신의 길 속에 녹아들어 의식하지 않아도 의식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1.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장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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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3권 세트 - 10점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즐거움과 함께 인간의 본질과 가장 맞닿아있는 감정이다. 사실 아름다움에서 즐거움이 나오고, 즐거움에서 아름다움이 파생되어 사실상 둘을 면도날로 자르듯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모든 세상은 자신이 느끼는 아름다움을 남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이다. 철학자들은 이성(理性)에서, 신학자들은 신성(神聖)에서, 과학자들은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느꼈고, 그것을 각자의 언어, 그러니까 논리, 성서, 수학으로 표현했을 뿐이라고.

이 사람들은 단지 다른 미적 감각을 가졌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학의 논의의 상당수가 철학과 겹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정신활동이고, 이성은 정신활동의 정수처럼 여겨지지 않던가? 더군다나 수많은 동기가 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즉 미각(美覺)에서 출발했다면 인간의 정신에 매력을 느끼던 사람들이 놓기 힘든 주제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학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활동에 대한 교양서 중에서 단연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책을 꼽으라면 진중권씨의 『미학 오디세이』시리즈이다. 그래서 읽게 되었다. 책을 사다가 5만원을 채우면 마일리지 2000점을 더 준다는 알라딘의 유혹(?) 때문에 그런 점도 있지만, 나온지 10년이 거의 넘어가는데도 아직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는 점이 눈을 끌었던 것 같다.

미학 오디세이 1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1권은 에셔(Escher)의 일러스트가 주로 나온다. 들어 본 사람만 많고 정작 읽은 사람은 적다는 『괴델, 에셔, 바흐』의 에셔 말이다. 내가 처음으로 에셔의 작품을 보았던 것은 일본에 갔을 때 둘러보다가 들렀던 어떤 박물관(미술관이었는지도 모른다)에서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잠깐 그 앞에 서서 서너 초 정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발길을 돌리는 자그마한 소년이 보였을테지만, 나에게는 영화 「컨택트(Contact)」에서의 시공간의 벽을 넘나드는 찰나의 여행이었다. 때문에 그 곳 기념품점에서 팔고있는 자그마한 저금통-들어간 동전이 쌀알보다도 작아지거나 작은 상자만이 떠 있는 공간 속으로 동전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들-을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나왔던 기억이 난다.


이런 애들 말이다. 내 기억으로는 동전도 엄청 작아졌었는데 다른 비슷한 건가?

1권과 동시대에 나온 책이 2권이다. 2권은 마그리트의 그림들을 다루고 있다.

미학 오디세이 2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에셔의 작품들처럼 마그리트의 작품들도 말이 안 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그리트의 작품들 중에는 딱히 기억에 남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이전 글에서 잠시 끌어왔던 이 그림이다. 허공에 떠 있는 성, 어디에서 많이 본 판타지적 요소 아닌가?



제 3권은 앞의 두 권과는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적 간극이 있기 때문에 앞서 소개한 두 권의 책과는 살짝 다른 분위기가 함께하고 있어 천천히 다루기로 하고, 위 두 권을 독자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말 하나는 잘 해서 안티와 팬 모두를 끌고다니는 진중권씨의 말빨이 그대로 녹아나 있는 괜찮은 책이라고 하겠다. 책이라는 것이 대화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던 전통을[각주:1] 그대로 따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서로 대화시키는 구성을 넣은 것은 분명히 오래된 기법이지만 그 전통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현대를 사는 나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름다움과 같이 보편적이면서도 난해한 대상을 이해할 때에는 직접 남과 토론하면서 배우는 것이 효과적인 학습법이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산문과 대화를 적절히 배합한 책의 구성이 얼마나 절묘한지 놀라게 된다.

트로이
아델 게라 지음, 강경화 옮김/열림원
조금은 상관없지만, 대화로만 구성된 현대 책 중 하나. 참고하시길...

앞서 말했듯이 3권의 분위기는 그 전의 두 권과는 조금 다르다. 아무래도 작가가 강산이 변하는 시간만큼 머리가 굵어진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다룬 주제 자체가 분위기의 변화를 유도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에 날 가르치셨던 은사분들 중에는 이른바 '시계추 이론'이라는 것을 주장하시는 분이 있었는데,[각주:2] 그 주된 내용은 모든 것이든 시계추처럼 한 쪽으로 기울었다가 그 반대로 기울게 되고, 다시 기울어진 쪽에서 원래 위치로 다시 기우는 주기적인 행동을 무한히 반복한다는 것이다. 서양 문화의 분위기가 인간 중심에서 신 중심으로, 신 중심에서 다시 인간 중심으로, 이런 식으로 계속 진동한다는 것을 가장 큰 근거로 내세우셨던 기억이 나는데 돌이켜보면 어떤 철학자가 주장한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튼, 공비가 -1인 기하급수처럼 끝없이 진동하는 역사 속에서 그 끝은 어디에 있을까? 0? 1? 아니면 다음의 식에서 r에 -1을 넣으면 얻는 값처럼 이도 저도 아닌 ½?

1 \,+\, r \,+\, r^2 \,+\, r^3 \,+\, \cdots 
\;=\; \frac{1}{1-r},
'기하급수적으로'라는 단어가 이 수열에서 나왔다.[각주:3]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발걸음이 무거울 수 밖에 없다. 철학이 이리 저리 시계추처럼 진동하다가 결국에는 끝나지 않은 기하급수처럼 어디로 가야 할 지 방향을 잃어버린 현대-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의 미학 또한 차가운 겨울 밤을 지낼 피난처를 찾지 못한 길거리의 나그네의 발걸음처럼 무겁다. 그렇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필자가 3권을 읽으며 느낀 첫 느낌은 '억지로 분위기에서 무게를 덜어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미학 오디세이 3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구는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가 앞으로 쓰지 않을 소설' 이었다. 한편으로는 적절한 소설을 찾아 헤매기 귀찮아하는(?) 저자의 게으름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게으름보다는 꽤 무겁게 흘러가는 현대철학과 그 무거운 발걸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주기 위한 장치라고 느껴졌다. 그 시도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책을 읽으며 굳어있었던 얼굴에 피식하며 스쳐 지나가는 미소를 안겨주는 효과는 있었다.



맑은 달밤에 베란다에 홀로 앉아 달과 함께 맥주캔을 홀짝이던 그대. 무엇이 그대를 베란다로 끌고 왔는지 궁금하지는 않던가? 오늘 한번 무엇이 그대를 불러냈는지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

미학 오디세이 3권 세트 - 10점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미학 오디세이 1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미학 오디세이 2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미학 오디세이 3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1. 플라톤의 책은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하는 구조로 이루어진 것들이 많다. 가까운 근대에서 찾는다면 갈릴레오의 책이 이런 방식으로 쓰여졌다. 가까운 지역에서 찾는다면 공자의 論語가 딱 이런 구성이다. [본문으로]
  2. 이상하게도 이 분처럼 조금은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강의하시는 분들은 아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아니면 내가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았던 선생님이 엄한 분위기를 가지고 계셔서 그때에만 주의를 집중했을 수도 있고. [본문으로]
  3. 파인만(R. Feynman)씨는 이 단어의 상위 개념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이라는 단어 대신 '경제학적'이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고 했다. 인플레이션을 생각해보면 경제학적 숫자가 무한대를 상징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을지도.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죽은 자들에게 고하라 - 8점
이영도.듀나 외 지음/해토

소설은 금방 금방 읽을 수 있어서 좋다. 물론 난 픽션보다는 논픽션을 선호하지만.

이번 책은 크로스로드에서 기고된 SF 단편들 중 엄선(?)한 것을 모아 책으로 낸 것이다. 이전 글에서 말한 것처럼 표지가 좀 에러이긴 한데 그래도 내용은 그럭저럭 괜찮다. 이영도씨의 단편이 실려있다는 것으로 소장가치 상승(?).

아침에 트위터에 올린 것처럼 SF를 읽다보면 이론을 잘못 이해한 부분이 눈에 너무 크게 들어온다. 너무 크게 들어와서 정작 소설의 내용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는게 문제. 이전에 Murray Gell-Mann이 TED 강연에서 '양자역학에 대해 잘못 설명하는 교양책이 시중에 넘쳐난다'는 말을 했는데, 내가 이전에 이 글에서 정확하게 그 예를 지적했던 기억이 난다.


그 동영상의 유일하게 볼 만한 부분. 나머지는 말 그대로 헛소리.

정확히 똑같은 잘못된 이해가 단편 「0과 1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나의 측정'이 세계의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 말이다. 상당히 지독한 인간중심주의가 느껴지는 이런 견해에 대해서는 아인슈타인이 그랬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달이 내가 쳐다보고 있어서 존재한다는게 말이 되냐'라는 말로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주류(?) 물리학의 입장은 '물질의 존재는 물질이 서로 반응하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에 더 가깝다. 세상에 단 한 사람만이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을 묘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과 비슷하다. 닮음보다는 차이가 그 사람을 드러내는 법이다.[각주:1] 이렇게 신나게 까 놓고 이런 말 하기는 좀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소설 내용은 마음에 들었다.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소설을 쓰다가 때려치운 경험도 있고, 더불어 시간여행에 대한 시각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기타 각 작품별로 떠오르는 단편적인 생각들은:
-이영도, 「별뜨기에 관하여」: 별자리를 찾아가는 사람의 이야기
명불허전.[각주:2] 그런데 예전에 인터넷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듀나, 「죽은 자들에게 고하라」: 20세기의 재림을 보는 기분
간판격 단편. '기술에 대한 불신'이 간간히 내비치는게 특징이다. 이영도가 전 단편 중 하나인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에서 말했던 문화가 문화를 집어삼키는 시대에 대한 우려가 보이기는 하지만 소설의 중심에 놓인 그 불신이 점수를 까먹었다. 기술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기술을 잡아먹어야 한다는게 신념이라서.

-임태운, 「채널」: 채널 사이의 숨겨진 채널에 감춰진 음모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진짜 따로 할 말이 없다.

-송경아, 「하나를 위한 하루」: 아버지냐 딸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족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할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뒤끝이 좀 많이 남아서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그 나름대로 괜찮은 결말이라고 생각하는 중. 강풀의 만화 『26년』의 결말이 생각난다.

-설인효, 「진짜 죽음」: 속설에 진리를 본 자는 미쳐버린다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나름대로 내용은 참신했지만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내용이다. 일단 각종 실험의 결과가 인류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해 그 발표를 규제하는 기구가 있다는 것부터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독한 엘리트주의, 선민의식이 느껴져 헛구역질이 날 지경이다.[각주:3] 핵무기에 대한 지식을 예로 들면서 아예 모르는 것이 나은 것도 있다는 주장을 하지만 역으로 핵무기에 대한 지식이 있기에 다른 지식(수소폭탄 등)에 대해서 쓰면 안된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알면서도 쓰지 않는 것과 알지 못해 쓰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

-노기욱, 「소울메이트」: 기계가 운명의 상대를 점지해주는 시대의 비극
왜 나는 '사람의 감정을 확인해주는 기계'들이 등장하면 제대로 테스트했을지 의문이 드는 것일까? 진짜 효과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기계가 반응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려준 커플들의 말로와 기계가 반응을 일으켰다는 거짓말을 한 커플들의 말로,[각주:4] 그리고 반응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커플들의 말로를 전부 조사해야 할텐데 그걸 전부 조사한 통계가 사용되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봐도 난 다른 사람과 무언가 다른듯.

-김보영, 「0과 1 사이」: 시간여행 속에서 과거와 현재는 꼬여만 가고...
위에서도 말했듯 오개념 때문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 글 속에 녹아든 분위기가 재미있었지만. 과거에 매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부분은 이영도의 전 작품 『퓨처 워커』가 생각나게 한다.

-김몽, 「차이니스 와이너리」: 중국은 언제까지 악의 축이려나
내가 '아시아 연합' 방면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해서 그런 배경이 깔려있는 소설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중국에 대해 좀 많이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기분이 드는데(마치 냉전시대 소련을 비난하던 미국처럼) 내 이력 탓일듯 싶다. 그 외에는 평범.

-김선우, 「양치기의 달」: 타 행성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인간은 언제라도 인간성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다'는 기분이 드는 단편.

-백상준, 「우주복」: 인간 외계인 몰라요 외계인도 인간 몰라요
재미있게 읽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 물론 나는 읽은 후 페르미온과 보존을 떠올리면서 물질과 원하는 경우에만 반응하는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을지 고민했지만.(물질 사이의 반발은 전자가 페르미온이기 때문에 파울리 배타원리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페르미온과 보존 사이를 진동할 수 있는 입자가 존재한다면 가능할지도라는 결론을 내리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난 역시 무언가 달라.

위에 있는 소설들은 전부 크로스로드 홈페이지에서 검색해 읽을 수 있다. 그런데 활자는 모니터보다는 종이 위에서 더 잘 읽히는 것이 현실이다.

죽은 자들에게 고하라 - 8점
이영도.듀나 외 지음/해토

  1. 비록 신영복 교수님께서는 『강의』에서 이렇게 작은 차이를 부각하는 서양적 사고방식이 가져온 반인간성에 대해 통탄하셨지만 우리가 가진 그나마 쓸만한 몇 안되는 도구 중 하나인 것을 어쩌겠는가? [본문으로]
  2. 그런데 딱히 악평할 거리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3. 엘리트주의와 선민의식을 딱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의식이 자기 자신을 규제하는데 쓰이면 발전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을 규제하는 순간 선민의식은 온갖 죄악의 씨앗이 된다. 그리고 소설에서 나온 '국제문명보호연대'는 후자의 너무도 모범적인(?) 예이다. [본문으로]
  4. 플라시보 효과는 의외로 강력하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책을 사다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장바구니에 추가했던 책이다.

가공된 신화, 인간 - 8점
틸 바스티안 지음, 손성현.박성윤 옮김/시아출판사

이전에 좀 거칠게 표현했던 적이 있기는 하지만, 동물에 대한 동정에서 시작하는 채식주의에 대한 내 입장은 아직도 부정적이다. 감정이나 종교의 영역에서 채식주의를 옹호한다면 그 나름대로 의미를 갖겠지만, 논리의 입장에서 동물을 먹지 말자고 주장한다면 모순없는 입장은 과식주의(果食主義 - Fruitarianism) 외에는 없다고 생각한다.[각주:1] 과일은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식물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내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식사를 끌어들인 이유는 책의 주제가 '동물과 인간사이'이기 때문이다. 부제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사유하다'가 책의 주제를 잘 표현해준다. 사실 내가 더 이상 설명할 것도 없이, 이 부제가 사실상 책 내용의 전부이다. 여기에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자연을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찰로 드레싱을 곁들여주면, 『가공된 신화, 인간』이라는 샐러드는 완성된다. 그러면 이 샐러드에는 어떤 야채가 들어가 있을까?



예전에 「워낭소리」라는 독립영화가 대히트를 친 적이 있었다. 거기에 대해서 그 이유는 '시골을 이상적인 공간으로 바라보려는 낭만주의적 시선'이 어려있는 것이며, 이것이 7-80년대의 급격한 산업화에서 낙후된 '도시의 시골에 대한 부채의식'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좀 까칠하게 분석했던 글을 하나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정확한 출처는 검색해보아도 걸리지 않고 해서 일단은 링크 없이 놓아둔다. 책 이야기하는데 왜 난데없이 영화 이야기를 하느냐면, 책에서는 똑같은 현상이 자연에 대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부채의식은 아니더라도 자연에 대한 미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

근대적 의미의 '동물 사랑'은 낭만주의의 산물이다. 그것은 시민 계층의 성장과 함께 형성된 '감정의 세계'와 결부되어 있다. 요한 고트프리트 조이메의 유명한 시 「진실한 휴런 사람들」에서 보듯이, 이 시대는 인간이 '고귀한 야생의 자연'을 발견하고 찬미하던 시대였고, 장 자크 루소가 정치적인 의도로 주창했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개인의 감정 구조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시대이기도 했다.[...] 그 시대에는 자연이 다양하게 형상화되었는데, 자연은 낭만주의의 도피처이자 지향점이었다.

[...]
p.126

이런 '낭만주의적 관점'은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지는 아직도 의문이 가지만 많은 경우 동물보호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동물들에게 감정이입할 것을 요구한다. 구육(狗肉 - 개고기)이 관련될 경우, 대부분의 합법화 반대론자들의 논리가 여기에서 멈추어 있지 않던가.[각주:2] 책의 저자는 이 부분 역시 짚고 넘어간다.

[...]

직관적인 감정이입은 실제로 효과가 있으며 우리의 경험도 그것을 입증해 준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의 감정이입은 성게나 민달팽이보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가진 '귀여운' 강아지나 송아지에게 훨씬 빠르고 쉽게 적용이 된다. 반면 미생물에게는 거의 언제나 실패다.

[...]
p.138

저자는 그렇다고 '동물에게는 권리같은 것을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권'이라는 개념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처럼 아직 끝을 보지는 못했으나 언젠가는 자연계에 대해서도 비슷한 개념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주장한다.[각주:3] 그리고 이런 개념들은 인공적인 것이 아니라 "거미가 실을 뽑아내듯 스스로에게서 뽑아"내어 지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앞에 정리한 부분은 사실 이 샐러드에 들어가는 여덟가지 재료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장은 주로 '인간은 동물을 어떻게 이용해왔는가'나 '동물과 인간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들'과 관련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생각해 소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드레싱에 해당하는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자연을 대해야 하는가'와의 궁합 때문에 필연적으로 소개해야만 하는 재료가 하나 있다. '전염병'

08년 여름, 광장의 밤은 수많은 불빛으로 아른거렸다. 광우병 논란과 함께 소고기 수입에 대한 폭발적인 우려가 낳은 결과였다. 난 당시의 가장 큰 문제가 불필요하고 이롭지도 않은 외교적 행동에 있다고 보지만, 이 책은 조금 다른 부분에 집중한다. 광우병은 변형프리온이 생성되어 폐사된 소를 원료로 만든 사료 때문에 크게 퍼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종 전염병' 말고도, 지금과 같은 식료품 소비 체제를 그대로 이어 갈 경우 앞으로도 계속 비슷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책에서는 경고하며 다른 대안의 필요성을 호소한다.

[...]

만일 소비자들이 식료품 상점의 선반에서 뉴질랜드 산 사과나 남아프리카 산 배를 향해 너도나도 손을 뻗치지만 않는다면, 자사 비행기를 통해 해외에서 독일로 미생물 불청객들을 수입해오곤 하는 루프트한자가 더이상 세계 제일의 화물항공 기업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미생물과 잘 지내야한다.

[...]
p.234

물론 광우병과 같이 인간이 육류를 섭취하느라 만들어낸 구조 속에서 가축의 원래 삶이 왜곡되어 만들어지는 병들과는 다른 종류인 말레리아와 같은 전염병의 경우 세계화가 더 큰 요인이지만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다. 빈번한 화물 운반이 생태계 교란의 원인이 된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필자는 샐러드를 먹을 때 드레싱을 전혀 하지 않고 생 야채만 먹는 스타일이라 그런지 많은 친구들은 나를 두고 '무슨 맛으로 샐러드를 먹냐'며 신기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애초에 이 책을 샐러드에 비유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결론은 본문에 비해 양이 현저히 적다. 하지만 드레싱은 샐러드의 맛을 결정한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샐러드는 어떤 드레싱을 사용했을까?

애석하게도 이 분야는 질문의 범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기 때문에 '답이 없는' 분야이다. 저자도 어쩔 수 없이 다음과 같은 유보적인 결론만 내려놓고 있다.

[...]

겸허하게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며 가능한 이 세계를 아끼고 보호하려는 가운데 이 세계, 즉 하나의 시스템으로 파악되고 경험되는 세계, 우리와 더불어 존재하는 이 세계 안에서 - 혹은, 그냥 자연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 자신의 위치를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동물과 식물세계의 번영, 그리고 솟구쳐 오르는 샘물의 투명함과 무궁함이 우리 자신의 안녕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함부로 깨뜨릴 수 없는 규칙의 지배 아래에 있음을 예감하는 것이다.

[...]
p.268

하지만 이 드레싱이 현재로서는 가장 쓸만한 드레싱 아닐까?



책 전반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지만, 균형을 조금은 힘들게 잡았다고 생각한다. 가령 책의 첫 두어장만 읽는다면 비록 그런 태도를 경계하고 있다고 해도 '자연에 대한 미화'로 가득 차 있는, 그저 그런 책으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 결국 균형을 잡는데는 성공하였지만 처음부터 그 자리에 안정되게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계추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마지막에 아슬아슬하게 정지하며 균형을 맞춘 느낌이라고 묘사하겠다.

가공된 신화, 인간 - 8점
틸 바스티안 지음, 손성현.박성윤 옮김/시아출판사

  1. '모순없는'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논리에 어느 정도의 모순이 존재한다고 해도 수학을 하고있지 않은 한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의 경우 점전하와 같은 비교적 '사소한' 모순은 무리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입자물리와 같이 엄격함이 생명이 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본문으로]
  2. 난 구육을 먹지는 않지만 합법화에는 찬성한다. 불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개 도살을 양지로 끌어내어 직접 관리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 많은 미세한 조정이 필요하겠지만. 참고할만한 단편을 하나 링크해둔다. http://www.foog.com/37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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