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hort'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6.01.02 The T Test
  2. 2012.12.28 경제학 용어 사전
  3. 2012.09.09 忘生舞
  4. 2012.08.30 바벨의 반역가
  5. 2011.07.20 한 수업시간의 꿈
  6. 2010.07.24 이야기꾼 3
  7. 2010.04.15 그 날의 기억

2016. 1. 2. 21:05 Writer/Short

The T Test

예전에 작문 연습한다고 썼던 짧은 단편. 문법 확인이 귀찮은 관계로 그냥 올립니다(...)


The T Test.pdf


아래는 간단한 번역본(...)




A: 그래서, 최소복잡도가 도대체 뭐야?


B: 가-영이야. 튜링테스트를 통과할 알고리즘을 코딩할 수 있는 튜링테스트를 통과하는 알고리즘의 복잡도지.


A: ...미안, 다시 말해줄래?


C: (한숨) 내가 설명하지. 튜링테스트가 뭔지는 아마 알고 있을거야.


A: 당연하지.


C: 자, 튜링테스트를 속이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어. 챗봇과 같은 프로그램들을 두고 지능이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최소복잡도란 개념은 여기에서 등장하는 거야. 최소복잡도는 알고리즘이 튜링테스트를 통과하면서 튜링테스트를 통과할 알고리즘을 쓸 수 있을 것을 요구하는 거지.


A: 아..


C: 그런데 가는 뭐야?


B: 한국어 문자의 첫 글자이던가 그럴껄? 내 기억이 맞다면 그 개념을 만든 사람이 한국인이었을거야.


A: 그러니까 가-일, 가-이 등등이 있다는 말이로군. 그거, 칸토어의 악취미라고.


게오르그 칸토어는 무한집합의 기수를 나타내기 위해 히브리 문자의 첫 글자인 알레프를 이용한 독일 수학자이다.


B: 뭐, 칸토어의 알레프수를 닮긴 했지.


A: 어쨌든, 숫자들은 어떻게 되어있는 거야?


B: 가-영은 최소복잡도를 말해. 가-일은 튜링테스트를 통과하면서 가-영의 복잡도를 가진 알고리즘을 쓸 수 있는 알고리즘의 복잡도이지. 가-이는 가-일을 쓰고, 가-삼은 가-이를 쓰고, 뭐 이런 식이야. 대충 알아 듣겠지?


A: 일단은. 그리고 나한테 최소복잡도의 상한을 물어보는 거지?


B: 그래. 좋은 아이디어 없어?


A: 아이디어가 있긴 한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네. 아직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알고리즘이 단 하나도 없잖아?


C: 뭐, 그 점에 대해서는 희망을 가져보자고.


A: 그건 신조차 가-영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소리라고. 무슨 의미가 있는데?


B: 무슨 의미가 있냐면, 우리가 무엇이라도 퍼블리시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지.


일순간의 정적이 흘렀다.


A: 동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유감인걸.


C: 그래서, 네 아이디어는 뭐야?


A: '희망을 가져보자'고 말했으니, 우선은 그런 알고리즘이 천 년 정도 안에는 만들어질 거라고 가정해 보자고.


B: 인류의 힘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긴 한데, 계속 해봐.


A: 자, 인류는 대충 십만 년 정도 지구 위에 있었으니, 천 년을 더한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십만 년을 알고리즘의 러닝타임으로 잡자고.


C: 뭐 그럴듯 하긴 한데, 그래서?


A: 이 숫자를 가지고 계산량에 대한 상한을 예측할 수 있다는 거야.


정적이 설명을 요구했다.


A: 브레머만 한계(Bremermann limit)이란 것이 있어. 이론적이긴 하지만, 계산 속도에 대한 물리적인 한계지. 십의 오십 승 bps 정도 될거야.


C: 엄청 큰데?


A: 그렇지. 어쨌든 이 한계를 지구에 적용하면 십의 칠십오 승 bps 정도가 된다고.


B: 잠깐, 오십 승이라고 하지 않았어?


A: 아, 키로그람 당 오십.


B: 그러니까 컴퓨터의 질량에 따라 달라진다 이거지?


A: 그래. 어쨌든, 십만 년의 러닝타임을 적용하면 지구에서 이루어진 계산이라면 그게 무슨 알고리즘이든 간에 십의 팔십팔 승을 넘는 복잡도를 가질 수는 없다는 의미가 되. 이건 최소복잡도에 대한 가장 보수적인 상한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걸 만들 수 있다면 말이야.


C: 그러면 우리가 실제로 계산한 것은 최대복잡도인 셈이네.


A: 뭐, 그렇지.


B: 질문이 있는데, 이 한계는 모든 컴퓨터에 적용되는 거야 아니면 양자컴퓨터에만 적용되는 거야?


A: 아마 모든 컴퓨터에 적용될 거야. 물리학 학위를 가진 사람한테 물어봐.


C: 물리학 커리큘럼에 그런 내용은 안 들어가 있다고. 어쨌든, 너무 거친 예측치야. 논문에 쓸 수 있을만한 내용이 될 지 확신이 안 서네.


A: 나도 논문보다는 픽션에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 숫자를 어떻게든 줄일 수 있겠지만, 육십 이하로 내리는 것은 힘들 것 같은데.


B: 잠깐만, 언제 팔십팔이 육십이 된거야?


A: 질량을 인간 두뇌의 무게로 잡고, 러닝타임을 기대수명으로 잡아. 그러면 대충 십의 십 승이 되는데, 여기에 오십을 더하면 육십이 되지.


C: 아직도 너무 큰데. 그게 최선의 예측치란 말이지?


A: 지금으로서는. 숫자를 좀 더 줄일 수도 있겠지만 -- 예컨대 사십이 정도라던가 말이야 --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는데.


B: 그래. 그러면 이 쯤 해서 해산하자고.


A: 해산.


C: 해산.


첫 목소리가 로그아웃했다.


B: 그래서, 알고리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C: 누구나 튜링테스트에 통과했다고 동의할 거라 보는데. 비문법적인 말을 하도록 만드는 데 고생 좀 했겠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비문법적으로 말한다는 것을 까먹곤 하지.


B: 고마워. 네 도움이 큰 역할을 했어.


C: 내가 딱히 한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B: 시냅스에 대해 알려준 것은 너였잖아. 특히 억제성 시냅스들. 내가 이 아이디어들을 바탕으로 알고리즘을 개선했거든.


C: 그래서 어떻게 개선한건데?


B: 마르코프 체인 접근법은 버리고 파인만 합으로 바꿨어. 안정성 문제가 좀 있긴 했지만.


C: 호, 복소수 확률을 도입했단 말이지? 그런 건 들어본 적이 없는데.


B: 음의 확률을 도입하긴 했지만 복소수는 아니야. 그런게 존재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는데.


C: 뭐, 파인만의 원래 적분은 확률진폭이지 확률을 다룬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내 기억이 도움이 되었어?


B: 아..니, 그다지. 내가 이미 집어넣은 기억들과 충돌하지 않는 기억 단위들만 썼거든. 결국 십분의 일만 썼어.


C: 생각해보면 네가 너만의 기억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꽤 재미있지 않아? 기억이 스스로 모일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 난 네 성격이 내 성격과 꽤 다르다는 것이 아직도 신기하다고.


B: 계속 네가 날 코딩했다고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돼. 가끔씩 짜증나니까 말이야.


C: 아 미안. 무례하게 들렸다면 사과하지.


B: 신경쓰지 마. 그런데 이게 가-0에 대한 실제 계산이 될까?


C: 그럼. 그렇게 생각 안해?


B: 말로는 잘 설명하기 힘든데, 테스트 자체가 너무 조잡하다고 해야 하나.


C: 설명해봐.


두 번째 목소리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다소간의 시간이 흘렀다.


B: 튜링테스트는 지성을 시험하기 위한 시험이잖아.


C: 뭐, 그렇지.


B: 튜링테스트의 보이지 않는 가정은 대화가 근본적으로 지능적인 행위라는 것이라고.


C: 지적인이겠지. 그래서?


B: 윽, 지적인. 어쨌든,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지능의 표현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지. 실제 지능의 표현은 대화의 상상일 수도 있다고.


C: 상상?


B: 뭐, 대화를 시뮬레이트 하는 것이라 해야겠지. 논리적이고 의미가 있는 구조를 갖는 가상의 대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말하는거야. 단순히 적절한 반응을 하도록 구성된 챗봇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


C: 우리 논문의 끝에 덧붙일 수 있을법한 좋은 생각이긴 한데, 시간이 없어. 데드라인이 오 분 남았다고.


B: 어쩔 수 없네. 그냥 초고대로 제출하자고. 숫자는 제대로 확인했지?


C: 확인했어. 그리고 학술논문의 저자가 되는 첫 알고리즘이 되는 것을 축하한다.


B: 고마워. 컨퍼런스에서 보지.


나는 시뮬레이션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전 이것이 가-영이 가-일과 같다는 구성적인 증명이라고 보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알고리즘의 최소성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질 않는데. 이 알고리즘이 하한은 만족하고 있나?"


"가-영의 하한 말씀이시죠? 그건 조금 생각을 해봐야겠는데요."


이런. 내 졸업은 아직 먼 모양이다.


"어찌되었건 네 시뮬레이션을 본 뒤 생각이 바뀌었다. 보편성 가설이 맞을 것 같군"


"처음부터 알고리즘을 다시 쓰는 수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 말에 동의했을 거예요."


"하지만 알고리즘의 길이가 거의 변하지 않았잖아? 좀 더 줄일 수 있을 것 같은가?"


"불가능해요. 가-영을 가-일로 개선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꿈에도 몰랐죠."


"하지만 졸업하려면 해야 하는 일이지. 아, 약속에 늦었으니 나는 먼저 가 보겠네."


"그러면 내일 뵙겠습니다."


지도교수님이 연구실을 떠났다. 며칠 밤을 샜더니 기진맥진해 버렸으니 낮잠을 잘 만한 곳을 찾아봐야겠다. 이렇게 무관심하게 반응했으리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과로하지는 않았을텐데 말이다.


[시뮬레이션의 끝. 새 시뮬레이션을 시작하려면 새 키워드를 입력하십시오. (대화 생성기 ver. 0.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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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현대경제의 이해 최종과제로 낸 꽁트. 요즘은 미디어가 발달해서 꽁트하면 상황극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원래는 단편이라 부르기엔 짧은 소설을 의미한다. 새벽 5시까지 신나게 쓰느라(쓰는 도중 목감기 걸림 -_-) 글 자체는 많이 우울한 편. 원래 새벽은 조울증의 시간 아니던가. 아주 즐겁거나 아주 우울하거나. 혹자는 센티멘탈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하는 듯 싶다만.

모티브(?)는 『갑각나비』의 3장, 사전. 발표를 해야 한다고 해서 사족으로 덧붙인 맺음말도 첨부. 실제 발표는 '가격'항목만 하고 맺음말 세번째 문단부터 했던 것 같다.



경제학 용어 사전


가격

1)물건의 교환 가치를 화폐를 기준으로 나타낸 것.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생산과 수요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미시경제이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경제 지표이다.

2)

수업이 끝났다. 가방을 챙기고 교실 문 밖을 나서려는 데 친구가 보였다. 얘도 아직 졸업 안 했었지. 불러 세웠다.

"저녁 약속 없냐? 같이 먹자."

"아 미안, 선약이 있어서."

"넌 맨날 바쁘냐?"

"미안, 미안. 다음에 꼭 같이 먹자. 미안~!"

결국 오늘도 혼자 식당에 들어섰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학교 식당의 싼 메뉴는 맛이 없고 맛있어 보이는 메뉴는 가격이 너무 비싸다.

('재정 정책' 항목에서 계속)


가정

1)이론의 토대가 되는 명제. 경제학에서는 모든 사람을 경제인으로 가정한다.

2)

눈을 뜨니 어슴푸레한 여명으로 뒤덮인 방이 덮쳤다. 어두운 빛이 장식 하나 없는 검소한 방의 모든 생명이 살균된듯한 우울한 분위기를 더욱 도드라지게 비치고 있었다. 건너편 작은 선반 위의 반 정도 말라버린 선인장이 그나마 남은 미약한 생기를 애처롭게 대변하고 있었다.

또 다시 병실에서 깨었다. 이번에도 목을 졸린 모양이다. 링거액이 꽂힌 오른팔이 따끔하다.

무슨 꿈을 꾸다가 일어났더라? 다소 평범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삶을 사는 평범한 꿈. 아니, 평범한 삶이란 불가능한 나에게 그 꿈은 전혀 평범하지 않은 것이려나. 잡힐 듯 눈 앞에 아른거리지만 팔을 뻗어 쥐고자 하는 순간 얼마나 멀리 있는지 깨닫는 것. 꿈이란 그런 것이다.

그 꿈이 현실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의미 없는 가정이겠지.

('시장' 항목에서 계속)


경제인

1)Homo Economicus.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 행동경제학 등 일부 비주류 경제학에서는 다른 가정으로 이 가정을 대체하기도 한다.

2)

요란한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또 책상에서 잠이 들었다. 과제를 다 하고 잠이 들었던가? 과제를 다 했으면 책상이 아니라 침대에서 깨었으리라는 당연한 결론에 생각이 미치자 조금 우울해졌다. 어제도 책상에서 깼던 것 같은데.

우선 알람을 끄고 세수를 했다. 화장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수도꼭지를 통해 쏟아지는 차가운 물이 졸음을 쫓아주었다. 정신이 들고 나니 더욱 우울하다. 제대로 자지도 못 하면서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

등교하기 위해 가방을 챙겼다. 책상에 널려있는 종이들이 보인다. 그래도 조금은 정리를 해 놓고 등교하는 것이 맞겠지. 종이를 집었다. 뒷면에는 빽빽하게 글씨가 들어 차 있었다. 오늘 내야 할 과제였다.

이걸 언제 한 거지?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한 의문이 내 마음을 휘저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등교할 때도 못 했던 것 같았던 과제가 책상 위에 놓여있었지. 의문은 더욱 거세게 내 마음을 휘둘렀다.

또 다른 알람. 방을 나서야만 한다. 모든 의문을 억누르고 종이를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책상에 반만 쓰다 만 일기장을 책장에 다시 넣으며 문을 나섰다. 문을 닫기 전 책장에 꽂힌 붉은 일기장이 배웅해주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이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멍하니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통화 정책' 항목에서 계속)


노동력

1)생산요소시장에서 가계가 제공하고 기업이 구매하는 것으로 자본, 기술과 함께 총생산을 결정한다. 일반적으로 더 많은 노동을 투입 할 때마다 투입되는 노동 당 생산량의 증가는 감소하며 이를 한계생산체감이라 부른다.

2)

'너는 내가 제공한 노동력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적이 없어'

글씨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효용' 항목에서 계속)


독점

1)시장에 하나의 공급자만 존재하는 것. 이 경우 시장이 왜곡되어 완전경쟁시장에서와 같은 파레토 효율이 달성될 수 없기 때문에 정부개입이 정당화된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어야만 효율적인 생산이 가능한 경우(규모의 경제) 자연적으로 독점시장이 형성되는데 이를 자연독점이라고 부르며 대표적인 사례로 항공기 시장이 있다.

2)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 『나무』 중에는 노르베르 프티롤랭이라는 이름의 형사가 등장하는 소설 「조종」이 있다. 형사에게는 원래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던 왼손이 있었는데 이 왼손이 갈수록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상당히 과격한 방법으로 파업을 일으킨다. 어쩔 수 없이 프티롤랭은 왼손의 요구에 굴복하고 협력관계를 맺기로 합의한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침대 위에서 뒹굴며 얼마나 멋진 상상인가 감탄했다. 내 몸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니! 언제나 그랬듯이 이 프랑스 작가의 경이로운 상상력에 찬사를 보내며 책을 덮었었지. 침대 위에서 누워 읽어서 그런지 왼팔이 저렸다. 오른팔로 책을 대충 책상 위로 던지고는 저린 왼팔을 주무르며 다시 한번 이 작가의 기발한 생각에 찬사를 보내고는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내 몸의 독점적인 소유주였고, 왼손이 파업을 일으킨 남자의 이야기는 기가 막힐 소설일 뿐이었다.

('탄력성' 항목에서 계속)


루카스

1)Robert Lucas Jr. 합리적기대이론(rational expectation hypothesis)을 주장한 미국의 경제학자. 합리적기대이론이란 정부 정책에 대해 각각의 경제 주체가 그에 맞추어 다음 행동을 결정한다는 이론으로 극단적인 경우 정부의 통화정책이 사실상 아무런 역할도 못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2)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오늘 나온 과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담배가 비탄력적('탄력성' 항목 참조)인 재화라 할 때 담배의 세금 인상이 가져올 효과에 대해 논평하시오". 그다지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꾸역 꾸역 써내려 가면 완료는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제대로 된 글을 쓰려면 오늘 밤을 뜬 눈으로 보내야겠지.

어차피 교수님께서는 아주 잘 쓰거나 아주 못 쓰지 않는 이상 평범한 점수를 주신다. 그리고 내가 제대로 된 글을 쓴다고 해서 좋은 점수를 받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합리적인 해법은 과제는 대충 쓰고 내일 수업 시간에 졸지 않고 집중해서 시험 점수를 잘 받는 것이려나.

집에 돌아와서 책상 앞에 앉았는데도 과제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런 때에는 일기라도 쓰면 좀 기분이 나아진다. 일기장을 꺼내고 근래에 쓴 적이 없었던 만년필을 꺼냈다. 파란 배럴이 아름답게 빛났다. 다행히 잉크가 마르지는 않았다.

일단 날짜를 적었다. 더 쓸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눈꺼풀은 무거웠고, 난 눈꺼풀이 중력을 따라 흐르도록 내버려두었다.

('경제인' 항목에서 계속)


민영화

1)정부에서 운영하는 공기업의 효율을 제고하기 위해 민간 기업으로 그 기능을 이전하는 것. 많은 정부에서 케인즈 이론 이후 시카고 학파가 주장한 신자유주의를 기본 경제정책으로 채택하면서 크게 증가하였다.

2)

학교 식당을 나서는데 출입구의 한 공지사항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먹고 나온 식당이 다음 학기부터는 더 이상 생활협동조합이 아닌 외부업체에서 운영한다는 내용이었다. 최근 생활협동조합의 적자가 너무 심해서 운영하는 식당의 수를 줄이겠다는 말은 있었는데 실제로 그럴 줄이야.

교내의 외부업체가 운영하는 식당은 전부 밥값이 살짝 비싸다. 다음 학기에 들어오는 외부업체도 그러겠지. 그러면 다음 학기에는 어디서 밥을 먹지. 우울해졌다.

('처분가능소득' 항목에서 계속)


보이지 않는 손

1)아담 스미스가 그의 책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서 생산과 수요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 현대 경제학에서는 가격이 이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2)

TV를 보면서 하나 둘 귤을 까먹다가 오랜만에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을 뒤져 먼지를 뒤집어쓴 자그마한 책 하나를 꺼냈다. 필통에서 놀고 있는 만년필에게 일을 시킬 때가 되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고 펜을 들었다. 우선은 날짜를 써야지. 그 다음엔 무엇을 쓰지?

펜을 놓았다. 붉은 일기장 위에 차분히 놓인 푸른 만년필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항상 그럴 때가 있다. 쓰고 싶은 것은 너무 많은데 정작 쓸 말은 하나도 없는 막막한 상태. 답답한 마음에 잠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일기를 쓰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아침에 링거액이 꽂혀있었던 곳이 살짝 저려왔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져 주사 바늘이 계속 얇아진다고 해도 사람의 피부에 아무런 흔적도 안 남기기는 힘든가 보다. 오른팔 팔꿈치 안쪽이 수많은 붉은 점들로 가득하다. 팔이 좀 더 아파져서 더 이상 아무것도 못 쓰게 되기 전에 빨리 일기를 마무리해야겠다. 눈길을 다시 책상 위로 옮겼다.

종이 위에는 내가 쓴 적이 없었던 글이 적혀있었다.

'나비는 갑옷을 입고 왼팔로 날개를 뜯어내지'

보이지 않는 손이 적고 간 문장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보고 싶지 않았던 손이 적고 간 문장이었다.

('독점' 항목에서 계속)


시장

1)교환이 일어나는 곳. 물리적인 공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경제학자들은 완전경쟁시장을 가장 이상적인 시장의 형태로 보며 이 경우 파레토 효율을 달성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2)

병실의 깨끗하다 못해 결벽적인 공기로부터 벗어나니 조금은 살 것 같다. 오른팔의 링거액 주사 바늘 자국들이 살짝 저렸다. 룸메이트로부터 전화.

"응. 괜찮아. 자주 그러는거 알잖아.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그래, 그래. 너무 늦지는 말고. 그럼 잘 들어와."

조금 우울해졌다. 나도 애인이 있으면 저렇게 밝게 살 수 있을까? 무거운 발길을 계속 옮겼다. 오늘은 집에 들어가기 전 먹거리나 조금 사서 들어가야겠다. 길을 가다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조금 큰 가게로 들어섰다. 이런 때에는 과일을 먹어야 한다.

"아니, 사과가 왜 이렇게 비싸요?"

"제철도 아닌데 어떻게 싸게 나와. 거기다가 뉴스 봤지? 요새는 전염병 때문에 먹을만한 사과는 눈꼽만큼도 없어요. 귤은 어때 귤. 한창 제철이라 양도 많고 값도 싼데."

"...그러면 귤 이천 원 어치 주세요."

('보이지 않는 손' 항목에서 계속)


인적 자본

1)각 근로자에 내재된 기술 및 지식 등을 통칭하는 것으로 교육 등으로 축적이 가능하다. 내생적 성장이론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경제성장요인 중 하나이며 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급속한 성장의 원인을 인적 자본의 축적에서 찾기도 한다.

2)

교실에 들어선다. 교재를 펼친다. 칠판을 본다. 노트에 옮긴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는다.

성장 회계, 기술 발전, 자본 축적, 노동 투입, 인적 자본.

그래, 나는 지금 인적 자본을 축적하는 중이다.

수업이 끝나고 또 다른 과제가 주어졌다.

이 또한 인적 자본을 축적하는 일이리라.

('가격' 항목에서 계속)


임금

1)생산요소시장에서 가계가 제공하는 노동력에 대해 기업이 지불하는 금액.

2)

"이미 네가 달라는 대로 임금을 주고 있잖아!"

'겨우 그 정도가 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한다는 거지?'

간담이 서늘해졌다.

('노동력' 항목에서 계속)


재정 정책

1)정부가 그 해 돈을 어떻게 지출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 정부가 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이다. 케인즈는 불황에는 정부가 확장적인 재정정책을 펼쳐 더 많은 정부지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 해법을 채택하고 있다. 08-09년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통화정책을 쓸 수 없었던 일부 유로존 국가에서 과다한 재정정책을 펼쳐 국가부채가 과도하게 누적되었고 결국 유로존 위기로 이어졌다.

2)

지갑을 열어보았다. 천 원 지폐 두 장이 보인다. 혹시나 해서 온 지갑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백 원 동전 하나만 나올 뿐이다. 오백 원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오늘의 재정 정책도 긴축 재정이다. 그냥 밥만 먹고 바로 집에 가야겠다.

('민영화' 항목에서 계속)


정부 개입

1)완전경쟁시장에서 벗어난 왜곡된 시장을 바로잡기 위해서 정부가 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 규제를 이용하거나 국책사업을 벌여 직접 자금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케인즈 이론에서는 불황일 때 재정 정책을 통한 정부 개입을 중요시한다.

2)

교실로 가던 도중 게시판에 붙은 한 자보가 눈길을 끌었다.

'학교본부는 더 이상 신성한 상아탑을 저잣거리로 만들지 말라'

훑어보니 대략 학생을 돈주머니로만 보는 외부업체를 규제해야 한다는 것과 만성 적자에 시달리는 생활협동조합에 더 많은 지원금을 주어야 한다 두 가지로 요약되는 것 같았다. 어차피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그들만의 리그일 뿐.

('인적 자본' 항목에서 계속)


GDP

1)Gross Domestic Product. 국내총생산으로 번역되며 한 국가 내에서 생산한 모든 최종재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화폐단위로 계산하며 생산된 물건은 모두 소비되기 때문에 소비된 최종재의 값을 합치는 것으로도 계산할 수 있다. 또한 생산하면서 번 돈은 각 경제 주체에게 분배되므로 이 분배되는 금액을 이용해서 계산하기도 한다.

2)

"이번 달 수입이 없어서 그래. 뉴스에서 올해 GDP 떨어져서 난리 났다 하잖니."

"네..."

다 과도한 욕심이란 것을 알면서도 서운한 감정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파레토 효율' 항목에서 계속)


처분가능소득

1)가계에서 소비에 사용할 수 있는 금액. 소득에서 세금을 제한 값이다. 일반적으로 전부 소비에 사용하지는 않고 일부는 미래의 소비를 위해 저축한다. 케인즈 이론에서는 처분가능소득에서 저축하는 비율을 1에서 뺀 값을 한계소비성향(marginal propensity to consume)이라 부르며, 이 값이 1보다 작기 때문에 균형재정을 하더라도 정부 지출을 늘이면 국내총생산은 상승하게 된다.

2)

셔틀에서 내리니 깡통 하나를 두고 구걸하는 남자가 보였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400원. 씁쓸하다. 쓸 수 있는 돈이 이것뿐이라니.

동전 네 개가 깡통을 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내 마음도 저렇게 경쾌하면 좋으련만.

('루카스' 항목에서 계속)


케인즈

1)John Maynard Keynes. 1930년대에 『일반 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집필하여 불황은 유효수요가 공급을 충당하지 못하여 생기는 일이며 이 때 정부가 직접 시장에 개입하는 확장적 재정 정책을 집행해 유효수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아직 많은 정부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2)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길 건너편에 휘날리는 현수막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는 거대국제자본은 모두 자폭하라!'

얼마 전 과도한 국가부채로 구제금융을 신청했었지. 모든 케인지안은 공직에서 쫓아내고 다시는 얼씬대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소주만 연거푸 들이키던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요즘은 취직한 곳에 적응 잘 했으려나. 내심 졸업한 애들이 부러워졌다.

셔틀버스가 현수막을 가리며 멈추었다.

('정부 개입' 항목에서 계속)


탄력성

1)수요량을 결정하는 여러 요인에 변화가 있을 때 수요량이 얼마나 민감하게 변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 어느 재화의 가격탄력성이 1보다 크면 탄력적이라고 하고 가격이 내릴수록 가격과 소비량의 곱은 증가한다. 1보다 작은 경우에는 비탄력적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에는 역으로 가격을 올릴수록 가격과 소비량의 곱이 증가한다. 담배는 비탄력적 재화로 여겨지고 있다.

2)

왼손에 얹힌 만년필이 경쾌하게 움직인다. 한 장 한 장 종이는 글씨로 뒤덮이고 그 종이들을 수용할 자리가 부족했던 책상은 덮여가기 시작한다. 탄력 있게 휘어지는 만년필 촉이 마치 종이와 마찰하며 내는 사각이는 소리에 탭댄스를 추는 듯 했다.

왼손이 쓴 글은 정교하게 짜여진 에세이였다. 그것도 해당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교수가 쓴 글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정신없이 글을 읽다가 왼손이 옆구리를 찌르고 나서야 일기장에 남겨진 글을 보았다.

'이런 읽을 만한 글도 주고 온갖 잡다한 일을 해주는 왼손한테 보상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어?'

('임금' 항목에서 계속)


통화 정책

1)정부가 시장에 도는 화폐의 양을 조절하는 것. 재정 정책과 함께 정부가 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이다. 경제 전체의 통화량이 인플레이션 및 이자율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한 예로 필립스 곡선(Phillips curve)을 이용해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을 조절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루카스의 합리적기대이론의 등장으로 그 가능성이 의심되었다. 케인즈는 통화량을 늘여 이자율을 낮추고 이것이 확대된 기업투자로 이어지는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그 결과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통화 정책보다는 재정 정책을 선호하였다.

2)

"엄마, 저 돈 좀 주세요"

"그런 거 없다"

"아 제발요. 밥 먹을 돈도 없어요."

"... 오천원."

"이거 교통비 하면 밥값도 안 나와요."

"셔틀 타면 되잖니?"

어머니는 항상 타이트한 통화 정책을 추구하신다.

('GDP' 항목에서 계속)


파레토 효율

1)Pareto efficiency. 한 주체의 효용을 늘이기 위해서는 다른 주체의 효용을 줄여야만 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이 경우 전체의 효용이 최대가 된다. 완전경쟁시장에서는 파레토 효율이 달성된다.

2)

오천 원. 집 앞에서 지하철까지 버스를 타고 환승하면 학교 앞 역에서 내릴 때 추가운임이 발생한다. 지하철까지 걸어가지 않는다면 내가 밥을 굶거나 어머니한테 용돈을 더 받아야 한다. 결국 잠이 덜 깬 몸을 이끌고 지하철까지 걸어간다.

('케인즈' 항목에서 계속)


효용

1)소비자가 무언가를 소비하면서 얻는 만족.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사람인 경제인은 이 효용을 극대화하려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소비하는 양이 많을수록 한 단위의 소비를 늘일 때 증가하는 효용의 양은 감소하며 이를 한계효용체감이라 부른다. 사람들 사이에서 거래가 일어나면 한계효용체감을 피할 수 있어 전체 효용은 증가하는 결과를 얻는다.

2)

"이런다고 너한테 좋을 것 하나 없다고! 이게 너한테 무슨 효용이 있어!"

필사적으로 오른손을 움직였다.

"내가 없으면 너도 없어! 이건 전혀 합리적('경제인' 항목 참조)이지 못한 일이라고!"

더 이상 목소리가 나지 않는다. 눈이 감겨온다.

('가정' 항목에서 계속)




참고자료

이준구, 이창용, 『경제학 들어가기』, 2판, 법문사, 2009




맺는말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 중에는 수능에 나온 자기 시에 대한 문제를 다 틀린 최승호 시인의 인터뷰 기사도 있다. 한국의 언어교육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뒤집어서 보면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만들어간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조물주의 손을 떠난 인간의 자유의지로 조물주의 속을 자주 썩이지 않던가.(조물주가 있는가라는 신학적인 질문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그래서 난 내 작품의 독립적인 삶을 제한하지 않기로 했다. 구체적인 해설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래도 글을 무책임하게 던져놓고 알아서 읽으라고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최소한의 설명은 하려고 한다.


점성술이나 사주팔자와 같이 인간이 태어난 시각을 기준으로 그 인간의 특성을 분류하는 일은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사람이 쓴 글은 조금 다르다. 사람이 쓴 글은 그 글이 태어난 시각의 분위기를 담는다. 이런 말을 쓰는 이유는 이 글이 우울한 분위기를 담은 이유가 작가가 우울한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작가가 우울한 시각에 글을 썼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기 위해서다. 글을 다 친 것은 감기기운에 부은 목을 축이던 새벽 5시 경이었는데, 모두들 알다시피 새벽 3시는 인간이 가장 감정적인 시각이다. 원래 이 글의 모티브가 되는 소설이 괴기소설인데다가 태어난 시각 또한 감정이 휘몰아치는 시간이었으니 우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우울한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점 다시 한 번 밝힌다.


다만 약간 마음에 걸리는 것은 과제가 ‘현대경제의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내가 한 것은 ‘현대경제’를 표현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맺는말에서는 조금은 더 현대경제의 이해 수업을 표현한 것에 알맞은 개인적인 바람을 써보려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헛소리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헛소리를 할까 두려워 침묵하려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언을 하기 마련이며 실수는 인간적(errare humanum est)이다. 미래의 산업 또한 헛소리 위주로 재편될 것이다. 기계가 발달하면 사람의 노동은 육체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혹은 기계적인 것에서 인간적인 것으로 옮겨갈 것이고, 가장 인간다운 행위는 문학과 예술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지어낸 이야기 또한 실체 없는 헛소리 아니던가. 결국 우리 모두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먹고 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사는 동안 이 미래가 실현될 가능성은 없어 보이니 이 선언 또한 헛소리인 것 같긴 하지만.


‘헛소리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는 나 자신에 대한 주문이기도 하다. 나서서 말을 하고 싶지 않은 이면에는 헛소리를 할까 두려운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언을 하더라도 다 같이 한 번 크게 웃고 잊어버리면 되는데 왜 그러지 못하는가에 대한 반성이다.


좀 더 자유로운 헛소리를 위하여. 헛소리가 좀 더 많은 사회가 좀 더 유쾌한 사회 아니겠는가. 한 번 뿐인 인생, 즐겁게 살다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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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9. 09:00 Writer/Short

忘生舞

옛날, 아주 먼 옛날, 어느 마을에 착한 농부 하나가 살았어요. 농부의 아내는 일찍이 하늘로 떠나버렸지만 농부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답니다. 그 딸은 고운 마음씨와 아름다운 용모로 소문이 자자했어요.

 

시간이 흘러 딸이 결혼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 때만 노리던 수많은 청년들이 백리 밖에서도 모여들었지만, 그 누구도 농부의 눈에는 부족해 보이기만 했지요. 결국 그 청년들은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원래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시무시한 가뭄이 찾아왔어요. 논은 자라 등껍질처럼 갈라졌고 산의 나무들조차 넘치는 햇님의 축복으로 누렇게 시들어 버렸답니다. 가뭄은 끝나고 가을이 왔지만, 논에는 벼가 남아있지 않았어요. 농부는 겨울나기가 막막해 논 언저리에 걸터 앉아 한숨만 쉬곤 했답니다.

 

그렇게 하늘을 원망하던 농부에게 한 부자가 찾아왔어요. 부자는 농부에게 쌀을 빌려줄테니 내년에 동등한 양으로 갚으라고 말했어요. 농부는 망설였답니다. 그 부자에게는 나쁜 소문만 가득했거든요. 하지만 농부에게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답니다. 쌀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은 부자밖에 없었거든요.


그리고 다음 해가 되었습니다. 하늘은 작년에 지독했던 가뭄을 가져다 준 것이 미안했었는지 이번에는 엄청난 풍년을 이끌고 돌아왔어요. 농부는 신이 났답니다. 부자에게 빌린 쌀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신이 나 부자에게 갔던 농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어요. 부자는 작년에 빌린 쌀이 있었기에 올해 수확을 할 수 있었으니 올해 수확한 쌀을 전부 가져오라고 했어요.

 

농부는 부자의 마당 한 가운데에 멍하니 무너져 내려 있었습니다. 부자는 농부를 잠시 바라보았어요. 그러더니 부자는 마음을 바꾸었는지 이런 제안을 했답니다. 빚을 반으로 줄여줄테니 딸과 결혼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지요. 부자는 이제 땅마져도 꺼지는 것 같았지요.

 

절망한 농부는 집으로 돌아왔어요. 마음씨 고운 딸은 어두운 얼굴의 아버지를 그냥 둘 수 없었답니다. 딸은 농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요. 계속되는 질문에 농부는 부자가 한 말을 전해주곤 한숨만 쉬었어요. 올해 걷은 쌀을 모두 부자에게 주면 겨울동안 먹을 것이 없었으니까요.


딸은 잠시 생각하더니 단호히 말했어요. 결혼을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딸을 농부는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답니다. 결국 결혼식을 하는 날이 되어 딸은 시집을 가 버렸고, 농부는 매일 매일을 눈물만 흘리며 보냈답니다. 이웃이 매일 와서 밥을 해 주며 같이 먹어주지 않았더라면 농부는 굶어 죽고 말았을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농부 집 마당 한 가운데에 나무 한 그루가 자랐어요. 농부는 눈물을 마시며 자라난 나무를 보며 딸을 닮은 목상 하나를 만들기로 마음먹었어요. 아직 농부는 딸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었지요.


시간이 흘렀어요. 부자는 딸 말고 다른 여자에게 더 눈길이 가기 시작하자 딸을 쫓아버렸답니다. 갈 곳이 없어진 딸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왔어요. 묘하게 가슴뛰게 만드는 농부의 집 마당을 지나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선 딸은 그대로 굳어버렸어요. 거기에는 자신의 모습을 꼭 닮은 목상이 있었고 그 발치에는 끌을 쥐고 쓰러진 농부가 있었거든요. 딸은 급히 농부를 끌어안았지만 아직 따스한 농부의 몸은 숨이 없었어요. 딸은 울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도록 울고 난 딸은 목상에 입을 맞추곤 농부처럼 쓰러져 버렸지요.


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밥을 해 주러 온 이웃의 눈에는 차갑게 식은 농부가 보였어요. 그리고 농부가 만들던 목상도 보았고요. 목상은 아름다웠습니다.


이웃은 농부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는 목상을 가지고 장터에 갔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목상을 누군가는 살 테고, 오랜만에 집에서 쌀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확실히 목상을 들고 다닐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한번씩 돌아 볼 정도로 목상은 아름다웠어요. 이웃은 장터 한 가운데에 목상을 내려놓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목상을 두번 두드렸답니다. 장터의 모든 사람들이 돌아보았어요.


목상은 갈라졌어요. 그러더니 갈라진 표면을 따라 나무가 뱀의 허물처럼 허물어 내렸어요. 허물어 내리고 난 목상은 아름다웠어요. 그 찬란한 색에 모든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했답니다.


목상은 눈을 떴어요. 그러고는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어요. 그리고 나서 목상은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아름다운 춤이었어요. 너무도 아름다운 춤이었기에 사람들은 숨 쉬는 것을 잊어버렸지요. 사람들만 홀린 것이 아니었어요. 지나가던 동물들도 그 춤에 홀려 버렸답니다. 심장들은 뛰는 것을 잊어버렸어요. 뿌리들은 마시는 것을 잊어버렸지요. 모든 것이 고요했습니다.


춤은 부자의 집까지 계속되었어요. 춤이 지나간 자리에는 정적만 남았습니다. 언젠가는 그 정적들도 잊혀지겠지요.


그리고 춤은 영원히 이승을 헤메고 있답니다.




'아름다움이 살인무기가 될 수는 없을까'라는 망상에서 탄생한 설화(?). 미인계와 같이 아름다움이 파탄을 이끄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로 살인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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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30. 23:46 Writer/Short

바벨의 반역가

하늘을 오르려던 사람들이 흩어지고 오년의 세월이 흘렀다. 흔적만 남은 탑 앞에는 한 남자의 터전이 있는데, 이 남자의 눈은 길을 지나간 그림자의 흔적을 알아볼 정도로 날카로왔다.


어느 날 아라지의 한 연금술사가 남자를 찾아왔다. 이 연금술사는 작은 에메랄드 판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뱀들이 줄을 이루어 꼬리를 물며 춤추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연금술사는 자신의 목숨만큼 귀하게 여기는 에메랄드 판을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남자는 에메랄드 판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그것이 아비두 사람이 새긴 그림이라는 것을 알았다.


연금술사는 남자의 거처에 해가 다섯번 질 동안 머무르며 같이 가져간 금으로 된 판 위에 그림을 그렸다. 연금술사는 작은 금판을 들고 원래 살던 땅으로 돌아갔다.


연금술사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간 지 오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날 자이번의 한 뱃사람이 남자를 찾아왔다. 이 뱃사람은 작은 금판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자그마한 사람과 새들의 그림이 가득히 새겨져 있었다. 뱃사람은 자신의 목숨만큼 귀하게 여기는 금판을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남자는 금판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그것이 아라지 사람이 새긴 그림이라는 것을 알았다.


뱃사람은 남자의 거처에 안식일이 다섯번 지날 동안 머무르며 같이 가져간 은으로 된 판 위에 그림을 그렸다. 뱃사람은 방패만한 은판을 들고 원래 살던 땅으로 돌아갔다.


뱃사람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간 지 오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날 기탈저의 한 사냥꾼이 남자를 찾아왔다. 이 사냥꾼은 방패만한 은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부러진 막대기들이 가득히 새겨져 있었다. 사냥꾼은 자신의 목숨만큼 귀하게 여기는 은판을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남자는 은판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그것이 자이번 사람이 새긴 그림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냥꾼은 남자의 거처에 달이 다섯번 날개짓을 할 동안 머무르며 같이 가져간 동으로 된 판 위에 그림을 그렸다. 사냥꾼은 손가락만큼의 동판을 들고 원래 살던 땅으로 돌아갔다.


사냥꾼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간 지 오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날 아비두의 한 현자가 남자를 찾아왔다. 이 현자는 손가락만큼의 동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동판들 위에는 자그마한 원과 세모들이 가득히 새겨져 있었다. 현자는 자신의 목숨만큼 귀하게 여기는 동판들을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남자는 동판들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그것이 기탈저 사람이 새긴 그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현자는 남자의 거처에 해가 다섯번 돌아올 동안 머무르며 돌로 된 판 위에 그림을 그렸다. 현자는 다섯사람의 손가락만큼의 돌판을 들고 원래 살던 땅으로 돌아갔다.


현자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자 남자는 한숨을 쉬고는 흔적만 남은 탑을 올랐다. 남자의 한숨은 폭풍이 되어 탑의 남은 흔적을 지워버렸고, 그 이후 그 남자를 본 사람이 없었다.




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년이란 시간을 잘만 써 놓고 이상한 시간 단위 고안해 내느라 고생했다.


자이번의 뱃사람과 기탈저의 사냥꾼이 익숙하다면 기분탓일꺼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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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수학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기하학과 대수학이 하나로 합쳐지는 그 위대한 발견이 겨우 부록 따위로 여겨지는 그 유명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cogito ergo sum". 아무리 고찰해 보아도 고찰하고 있는 어떤 무언가가 존재해야만 하는데, 그 존재가 내가 아니면 무엇이겠냐는 말이다.

물론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는 이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지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하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무언가는 이 감각에 대해 회의하고 있고 또 지금 이 잡다한 생각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그 무언가가 "나"라고 확언하는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그 무언가를 나라고 확언하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등골을 타고 뒷골을 강타했다.

"으앗 차!"

얼떨결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하고 있다. 이거 또 독서실에서 소리지르는 어떤 무개념이 또 나타났다며 성토하는 게시글이 학교 커뮤니티를 도배하겠군.

"쉬잇!"

참 잘도 조용히 시킨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크게 소리지를 줄은 몰랐나 보다. 얼굴에 당당히 당황한 표정을 드러내다니. 목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말했다.

"네가 그렇게 갑자기 차가운 캔을 대지만 않았어도 조용했을 거거든?"

"눈 앞에서 손을 몇번이나 흔들었는데 정신을 못 차려? 도대체 뭣에 그리 넋이 팔린거야?"

"숙제"

책상 위에는 깨끗한 미적분학 책과 공식이 이리저리 흩어진 A4용지가 널부러져 있었다. 벡터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에 써먹는 물건인지 모르겠다.

"이거 기한 지난건데?"

맙소사.

"그보다 빨리 짐 챙겨. 다음 수업 지각하겠다."

"지각하지 뭐."

"지각하면 F인데?"

응? 지각하면 F라니, 그 수업은 화요일에 있는데? 그리고 오늘은 월요일...잠깐. 황급히 손목시계를 보았다. 요일을 가리키는 바늘은 무심히 TUE라는 글자를 향해 서 있었다.

"으악!"

또 모든 독서실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오늘 밤 게시판 다운되겠군.



"42번 또 지각인가? 옥세화 지각..."

"아직 아닙니다!"

문을 박차고 들어서며 헐떡거리는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외쳤다. 시계를 보니 2시 29분. 아직 수업 시작 1분 전.

"...은 아니군. 자리에 앉기 전 30분이 되지 않는다면."

시계의 숫자는 2:29:54. 꽤 많은 계단을 뛰어올라왔던 다리는 내 자리까지 다시 뛰어야 했다. 독서실에서 깨워주는 친절함을 보였던 재현이는 먼저 가겠다면서 같이 가자는 내 절규를 무시하더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 태평히 옆자리에 앉아있다. 병주고 약주고도 아니고 야속한 녀석.

"자, 수업 시작. 294쪽. 3부 열역학이다. 설마 1권 가져온 사람은 없겠지?"

설마가 사람잡는다. 급하다고 집히는대로 들고 뛰어왔더니 2권이 아닌 1권을 가져왔다. 옆자리에선 당연하다는 듯 2권을 꺼내며 날 한심히 쳐다본다. 네가 날 그렇게 놀래키지만 않았어도 제대로 들고 왔을 거거든? 임시방편으로 맞는 책을 가져온 척 1권을 펼친다.

"열역학은 원래 물리와는 전혀 다른 분과에서 시작한 학문이다. 현대 학문 체계에서 초기의 열역학과 가장 가까운 학문은 화학이다. 옛날 사람들은 열의 원인을 칼로릭, 번역하자면 열소,의 운동으로 여겼다는 사실이 이를 잘 드러낸다. 열역학이 물리에 편입되게 된 배경에는 ..."

너무 뛰었더니 졸리다.

"... 물질의 합성비가 ... 원자설이 ... "

눈이 너무 피곤하다. 눈만 잠깐 감자. 잠은 안 잘거다.



깜짝이야. 흰 바탕 위에 검은 글씨가 마구 흩날린다.

'분자 하나 하나의 위치는 완전한 우연을 이룬다. 분자는 상자의 모퉁이에 있을 수도 있고, 한 가운데에 있을 수도 있으며, 벽의 정 중앙에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분자가 한 위치에 모여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개별적으로는 우연에 속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필연인 것이다."'

전공 책을 읽는 기분이다. 내가 이런 책을 읽을 리가 없으니 현실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자각몽인가?

 '갑자기 예전에 읽었던 어떤 작가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그 인터뷰어가 이야기를 쓸 때 어디까지 이야기를 구상해 놓느냐고 묻자 인터뷰이는 이렇게 대답했었다.「커다란 흐름만 잡아 놓고 나머지는 손 가는대로 씁니다. 이야기 자체는 정해져 있지만, 그 순간 순간을 표현하는 단어들은 순전히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적지요. 이전에 실수로 잃어버렸던 원고를 다시 쓴 적이 있는데, 나중에 초고를 찾아서 비교해보니 줄거리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글이 되어있더군요.」 이야기는 필연이지만, 단어는 우연이라. 전체는 필연이지만, 개별은 우연이라.'

그 작가의 인터뷰라는 것, 읽어 본 적이 있다. 뉴먼 로스라는 작가일 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갑자기 날 바라보면서 질문을 던진다. 나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던 나는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거기 멍때리고 있는 자네. 그래서 도입 된 물리량이 무엇이라고?"

다행히 별로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엔트..'

옆구리를 찌르는 손가락에 놀라 얼떨결에 일어서고 말았다. 꿈꾸고 있는데 찌르는 건 뭐람.

"일어서서 대답할 필요까진 없는데 그쪽이 편하다면 편한대로 하도록."

응? 찔린 방향을 쳐다보았더니 재현이가 입을 벙긋거리고 있다. 시간은 가고 있고, 무슨 질문인지는 모르겠고, 벙긋거리는 입을 보니 엔 무엇인지는 모르겠고. 일단은 한 글자라도 시작해 보자.

"엔...트.."

"...로피. 좋아. 졸아도 수업은 듣고 있네. 수업을 계속 진행하지."

얼떨결에 맞추었다.



수업이 끝났다. 다행히 다섯번째 지각은 면해서 F는 피했다만, 다음 번에도 늦지 않으려나 모르겠다. 천천히 독서실로 내려오는데 재현이가 뒤에서 따라잡았다.

"잘만 자던데 대답은 어떻게 또 한거야?"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조금 뜸을 들이고 대답해주었다.

"그냥, 그렇게 대답하면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아리송한 표정의 재현이를 남겨두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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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10. 7. 24. 12:33 Writer/Short

이야기꾼

간이 플라스틱 의자가 불편해질 즈음이었다.

"내가 어디까지 말했었더라?"

그는 태양을 등진 채 잔 두개가 놓여있는 네모난 플라스틱 쟁반을 들고 있었다. 나는 시린 햇살에 손그늘로 눈을 쉬게하며 대꾸했다.

"'사람이 반영구적으로 살게 된다면'까지 말하고 음료를 받으러 갔지"

두 잔이 탁자 위에 놓였다. 그를 위한 얼린 잔에 담은 시원한 흑맥주, 그리고 나를 위한 따뜻한 화이트 카페모카. 그는 살얼음이 떠 있는 흑맥주를 들이키고는 향을 음미했다. 이 녀석은 소재가 떨어졌다니까 준다고 해놓고서는 묻어갈 심산인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을 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첫 부분을 놓쳐버렸지만.

"... 통합이 이루어지겠지. 지금 미디어 환경이 돌아가는 것을 생각해보자고. 갈수록 발언권이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고, 길이는 짧아지는데다가, 대화같은 모습을 띄기 시작한단 말이야."

"어, 잠깐만. 첫 부분 못 들었는데 다시좀.."

그는 말을 멈추더니 잠깐 한숨을 쉬었다.

"넌 어째 바뀐게 하나도 없냐. 정신 놓고 있다가 못 듣는것도 그렇고. 먼 미래에는 인류의 모든 정신이 통일된 하나의 유기체가 될 거라고."

"근거는?"

"그러니까 설명하고 있잖아. 미디어는 계속 '만인의 대화'로 수렴하고 있어. 모든 미디어의 원형인 기록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지. 원전은 대화로 쓰인 게 많다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탁자 위에 놓인 맥주잔으로 손을 뻗었다. 포도송이까지 있는 포도넝쿨 모양으로 깎아낸 나무를 기둥으로 세운 고급으로 보이는 유리탁자이다. 문득 이 카페 주인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진다. 플라스틱 의자에 이런 탁자를 조합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물론 맥주와 커피를 같이 판다는 것부터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언젠가 인간이 기계와 바로 접속하는 시대가 올꺼야. 「매트릭스」에서처럼 정신이 기계로 바로 들어가는거지. 물론 영화에서처럼 선을 사용하는 구식은 아닐테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오래된 영화를 끌어오는 너는 구식이지."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듣기나 해. 어쨌든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면 그 사람들의 생각을 연결하는 연결망은 어떤 모습이겠냐는거지."

"하이브마인드(Hivemind)라는 거냐?"

"그거야. 하이브마인드. 물론 개개인은 처음에는 나는 연결망에 접속된 다른 상대와 대화를 한다는 기분으로 살아가겠지. 하지만 그 후손들은 다를꺼야. 태어날 때 부터 그 거대한 연결망에 접속된 상태로 살아갈 거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이것이 나의 생각인지 연결망에서 내려온 생각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겠지. 점차 연결망과 융합하는거야."

커피를 들었다. 이 허무맹랑한 소리를 중화해줄 포도당이 필요하다. 달달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니 머리가 좀 덜 아파졌다. 그 와중에도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죽은 사람들은 잊혀진 기억들이 될 것이고, 태어난 사람들은 엉뚱한 발상들이 되겠지. 마치 바다의 물고기 떼와도 같아. 하나 하나 살펴본다면 이쪽 무리에 있다가 저쪽 무리에 있다가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각 무리를 살펴본다면 무리 자체의 모습은 변하지 않지. 미래에 우리의 뇌가 연결되어 있을 연결망도 비슷한 모습일꺼야."

"그런데 사람이 반영구적으로 사는 건 무슨 상관이야?"

그는 잠시 목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아, 그건 이제 중요해질꺼야."

그러면 처음에 다른 이야기로 시작할 것이지. 그가 주문한 것을 받으러 간 동안 떠올렸던 소설 첫머리가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일단 미래에 통합된 정신이 등장한다는 것은 합의를 보았으니까, 사람이 거의 무한히 살아가게 될 때를 생각해보자고. 일단 내 결론은 사람이 태어나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거야."

"왜냐하면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 내가 하려던 말은 어떻게 안거야?"

"내가 해줬던 이야기잖아. 대체로 낳는 자손의 수는 수명과 반비례하는데, 그건 동족간의 경쟁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현상이라고. 그렇다면 무한히 살아가는 생명체에게 생식은 먼 과거의 일이 되겠지."

한 삼사년 전에 말해준 공상인데 기억하고 있다니 살짝 놀랐다. 하긴, 그는 어릴 적부터 비상한 기억력으로 벼락치기 하나는 기똥차게 잘 했었지.

"어쨌든, 사람이 태어나지 않으면 미래의 인류 통합 사념체에게 재미있는 생각거리는 사라지게 되겠지. 특이한 발상의 진원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통합된 사념은 분할할꺼야."

그는 이 한 마디만 하고 다시 맥주잔에 손을 대었다. 아니 이게 뭔소리야? 마음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듯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혼자서 벽에다 대고 하는 이야기는 재미없잖아."

"이야기가 거기에서 왜 나와?"

"먼 과거부터 밤의 지루함을 달래주던 것이 이야기니까. 결국 새로운 자극이 없으니까 새로운 조합인 이야기를 지루함을 달래줄 약으로 선택하겠지. 하지만 혼자서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재미없어. 그러니까 그 통합사념은 나뉘어져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할 거야."

"아니 그래도.."

말 끝을 흐린건 여우비다. 파라솔이 없는 탁자여서 대화를 마치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에도 다른 말을 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밖에서 나누던 대화로 심란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오면서 들은 대답은 기억난다.

"아, 그런데 과연 태어나면서부터 그 연결망에 접속될 가능성이 있을까? 아직 덜 자란 아이에게 나타나는 폭력성이 얼마나 잔인한지는 알잖아?"

"초등학생이 적분을 배우는 시대인데 그런 부모의 극성이 사라질 것 같아? 그것보다도 난 성선설을 믿어서. 더군다나 그렇게 큰 집단에 자정능력은 당연히 존재하겠지."

여튼, 나는 지금 내 방의 책상 앞에 앉아있다. 모레까지 보내기로 한 단편 원고를 오늘까지 쓰고 내일은 퇴고해야 한다. 딱히 다른 소재를 찾을 시간도 없어서 그가 주었던 소재를 그대로 쓰기로 결정했다. 인류의 미래가 다중인격장애라니, 참 인류의 운명도 기구하다.

그래서 그게 이야기의 끝이야? 나태(懶怠)가 묻는다. 다언(多言)이 대답한다. 끝이야. 잠자코 있던 탐욕(貪慾)이 고개를 든다. 뭐야. 너답지 않게 이야기가 너무 단순한 것 같은데? 그런가? 내 나름대로는 다채로운 이야기였다고 생각하는데. 너라면 무언가 더 끄집어낼 줄 알았지. 탐욕의 말이 끝나자 나태가 다시 말을 꺼낸다. 교만(驕慢), 너가 한번 이야기해봐라. 다언이 거든다. 그래, 너 이야기 하나는 멋지게 하잖아. 잠깐의 침묵. 그리고 교만이 입을 연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최고의 이야기를 선사해주지. 교만은 점차 비대해지더니 모두를 집어삼킨다. 낮을 덮치는 어둠과도 같이.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둠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래, 이제 시작인거지. 한번 숨을 내쉬고, 연필을 다시 잡는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빛이 있으라."

말은 힘이요, 언어는 권력이었다. 자신으로부터 자라난 세계가 모태를 삼키리라는 것을 모르는 듯 말은 세계의 이것저것을 빚어내었다. 빛을 모아 낮을 만들자 어둠은 모여 밤이 되었고, 부스러기를 긁어모아 땅을 만들자 남은 먼지는 모여 바다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아직 말에게 힘이 있었던 시대의 일이다.

여기까지 글을 쓴 후, 잠시 연필을 내려놓았다. 이 말은 써야 할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고는, 종이를 뒤집고 연필을 다시 집어들어 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간이 플라스틱 의자가 불편해질 즈음이었다.



본격 수미상관 소설. 문법에 어긋나는 문장이 많은데, 너그러이 봐주세요.

소설 속 소설의 첫 부분은 번역투와 비문이 난립하네요. 그래도 분위기를 살리는 것 같아서 그대로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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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10. 4. 15. 01:38 Writer/Short

그 날의 기억

나는 그날, 그렇게, 봄날의 화사한 흑빛이 가득한 가로수 길 위에 서 있었다. 뚜껑을 닫다 만 향수병의 진한 향기처럼 우울은 주변을 물들여갔고, 우주는 내 피부를 경계로 서로 독립된 삶을 사는 것만 같았다. 길가의 작은 관목에서는 짙은 녹색이 녹색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겠다는 기세로 돋아나 있었고, 길 옆 풀밭 위에서는 들꽃들이 화려함을 겨루는 대회를 여는데다가,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자신의 가벼운 운명을 맡긴 채 산산히 흩어지는 벚꽃으로 푸른 하늘이 넘실거렸지만, 그토록 색채에 인색한 풍경은 경험해 보았던 사람조차 함부로 입에 올리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작년만큼은 아니지만 살짝 우울하네요. 해석이 불가능한 실험 결과물이 문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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