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노벨 물리학상은 위상론적인 물질과 관련된 연구를 한 사울레스, 홀데인, 그리고 코스털리츠에게 돌아갔지요. 제 전공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주제인지라 그냥 넘어가려고 했었는데, 트위터에서 어쩌다가 개인 DM으로 해설을 부탁받아버려서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썰을 풀어봅니다. 그 말인즉, 노벨상 수상자들이 무엇을 했는지 설명하기보다는 노벨상 수상자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기 위해 필요한 사전지식들에 대해 설명해보겠다는 소리죠.


다음 주제를 주로 다룰 생각입니다.

1) 새로 발견된 상전이는 이전의 알려졌던 상전이와 어떻게 다른가

2) 실제로 이용하는 위상수학은 무엇에 대한 위상수학인가

3) 왜 위상론적 물질에서 경계면이 중요해지는가


그러면 시작해보죠.




위상수학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예시라고 한다면 도넛과 머그잔이겠지요. 거기에 질세라 노벨위원회에서 올해 수상자를 발표할 때 위상수학을 설명하면서 베이글과 프레츨을 예시로 들었습니다. 이 물체들이 어떻게 위상수학적으로 같고 다른지는 찰흙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부모님께 혼나본 경험이 있으시다면 이해할 수 있으시겠지요. 아쉽게도 위상론적 물질에서 필요한 위상수학적인 양은 천 숫자(Chern number)라는 값으로, 앞선 예시들과는 달리 쉽게 머리 속으로 그릴 수 있는 것들은 아닙니다.


위상수학에서는 우리가 머리 속으로 그릴 수 있는 평범한 도형들을 다양체(manifold)라는 개념을 이용해 정의합니다. 구체적인 정의는 논의를 괜히 쓸데없이 복잡하게 만들테니 필요없겠지요. 천 숫자는 접속(connection)이란 특별한 종류의 수학적인 물체를 다양체 위에 올려놓았을 때 그 접속에 대한 위상론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값입니다. 그러면 우선 접속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 위상수학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겠지요.


그다지 좋은 예는 아니지만[각주:1] 접속을 이해하는데 쓸 수 있는 장난감으로 굴렁쇠가 있습니다. 비록 저 자신은 굴렁쇠를 실제로 굴려본 적이 없고 교과서 사진으로나 봤을 뿐이지만 동전은 자주 굴려봤으니 자신감을 가져도 좋겠지요. 다시 굴렁쇠로 돌아와서, 어떤 위치에서 굴리기 시작한 굴렁쇠를 적당한 경로를 따라 원래 위치로 돌아오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만약 굴렁쇠의 각 점에 눈금이 매겨져 있었다면 굴리기 전의 굴렁쇠와 바닥이 맞닿은 점을 가리키는 눈금과 굴리고 같은 위치로 돌아왔을 때 굴렁쇠와 바닥이 맞닿은 점을 가리키는 눈금은 다르겠지요. 홀로노미(holonomy)나 모노드로미(monodromy)는 이 눈금이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잡아내기 위해 정의된 수학적인 물체입니다. 하지만 오늘 논의에서는 다루려던 내용이 아니므로 두 용어에 대해서는 이 정도에서 설명을 마치도록 하지요.


접속이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굴렁쇠를 굴린 경로 위의 각 점에 굴러가고 있는 굴렁쇠를 관찰하는 관찰자를 올려놓는 것이 좋습니다. 각 점에 앉아있는 관찰자는 굴렁쇠의 눈금 중 어떤 눈금이 바닥과 닿아있는지를 기록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한 점에 앉아있는 관찰자가 관찰한 눈금은 바로 옆에 앉은 관찰자가 관찰한 눈금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굴렁쇠는 미끄러지지 않고 굴렀을테니, 두 관찰자 사이의 거리만큼 굴렁쇠와 바닥이 닿은 눈금이 변했을테니까요. 이처럼 한 점에서 관찰한 무언가의 값을 바로 옆의 점으로 끌고가면 일반적으로는 그 값이 변합니다. 수학에서는 이런 정보를 담은 것을 접속이라고 부릅니다. 한 점에서의 정보를 바로 옆의 점으로 연결시켜 준다는 점에서 더없이 적절한 용어(접속은 영어로 connection이라 부릅니다)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한 점에서 바로 옆의 다른 점으로 움직이는 방법은 움직일 수 있는 방향만큼이나 다양하기 때문에 접속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에 대한 정보도 함께 담고 있어야 합니다. 방향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접속은 벡터장과 매우 비슷합니다.


약간은 의외의 사실일 수 있겠지만, 어떤 다양체에는 벡터장을 임의로 올려놓지 못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습니다. 가장 간단하고 머리 속으로 그려볼 수 있는 예시로는 털난 공 정리(hairy ball theorem)이 있습니다. '털난 공을 빗을 수 없다'란 표현으로 유명한 이 정리는 공의 표면(2차원 곡면이므로 $S^2$라 부릅니다) 위에 올려놓은 벡터장은 항상 0이 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크기가 0이 아닌 벡터장을 공에 납작하게 붙은 털에 빗댄 것이지요. 실제로 그런지 의심이 드는 분이라면 바람이 부는 지구 표면을 생각해 보시면 좋습니다. 과연 지구 표면의 모든 점에서 동시에 바람이 불 수 있을까요? 털난 공 정리에 따르면 지구의 적어도 한 점에서는 바람이 불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위의 정리는 위상수학적인 결과입니다. 털난 공이라고는 했지만 그것이 꼭 공일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공이 조금 찌그러져 있다거나 허리같은 길쭉한 부분이 있다거나 해서 벡터장이 0인 지점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천 숫자는 털난 공 정리와 비슷하게 다양체 위에 올려놓은 접속이 임의로 주어질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천 숫자를 계산하면 정수를 얻지만 이 정수가 정확히 무엇을 세는가에 대해서는 저도 좋은 설명이 없다는 점이 아쉽군요.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접속에 대해 계산한 천 숫자가 서로 차이가 난다면 하나의 접속에 작은 변화를 누적시켜서 다른 접속으로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천 숫자가 위상론적인 불변량이라는 것입니다.




천 숫자에 대해 이해하려면 우선 접속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접속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잘 만들어진 굴렁쇠라면 모든 점이 서로 엇비슷하게 생겼을 겁니다. 굴렁쇠에 눈금을 새겼더라도 어떤 눈금을 1로 두고 그 눈금부터 번호를 매길 것인가에 대한 자유가 남아있는 것이지요. 때문에 각 점에 앉아있는 관찰자가 각자 굴렁쇠를 하나씩 들고 '나는 이 눈금을 1로 세겠다'고 주장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눈금을 1로 세는 점을 기준점이라고 부르도록 하죠. 각 점에 앉아있는 관찰자가 임의로 기준점을 재조정하더라도 실제로 굴렁쇠가 굴러가는 것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기준점을 재조정하는 것을 게이지 변환(gauge transform)이라 부르고, 기준점 재조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게이지 대칭(gauge symmetry)이라 부릅니다. 입자물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게이지 보존(gauge boson)이란 단어를 들어보셨을텐데, 그 단어에서 말하는 게이지와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게이지는 같은 수학적인 물체입니다. 단지 그 수학적인 물체를 무엇을 나타내기 위해 쓰고 있느냐의 차이 정도만 있을 뿐이지요.


접속은 언제까지나 '한 점에서 읽어낸 값을 바로 옆의 점으로 옮기는 방법'을 결정해주기 때문에 값을 읽어낸 점에서 관찰자가 선택한 기준점과 값이 옮겨질 점에서 관찰자가 선택한 기준점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인지 기준점을 재조정하는 과정인 게이지 변환을 할 경우 각 점이 얼마나 다르게 기준점을 재조정했는지의 정보까지 들어가야 해서 보다 복잡하게 변화하지요. 다르게 말하자면 '각 점에서의 기준점 선택'에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진짜 물리적인 의미를 갖는 대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이지 변환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들, 즉 게이지 불변(gauge invariant)인 것만이 실제 물리적인 의미를 갖는 대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접속으로부터 충분히 물리적인 의미를 갖는 대상을 얻어낼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한가지 방법은 아주 작은 폐곡선을 생각하고 그 폐곡선을 따라 굴렁쇠를 원래 위치로 굴린 것과 굴리기 전의 굴렁쇠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같은 점에서 굴렁쇠를 비교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준점을 옮긴다고 해도 눈금의 차이는 변하지 않지요. 마치 12와 16의 차이가 112와 116의 차이와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곡률(curvature)이라고 부릅니다.[각주:2] 곡률은 작은 폐곡선의 경우 그 폐곡선을 경계면으로 갖는 곡면의 넓이에 비례해서 눈금의 차이가 커진다는 관찰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작은 곡면은 평행사변형으로 근사할 수 있고 평행사변형은 두 방향(마주한 변은 같은 방향이므로 두 방향만 갖습니다)을 갖기 때문에 곡률은 방향에 대한 정보를 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 두 방향이 겹치게 되면 넓이를 갖는 평행사변형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주어진 두 방향에 대해 반대칭적(antisymmetric)이어야 하죠.


곡률은 물리적인 정보를 담습니다. 게이지 이론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자기학을 예로 들자면, 전자기장에 해당하는 접속의 곡률은 우리가 실제로 측정할 수 있는 전기장과 자기장으로 인식됩니다. 또한 실제 천 숫자를 계산할 때는 접속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접속의 곡률을 이용합니다. 이것을 이용해 여러가지 위상론적인 물체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3차원 공간의 한 점을 감싸는 구의 표면 위에서 전자기장의 천 숫자를 계산하면 그 표면을 통과하는 총 자기장의 양을 얻는데, 천 숫자는 정수로 주어지므로 그 구 안에 들어있는 자기장의 원천 즉 자하의 총량은 정수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하와 마찬가지로 자하 또한 양자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약간 원래 논의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고에너지 물리학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위상수학을 이용해 위상론적인 물체들을 다루곤 합니다. 위상론적인 원인이 있고 입자의 성질을 갖기 때문에 이런 물체들을 위상론적 솔리톤(topological soliton)이라고 부르지요. 다른 위상론적인 물체로는 인스탄톤(instanton)들이 있는데 시간을 허수로 만드는 다소 설명하기 껄끄러운 일들을 해야 하므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천 숫자가 위상론적인 물질에서 물리적인 의미를 갖는 사례 중 하나는 정수 양자 홀 효과(integer quantum Hall effect)입니다. 금속에 아주 강한 자기장을 수직축으로 걸었을 때 전기장을 수평축으로 걸면 자기장과 전기장에 수직한 방향으로 전류가 흐르는데, 정수 양자 홀 효과는 이때 흐르는 전류와 전기장의 비를 측정한 것(홀 전도도라고 부릅니다)이 폰 클리칭 상수(von Klitzing constant)의 정수배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정수 양자 홀 효과에서는 이 홀 전도도가 천 숫자로부터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습니다.


정수 양자 홀 효과에서 계산하는 천 숫자는 조금 독특한 공간에서 계산합니다. 2차원 공간을 돌아다니는 전자들을 운동량으로 분류했을 때, 이 운동량이 만드는 공간에서의 적분이죠. 이 공간 위에서도 접속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특정 운동량을 갖는 전자의 위상을 측정할 때 기준으로 삼는 위상을 운동량마다 다르게 설정해 줄 수 있기 때문이죠. 이를 베리 접속(Berry connection)이라고 부르고, 베리 접속으로부터 얻는 곡률을 베리 곡률(Berry curvature)라고 부릅니다. 양자 홀 효과와 관련된 천 숫자는 베리 곡률로부터 얻어지며, 이를 TKNN 불변량이라고 부릅니다.


정리해보자면, 실제로 위상론적 물질에서 쓰이는 위상수학은 접속과 관계된 천 숫자라는 불변량들이고 천 숫자가 실제로 힘을 발휘하는 경우의 예로 정수 양자 홀 효과를 들 수 있었습니다. 논의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고에너지 물리학에서는 위상수학을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다루면서 솔리톤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지요. 위상수학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 하고 정작 물리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일단은 여기까지가 현재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최선인 것 같네요.




천 숫자를 중심으로 살펴보긴 했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위상수학이 쓰입니다. 예를 들어 애니온(anyon)의 경우에는 매듭 군(braid group)과 관련이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관계로 넘어갔습니다. 글에서 언급된 자기단극자의 경우 한 차원 낮추게 되면 소용돌이(vortex)의 양자화를 얻는데, 이건 천 숫자로 표현하기에는 껄끄러운 점이 있어서 넘어갔죠.


마지막 글은 솔직히 쓰기는 할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일이 많아서... ㅠㅠ

  1. 수학적으로 정합적(consistent)인 묘사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좋은 예는 아닙니다. [본문으로]
  2. 참고로 일반상대론에서 말하는 '휜 공간'의 곡률과 이 곡률은 같습니다. 단지 곡률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하는 접속이 다를 뿐이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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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노벨 물리학상은 위상론적인 물질과 관련된 연구를 한 사울레스, 홀데인, 그리고 코스털리츠에게 돌아갔지요. 제 전공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주제인지라 그냥 넘어가려고 했었는데, 트위터에서 어쩌다가 개인 DM으로 해설을 부탁받아버려서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썰을 풀어봅니다. 그 말인즉, 노벨상 수상자들이 무엇을 했는지 설명하기보다는 노벨상 수상자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기 위해 필요한 사전지식들에 대해 설명해보겠다는 소리죠.


세 번 정도에 걸쳐 다음 주제를 주로 다룰 생각입니다.

1) 새로 발견된 상전이는 이전의 알려졌던 상전이와 어떻게 다른가

2) 실제로 이용하는 위상수학은 무엇에 대한 위상수학인가

3) 왜 위상론적 물질에서 경계면이 중요해지는가


그러면 시작해보죠.




기초적인 질문부터 시작해보도록 합시다. 물질의 상은 어떻게 구분할까요? 누구나 물과 얼음은 다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계에게 물과 얼음의 차이를 이해시키고자 한다면 "딱 보면 몰라?"보다는 나은 설명이 필요하겠죠.


한없이 투명한 무언가가 담겨 있는 양동이를 생각해봅시다. 양동이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 양동이에 담긴 것이 물인지 아니면 얼음인지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겠죠. 어떻게 하면 물인지 얼음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요? 답은 손을 대보면 됩니다. 액체인 물이라면 손이 한없이 투명한 표면을 뚫고 들어갈 것이고, 고체인 얼음이라면 손은 단단한 벽과 마주한 것처럼 전혀 표면을 뚫을 수 없겠지요. 이 차이를 두고 '얼음과 물의 층밀리기 탄성(shear elasticity)이 다르다'고 합니다. 층밀리기 탄성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평평한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책을 떠올려 보는 것입니다. 책의 윗면에 손을 놓고 마찰력을 이용해 책의 윗면을 책상과 평평하게 이동시키면 책은 원래의 네모난 모양을 잃어버리고 각 페이지가 층층이 밀린 듯한 모습으로 변해버리겠지요. 이런 변화를 층밀리기 변형(shear)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얼음과 같이 층밀리기 변형에 대해 단단하게 저항하는 성질을 갖는 물체를 고체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물처럼 층밀리기 변형에 대해 전혀 저항하지 못하는 물체는 액체라고 부르지요.


위의 예시처럼 '어떤 계의 상이 변했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그 계의 특징적인 물리량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물과 얼음의 경우에는 층밀리기 변형에 대한 저항이 이런 물리량 중 하나에 해당하겠지요. 이런 특징적인 물리량을 두고 질서 변수(order parameter)라고 부릅니다. 잘 정한 질서 변수는 그 상전이를 완벽하게 묘사해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란다우-긴즈부르크(Landau-Ginzburg) 이론입니다. 란다우-긴즈부르크 이론에서는 '무엇이 상전이를 일으키는가'란 질문보다는 '무엇이 상전이의 특성을 나타내는가'란 질문이 중요합니다. 이제 상전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해야 좋은 질서 변수를 찾을 수 있을까?'가 되겠지요.


물리계 중에는 대칭성을 가진 계들도 존재합니다. 대칭성을 정확히 정의하려면 논의가 복잡해지지만[각주:1] 여기에서는 일상에서 '대칭'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정도로만 이해해도 충분합니다. 정삼각형은 세 꼭지점을 돌리는 것에 대해 회전대칭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의 물고기는 (거의) 좌우대칭입니다. 물리계가 대칭성을 가진다는 것도 비슷한 의미를 지닙니다. 물리계를 전체적으로 돌리거나(회전대칭) 전체적으로 조금 이동시킬 경우(병진대칭) 그 전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과거에는 '계가 가진 대칭성이 좋은 질서 변수를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심지어는 계가 가진 대칭성만 가지고도 그 계의 상전이가 완전히 결정된다는 주장도 있었지요. 이것을 보편성(universality)이라고 부릅니다.


보편성은 계가 상전이를 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는 눈금 바꿈 대칭(scale symmetry)을 가진다는 것에 근거를 둡니다. 어떤 물리계의 어떤 물리량을 측정하고자 한다면 그 물리량을 측정하는데 기준이 되어주는 기준자가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길이를 측정한다고 하면 1cm마다 눈금이 하나씩 그어져 있는 자가 필요하지요. 눈금 바꿈 대칭이란 물리량을 측정하는데 기준으로 쓴 기준자의 눈금을 바꿔도 바꾸기 전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어떤 물리계를 한 사람은 a란 크기의 눈금을 가진 기준자로 관찰하고 다른 사람은 b란 크기의 눈금을 가진 기준자로 관찰할 경우 둘은 서로 같은 계를 관찰했지만 다른 상태를 관찰했다고 인식하는 것이지요. 만약 눈금 바꿈 대칭이 없었다면 그 계는 어떤 특성 길이(characteristic length) c를 갖기 때문에 전자는 c/a라는 값이 특별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후자는 c/b라는 값이 특별하다는 것을 눈치채며, 일반적으로 c/a와 c/b는 같지 않기 때문에 둘은 서로 다른 계를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편 그 특성 길이가 0이거나 무한대가 된다면 두 값은 같으므로 그 물리계는 눈금 바꿈 대칭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계가 A라는 상과 B라는 상 사이에 끼어서 상전이를 하는 순간에는 계를 A라는 상으로 바꾸려는 작용과 B라는 상으로 바꾸려는 작용이 균형을 이루기 때문에 작은 변화라고 해도 아주 먼 거리까지 영향을 미칩니다.[각주:2] 팽팽하게 당겨진 실에서는 한쪽으로 움직이려는 힘과 반대쪽으로 움직이려는 힘이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한 끝을 튕기면 그 진동이 반대 끝까지 전달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할까요? 이렇게 한 계가 눈금 바꿈 대칭을 가진 경우에는 매우 큰 눈금을 가진 자로 측정해도 살아남는 특징이 계의 특징을 결정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통계역학의 관점에서는 매우 큰 눈금을 가진 자로 측정할 경우 물리량을 측정하는데 관여하는 원자의 수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각 원자의 상세한 특징은 거대한 숫자에 쓸려나가 버립니다. 따라서 계의 상세한 특징은 상전이를 기술하는데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한편 계의 대칭성은 작은 눈금을 이용하든 큰 눈금을 이용하든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계의 대칭성은 상전이를 기술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추정할 수 있고, 이것이 앞서 설명한 보편성의 근거가 됩니다.


여기까지가 위상론이 상전이를 이해하는데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의 이야기였습니다. 정리하자면, 여태까지는 계가 가진 대칭성만 잘 이해하면 계의 상전이를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죠.




나머지 내용도 언젠가 올리긴 올릴텐데 과연 노벨상 수상식이 있기 전에 올라갈 것인지는 모르겠군요...=-= 다른 할 일이 많아서...




23. Oct. 2016> 생각해보니 중요한 내용 몇가지를 언급하는 것을 잊어버렸는데, 란다우-긴즈부르크 이론에서 대칭성과 함께 중요한 것은 계가 몇차원에 정의되었는가이며 상전이를 두고 나누어진 두 상은 계의 대칭성이 깨졌는가 깨지지 않았는가를 이용해 구분합니다. 계의 대칭성이 깨지지 않았다면 질서 변수가 계의 대칭성을 보존하는 변환에 대해 변하지 않지만 계의 대칭성이 깨졌다면 질서 변수가 계의 대칭성을 보존하는 변환에 따라 변화하게 되지요. 해당되는 질서변수의 구체적인 예로 철의 자화(magnetisation)를 들 수 있는데, 대칭성이 깨지지 않은 고온의 탈자 상태에서는 회전에 대해 자화가 변하지 않지만(0이니까요) 저온의 자화된 상태에서는 회전하게 되면 자화된 방향이 변하게 되죠.

  1. 관심이 있으신 분은 제가 예전에 적은 노트(영문)의 앞부분에 해당 내용이 있으니 참고하세요.2016/08/08 - Particles in Curved Space [본문으로]
  2. 이 설명은 잠열이 없는 상전이, 즉 2차 상전이에 해당하는 설명입니다. 잠열이 있는 1차 상전이에서는 잠열이 작은 변화를 완충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경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주로 임계현상(critical phenomena)의 연구가 2차 상전이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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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에 마주한 Frobenius' theorem이 특수상대론의 유명한 문제인 '회전하는 원반의 둘레는 얼마인가?'와 연결된다는 것을 깨닫고 작성을 시작한 노트. 별 내용도 없는데 생각보다 작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특수상대론을 다루는 부분은 작업 시작한 날 3시간만에 전부 정리했는데 나머지 부분에서 제대로 된 설명을 만드느라 헤매서....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오 이거 재미있다!'란 생각으로 타자를 쳤는데 다 치고 나니까 '뭐야 이거 당연한 소리였잖아...'란 느낌만 든다. 안 그런 일이 드물기는 하지만...


Frobenius Theorem in General Relativity.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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