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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10.18 제네바 생활 5주차의 근황 2
  2. 2025.10.18 개념원리 양자중력 5
  3. 2025.09.11 이사 및 근황 2

0.

몇 개월 전 꽤나 공들여 썼던 포스트의[각주:1] 레퍼런스 표기를 편집한다고[각주:2] 건드렸다가 각주 내용을 전부 날려버린 덕분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대부분은 있으나 없느나 상관없는 사족이라 각주로 남겨둔 것이지만 중요한 각주도 두어개 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되살릴 방법이 없으니 그냥 일괄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필요 이상으로 각주를 많이 다는 버릇이 있다는 자각도 있으니 다소 비싼 교육비를 치렀다고 생각하자...[각주:3]

 

1.

새로운 국가로 이사하게 되면 항상 겪는 죽음(...)의 사이클이 있다. 대표적으로 은행 계좌를 열려면 집 주소가 필요한데 집 계약을 하려면 은행 계좌가 필요한 경우가 있겠다. 여기에 전화 회선을 개통하는데 은행 계좌가 필요하다던가 월급을 받아야 하는데 은행 계좌는 아직도 안 열리는 등의 문제가 더해지면[각주:4] 꽤나 즐거운 상황이 벌어진다.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 아니겠는가. 리얼리티 쇼로 시트콤을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하다급발진.

 

이번에는 집을 엄청나게 빨리 구해서 이사가 매끄럽게 진행되는가 싶었는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집 전기 계약을 내가 열어야 하는데, 전기 계약을 열려면 (프랑스) 은행 계좌와 휴대전화 번호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스위스) 은행 계좌를 열러 은행에 갔더니 (아직 연구소 계약이 시작되지 않아) 은행 서류를 받을 주소가 없다고 다음에 오라는 말을 들었고, 아직 독일 번호를 쓰고 있던 시점에 프랑스 번호를 개통하려고 하니 선결제 심으로는 휴대번호의 장기 개통이 안되니 은행 계좌가 필요하다고 하고, 이사는 연구소 계약 시작 전인데 이러다가는 첫 일주일을 전기 끊긴 집에서 살게 생겼고.[각주:5]

 

결국 영국에서 이 죽음의 사이클을 해결한 방법을 그대로 써서 이사 직전에 모든 문제를 정리하는데 성공했다. 가장 약한(?) 고리인 은행계좌를 공략하는 것. 월드와이드웹의 꽤 먼 후손으로 인터넷 은행 혹은 핀테크(fintech)라는 것이 있는데, 인터넷 은행에서는 계좌를 열 때 필요한 서류 등이 훨씬 간략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은행 계좌를 열 수 있다.[각주:6] 은행 계좌가 있으니 프랑스 번호도 개통하고 전기도 계약하고[각주:7] 이사는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새 집은 빨래가 좀 불편하긴 한데[각주:8] 뭐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다.

 

1.1.

이로서 다섯 개 나라에 은행 계좌를 갖게 되었다. 하필 그 중 하나가 스위스라 뭔가 어둠의 세계의 거물이 된 듯한 느낌이 없지는 않은데, 블랙홀만큼 까만 것도 없으니 뭐 대충 비슷?하다고 하자.

 

1.1.1.

그와는 별개로 스위스 은행 계좌를 열 때 다른 나라에 얼마나 자산을 갖고 있는지 물어봐서 당황했다. 이제는 '스위스 은행'의 평판을 신경쓰는구나...

 

2.

새 연구소에는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다. 연구 주제 자체가 고에너지물리 세부주제로 놓고 볼 때 학제간(?)의 성격이 있어서 어느 연구 그룹에 발을 붙여야 하는가가 다소 미묘하긴 했는데,[각주:9] 일단은 양자장론의 형식적인 부분(formal theory)에 가까운 편이니 끈이론 그룹에 정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번 학기 첫 그룹 미팅을 가 봤는데, 포츠담에 있던 3년간 고전 중력만 다루다가 양자 중력을 다시 하려니 좀 적응 기간이 필요하단 느낌이 들고 있다.

 

2.1.

드디어(?) 물어볼만한 사람들과 같은 연구 그룹이 되어 대학원생 시절부터 갖고 있었던 의문을 해소해볼만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mathcal{N} = 8$ SUGRA는 $E_{7(7)}$ (정확한 대칭군이 중요하진 않다) global symmetry를 갖고 있는데, 왜 no global symmetry conjecture에 위배되지 않죠?[각주:10]

이 질문에 대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각주:11] 대답을 벨기에에서 열렸던 Strings 2019의 학회 디너 자리에서[각주:12] 들은 기억이 있고, 최근에는 포츠담에서 colloquium을 담당할 때 Timo Weigand가 swampland 관련 톡을 하러 와서 이 질문을 던지고 당황시킨 기억이 있다.[각주:13] 여기 와서는 마찬가지로 swampland쪽 일을 한 적이 있는 Wolfgang Lerche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고 good question이란[각주:14] 코멘트를 받았는데, 오늘 점심때 Irene Valenzuela까지 모여서 간략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는 이 질문의 답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이 잡힌 느낌이다. 새로운 결과라 할 만한 것은 없으니 답을 정리한다고 해서 논문 거리는 안 될 것 같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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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념원리 양자중력 [본문으로]
  2. 인명을 연결할 때 부분적으로 사용한 em-dash(---)를 hypen(-)을 쓴 경우까지 포함해서 전부 en-dash(--)로 바꾸는 진짜 아무래도 좋을 편집. [본문으로]
  3. 그 와중에 여기에도 각주를 과다하게 다는 시점에서 교훈을 제대로 배운 것이 맞기는 한지 약간의 의심이 들지만 일단은 넘어가자. [본문으로]
  4. 실제로 영국에서 포닥할 때 첫 세 월급이 밀린 경우도 있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본문으로]
  5. 전기 계약하면서 온수도 전기라서 만약 전기 계약을 못 했다면 씻는 것 조차 못 했을 것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잘 풀리긴 했지만... [본문으로]
  6. 영국에 있을 땐 Monzo와 Revolut를 썼는데, Revolut는 국가 이동이 안 되어서 (그래서 독일로 이사할 때 그냥 영국 계좌를 그대로 두었다) 프랑스 계좌로 새로 열려면 기존 계좌를 닫아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N26을 프랑스 계좌로 열어서 해결. [본문으로]
  7. 다만 전기 계약 상담원과 연결되느라 엄청 고생했다. 내가 얻은 교훈은 이것이다: 고객 상담센터가 오후 8시까지라고 되어있긴 한데 저녁시간이 다가오면 다들 퇴근하느라 일 안 하는 것 같으니 그냥 다음날 아침 10시-11시쯤 전화해라. [본문으로]
  8. 세탁조와 탈수조가 나눠진 말 그대로 손으로 빨래 때를 빼는 과정만 자동화해주는 세탁기만 설치되어 있다. [본문으로]
  9. EFT를 많이 쓰긴 하지만 BSM이라 하기는 그렇고, amplitude로 분류되긴 하지만 QCD라 하기는 그렇고, string이라 하려고 보니 정작 끈이론 논문은 없고... [본문으로]
  10. 놀랍게도 양자 중력을 한다면 누구나 생각해봤을만한 이 질문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논문은 (내 검색 능력의 한계 안에서는) Tom Banks의 논문 하나 뿐이었고, 모든 각주가 날아간 포스트의 각주 중 하나가 바로 이 질문과 관련된 문헌에 대한 정보를 다루고 있었다. 이런... [본문으로]
  11. 즉, 이해하지 못한 [본문으로]
  12. 다만 내 옆 자리에 있던 누구에게 이 질문을 했었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본문으로]
  13. 점심 자리에서 Hermann Nicolai 선생은 '우리는 아직 중력에 대해 잘 모른다'란 외교적 수사를 답변으로 주셨고, 이후 학생들이 들은 답을 전해 들었는데 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만족스러운 답변이 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4. 학계의 불문률 중 하나로 '당장 답을 모르겠으면 "good/interesting question"이라 답하는 것으로 시간을 번다'가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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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Amplitudes 2025 학회도 대충 끝났고 하니 백만년만의 블로그 업데이트. 생각외로 '양자중력'이 어떤 의미에서 열린 문제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듯 하여 (예컨대 Carlo Rovelli의 scholarpedia 리뷰의 경우 '왜 사람들은 "중력자"란 개념을 이용해 계산하는데 거리낌이 없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는 못한다) 본업이 양자와 고전 사이에 끼인 중력을 다루고 있으니 그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여기서 이야기할 내용은 John Donoghue의 scholarpedia 리뷰에서 다루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을테니 이 쪽을 보아도 좋고, 트위터에서 실컷 떠들었던 적도 있으니 이쪽을 보아도 좋을 것이다.

 

더보기

 

이 주제와 어느 정도 겹치는 부분이 있는 강의로는 이번 Amplitudes Summer School에서 Parra-Martinez의 강의가 있다. 그러면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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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quantised)'란 서술어는 어떤 현상이 이산적(discrete)으로 일어남을 지칭한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은 광양자 가설로 전자기파로부터 금속 내부의 자유전자에게 에너지가 전달되는 과정이 이산적임을 가정하여 광전효과를 설명하고자 했다. 현상의 '단위'를 현대물리에서는 '입자'라는 용어로 기술하며, 이런 (역사적인) 맥락에서 입자물리가 이론물리의 동의어로 취급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자중력이란 이산적으로 전파되는 중력의 효과를 기술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때 중력 효과의 전파 단위를 중력의 양자, 혹은 중력자(graviton)라 부를 수 있다. (민코프스키 공간(Minkowski space)에서의) 중력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성질들이 알려져 있다.

 

1. 일반상대론을 양자화하여 얻는 중력자는 질량이 없는 스핀-2 입자이다.

2. 역으로, 질량이 없는 스핀-2 입자의 존재를 가정할 경우 (편의상 중력자라고 부르자) 다음과 같은 성질을 만족해야만 한다.

  • 중력자의 원천(source)으로 기능할 수 있는 물리량은 에너지-운동량 텐서(stress-energy tensor) 뿐이며 중력자에 대응되는 장 방정식을 정리하면 일반상대론을 얻는다(Weinberg 1965).]
  • 모든 입자는 중력자에 대해 동일하게 반응하며, 이를 등가원리(equivalence principle)의 일종으로 이해할 수 있다(Weinberg 1964).
  • 중력자는 유일하다. 혹은, 여러 종류(flavour)의 중력자가 존재한다면 각 중력자는 자신만의 우주로 갈라져 서로 상호작용하지 않는다(Boulanger--Damour--Gualtieri--Henneaux 2000, Benincasa--Cachazo 2007).

 

이런 연구들로부터 낮은 에너지/먼 거리(low energy/long distance)에서의 중력을 기술하는 이론은 일반상대론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좀 더 전문적인 내용을 알고 싶다면 Arkani-Hamed의 강의를 참조하는 것도 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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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접근법의 연장선상에서 일반상대론을 유효장론(effective field theory)으로 취급하여 고전적인 중력에 대한 중력의 양자역학적인 효과에 의한 보정을 계산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종류의 계산들을 유효장론으로서의 일반상대론 (general relativity as an effective field theory) 혹은 적외 양자중력(infrared quantum gravity)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중력자가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두 원천 사이의 중력적 상호작용을 매개하며 그 과정은 일반상대론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것만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어떤 양자중력 이론에서 출발하더라도 먼 거리에서는 일반상대론의 예측을 재생산(reproduce)해야 하므로 궁극적인 양자중력 이론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이 예측들은 유효하다. 이 방향의 계산에 대한 몇가지 예시로는 다음 연구가 있다.

 

 

위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수많은 연구가 있긴 한데 리뷰를 쓰는 것이 목표가 아니므로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관심이 있다면 처음 언급한 Donoghue의 scholarpedia 항목이나 인용해둔 inspire 링크를 통해 다른 연구들이 뭐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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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양자중력이 현대물리의 열린 문제라고 하는 것일까? 비밀(?)은 재규격화(renormalisation)에 있다.

 

현재 자연을 가장 작은 길이 단위(smallest length scale)에서 기술함이 실험적으로 확인된 이론은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이며, 대부분의 양자장론 계산에서는 발산하는 무한대를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이 무한대를 규제(regulate)하는 재규격화라는 절차를 필요로 한다. 무한대로는 어떤 예측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한한 값에서 무한한 값을 빼서 유한한 예측을 하는 방법은 무한히 많은 방법이 있기 때문에 이론으로부터 유효한 예측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무한한 값에서 유한한 값을 얻어내는 절차 또한 규정해야 한다. 이를 재규격화 조건(renormalisation scheme)이라 한다. 재규격화시 이미 이론에 존재하고 있는 작용자(operator)에 붙은 계수의 값만을 조정하는 것으로 재규격화 조건을 맞출 수 있는 경우를 두고 재규격화 가능(renormalisable)하다고 하며, 끝없이 새로운 작용자를 도입해야 하는 경우를 두고 재규격화 불가능(nonrenormalisable)하다고 한다.

 

재규격화 가능한 이론은 몇가지 값만 고정해주면 추가적인 정보 없이 무한히 많은 예측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에 예측성(predictability)을 가진 물리 이론으로 평가되며, 재규격화 불가능한 이론은 예측을 위해서는 무한히 많은 정보(모든 작용자들의 계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유효이론(effective theory)으로 취급되지 않는 이상) 예측성이 없다고 평가된다. 일반상대론은 재규격화 불가능한 이론의 대표적인 예시이고, 이런 의미에서 현대물리의 열린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완전한 이론으로서의 양자중력이 필수적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문제로 다음을 들 수 있다.

 

  • 블랙홀 정보 문제(black hole information paradox). 정확히는 호킹 복사(Hawking radiation)에 의해 증발하는 블랙홀에 엔트로피의 형태로 저장된 정보가 어떻게 증발하면서 발생하는 복사선으로 이동하는가의 문제.]
  • 블랙홀의 미시상태(black hole microstate). 다양한 준고전적(semiclassical)인 방법으로 계산된 블랙홀의 엔트로피가 정확히 어떤 자유도의 다른 상태를 세는지에 대한 이해. 이 문제에 대해 제한적으로나마 정량적인 답변을 제공하는데 성공하여 유명한 이론으로 끈이론이 있다(Strominger--Vafa 1996).
  • 중력 특이점(gravitational singularity) 부근에서의 물리학. 빅뱅 초기나 블랙홀의 특이점이 여기에 대응된다.

 

이보다 더 다양한 문제가 완전한 양자중력 이론을 필요로 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지만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은 이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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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말한다면 중력과 양자효과 모두를 고려해야 하는 문제 중 지금의 제한적(?)인 양자중력에 대한 이해만 가지고도 풀 수 있는 문제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직전에 언급한 문제들이 양자역학 도입 이전 자성의 설명에 대응된다면 이번에 언급하는 문제들은 완전한 양자역학이 없더라도 고전역학에 몇가지 가정을 덧대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소 원자 스펙트럼에 대응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범주에 속하는 문제의 하나로 초플랑크 산란(transplanckian/super-planckian scattering; 't Hooft 1987) 문제를 들 수 있고, 큰 틀에서 입자물리 계산의 범주로 취급되는 후민코프스키(post-Minkowskian; PM) 계산이 이 연장선상에 있다.

 

일반적인 유효장론 접근에서는 고려하는 현상에 수반되는 에너지 수준이 그 유효장론이 유효할 것으로 여겨지는 한계(보통 자외 차단(UV cutoff)이라고 한다)를 넘어서면 그 유효장론으로는 유효한 예측을 하지 못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 소박한(naive) 관점을 일반상대론에 적용하게 되면 일반상대론의 그 어떤 예측도 믿을 수 없다는 황당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일반상대론의 자외 차단은 뉴턴 상수 $G$로 결정되는 플랑크 질량(Planck mass; $m_{\text{Pl}}$)이며 입자물리 수준에서는 황당할 정도로 큰 에너지($1.2209 \times 10^{19}$ GeV)지만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질량의 단위로는 상당히 작은 질량(22 ug = $2.2 \times 10^{-5}$ g)이며 천체물리에서 사용하는 질량의 단위인 태양질량(solar mass)으로 셀 경우 황당할 적오로 작기($1.1 \times 10^{-38} M_{\odot}$) 때문이다. 실제로는 일반상대론이 실험과 가장 자주 비교되는 영역이 천체물리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소박한 예측에는 다소 문제가 있음이 명확해진다.

 

초플랑크 산란은 이런 표면적인 모순을 해소해준다. 에너지 수준이 $E$인 현상을 뉴턴상수 $G = (m_{\text{Pl}})^{-2}$로 대표되는 일반상대론으로 기술할 경우, 일반적인 유효장론이라면 섭동이론(perturbation theory)의 전개변수(expansion parameter)로 $GE^2 = (E / m_{\text{Pl}})^2$를 이용하며, 이 조합이 1보다 매우 작아야 유효장론을 이용한 섭동이론적 기술이 유효하다. 일반상대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천체물리에서는 이 조합이 $(M_{\odot} / m_{\text{Pl}})^2 \sim 10^{76}$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언가 놓친 부분이 있음이 명백해진다.

 

여기서 빠진 정보는 '상호작용하는 두 물체 사이의 거리'다. 고전역학에서 일반상대론을 섭동이론(후민코프스키 전개)으로 다룰 때 전개변수는 $GE/R$의 꼴을 가지며, 앞서 언급한 전개변수를 두 물체 사이의 각운동량으로 나눈 값으로 취급할 수 있다($GE/R \sim GE^2 / J$). 첫 번째 전개변수 $GE^2 \gg 1$가 매우 크고 두 번째 전개변수 $GE/R \ll 1$이 매우 작은 경우(이때 $R$을 충격매개변수(impact parameter)로 취급한다)에는 준고전적인 근사가 잘 작동하고 두 전개변수가 매우 큰 경우에는 블랙홀 생성이 최종 상태를 결정하므로(고리 가설hoop conjecture; Thorne 1972) 양자중력에 대해 상세하게 알지 못해도 플랑크 질량보다 훨씬 높은 에너지에서도 믿을 수 있는 예측을 내리는 것이 가능한 셈이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의 초플랑크 산란에 대한 활발한 연구는 이 깨달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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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생각보다 길어졌지만 현재 양자중력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문제들에 대한 정리 및 인상비평으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순서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고 떠오른 대로 적어보았다.

 

  • $\mathcal{N} = 8$ 초중력의 유한성(재규격화 가능성). 처음으로 초대칭을 위배하지 않는 상쇄항(counterterm)은 7-loop 수준에서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최근 UCLA 그룹에서 보다 높은 loop에서의 integrand를 적을 방법을 찾았다고는 하지만 NSF 펀딩이 잘려서 당분간 계산 클러스터를 못 돌린다고 하니 다음 loop 차수인 6-loop 계산은 한동안 기다려야 할 듯.
  • 적외 양자중력 문제로 4 중력자 산란진폭(scattering amplitude)의 산란행렬 부트스트랩(S-matrix bootstrap)을 통한 일반상대론의 고미분보정항(higher-derivative corrections)의 결정. 양수제약(positivity constraint)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접근에서 아직 열린 문제는 중력자의 질량이 없기 때문에 만델스탐 변수(Mandelstam variable) 평면에서 원점까지 닿는 분지점(branch cut)을 비섭동적으로 다루는 것과 흔히 $t$-채널 극($t$-channel pole)이라고 부르는 기여분을 적외 차단(infrared cutoff) 없이 다루는 것.
  • 고리양자중력(loop quantum gravity) 접근에서는 아직 민코프스키 공간(Minkowski space)을 이론의 진공(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으로서 구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알고 있다. 참고할 수 있는 Ashtekar의 리뷰.
  • 끈이론 방면의 접근에서는 블랙홀 정보 문제에 대한 얽힘섬(entanglement island) 풀이. 다만 몇달 전 AdS/CFT를 주 연구분야로 하는 사람에게 들은 인상비평으로는 이 방향의 연구가 (약간의 외교적 수사를 더한다면) 뜸해졌다고.

 

여기 적어둔 문제 외에도 다른 열린 문제들이 많지만 완전한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 목표는 아니니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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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Jul04] 글을 처음 올릴 때 빼먹은 몇가지가 있어서 추가.

 

  • 최신 연구 경향에서 끈이론 방면의 접근 중 늪지대(swampland)에 대한 이야기를 빼먹은게 생각나서 추가. 늪지대란 (적외IR에서만 유효한) 유효장론 중 양자중력이 포함된 자외 완성(UV completion)이 존재하지 않는 이론들의 공간을 말한다. 보통은 자외 완성에 중력이 존재하는 끈이론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효장론들의 공간을 살펴보고 공통점을 찾은 뒤 '이 공통점이 없다면 중력이 포함된 자외 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가설을 세우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편.
  • 양자중력의 열린 문제들을 정리한 좀 더 완전한 목록을 찾는다면 Nordita에서 진행된 양자중력 워크샵의 리포트를 참조하는 것도 좋겠다.
  • 휴가에서 돌아온 기념으로 브라우저 탭을 정리하다가 Rocci와 Van Riet의 양자중력 물리학사 리뷰를 발견했다. 역사적 맥락은 이쪽이 훨씬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으므로 관심이 있다면 (+ 충분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일독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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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Jul04B] Nordita 워크샵 리포트를 보다가 중력자에 대해 한가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어서 추가 코멘트.]

 

간혹 '중력파가 존재한다고 해서 중력자가 존재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는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예시로 수면파나 공기중의 소리의 양자화가 말이 안 되는 것을 비유로 드는 경우가 있는데, 중력을 통계역학적으로 접근하는 경우(entropic gravity)가 아니라면 이 비유는 틀렸다. 수면파나 공기중의 소리는 유한한 온도를 갖는 매질에서의 파동이기 때문에 양자화의 당위성이 부족하지만, 중력파는 (해당 이론에 진공(vacuum)이 존재한다면) 절대영도 진공에서의 파동을 양자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으며, 절대영도 진공이라면 파동과 같이 집합적 운동(collective motion)에 대응되는 자유도라도 양자화해야 한다. 당장 고체나 초유체(superfluid)에서의 포논(phonon)이 그 예시. 양자중력 이론에서 중력자가 근본 자유도(fundamental degrees of freedom)일 필요는 없지만, 적외(IR)에서 중력자가 등장할 수 없다면 아무래도 우리 우주를 기술하는 이론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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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Oct18] 레퍼런스 표기를 편집하다가 각주 정보가 전부 날아갔다(...). 하필이면 백업을 안한 포스트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다니... 20개가 넘는 각주에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기억할 방도가 없으므로 각주를 전부 삭제하기로 결정하였다. 각주에 있었던 꽤 중요한 정보도 있긴 할텐데 (예컨대 Tom Banks의 $\mathcal{N}=8$에 대한 논문이라던가) 각주에 둔 내용은 본문에 두지 않을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Posted by 덱스터

2025. 9. 11. 08:41 Daily lives

이사 및 근황

0.

새 포닥 자리를 위해 제네바로 이사했다.[각주:1] 런던에서 포츠담으로 건너온 것은 9월 21일이었고[각주:2] 포츠담에서 제네바로 건너온 것은 9월 10일이니 정확히 2년을 지낸 런던과는 달리 포츠담(보다는 Golm)에서는 3년에서 열흘 정도 모자라는 기간동안 지낸 셈이다. 과연 여기서는 얼마나 지낼 것인가...

 

0.1.

포츠담, 혹은 막스플랑크 중력연구소 포츠담Max-Planck-Institut fuer Gravitationsphysik (Albert-Einstein-Institut), Potsdam에서의[각주:3] 3년을 요약해본다면 '포닥을 왜 "박사후 연수"라고도 표현하는가'를 이해하게 된 경험이었다.

 

내 전공을 굳이 따진다면 고에너지물리 계열에 속하지만 포츠담에서 연구원으로 채용된 연구단은 중력파 연구단이었다. 일반상대론적 2체문제에 대한 전문성으로 뽑힌 것. 그래서 거대한[각주:4] 연구단임에도 불구하고 내 세부분야 (scattering amplitudes 혹은 양자장론) 안에서 내가 잘 모르는 주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 논의할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각주:5] 이걸 좀 다르게 말한다면 내 세부분야와 관련해서는 (양자장론의 수학적인 측면 등) 연구단에서 가장 전문가였다고 표현할 수 있긴 한데, 같은 내용의 표현인데도 느낌이 매우 달라진다는 점이 재미있다. 여튼, 이런 연구 상황은 같은 연구소 소속 사람들과 쓴 논문이 3년동안 쓴 논문 전체의 1/4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력파와 관련된 주제에 대해서는 연구단 안에서 이론부터 실험까지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루다보니[각주:6] 관성대로 고에너지물리를 중심으로 다루는 연구단에서만 포닥 경험을 쌓았더라면 절대로 알 수 없었을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예컨대 중력파 데이터 처리의 근간이 되는 파형 모형waveform model들의 고스핀 영역에서 정확도가 감소하는 문제와[각주:7] 같이 실제 중력파 관측과 밀접하게 관련된 주제는 다른 곳이었다면 배우기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속을 옮긴 직후 연구의 방향성을 잡느라고 좀 방황했는데,[각주:8] 중력파 관측과 관련된 다른 주제들에 대한 전문가들과 교류하기 힘든 환경이었다면 아무래도 방황이 더욱 길어졌을 것이다. 뭐, 다른 돌파구를 찾았을 수도 있고...

 

0.2.

여러모로 악명(...)이 있으신 학사지도교수님과의[각주:9] 면담에서 들었던 말 중 기억나는 말 하나는 '하고 싶은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이다. 이번에 CERN으로 소속을 옮겼으니 가속기 물리collider physics와 관련된 주제를 좀 깊게 배워보고 싶긴 한데 (+ 막연하게 생각해둔 연구문제들이 있긴 한데), 미래가 어떻게 풀릴지는 뭐 두고 봐야 알겠지.

 

0.2.1.

사실 그보다 급(?)한건 CERN 계약이 끝나는 3년이 (이걸 하고 나면 포닥 8년차가 되니 좀 많이 길긴 하다...) 지나기 전 주니어 포지션을 잡을 수 있느냐긴 하다. 이건 운이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문제라 뾰족한 수가 없긴 하지만 =_=;;

 

---

 

1.

첫 포닥을 했던 런던 퀸메리 대학Queen Mary University of London과 같이 영국 왕립학회Royal Society에서 뽑는 University Research Fellowship에[각주:10] 지원했다. 공교롭게도 데드라인이 이사하는 날이었던 9월 10일이라 여름동안 휴가를 5주나 내고도 연구실에 매일같이 출근해서 연구제안서를 쓰는 비극(...)이 일어났지만 학계라는 곳이 원래 그런 곳이니 그러려니 하자(...). 뭐 일단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남은 것은 이번 겨울에 있을 1차 결과 발표만 기다리는 것 뿐...

 

1.1.

처음으로 작성해본 연구제안서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몇가지 배운 점이 있는데 나중에 쓸 일이 있을 지 모르니 기록해둔다. 이런건 글로 정리해두지 않으면 금방 증발해버리는 종류의 기억이므로.

 

1.1.1.

자잘한 문법 오류가 있으니 ChatGPT를 써보면 어떻겠냐는 피드백이 돌아와서 약간 자존심이 상했는데, 인터넷에 제공되는 (인공지능 기능이 추가된) 문법검사기에 여태 쓴 연구제안서를 돌려보니 문법 오류는 거의 없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오타가 많았다.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어색한 문장을 지적해주는 기능. 인공지능이 제안하는 문장은 안 썼지만(쓸 생각도 없었지만 애초에 로그인 없이 쓰는 무료버전에서는 제안이 제공되질 않았다) 지적받은 문장을 이래 저래 편집하다 보니 확실히 훨씬 읽기 편한 결과물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LLM이 그래도 쓸 데가 없지는 않군'이란 생각을 했다.

 

여담으로 가장 많이 받은 지적이 '문장이 너무 길다'였음을 밝혀둔다. 반점이 서넛 들어간 긴 문장을 두세 문장으로 나눠보니 확실히 읽기 훨씬 편하더라...

 

1.1.2.

도입부를 좀 더 흥미롭게exciting 만들라는 피드백이 있었다. 약간의 과대광고(...)는 괜찮으며 리뷰하는 패널들 전부 그 정도의 과대광고는 기대하고 있다고(...).[각주:11]

 

예전에 연구제안서를 쓰는 팁을 읽었을 때 '리뷰어가 "이 연구제안서를 채택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데 들여야 하는 노력을 최소화해라(즉, 연구제안서에서 직접 떠먹여줘라)'란 내용이 있었는데, 연구제안서를 제출하고 나서 되돌아보니 이 연장선에 있는 이야기였다. 전 학술분야에서 35명(+a)을 뽑는데 '왜 하필 이 연구가 지원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해당 연구주제를 다뤄 본 적은 없는) 리뷰어에게 좋은 답을 떠먹여줘야(...)한다는 의미였던 셈이다.

 

나는 내가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첫 문장으로 택했는데 (= "강렬한 첫인상을 주자!"를 목표로 한 선택) 잘못된 선택이었나... =_=;; 시간만 알 뿐이다...

 

---

 

  1. 정착은 국경 너머 프랑스 쪽에서 할 생각이기는 하지만 가장 가까운 대(?)도시가 제네바이니 그러려니 하자. [본문으로]
  2. 분명히 이사에 대해 회고(?)하는 글을 썼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블로그에 없는 것으로 봐서는 얼굴책에만 끄적거렸던 모양이다. 한국어/영어 두 버전으로 작성했던 기억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얼굴책에만 남겨둔게 맞는 듯 [본문으로]
  3. AEI(Albert-Einstein-Institut 혹은 Albert Einstein Institute)는 별명이고 포츠담과 하노버 두 곳에 동명의 연구소가 있기 때문에 지명으로 구분한다. 포츠담은 이론 중심, 하노버는 실험 중심. [본문으로]
  4. 내가 근무하는 동안 50명 내외의 크기를 유지했다. Alessandra(디렉터)가 연구소에 자리가 없어서 감당이 안 된다고 사람을 덜 뽑아야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연구소의 그 누구도 그 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 눈치(...)였고. [본문으로]
  5. 긴 통근을 좋아하지 않아서 베를린 훔볼트 대학Humboldt-Universitaet zu Berlin의 양자장론 연구그룹을 필요할 때만 방문했는데, 돌이켜보면 좀 더 자주 방문하는 수고를 들였어야 하지 않았나란 생각이 들긴 한다. [본문으로]
  6. '중력파 연구의 이론부터 실험까지'란 방침은 Alessandra가 처음 연구단을 세울 때부터의 비전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7. 그리고 이 문제는 정밀도가 더 높은 다음 세대 중력파 관측소에서나 측정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상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문제가 실제 측정의 발목을 잡아버린 관측(GW231123)이 올해 7월에 발표되었다. 이와 관련된 연구제안서를 쓰고 있었는데 뽀록(...)이 터진 셈. [본문으로]
  8. (연구소 옮기기 전부터 대략적인 아이디어가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시작할 수 있었던) 연구소 옮긴 직후에 쓴 논문과 그 다음 논문 사이의 간격이 거의 1년이다. [본문으로]
  9. SNS에서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대학원 진학하면서 지도교수를 바꾼 것을 인생의 몇 안되는 로또(...)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본문으로]
  10. 영국에서는 많은 펠로우쉽이 정규 교수직(Lecturer/Senior Lecturer)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로서 기능한다. [본문으로]
  11. 애석하게도 이 피드백을 반영한 버전에 대한 피드백은 받질 못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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