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31. 13:00 Daily lives
일상
글쓰기 참 귀찮다. 페이스북에 잡다하게 끄적거렸던 글들이나 끌어와야겠다. 존나 길어요(...) 위에서부터 시간 역순. 페이스북 타임라인 그대로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라 생각하면 된다.
중국에서는 가족부양의무가 진짜 의무가 되어버린다고...
분명히 산업화 과정에서 서양쪽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겪었을텐데 왜 거기에서는 이런 진통은 겪지 않았던 것인지는 좀 미스테리하다. 계단 하나 하나 밟는거랑 절벽을 오르는 것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나?
일단 자유국가에서 이런 방식으로 법을 들이미는게 그다지 옳다고 여겨지지는 않아서(하지만 시대가 바뀌면 이 감정도 바뀔 가능성이 높다. 국가가 가정의 일에 개입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특히 가정폭력법 등-이 보편화된건 근대의 일이니 말이다.) 실소가 나오는 기사이기는 한데 우리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어서 마냥 편히 웃기도 그렇다. 가정의 부담이었던 것을 국가로 전이하는 복지정책은 고령화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기 딱 좋은 방법이라서. 일하는 사람을 늘이는 것이 해답이긴 한데 이게 또 여러가지랑 엮여 있는지라...
오늘 기사. 구체적으로 일하는 사람 늘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한을 낮추는 것, 나머지 하나는 상한을 높이는 것. 하한을 낮추는 것은 일할 수 있는 최저나이를 낮추는 것인데 대학생이 되려고 목숨을 거는 한국에서는 실업률만 높여주는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고(뭐라고요?) 상한을 높이는 것은 정년 연장. 그런데 명퇴가 보편화된 지금 정년 연장이 의미가 있나?
아테네. 그리스는 오랜 기간 오토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이슬람에 대한 거부감이 매우 강하다고 한다. 때문에 최근 유입되는 외국인 노동자로 이슬람 신자가 급증했지만 아직도 모스크를 짓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특히 동방정교회의 주교가 한 말-난 그 사람들이 유럽을 이슬람화하려 오는 것으로 믿는다-이 기억에 남는다. 그야말로 무조건적인 증오가 있을 때나 가능한 발언 아니던가. 다른 말들도 가관이다. "국경에 지뢰를 심어야 한다. 넘어오다 지뢰를 밟는건 걔네들 사정이고."식의 말은 나치 친위대가 말했다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 이게 한 당의 대변인(deputy)이라는 인물이 한 말이다.
금방 전쟁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적개심이다. 근세 들어 전쟁의 수가 많이 감소한 이유로 물질적 풍요를 드는 경우가 있는데, 최근의 그리스 경제를 보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인듯 싶다. 조한혜정 교수님께 자연스러운 불확실성마저 회피하고자 하는 현상은 파시즘으로 흐른다고 들었는데 그걸 실제로 보는 드문 경우랄까.(심각한건데 액자 속 그림 쳐다보듯 느끼는 것을 보니 테레비가 사람 많이 망쳐놓았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무차별적인 적개심을 표출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어 한국 경제가 말처럼 잘 나가는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대선에서 경제 살리기보다 경제 민주화라는 주제가 부각된 게 미스테리. 물론 고전적인 자유주의 입장에서는 시장경제 정상화가 경제 살리기이니 둘은 같은 명제이지만 우리나라 정치인중에 자유시장주의자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서...(사실 정치사상쪽에나 관심이 많지 실제 정치 구도는 많이 모르는 편이다)
이건 좀 심각한 문제. 우리나라도 인종차별 매우 심한 편에 속한다. 우리야 그 대상이 아니니까 못 느끼는 것 뿐이지. 물고기는 물 밖을 나와봐야 물이 있음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정치사상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전 자유지상주의쪽. 이 계열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아나키즘과도 통하는 면이 좀 있다. 그래서 새누리 민주 할 것 없이 둘 다 까지(전형적인 회색분자...). 참고로 아나키즘은 실현될 수 없는 구조가 내재된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설명한다면 사회 자체에도 생명체에 적용되는 자연법칙-적자생존-이 적용된다고 보기 때문에 적자생존에 불리한 이념을 채택한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
고장난 전기면도기를 가지고 서비스센터에 갔다가 고치려면 아예 내부를 갈아 엎어야 한다고 해서 그냥 왔다. 내년 초에-다음주인데 내년 초라고 하니 엄청 오래 걸리는 것 같다-나 수리가 완료될 것 같다고 하니 한동안은 면도날에 베이는 아침으로 시작할듯 싶다. 조금만 기다리면 환골한 전기면도기로 면도를 할 수 있겠지. 탈태는 힘들겠지만.
돌아오는 길에 잠깐 장이나 볼까 하고 마트에 들렀다가 장바구니가 있어야겠다 생각이 들어서 바로 방으로 가기로 했다. 방까지 올라오는 길에서 원룸 건물 옆에 있는 검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해서 잠깐 돌아가 살펴보니 고양이 한 마리. 영혼의 창이라고들 부르는 곳에는 검은 그림자만 있었다. 기분이 좀 찜찜했다. 일단은 장을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그 자리를 벗어났다.
사 온 먹거리를 정리하고 나니 다시 고양이 생각이 났다. 묻어주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덮쳤다. 옷을 대충 갖춰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방을 다시 나섰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온갖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고양이는 장바구니를 들고 올라오면서 다시 보았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 앞에 쪼그려 앉으니 보이지 않던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 죽음은 더 깊이 배여 있었다. 눈이 있어야 할 곳에는 그림자가 있었고, 털은 피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액체로 엉겨있었다. 흙탕물로 머리를 만져주면 비슷한 느낌이 나겠지. 내가 잘 때 취하는 자세-태아자세라고 많이들 부르는 모양이다-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자다가 동사한 것 같았다. 흙바닥이 시멘트보다는 따뜻하니까.
막상 흙을 파려니 망설임이 앞섰다. 삽이 없으니 맨손으로 땅을 파야 하는데, 전염병의 매개체가 되는 사체를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만진다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도중 바로 옆 넓적한 전단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얼어붙은 땅이 맨손으로 파이겠냐는 자기합리화를 하고는 전단지를 덮어주었다. 한번 더 보고는 다시 방으로 올라왔다. 찝찝한 기분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지만.
장자가 죽기 직전에 했다는 말-상황에 맞게 약간의 각색을 한다면, 고양이를 그대로 두었더라면 날파리와 구더기의 놀이터가 되었을테고, 묻어 주었더라면 땅깡아지와 쥐며느리의 공원이 되었겠지-과 장례라는 행위에 대한 말-장례라는 사자를 추모하는 행위가 전세계적으로 발견되지만 그 형식은 매우 다른데, 그 이유는 각 지방마다 기후가 다르기 때문에 전염병 확산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사체 격리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 떠올랐지만, 가장 찝찝한 느낌을 많이 주었던 생각은 장자가 아내의 장례식장에서 했다는 일들-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미x 놈이지만, 한편으로는 어차피 누구나 태어나 죽는 법인데 슬퍼한다고 달라지겠는가 생각하고는 평소 살던 대로 행동하고 있었겠지 싶다.-이었다. 생과 사는 하나인 법인데, 나는 왜 죽음 앞에서 쓸쓸한 감정을 느끼는가.
출가한 사람도 아닌데 그 정도 경지를 바라보는 것은 과다한 희망사항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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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참 다양한 감정들이 마음 속을 떠돌아다녔는데, 막상 글을 쓰고 나니까 그 다양한 감정들 중 일부분만 남고 나머지는 날아가 버렸다. 마치 살아있을 때의 그 생기를 잃어버리는 박제처럼 말이다. 하긴, 글 자체가 말의 박제였으니 모든 것을 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현재 『장자』 읽는 중. 도를 닦읍시다 도는 나위 원쑤(?)
파울로 코엘료는 그 명성이 자자한 소설 『연금술사』에서 이상한 해석 덧붙이는 연금술사들 때문에 한 줄 밖에 안 되는 진리가 이상하게 배배 꼬여 버렸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지금 계절학기를 들으며 씐나게 『논어』를 읽어보니 주석을 안 붙인다는게 말이 안됨을 깨달았다. 말은 박제되면 극히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속성들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잡다한 주석이 필요해지는 것. 덕분에 상상력이 꽃필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론 골치아프다.
가끔 사람들이 '인류는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이 없다'는 자조 섞인 농담을 던지는 것을 보는데 어쩌면 인류는 역사로부터 배우고 싶은 것만 배우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방대한 기록의 집합이다.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사실을 추려낼 것인지를 정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방대한 실험 자료 속에서 어떤 값이 잘못되었고 어떤 값을 취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물리학자의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물리학자의 기준이 자신이 알고 있는 이론이었다면, 역사가의 기준은 자신이 역사로부터 얻기를 원하는 교훈이라는 점이 다를 것이다. 다만 역사의 경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인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확증편향을 제어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차이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의미랄까.
한편으로는 역사에 대해서는 읽은 것이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밖에 없어서 성급하게 논리를 밀어붙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분명히 내가 취한 관점은 카의 관점-내가 이해한 바로는 역사는 미래로 나아갈 개략적인 방향을 판단하는 기반이라는 주장이다-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역사에 대한 입장이 카와는 정반대에 해당하는 역사가들도 있다고 알고 있지만 아직 그들의 글을 읽은 적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생각나는 관점은 역사는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라는 중학교 국사 선생님의 말씀 뿐.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설전이 벌어져 끼어들었다가 역사에 대한 말이 튀어나와서 급히 든 생각이다.
본격_역사_무용론.gaesori
이 글과 관련해서 적으려고 하는 글이 있는데(특히 80년대의 경제개발과 박정희 향수에 대해) 적기 매우 귀찮아서 고민. 어차피 역사는 그 집단의 정체성을 규정하기에 박정희 시대에 대한 재평가는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은 타는 것이 원칙. 우리는 이 재평가에 대항해 무슨 소리를 해야 하는가가 주된 내용이 될 듯. 일단은 계절 과제를 합시다...ㅜㅜ
방금 『무연사회』 정독 끝. 두시간 정도 만에 거침없이 읽은 것을 보면 미친듯이 빠져들어 읽은 모양이다. 읽으며 어제 본 「스카이 크롤러」 DVD의 한 장면-동정심은 오히려 모욕하는 것- 이라는 대화도 생각나고(니체도 비슷한 말을 했었는데), 크로스로드 SF 단편선에「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단편도 생각나고, 마지막 장에서는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에서 수학자의 절규도 생각나고, 『한비자』의 '선비는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말도 생각난다.
모두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쓸쓸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것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것이라면 더욱. 어차피 한 줌 먼지로 사라져갈텐데 무엇이 그토록 우리를 쓸쓸하게 만드는걸까. 나도 그다지 집착이 강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을 보면 아직은 아닌 모양이다.
난 개인적으로는 죽은 뒤 화장되고 바람에 실렸으면 좋겠다. 날 찾는 사람이 있다면 창문을 열고 밤바람의 손길에 내 온기를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어린왕자처럼 별을 보면서 눈을 맞추는 것이 더 로맨틱하니 우주에 흩어지면 더 좋겠지만 의미 없는 먼지보다는 위성 하나가 더 올라가는게 나을테니 선택지에서 배재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날 기억해달라는 소망이겠지 싶은 생각도 든다.
이전에 러닝맨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초능력자 특집을 한 적이 있었다. 등수대로 특수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술래잡기 놀이였는데 다른 것은 기억이 잘 안 나도 확실히 기억나는게 두 가지 있다. 1등은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꼴등은 공간을 재구성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다른 사람들도 시간의 흐름에 거스르는 것-혹은 망각이라는 시간의 힘을 거부하는 것-을 가장 소망한다는 의미일까.
병렬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마구잡이로 적어넣으니 글이 난잡하네. 내일 아침 정리해야겠다.
『무연사회』 감상의 조각이랄까? 어떻게 보면 위의 고양이 이야기와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영도 작가님의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가 떠오르는 기사네요. 뉴욕이 전세계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해 다양한 언어가 번창하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사라지는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가 남겨지는 일종의 '언어의 무덤'이라는군요. 그러면서 한 언어로 남겨진 지식이 다른 언어에 완벽히 번역되기 힘들어 사라져가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난다고 합니다.
사라져가는 것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말기 환자의 모르핀 투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읽다 보니 예전에 읽다가 중간에 그만둔 소설 속 상황이 생각나네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에는 소마(soma)라는 일종의 환각제가 등장합니다.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담배 피듯이 이 환각제를 투여하곤 하죠. 그리고 담배처럼 독성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주인공인 존이 자기 어머니가 소마에 빠져 살자 왜 그것을 놔두냐고 의사에게 항의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의사는 쿨하게 어차피 여생도 얼마 안 남았으니 짧더라도 고통없는 삶을 사는 것이 고통스럽게 조금 더 연명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하죠.
안락사 개념도 이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죽음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반사체(半死體)로 연명할 것인지 결정하는 행위니까요. 일반적으로 안락사를 소극적 안락사와 적극적 안락사로 구분하는데, 가망이 없는 치료의 중단으로 인한 죽음을 소극적 안락사로, 더 이상 치료의 희망이 없으므로 죽음을 유도하는 약물 등을 투여하는 것을 적극적 안락사로 분류합니다. 많은 국가에서 소극적 안락사는 인정하는 한편 적극적 안락사에는 살인방조죄와 비슷한 항목을 적용하여 처벌하고 있죠.
한편 안락사라는 개념은 자살하고도 이어볼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의미있는 삶이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경우 혹은 오히려 생존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퇴색시킨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 삶을 지속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이니까요. 알베르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자살이라고 선언했었지요.
한편으로는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한 니체의 말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즐거운 지식』에 실린 말이죠. Wir aber wollen die Dichter unseres Lebens sein. 우리는 우리 삶의 시인이고자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시를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까요. 그 시 한줄 한줄을 읊어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고민해야 할 문제겠지요.
사람은 죽기 위해 살아가는 법이다. 어떻게 죽느냐를 고민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운명. 누구나 자신이 좀 더 괜찮은 시로 맺어지기를 바라는 법 아니겠는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낸 다큐. 개인적으로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싫어하는지라 아무래도 비판적으로 보게 되는 효과가 있네.(그것보다는 내가 안티테제적인 성격만 남아있는것도 한 몫 할듯...-_-;;)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이 미국이 주도한 것이며 박정희는 경제성장 전략을 짠 장본인이 아니라는 내용.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닌게 저 당시 미국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는 공황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경계했다. 독일과 일본이 이차대전 패전국이었어도 빠르게 회복한 이유이기도 하고.
중간의 박정희가 일본에서 한 말은 관계가 없지만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넣은 듯한 느낌이다. 현 한국정치에서 양쪽이 제일 크게 내세우는 인물이 각각 박정희하고 노무현인데, 일단 민족문제연구소라면 어느 쪽 성향을 가지고 있을 지 빤히 보이지 않는가.
내용 자체는 생각해 볼 것이 있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정책을 짠 것이 박정희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 정책을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은 박정희였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 정책에 반대를 하고 반항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행했다는 것.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저 당시 군사독재를 했지만 대한민국처럼 미친듯이 경제성장을 한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당장 아프리카의 저 당시 군부독재만 봐도 그 사람들은 자기 뱃속 채우기 급급하느라 쿠데타에 연이은 쿠데타에 시달렸지, 경제발전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내세운 명분이 "혼란에 빠진 국가를 재건한다"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그 명분에 발목이 잡혀서 실제로 재건을 넘어서 발전까지 이루었다.
물론 반론이 가능한 부분은 있다. 당시 아프리카는 미국에게는 관심 밖의 제3지대였고, 한반도는 자칫 잘못하면 소련으로부터 직접 미사일이 날아올 수 있는 최전방이었으니 대한민국에 지원을 해 주었을 것이고 아프리카는 그런 것 없이 홀로서야 했다는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사실도 박정희가 경제발전같은건 쌩까고 자기 뱃속만 채우려 했다면 경제발전이 가능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긴 전혀 경제발전을 할 생각이 없었다면 CIA 요원이 쿠데타를 유도해서 다른 누군가로 지도부를 갈아치웠겠다만 그건 언제까지나 가정이고.
이렇게 말하면 내가 박정희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 같아 덧붙이자면, 난 박정희 대통령으로 안 본다. 대한민국은 90년대 초까지 전제군주정이었잖아. 윗동네는 아직도 하고 있고.
회색분자의 등장. 대선 전에 올린 글일듯? 그리고 난 대선 투표에서 진짜 회색분자가 되었다 -_-;; 누가 되든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던 것. 그런데 투표 끝나고 대선 결과 나오니까 기분이 급 나빠진 건 함정...
개인적으로 궁금한 건데, 내가 봐도 민주당 대북정책은 뒤통수 한데 후려갈기면서 정신차리라고 일갈을 넣고 싶을 정도로 병맛이지만 그게 종북이란 라벨이 붙을 정도로 국가를 팔아먹는 행위냐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대선 전에 페이스북 공개로 돌려놨어야 했나...-_-;; 대북정책이 일관적이지 못한 이유는 국민적 합의가 딱히 없다는 것이라는게 내 지론. 헌법상에야 통일을 해야 한다고 되어 있지만 일단 나부터도 그렇고 의외로 통일 해야 하냐는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다.
이전에 유럽우주국(ESA)의 아리안 5호 로켓이 비싸다고 까면서 혜성같이(?) 등장한 SpaceX사의 팰컨9 로켓 이야기를 전해드렸는데, 이번에는 반격에 나설지도 모르는 유럽우주국의 이야기입니다. 현재 유럽우주국이 민간 기업 Reaction Engine Ltd.에 새로운 추진체 개발을 의뢰한 모양인데, 이 추진체는 대기권에서는 대기의 산소를 이용하다가(제트기의 제트엔진과 같은 방식이라는군요. 항공기처럼 활주로에서 이륙하고 착륙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대기가 옅은 고도에 도달하면 그때서야 내장된 산화제를 이용하는 방식이랍니다. 이렇게 하면 대기에서부터 산화제를 쓸 필요가 없으므로 필요한 연료의 양을 줄일 수 있게 되지요.
이런 추진체가 완전히 개발된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첫 단계인 고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대기를 급냉시킬 수 있는 가벼운 열교환기를 제작하는데 성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속으로 날 때는 공기가 매우 차가운 대기 상층부일텐데(영하 70도까지도 떨어지죠) 왜 냉각장치가 필요한지 궁금하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공기를 냉각시켜야 하는 이유는 그 공기를 압축하면 온도가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공기를 압축하려면 일을 해야 합니다. 다들 풍선 속에 공기를 집어 넣는 일은 해 보셨으니 이게 꽤 힘이 든다는 것은 아시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공기를 압축하는데 쓴 일은 어딘가에는 저장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에너지 보존 법칙이고요. 그러면 이 에너지는 어떻게 저장되느냐 하면 다 열에너지로 저장됩니다. 그래서 공기의 온도가 올라가게 되지요.(여담입니다만 매우 고속으로 날아가는 물체가 엄청난 온도로 상승하는 것이 공기와의 마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그 물체가 날아가면서 그 앞에 놓인 공기를 압축하면서 생기는 현상인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성층권을 날아다니는 여객기는 외부 온도가 매우 낮아도 항공기 내부에 승객들이 숨을 쉴 수 있을 정도의 압력으로 압축하면서 온도가 너무 크게 상승해서 에어콘을 돌리고 있지요.
냉각이 어려운 이유는 겨울날 자고 일어나면 창문에 성에가 서리는 것처럼 냉각되고 있는 입구에 얼음이 껴서 공기가 들어오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시연에서는 그런 위험 없이 잘만 냉각하더라 보였다고 하네요.
일단은 훨씬 싼 가격에 우주로 나가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보다는 냉각장치에 더 관심이 갑니다. 이런 급냉장치가요즘 연구되는 램제트나 스크램제트에(이런 추진기관들은 기본 운용 속도가 마하수 5 근처입니다. 전투기들도 일시적으로만 낼 수 있는 최대속도가 마하수 2.5 정도밖에 안되는데 기본적으로 그런 속도에서만 운용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빠른지 그려지시나요? 참고로 오래 전 예산문제로 퇴역한 SR-71이 기본 운항속도 마하수 3인 괴물이었지요. 블랙버드란 별명을 가진 딱 봐도 아 얜 빠르게 생겼다라는 말이 나오는 그 비행기입니다. 초고고도 정찰기인 U-2기가 미사일에 맞고 추락해서-사실 미사일이 안 닿는 고도에서 날아다니는 비행기인데 고도가 너무 높으면 산소가 없어서 엔진이 꺼진다는군요. 하필 그 때 고도가 제일 낮았는데 미사일에 맞았다고...-홧김에 그러면 초고고도에서 총알같이 날아다니는 녀석을 만들자는 생각에 개발되었다고 합니다.)응용되면 이런 추진기관들이 상용화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그나저나 나로호...ㅠㅠ
나로호 ㅠㅠ 나중에 은하3호 보고 어떻게 윗동네 따위한테 질 수가 있는거지 욕을 한 바가지로 했던 기억이 난다. 애꿎은 하늘아 미안하다 ㅠㅠ
모두들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티벳 이야기입니다. 과연 이번에 새로 구성된 중국 정부가 티벳의 자유를 인정할 것이냐는 질문과 닿아 있죠.
약간 곁다리 이야기를 하자면, 예전 영국에서도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문제가 있었죠. 아마 8-90년대의 일일텐데 밀려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살던 사회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다문화정책을 실행했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따로 놀도록 놔둔 이질적인 문화들 사이에 충돌과 슬럼이 크게 증가해서 동화정책을 사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일었지요.
영국이 취했던 다문화정책을 샐러드 그릇으로 표현한다면 중국이 취하고 있는 다문화정책은 용광로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 문화정책은 하나죠. 하나된 중국. 서로 가능한 다문화정책의 양 극단을 이루고 있는 셈인데, 양쪽 다 적잖은 문제가 있는 듯 싶습니다.
우리나라도 근래에 급격히 다문화국가로 변해가는 중이죠. 어떤 다문화정책을 써야 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적당한 중용의 지점은 어디일까요?
제가 어릴 적 배우던 교과서에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점에 단일민족국가라는 말이 들어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곁다리지만 중국이 계속 그 '중화사상'을 이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기는 하다. 언젠가 한번 쓴 대로 무차별적인 융합이 중화사상의 핵심인데 개인의 독립 요구가 갈수록 심해지면 중국으로선 "버틸수가 ㅇ벗다!!"를 외치는 시점이 나타나게 될 테니 말이다. 그 이전에 점차 자유국가로 이전이 일어나려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출간이 50년이 지났답니다. 본 소설은 스탈린 시절 강제수용소의 삶을 다루었고 그 때문에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소련에서 추방당했다고 하네요. 찾아보니 고향에서는 쫓겨났지만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는 말이 있군요.
모스코바의 외곽에는 1km에 걸쳐 13개의 공동묘지가 있다고 합니다. 37년 8월부터 38년 10월까지 20,760명에 달하는 과학자, 농노, 회계원 등이 여기에서 총살당했다고 하네요. 거기다가 이건 전 소련에 걸쳐 스탈린이 벌인 일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네요.
그러면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요? 60여년이 지난 지금,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48%가 긍정적이라고 합니다. 단 22%만 스탈린 시대를 부정적으로 본다고 하는군요.
무언가 낯설지만은 않은 풍경입니다.
대통령만 봐도 낯설지 않지...-_-;;
예전에 X prize라고 민간 우주관광을 실현시키는 사람에게 건 상금이 있었죠. 결국 그 상은 SpaceShipOne이 타갔습니다. 그렇다고 우주시대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가 하면 아직 우주여행은 억만장자를 넘어선 조만장자나 가능한 일로 여겨지고 있죠.
이번 기사는 미 캘리포니아에 기반을 둔 SpaceX라는 회사에서 개발한 Falcon 9 추진체 이야기입니다. 여기 주인장이 유럽우주국(ESA-European Space Agency)의 아리안 5 추진체에 도전장을 내밀었답니다. 건방진 건지는 좀 두고봐야 알겠지만 확실히 우주는 우리에게 한발 한발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누가 그 개발 힘들다는 추진체 기술을 민간 기업에서 갖추리라 상상을 했겠어요. 우주왕복선의 마지막 비행으로 저물 것 같았던 우주 개척기는 국가에 의한 우주개발의 황혼이었나 봅니다. 황혼을 지나 밤을 견디고 나면 여명이 찾아오기 마련이겠죠.
그나저나 어릴 적 아리안 로켓이라는 이름을 참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별다른 이유 없이 그저 아리랑과 닮았다고(-_-;;) 좋았더랍니다. 지금 보면 아리안이란 이름으로 꽤 큰 삽질을 한 집단이 있어서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안 드는지도 모르겠네요.
하여간, 아름다운 별들과 함께 좋은 밤 되세요. 꿈 속에서 별들의 바다를 소요하는 즐거움 만끽하시고요.
글은 만족하지 못한 자들이 쓰는 것이다. 내 절규에 물든 절망을 남들도 이해해주었으면 싶은 마음이든, 감당할 수 없는 풍요에서 진공처럼 비어버린 허무를 이야기하고 싶은 감정이든, 넘처 흘러서 남들에게 퍼주지 않고서는 주체할 수 없는 덕 때문이든 글을 쓴다는 행위는 그 동기가 없어서는 유지될 수 없다. 말은 싸지만 글은 비싼 법이다.(그런데 words면 말과 글 둘 다 해당될텐데?)
지금 내 상황? 글을 쓰고는 싶은데 그 감정보다는 귀찮음이 더 크다고 해야 하나? 글 쓸 거리는 많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박정희 시대의 역사적 재평가와 관련된 부분이라고 생각되어서 언젠가 쓰기는 쓸 거다. 언젠가...
그러고보니 물리 블로그를 표명하면서 근래에 물리에 대해서는 전혀 쓴 것이 없네...-_-;;; 다음학기부터 물리 전공만 신나게 들을 예정인지라 많이 올라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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