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9. 15. 03:04 Writer

버림의 미학

요즘,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예전의 [나무야 나무야]라는 책은 참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이 책 중에는 [버림과 키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서신이 하나 있습니다. 제목에서 내용을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제가 오늘 이 서간을 떠올리게 된 이유는 바로 버림의 아름다움, 그 잃어버린 미에 대한 아쉬움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황금만능주의라는 날카로운 칼에 베일대로 베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만 남은 인간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그 좋았다는 '황금 시절'의 이야기에 불과한, 여유있는 자들의 정신적인 사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이 시대에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욕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되는 시대, 이런 시대에 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비움을 미련함의 연장선상에 두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비움이 현자의 미련함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술잔에 술을 따를 땐 먼저 술잔을 비우는 것이 술과 상대방에 대한 도리이듯이, 무언가로 채우고자 할 때 먼저 빈 자리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 자리가 그릇을 비움으로서 만들어지는 것이든, 그릇을 크게 늘려서 만들어내는 것이든 말입니다. 하지만 그릇을 키우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릇은 그 자신을 이루는 뼈대가 견디지 못할 정도로 비대해지면 결국엔 자신의 과도한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채움의 계교보다는 버림의 지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예전에 법정스님이 전해주신 이야기가 하나 생각납니다. 어느 절의 선사가 버려진 땅을 보고 논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개간에 들일 돈으로 그 갑절의 땅을 살 수 있었지만, 미련하게도 계속 개간을 고집했다고 합니다. 혜월 선사. 이분은 분명히 어리석었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눈으로 보면, 아니 세속으로 물든 시대의 눈으로 보면 그는 경제의 경자조차 모르는 천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리석음 덕에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는 미련한 현자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비움으로서 그릇을 넓힐 줄 알았던 시대를 초월한 현자였던 것입니다.

저 멀리 중동의 어느 모래사막 한가운데에는 사해라는 커다란 호수가 있습니다. 오만하게도 호수 주제에 바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전 바다라는 이 이름이 아주 잘 지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호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바다만큼 커다란 교훈을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제주도처럼 길쭉한 이 바다가 죽음의 바다가 된 이유는 비움의 미학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해에는 물이 요르단 강으로 들어오기만 하지 빠져나가는 곳은 없다고 합니다. 결국 사해의 염도는 세계의 그 어느 바다보다도 진해지고 말았고, 이런 높은 염분을 견디고 살아남은 생명체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답니다. 비움의 미학을, 버림의 아름다움을 잊어버린 그릇이 제 탐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사해의 교훈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비록 미련한 현자의 지혜를 따라가지는 못하더라도, 지나친 욕망으로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 외침이 이 에피메테우스들의 세상에 공허한 메아리로만 남지는 않을지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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