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10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좀 오래된 책이긴 하지만, 이제야 읽었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내용에 대해 정리하고 공감을 표시했으니, 전 이번 리뷰에서 내용 요약보다는 감상 및 의문점 정리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주로 책을 읽고 중간 중간에 느낀 감상을 포스트잇으로 짧게 정리해 둔 것인데, 옮겨봅니다.



1. 1984년 FAO 평가 - p37

'지금의 생산력으로 120억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모두 하루 2,400~2,700Kcal의 영양분을 제공할 수 있다' 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지금의 인구는 약 65억명입니다. 한 사람당 약 5.000Kcal의 식량을 제공할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중국의 미등록 인구까지 고려하더라도 최소한 3,500Kcal는 제공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저 숫자가 1984년의 숫자란 말입니다. 지금은 수가 훨씬 늘어났을텐데 지금은 어느정도의 생산력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군요.

하지만 저 곡물이 전부 인간에게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농장에서 재배되는 소들도 곡물을 섭취하고 있고, 더군다나 요즘은 대체에너지로 바이오에너지가 부상하면서 에탄올을 만드는 데 곡물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단백질을 얻는 데 귀한 곡물이 들어가는 것은 제거할 수 있지만(가능성은 비록 매우 낮다 하더라도) 에탄올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각주:1]



2. 간호사의 슬픔 - p51

에티오피아 간호사가 살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 살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을 분류하고 살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거절을 표현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워낙 물자가 부족하니 살 가능성이 있는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는 것이지요.

고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적절한 치료를 받아 살아난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받을 때, 잠깐동안 막혔던 숨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겠지요. 하지만 다시 거절을 해야 하는 상황에 도달했을 때, 심연의 물통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어야 하는 고통이 되살아나겠지요.

무기력하군요.... 바뀔 수 있지만 바뀌지 않는 현실이란..



3. 꿈에 대하여

마지막 강의에서 랜디 포시 교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원서를 기억나는 대로 번역해 적는 것이니 굳이 대조하지는 않아주셨으면...)

"물론 세상엔 시급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 온 것은 꿈입니다. 꿈을 제시하는데 돈이 사용되는 것은 비판받을 일은 아닙니다."

옳은 소리입니다. 하지만 꿈을 꿀 수 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꿈이 해독제가 되어줄 수 있을까요?
꿈과 현실,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어 보입니다.



4. 아옌데 정권의 붕괴 - p101

아옌데 정권은 다국적기업 네슬레와 미국 정부의 비협조, 아니 방해로 인해 개혁에 실패합니다. 이후 미국 정부에서는 CIA를 통해 이 정부를 뒤집습니다.

미국의 깡패적인 면모를 들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 왜 그렇게 다들 미쳐있었는지에 대한 유감을 표시하고 싶을 뿐입니다.

분명히 글에는 명시되어 있습니다. '... 아옌데 정권의 사회주의적 개혁정책을 꺼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당시는 1970년대,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였겠지요. 이데올로기건 뭐건 사람 살자고 만들어놓은 것인데 그것 때문에 사람이 죽어야 한다니 아이러니한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사막화, 현대에 와서 문제가 된 이유는? - p109

아프리카의 여인들은 나무를 때어 식사를 준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왜 이런 행위가 예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요?

옛날에는 사람은 적고 나무는 많아서 베어진 나무들은 사람들이 돌아올 때 즈음이면 다시 원상태로 자라나 있어서 그러지 않았을까라고 살짝 예상해 봅니다.

그리고 조금은 엉뚱한 것을 추가적으로 덧붙입니다. 석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금은 석탄이 매우 좋은 화석연료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석탄이 대중화될 때에는 이런 석탄을 보고 '검은 돌을 때워 불을 만든다'는 의식이 강했다고 합니다. 나무가 없어서 꿩 대신 닭으로 석탄을 이용한 것이지요. 나무와는 달리 태울 때 독한 연기가 풍겼으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6. 르 아이으 주민들의 이야기 - p120, 124

고통은 연대와 기이한 공생관계를 가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드라마같은데서(전 거의 보지 않지만) 자주 그러잖아요. 부잣집 아들딸들은 유산 놓고 싸우다가 완전 콩가루 집안이 되어버리는 반면에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은 잘 지내는 것처럼. 신의 저울대는 참 신기한 것 같네요. 무언가 하나가 만족이 되면, 항상 다른 무언가는 만족되지 못합니다.

그것보다도 이분들은 무엇으로 삶을 유지하는지 궁금하더군요. 경제활동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는데 어디서 먹을 것을 얻었을까요...?



7. 토마스 상카라와 박정희 - p151

닮았습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나라를 개혁하려고 했지요. 그리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살해당했습니다. 하나는 4년간 정권을 잡았고, 다른 하나는 그 네배의 기간동안 정권을 잡았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했던 악행들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고,[각주:2] 전 여기서 개혁이라는 것이 그 국가의 내부적인 요인뿐만이 아니라 외부적인 환경에 얼마나 크게 영향받는지를 논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토마스 상카라의 경우입니다. 토마스 상카라의 경우에는 주변 국가들의 부패한 대통령들의 외압으로 인해 결국 살해당했다고 나옵니다. 더불어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지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개혁 자체는 성공했습니다.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였지요. 여기서 재미있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대한민국의 경우 주변 국가중에는 부패한 독재자가 없었다. 주변 국가라고 해 봐야 일본뿐이니(냉전시대입니다. 북한과 중국은 적이던 시대예요.) 말 다 했지요. 둘째,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극한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땅 위에 서 있었다. 전 90년생이라 7-80년대의 반공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들은 건 있어서 이념대립이 무지하게 심했다는 사실 하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두 특징이 절묘하게 조합되어 성공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주위에 부패한 독재자가 없었다는 것은 개혁을 시도했던 박통에 딴지를 걸 외부세력이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는 부패한 권력자가 없으니 개혁에 태클을 걸어야만 하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냉전의 효과가 가장 컸다고 보여집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방어선의 최전방에 서 있습니다. 적어도 미국의 입장에서는 말이지요. 사회주의는 보통 경제가 침체된 국가에서 주로 퍼지기 때문에 미국은 2차대전 이후 서부유럽의 재건에 많은 돈을 썼다고 알고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사회주의에 그다지 흥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지요. 하물며 유럽에서도 그랬는데, 아시아에서 이념대립의 최전선에 서 있는 국가에서 잘 살아 보겠다고 아둥바둥 거리는 것을 방해할 이유는 없지요. 물론 여기에는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노선을 타고 있었다는 것도 한 몫 할 것입니다.



8. 숫자에 대해서

일찍이 켈빈경은 숫자의 중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한 적이 있습니다.

http://zapatopi.net/kelvin/quotes/

"In physical science the first essential step in the direction of learning any subject is to find principles of numerical reckoning and practicable methods for measuring some quality connected with it. I often say that when you can measure what you are speaking about, and express it in numbers, you know something about it; but when you cannot measure it, when you cannot express it in numbers, your knowledge is of a meagre and unsatisfactory kind; it may be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you have scarcely in your thoughts advanced to the state of Science, whatever the matter may be."

- PLA, vol. 1, "Electrical Units of Measurement", 1883-05-03

요즘 한 숫자에 사람들이 죽고 삽니다. 경제성장률이라는 숫자입니다. 도대체 이 숫자가 무엇을 나타내길레 이 숫자 하나에 죽고 사는 것일까요?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은 탓, 제가 매우 어렸던 탓도 있겠지만, 전 제 생활이 저 숫자에 의해 흔들리거나 뒤바뀌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저 숫자가 높으면 행복한 삶을 보장해 주고 저 숫자가 낮으면 어쩔 수 없이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요? 747이라는 작명소에서 지은 공약이 생각나는군요.

그리고 통장에 찍히는 숫자 하나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생각나네요. 먹고 살 정도의 돈을 제한 나머지는 사실 불필요한 통장의 숫자에 불과하지 않나요? 거대한 자본을 움직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하는 말입니다.[각주:3] 하긴, 제가 욕심이 너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써 놓고 보니 파생되어 나온 내용이 너무나도 많네요. 그만큼 많은 생각을 던져주었던 책인가 봅니다. 다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1. 실제로도 바이오에너지는 식량난을 부추기기 때문에 적절한 대체에너지는 아니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본문으로]
  2. 그렇다고 박정희가 좋은 대통령이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 해야지요. 그 당시에 경제성장률이 매우 높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본문으로]
  3. 물론 이 숫자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무조건 잘못된 삶은 아닙니다. 65억의 사람 수 만큼 65억가지의 다른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지요. 하지만 전 이 분들이 자유라는 이름을 내세워 남을 갈취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프로복서와 초딩의 권투경기가 자유로운 경기가 아닌 것처럼, 이 분들이 원하는 자유는 자유라는 이름의 폭행일 뿐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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