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그렇다네. 그러면 말해보게, 세상에 악이 있는가?
학생: 네.
교수: 악은 어디에나 있지, 그렇지 아니한가? 그리고 신은 모든것을 만들었지. 맞는가?
학생: 네.
교수: 그렇다면 악은 누가 만들었는가?
(학생은 대답하지 않는다.)
교수: 세상에는 아픔, 부도덕, 추함 등의 추악한 것들이 존재하지, 그렇지?
학생: 그렇습니다, 교수님.
교수: 그렇다면 누가 그것들을 만들었나?
(학생은 대답하지 않는다.)
교수: 과학은 사람이 세상은 인지하는데 5가지 감각을 사용한다고 하지. 그렇다면 대답해보게 젊은이, 신을 본적이 있는가?
학생: 못 봤습니다, 교수님.
교수: 그렇다면 신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학생: 아니오, 교수님.
교수: 그렇다면 신을 느끼거나, 맛보거나, 냄새 맡은 적도 없는가? 신을 어떠한 감각으로도 인지한 적이 있는가?
학생: 아니오, 없습니다. 교수님.
교수: 그런데도 아직 신을 믿나?
학생: 네.
교수: 과학은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논증으로 신이 없다고 말하네. 자네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학생: 저는 단지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교수: 그래, 믿음. 그게 과학이 가지지 못 한 것이지.
학생: 교수님, 세상에 열이란 것이 있습니까?
교수: 물론이지.
학생: 그러면 차가움이란 것도 있겠지요?
교수: 그렇다네.
학생: 아닙니다, 교수님. 그런 것은 없지요.
(강의실은 이 반전에 순간 적막이 흘렀다)
학
생: 교수님, 많은 열, 더 많은 열, 초열, 백열, 아니면 아주 적은 열이나 열의 부재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가움이란
것은 없지요. 영하 273도의 열의 부재 상태로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이하로 만들 수는 없지요. 차가움이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차가움이란 단어는 단지 열의 부재를 나타낼 뿐이지 그것을 계량할 수는 없지요. 열은 에너지이지만, 차가움은 열의
반대가 아닙니다. 교수님. 그저 열의 부재일뿐이지요.
(강의실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학생: 그렇다면 어둠은 어떻습니까, 교수님? 어둠이란 것이 존재하나요?
교수: 그렇지. 어둠이 없다면 밤이 도대체 왜 오는가?
학
생: 그렇지 않습니다, 교수님. 어둠 역시 무엇인가 부재하기 때문에 생기지요. 아주 적은 빛, 보통 빛, 밝은 빛, 눈부신 빛이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아무 빛도 존재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이라 부르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실제로
어둠이란 것은 없지요. 만약 있다면 어둠을 더 어둡게 만들 수 있겠지요, 그럴 수 있나요?
교수: 그래, 요점이 뭔가, 젊은이?
학생: 교수님, 제 요점은 교수님이 잘못된 전제를 내리시고 있다는 겁니다.
교수: 잘못되었다고? 설명해 줄 수 있겠나?
학생: 교수님, 교수님은 이분법적인 오류를 범하고 계십니다. 생명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선한 신이 있으면 악한 신이 있다는 논지이지요. 교수님은 하나님을 유한한, 우리가 측정 가능한 분이라 보고 계십니다.
교수님, 과학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는 점조차 설명을 못합니다. 전기와 자기를 말하지만, 볼 수는 없지요.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건 물론이구요. 죽음을 생명의 반대로 보는 건 죽음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무지해서 그런 겁니다. 죽음은
생명의 반대가 아니라 단지 생명의 부재일뿐이지요. 교수님은 사람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고 가르치십니까?
교수: 자연 진화 과정을 말하는 거라면 그렇다네.
학생: 그렇다면, 진화의 과정을 눈으로 목격한 적이 있습니까, 교수님?
(교수는 논리가 성립되어감을 보고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학생: 아무도 진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목격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을 증명하지도 못했으니 교수님은 개인의 의견을 가르치시는 거 겠군요, 교수님. 마치 과학자가 아닌 연설가 처럼요.
(강의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학생: 이 강의실에 교수님의 뇌를 본 사람이 있나요?
(강의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학
생: 여기에 교수님의 뇌를 듣거나, 느끼거나, 맛보거나, 냄새 맡은 적이 있는 분에 계십니까? … 아무도 그런 적이 없는 것
같군요. 그러면 과학은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논증으로 교수님의 뇌가 없다고 말하는군요. 그렇다면 교수님의 강의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습니까?
(강의실은 고요했다. 교수는 심오한 표정으로 학생을 응시했다.)
교수: 사실을 믿는 수밖에 없겠군, 젊은이.
학생: 바로 그겁니다, 교수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믿음" 입니다. 그게 바로 모든 것을 움직이고 생명 있게 만드는 것이지요.
(교수는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학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교수의 시선에 따라 학생들의 시선이 옮겨졌다. 교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그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교수: 무슨 일인가?
사티레브: 저는 사티레브(Satirev)입니다. 이 대학의 졸업생이죠.
교수: 그래, 왜 손을 들었는가?
사티레브: 저 돌아버린 학생과 그 학생을 인정하는 어떤 멍청한 남자 때문에 이 강의실을 나갈까 해서 말입니다.
(사티레브의 말에 교수와 학생은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자신을 향해 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교수: 누구에 대한 불만인가. 나인가, 아니면 저 젊은이인가?
사티레브: 저 젋은이가 돌아버린 자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만, 교수님께서 이렇게 버벅 거릴 줄은 몰랐습니다.
학생: 제가 말한 것에 문제가 있습니까?
사티레브: 문제가 없는 게 뭐냐고 묻는 게 더 빠를 듯하군.
(사티레브는 강의실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학생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그를 보며 조용히 숨을 쉬었다. 학생과 사티레브는 서로 마주보고 서있었다.)
사
티레브: 자네는 전자기파에 대해서 언급했었지. 그럼 묻겠네, 자네는 분명 어떠한 감각기관으로도 신을 느끼지 못했다고 진술했지.
그리고 자네는 전자기와 신 모두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어. 그럼 자네는 어떻게 예시로 든 전자기파라는 것을 알고 논하는가?
전자기파도 믿는가? 퀄컴은 자네가 믿는 두 번째 신인가?
(사티레브의 말에 일각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학생: 오감으로 인지할 수 없는, 그러나 실재하는 것이 있음을 말하려 한 것입니다.
사
티레브: 말장난이네. 우리의 오감은 분명 한계를 가지고 있지. 그리고 우리는 오감으로 느끼지 못하는 걸 지각할 수 없다네.
고래의 초저주파, 박쥐의 초음파 등이 그러하지. 그러면 우리가 지금 논하는 초저주파, 초음파는 모두 믿음의 결과물이겠네, 안
그런가?
(학생은 말이 없었다.)
사티레브: 우린 지각할 수 없는 대상을 지각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기술을 개발시켜오고 있지. 들리지 않는 라디오 전파는 라디오 회로를 거쳐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바뀐다네. 아, 자네는 라디오
전파도 믿는가? 어느 채널을 믿는가?
(강의실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티레브: 우린 자네가 지각 불가능하다고 내민 예시를 이미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지각하고 있지. 그래프로든 소리로든 간에.
(학생은 긴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티레브: 신이 지각 불가능한 대상이라는 건 괜찮은 접근이라네. 불가지론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과학으로도 관측되지 않는, 바로 그 절대자 말일세. 하지만 말이야, 과학으로 관측되지 않는 개체가 또 있다네.
학생: 천사 말입니까?
사티레브: 아니네. 바로 제우스라네.
(제우스라는 단어가 나오자 강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학생: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를 말씀하십니까?
사
티레브: 아니라네. 그리스 경전의 제우스를 말하네. 자네에겐 그것이 신화일지 모르겠지만, 유대민족들이 믿던 신화에 비하면 그리스
경전은 더욱 감성적이고 인간적이며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예수의 희생도 프로메테우스의 희생에 비할 바가 못 되지. 야훼는
태초부터 존재하여 인간 세상에 오지랖이란 오지랖을 다 떨지만 제우스는 타이탄 신들과의 싸움을 통해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낸
개척자라네. 자네가 소위 성경이라 부르는 기독경은 제우스가 세상에 내린 두 번째 판도라의 상자라네. 그걸 연 자네는 그의 함정에
빠진 거라네.
학생: 어떤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집필자가 밝혀져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이것이 판도라의 상자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사티레브: 느낄 수 없다는 게 바로 판도라의 상자라는 증거라네. 교묘한 함정은 토끼가 전혀 느낄 수 없게 짜여있다네.
학생: 기존의 상식을 깨는 주장이군요.
사티레브: 반증이 가능한가? 나는 제우스와 믿음으로 관계하고 있다네.
(학생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판 논리의 함정에 빠졌음을 안 그는 당혹감을 느꼈다.)
사티레브: 그리고 제우스는 자네 같은 크리스찬들을 전부 타르타로스에 넣을 것이라 하였네. 가짜 신을 믿는다는 이유로.
학생: 그런 구절은 그리스 신… 경전에 없을 텐데요.
사티레브: 나와 제우스는 책이 아닌 믿음으로 관계한다네. 자네들이 성령이라 부르는, 그런 것과 비슷한 개념이 나에게 진리를 속삭인다네. 다만 나에게 온 성령은 자네의 성령과는 이름이 다르다네. 그리스령이라고 하지.
교수: 성령이라는 걸 자네가 입증할 수 있나?
사티레브: 자기 머리에 뇌가 있는지도 장담 못하는 교수님이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그리스령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아마 교수님은 X레이나 MRI로 머리를 찍어본다면, 인화된 사진을 벽에 붙여놓고 하루에 5번씩 기도하겠죠?
(교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나왔으나 교수가 그쪽을 바라보자 웃음소리가 멈췄다.)
사
티레브: 장난은 그만하도록 하지. 제우스 하나에 쩔쩔매는 주제에 시바(Shiva),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등은
어떻게 상대할 건가. 자네가 펴는 그 알량한 논리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다네. 심지어 야훼를 뜯어먹는
전설의 코요테를 생각해볼 수 있겠네.
학생: 예의에 어긋나는 표현입니다.
사티레브: 자네들이 소위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들에게 대하는 태도에 비하면 아주 신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지옥이니 심판이니 하며.
학생: 좋습니다. 제 논리가 악용될 여지가 있음은 인정합니다만, 논리 자체에서는 모순점을 찾지 못하신 것 같군요.
(사티레브는 크게 웃었다.)
사티레브: 지금, 자네는 자네의 논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 좋아, 그럼 자네가 언급한 걸 이야기해보지. 자네는 진화를 부정하는 것 같던데, 아닌가?
학생: 창조를 전 믿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 누구도 진화하는 과정을 본 적 없으며, 그건 단순히 이론에 불과합니다.
사티레브: 단순히 이론? 허… 자네가 진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진화하는 과정이 관측되지 않아서겠네, 자네의 말에서 유추하자면.
학생: 그렇습니다.
사티레브: 화석이 있지 않은가?
학생: 진화의 과정을 설명하기에 화석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미싱링크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학생의 말에 사티레브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강의실 왼쪽의 학생들도 입에 웃음을 머금고 상황을 바라보았다.)
사티레브: 자네는 내가 아기에서 지금의 성인의 몸으로 성장했다고 보는가?
학생: 그렇습니다.
사티레브: 자네가 내 성장과정을 관찰했나?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랬을 수도 있지 않은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교수는 민망함을 느끼고 등을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학생: 사진이 있을 것 아닙니까?
사
티레브: 물론이라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사진이 있지. 나머지 사진들은 애석하게도 집에 화재가
일어나서 잃었다네. 하지만 나의 성장을 말하기엔 사진이 턱없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 많은 화석도 충분치 않은 자네가 5장 밖에
안 되는 내 사진으로 나의 성장을 장담할 수 있겠나. 물론 내 사진이 백 장 넘게 있다고 해도, 자네에겐 하염없이 부족하겠지.
미싱링크라는 말, 들어봤나?
학생: 사티레브 씨에게 미싱링크가 있단 말입니까?
사티레브: 그렇다네. 난 태어나자마자 제니퍼 로페즈의 몸으로 살았다네. 그러다가 헤라 여신의 시샘으로 인해 지금의 평범한 몸이 되어버렸지.
(학생은 할 말이 없었다. 사티레브의 말장난이 주는 당황스러움과 그게 자신의 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그는 땀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
티레브: 당황스러울 거네. 난 자네의 논리를 하나하나 반박해야 할 의무감마저 느끼지 못하고 있네. 자네의 논리대로라면 난
제우스를 숭배하며 번개 걱정 없이 비오는 거리를 걸을 수 있고 남들에게 제니퍼 로페즈 시절을 자랑할 수 있지. 자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망상을 실재한다고 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버렸네.
학생: …
사티레브: 진화론은 양상이라네. 태초의
생명체를 설명하는 게 진화론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네. 함수로 보자면, x값이 0일 때의 y값을 찾는 게 진화론이라는 학문이
아니네. 우린 x값에 따른 y값의 변화 양상을 진화라 명명하고 그걸 연구할 뿐이네. 화석이 부족해서 진화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네는 수천 개의 점을 구해놓고도 그래프 하나 못 그리는 순수한 중학생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라네.
(학생은 잠깐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학생: 그러면 열, 빛에 관한 제 의견도 문제가 있습니까?
사
티레브: 당연하지. 선한 신, 악한 신에 대한 것 말인가? 자네는 열과 차가움, 빛과 어둠의 예시를 통해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저 교수를 눌러보려 했지. 하지만 선과 악은 분명 따로 존재한다네. 선이 약하면 악이 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는 걸세.
학생: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티레브: 애초에 이해를 했다면 그런 멍청한 발언은 꺼내지도 않았겠지. 예를 들어봄세. 자네가 빅맥을 먹고 싶은 데 50센트가 부족하다고 해보자. 만약 내가 자네에게 50센트를 준다면, 나는 선한가?
학생: 선합니다.
사티레브: 그럼 내가 자네에게 1센트를 준다면?
학생: 마찬가지로 선합니다.
사티레브: 내가 한 푼도 주지 않는다면?
(학생은 망설였다.)
사
티레브: 선하지 않지. 그러나 이게 악한 건 아니라네. 내가 자네의 1센트를 뺏는다면, 그건 악한 행동이겠지. 열의 부재가
차가움이라고 했지만, 선의 부재는 악이 아니라네. 선도 악도 아닌 그 중간적인 것이 자네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세상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자네에게 50센트를 주지도, 빼앗지도 않는 자들이 지천에 널려있다네. 이런데도 선의 부재를 악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있는가?
(학생들은 사티레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탄성을 질렀다. 교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
티레브: 정리하지. 자네는 선과 악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하여 다시는 나와 볼 일 없을 저 교수를 함정에 빠뜨렸고 진화론에 대한
자신의 이해 부족을 관측의 부족으로 보는 오만한 발언을 했다네. 신이 오감으로 지각되지 않는 대상이라며 이미 상식으로 인지하고
있는 전자기파를 예시로 들고 나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말이야,
(사티레브는 학생 앞으로 걸어갔다. 학생은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
티레브: 거증책임은 자네에게 있다네. 신이 있냐고 질문한 건 교수라네. 그럼 자네는 교수가 무엇을 얼마나 아느냐에 상관없이 신이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어야 하네. 결국 자네가 말한 것들 중 신이 있다는 증거 또는 논리를 내포한 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자네는
고작 교수의 말에 말도 안 되는 답을 해놓고서 결국엔 믿음이라는 결론을 내렸지. 자네는 신이 있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믿은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함을 밝힌 꼴이 되었지.
(학생은 답을 하지 못했다.)
사티레
브: 천하의 교수가 저 정도인데, 갓 유치원에 입학한, 또는 갓 중-고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얼마나 자네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겠는가. 허나 언제나 그러하듯 자네들의 말은 신이 존재한다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네. 자, 이제 신이 존재한다는 근거를
어디서 끌어올 건가?
학생: 성경이 있습니다.
사티레브: 자네, 아까 그리스 경전의 그리스령이 한 말을 잊었나? 판도라의 상자라니까. 반증할 수 있는가?
(사티레브는 웃으며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학생들도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교수와 학생을 힐끗 쳐다보며 밖으로 나갔다. 강의실에는 교수와 학생만이 남았다.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재미있는 글이라서 퍼왔습니다 -_-;;
흠... 원래 과학에서 말하는 신은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쪽에 가깝죠.(물론 여기서 신은 만물에 대해 중립적인 신을 의미) 그리고 존재와 존재하지 않음에 차이가 없다면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논리선별법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합당하다는 쪽이고요.
종교적인 의미의 신은 과학적인 증명을 때려 치는게 옳다고 보기는 합니다. 언제까지나 '무엇이 과학인가'의 문제인데, 믿음은 과학과는 좀 거리가 있어서요. 그런데 과학적으로 논증할 때 기준을 누구의 것으로 삼느냐가 문제네요. 포퍼의 논의가 어느 정도 우수하기는 하지만 역시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각주:1] 쿤은 '정상과학'이라는 지속적인 체계가 존재한다고 한 것에서만 의의를 찾을 수 있어서요. 그래도 포퍼의 기준을 들이대면 '가설에 반증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는가?'가 과학적인 명제의 기준입니다. 종교에서 그런 부분을 찾기는 힘들죠. 사람이 살아도 신의 뜻, 죽어도 신의 뜻, 이런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렇다고 무신론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인간이란게 세계를 인식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논리에 부분 부분 구멍이 있을 수 밖에 없고 이런게 비이성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거든요. 사실 비이성의 바다 위에 이성이라는 쪽배 하나 떠 있는 것이 인간의 심리일테고요. 글 자체는 유신론자의 논리가 비과학적이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포퍼대로라면 반증 하나에도 이론이 뒤집혀야 하는데 실제로는 실험을 의심하는 사람이 더 많죠. [본문으로]
6.54 [...]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
철학의 무용성(?)에 대해 적어놓은 명제집인 『논리-철학 논고』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명제인데, 뜻은 '내가 설명한 대상은 결국 존재하지 않으므로 나의 명제는 무의미하다' 이런 의미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리뷰를 적다가 말은 신영복 교수님의 『강의』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지요.(비록 어디였는지는 잊어버렸지만...)[각주:1] 생각해 보니 니체도 비슷한 말을 한 것 같네요. '너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배우는 것을 얼마나 '나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있는가 되돌아보게 됩니다. 양자역학이라는 틀이 완전히 정착해 버린 학문을 익히고 있어서 내 방식대로 구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하더라도 예전만큼 내 방식으로 소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느낌은 아직도 강하게 드네요. 중간과정에 살짝 느슨한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이런 글도 썼던 기억이 있는데...
독특한 취향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iGoogle을 기본 페이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심해서 오늘의 명언을 바탕에 깔아놓는데, 이런 글이 있네요. 레이건씨의 공산주의자 판별법입니다.
How do you tell a communist? Well, it's someone who reads Marx and Lenin. And how do you tell an anti-Communist? It's someone who understands Marx and Lenin.
서거는 죽음에 존경하는 마음을 덧붙여 높이 이르는 단어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서거란 사거(死去)의 높임말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거는 말 그대로 죽어서 떠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누구에게 서거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존경해야 하는 분께 서거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누가 존경해야 마땅한 인물인가는 전혀 자명하지 않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경외심을 갖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항상 뒤틀린 인물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는 현 시국에는 서거라는 단어가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예외없는 법칙은 없다는 경험법칙을 증명하려는듯이 서거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인물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선악도 무엇이 정답이다라고 말하기 어려운데, 존경해야 할 인물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렇다고 무한정 판단을 보류할수만은 없는데(내 특기이기도 하다. 반성중), 판단 없이 행동에 돌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행동하지 않음은 외부가 자연적으로 흐르도록 놓아두는 무위가 아니라 정체(停滯)에 불과하며 방임이자 포기이다.
어떻게 보면 자연과학은 참 속편한 학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이견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해석에서는 큰 편차를 보일 지 몰라도 적어도 숫자만큼은 누구나 동의하도록 얻어진다. 그리고, 현대 자연과학에서는 철학적 해석보다는 수학적 결론에 더 큰 비중을 둔다.) 하지만 사람들 속에 살면서 자연에 대해서만 탐구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2. 집회
발단
도서관에서 공부 중, 외부에서 법인화 반대 모임의 하늘이 울리는 노랫소리
학교가 법인화를 한다고 했다. 법인화 안내 책자까지 돌리던데, 역시 자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기는 했는데 다 불확정형이다. ~~~하겠습니다, ~~~일 것입니다 등. 결국 자금문제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했고 그냥 법인화를 밀어붙인다는 소리이다.
사실 법인화가 되면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지금보다 나빠지겠어 설마?(하지만 시대는 설마를 말하기 어렵게 한다) 그래도 법인화에 대해서는 아직도 부정적인데, 자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아직도 확답을 내놓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이 아니다. 미국처럼 대학을 입맛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미국은 최상위층을 제외하면 명문 그런거 없다. 장학금을 준다는 곳이 있으면 우왕ㅋ굳ㅋ 하면서 아이비리그도 버리는 것이 현실) 여기서는 대학이 입맛대로 입학자를 선발한다. 아마 이런 현실은 사회보장제도가 크게 개선되고 사회적으로도 대학이 불필요한 경우가 많아져야만 바뀌겠지만, 그런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이고, 온다고 해도 적어도 내 생애 동안 올 것 같지는 않다.
잡소리는 여기서 그만두고, 집회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도서관에서 양자물리를 공부하면서 연설하는 것을 얼핏 들었는데, 아무리 그 내용에 공감한다고는 해도 들었던 생각은 '촌스럽다'였다. 시대가 짱돌을 들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좀 세련되게 짱돌을 들면 안되려나? 표현이 내용을 못따라가면 야(野)하다고 했다. 이것이 내가 법인화 반대 집회에서 느낀 감정이었다. 완전히 부르주아의 물이 들어버렸군이라고 욕한다면 솔직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다른 집회방식은 없느냔 말이다. 물론 입만 나불거리는 소인보다는 한 등급 위라는 데 이견은 없지만....
3. 신영복
신영복 교수님의 책을 읽고 있다. 강의.
읽다가 생각나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다시 집어들었다. 이미 한번 읽은 적이 있는 책인데도 인상깊었던 부분은 계속 새로운 느낌을 준다. 이런 것을 명문이라고 하는 건가...
너는 아직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하겠지만 요즘 세상에는 같은 가격이면 그 염색료만큼 천이 나쁜 치마이기 십상이다.
한동안은 이런 문체에 경도되어서 비슷한 형식의 문장을 쓰곤 했었다. 뭐, 아직도 그 버릇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미디어법 개정안이 병맛인걸 광고하는 것은 잘 한것 같은데 광고를 하려면 좀 제대로 하지.....
어떻게 좀 들은 것 같은 사람들이 야인인 나보다 모르냐 -_-;;;;
미디어법은 내가 알기로는 신문사와 지상파방송간에 그어놓은 넘사벽을 제거하는것과 대기업의 지상파방송소유 허용 이 두가지로 개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저작권법으로 바뀌었나 모르겠다. 2시 즈음 직권상정한다는 말이 돌더니 6시 즈음 강행투표해서 결국 통과시켰나 보다.[각주:2]
...-_- 비가역적 변화라는 것이 문제일 터.....
이미 진출한 기업에게서 억지로 사업권을 빼앗는 것은 무리이기 이전에 자유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용납이 되지 않는다. 결국 양자전송이 일상화되어 양자정보로 흘러 들어오는 텔레비전을 만들거나 홀로그램 방송이 널리 퍼지기 전까지는 대기업과 신문사에게 주어진 방송권을 되돌리지 못한다는 의미.(신기술이 생겨나면 신기술로 방송할 권리를 제한하면 된다. 하지만 이미 준 권리 되찾아오기는 하늘의 별따기.... 표 준 선거인 표 다시 가저갈 수 없는거랑 똑같은 이치다)
요즘은 별의 별 막장짓을 다 봤더니 무덤덤하다. 제길.
대기업에게 방송권을 주는 막장짓은 왜 하면 안되는지는 잘 알 것이고(거기는 물량공세로 방송을 장악해서 대기업에게'만' 유리한 여론이 조성되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삼성 정도가 대표적인 예. "회장님 회장님 돈으로 스키장 혼자 정ㅋ벅ㅋ 하시겠다는데 뭐가 문제임?" 문제 있다. 회장님 돈이 아니라 주주 돈이거덩?) 신문에 대한 부분은 '신문이 과도하게 강력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여론조성능력을 가진 신문매체가(사실 요즘은 신문 읽는 사람이 없어서 조금씩 떨어져 가기는 하지만) 방송까지 진출하면 활자와 소리로 여론을 정ㅋ벅ㅋ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겠으나)얘네들은 좀 제정신 아닌 소리를 제정신인 것처럼 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촌스럽게 빨갱이 타령이 뭐니 빨갱이가 ㅉㅉㅉ
정확한 내용은 확인을 해야 될 것 같다. 내가 아는 개략적인 내용이 전부가 아닐 것 같은 느낌.
아... 역시 딴나라...-_-;;
법 쌩까고 투표한 거였냐
대리투표, 재투표불가 개무시 등등 말이 많더만 -_-;;;;
그나저나 이걸로 또 묻어가는거 생겼나 보던데...쩝;;; 금산분리가 증발했던가...
미국과 FTA를 체결하면서 정보의 소유권에 대한 권리를 강화하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안다. 실제로 그 때문에 최근 대한민국의 저작권법이 날로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물론 기업님들은 '그런거 없다'크리를 마음껏 써 대는 무법자들이지만 말이다. [본문으로]
아마 대기업에게 방송권을 주는 부분은 제외되었던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다. [본문으로]
아마도 이 글에 대한 비판인 것 같은데(시장을 의심하는 당신 떠나라, 폴라니의 세계로 - 한겨레 21, 2009-03-26), 뭐 전반적으로 매우 틀렸다고 할 만한 거리는 없지만 결론에서 에러다.
폴라니 특집을 기반으로 볼 때 폴라니가 말하는 것은 '도덕경제' 정도 되는 것 같다. 사회 참여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이 맞다면(내가 보기엔 '사회 참여의 가치가 저평가되어 있다' 정도인 것 같지만) 사람의 도덕성을 기반으로 경제체제를 꾸려나가자는 소리가 되니까 말이다. 도덕경제는 이미 탐욕이 주 동력이 되는 경제체제가 뿌리깊게 자리잡은 상태에서 대안이 되기엔 너무 나이브하다.
기업은 이윤창출이 제 1 목표인 집단이다. 사회적 기업이라고 해도 이윤 없이는 굴러갈 수 없다.(예전에 인도에서 백내장 치료용 렌즈(?) 비슷한 것을 생산하는 병원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런 사례가 하나의 좋은 예가 되겠다. 기업은 이윤이 없으면 망한다. 사회는 그렇게 착하지 않다.) 그리고 연구소에서 말한 것처럼 사회적 기업도 일반기업으로 변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린다. 이윤을 만들기는 하지만 사회적 가치를 제 1 가치로 하는 사회적 기업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일반기업 사이에 끼어서는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생각해 보라. 어떻게든 상대방을 죽여야겠다고 식칼을 들고 돌아버린 녀석과 상당히 오랜 기간 검술을 익혀왔지만 상대방에 상처 하나 주지 않고 제압해야 하는 검객이 붙을 경우 장기적으로는 돌아버린 녀석이 검객을 죽일 가능성이 크다.)
뭐 여기까지는 동의하겠는데, 결론이 왜 '프롤레타리아 독재 만세' 인지는 모르겠다. 여기서 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나오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데, 생산수단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전유하자는 말 자체가 그 소리 아니겠는가?
[...]
이러한 모순의 유일한 해결책은 생산수단을 소수의 자본가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전유하는 것, 공동체의 사용가치 생산을 위해 생산수단을 전유하는 것이다.
[...]
일단 내가 사용하는 독재의 의미를 간단히 '정당하지 아니한 방법으로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두자.(왕권 뭐 그런 것 등등으로 구분할 수 있겠지만 그런 무의미한 말장난은 때려치자) 그렇다면 내가 보여야 할 것은 어떻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자유를 억압하는가가 되겠다. 해답은 사유재산권의 거부에 있다.
자유는 기본적으로 '약자가 강자에게 사냥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각주:1] 그런데 약자가 어떻게 사냥당하는가? 여기서 사냥당한다는 의미는 '약자의 사유재산이 강자에 의해 강탈당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결국 자유는 '자신의 소유물이 강탈당하는 것을 막을 권리'인 것이다. 만약 자유에 대한 이 이론이 옳다면, 자유는 근본적으로 사유재산권이 보장되는 사회에서나 가능하다. 사유재산권이 없는 사회에서 '자신의 것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인 자유가 존재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각주:2]
따라서 사유물의 존재를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근본적으로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결국 '브루주아의 이윤을 위한 부속품' 정도밖에 되지 못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국가의 이윤을 위한 부속품'으로 대체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더불어 자유까지 잃었으니, 대체가 아니라 몰락이라고 이름붙여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혁명이건 뭐건 다 잘 살아보자고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근간에는 자유가 놓여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이 다시 자유에 눈을 돌리기 전까지, 공산주의는 이 땅에 다시 설 일이 없을 것이다.
J. S. Mill의 『자유론』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내용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해 둔다. "[...]To prevent the weaker members of the community from being preyed upon by innumerable vultures,[...]" 사실 이 부분은 국가의 사회계약론에 기초한 것이라 엄밀하게 말하자면 틀린 내용이지만 이 정도의 엄밀하지 못함은 용인되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사유재산권 없이도 자유를 논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유를 가르치는데 사유재산권처럼 유용한 수단은 없다고 본다. 적절한 예는 아닐 지 모르지만 노예에게 자유가 없는 것은 그에게 사유물을 가질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유재산권의 인정이 자본주의라면, 우리는 절대 자본주의를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뭐 예전에 데리다를 한시간으로 요약압축한 강의를 흘려들었을 때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옛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책을 쓸 때 대화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 전통은 매우 오랫동안 내려온 것 같다.(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쓴 책의 제목만 해도 『대화』이다. 그리고 내용 자체도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말이 글의 연장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이 관념이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것 같다. 적어도 나의 경우 상대방의 글을 읽고서는 상대방이 '말했다'는 형식의 표현을 사용하고, 어디선가 읽었던 글을 '들었다'는 형태로 쓴다. A가 쓴 글을 읽고 비판할 때 'A가 말하길, ~~~인데 이는 xyz한 문제가 있다.' 또는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은 글을 인용할 때 '내가 abc에서 주어들은 바로는 !@#이라고 한다' 뭐 이런 식이다.
참된 존재는 관찰할 수 없는, 확정할 수 없는, 비정형적인, 'apeiron'이다. - 아낙시만드로스
참된 존재는 공기다. 결국 이 세상 물질의 질적 차이는 다 양적 차이로 환원될 거임. - 아낙시메네스
참된 존재는 결국 수학적으로만 정확하게 표현가능한 어떤 것이다. 수학이 짱임 - 피타고라스
참된 존재는 없고 오직 변화만 있다. 어차피 몽땅 변할 거 불타버려라 ㅋㅋ - 헤라클레이토스
참된 존재는 오직 사유가능한 것이며 존재가 없는 장소는 불가능하고 無란 없다. 운동도 불가능하다. 아 이게 먼소리야 - 파르메니데스
참된 존재는 결국 불, 공기, 흙 물,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판타지월드! - 엠페도클레스
참된 존재는 원소로 되어있는데 그게 뭔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다. ㅅㅂ - 데모크리토스
참된 존재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아는 척 하는 너보다는 주제파악하는 내가 똑똑한 거 같다. - 소크라테스
참된 존재는 저~~~ 위에 참된 존재의 영역에만 존재한다. 땅에서 존재 어쩌고 예술한다고 깝치는 애들은 조져야 한다. - 플라톤
참된 존재는 잠재태의 현실태로서 바로 이 현실에 존재한다. 저 위엔 구름만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참된 존재란 없다. 사기치지마라. 존재는 단지 말 뿐이며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즐 - 오컴
참된 존재는 오직 단자 뿐이다. 미적분부터 공부하고 와라. - 라이프니츠
참된 존재는 두 가지 실체 가운데 어느 하나의 속성인데 뭔가 하나를 묶는 게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 데카르트
참된 존재라고? 미친 놈. - 흄
참된 존재는 이성에 의한 능동적 규정에서 제한적으로만 인식 가능하다. - 칸트
참된 존재는 투쟁과 함께 저절로 시간이 지나면 이성이 완성되면서 나타나게 된다. - 헤겔
참된 존재는 부르주아들의 환상일 뿐이다. 다 때려부셔야 한다. - 맑스
참된 존재는 의지의 발현 그 자체다. - 쇼펜하우어
참된 존재는 벌써 옛날에 죽었고 이 세계엔 권력 의지만 있다. 원숭이짓 좀 그만해라. -니체
참된 존재는 오직 이마주(image)다. - 베르그송
참된 존재는 불가능하며 오직 해석과 지평만 있다. - 가다머
참된 존재는 눈 앞에 보이는 존재자가 아니며 현존재가 산출되는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다. 뭔지는 모르겠다. - 하이데거
참된 존재는 우리의 판단 중지 이후 세계에서만 지향적으로 존재한다. - 후설
참된 존재는 평소엔 잠자고 있다가 가끔씩 튀어나온다.- 프로이트
참된 존재는, "아무 것도 안 보여요." "나한테도 그렇게 '아무 것도 안 보이는 눈'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할
때에서처럼 언어의 '광기'가 만들어낸, 시적으로만 쓸모있는 헛소리다. 학문의 영역에서 쫓아내야 한다. - 비트겐슈타인
참된 존재는 차이 그 자체인데 플라톤이 말하는 거랑 헤겔 꺼랑은 좀 다른데 암튼 기관으로 분화되기 전의 신체가 그 예임 - 들뢰즈
참된 존재는 경험적, 과학적, 객관적, 물질적이지 않기에 일단 헛소리같지만 수학과 논리학이 필연적으로 필연적이지 않기에
어차피 형이상학과 자연 과학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에서 ........아 나 ㅅㅂ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쨋든 우리가 철학하려면
경험적이고 행동적이고 실증적이고 물리주의적인 걸로 갈 수밖에 없음. - 콰인
참된 존재는 그것의 의미로 파악가능한데 그건 항상 다음 기회에만 설명된다. 언젠지는 모르겠다. - 데리다
예전에 친구한테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사립대보다는 국립대를 가는 것이 좋을 거라고. 기껏해야 대학생이 뭘 알겠느냐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는 있었다.
저출산 + 경제위기. 사립대학의 절반 정도는 저출산과 경제위기 때문에 재정상태가 악화될 것이고(둘 다 대학입학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학생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폐교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립대는 그런 걱정이 없으니 국립대가 나을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 특히 대입시장과 관련된 고질적인 병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공급과잉이고, 나머지 하나는 공급자주도시장이라는 것이다.
공급과잉이라는 것은 대학이 과도하게 많다는 의미이다. 실례로 대학입학자의 비율은 80%에 근접한다. <왜 순수학문이 바보들의 학문이어야 하는가>에서 이미 말했던 것 같은데 사회는 이렇게 많은 고급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막이 내린 이유 중 하나로 과도하게 많아진 양반을 드는 경우도 있듯, 화이트칼라는 생산과는 거리가 먼 계층이다. 유통에 능한 이 인력층은 생산층 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 이공계를 엿먹이는 사상의 대표격인 사농공상에서 사가 제일 먼저 온 것은 말하는 사람들이 사에 속했기 때문이고, 농이 그 다음에 온 것은 농이 생산을 맡은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신전이라도 땅이 있어야 세울 수 있는 법이다.
공급자주도시장은 수요자(입학생)와 공급자(대학) 사이에서 공급자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거래는 수요자보다는 공급자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소리이다. 다른 말로는 과잉수요가 존재한다는 말이 되겠다. 위쪽에서는 공급과잉이라고 해 놓고서 아래에서는 수요과잉이라고 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개별 대학을 놓고 비교하면 확실히 수요과잉임을 알 수 있다. 전재산을 팔아서라도 명문대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명문대의 입구는 크기가 정해져 있다. 이 좁은 입구를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은 경쟁을 벌인다.
대입시장은 미술작품이 거래되는 경매시장과 닮았다. 명작을 사기 위해 사람들은 경쟁을 벌인다. 하지만 명작은 복제품이 없기 때문에 하나뿐인 작품을 사기 위해 사람들은 미친듯이 가격을 부른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무명작가의 작품은 손드는 사람이 없어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이쯤 되면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미국과 유럽의 대입시장이다. 유럽식 대입시장은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구조라서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미국식은 상당히 닮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비교는 가능해 보인다. 미국식이 한국식과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공급과잉은 없다는 것과 수요자주도시장이라는 점이다.
이 차이는 미국과 한국에서 대학을 가는 이유에서 두드러진다. 미국은 대학이 말 그대로 대학(大學)이다. 고등학교에서 수준이 좀 되는 학문을 배운 다음 좀 더 커다란 학문을 배우기 위해 가는 곳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한국의 대학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관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공부하려고 대학온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다들 가니까 가는 것 뿐이지.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가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문제의 근원은 사회 전반 분위기에 있다. 대학 졸업장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현실이 대입을 부추기고 과잉수요를 낳는다. 영화 I am Sam에서 주인공은 스타벅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최소임금제가 지켜지지 않는 대한민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이다.
교육 과열의 문제는 결국 대입의 문제이고, 대입의 문제는 결국 생존의 문제이다. 따라서 사교육을 잡는다는 말이 교과부에서만 나온다는 말은 이 문제가 절대 해결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공교육 강화를 통해서만 해결되는 문제가 이니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장 없이도 어느 정도 생존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생활 속 깊은 곳까지 스며든 다음에야 공교육 강화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상위층의 개인교습과 같은 형태의 사교육은 언제나 수요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제거하지 못한다. 사교육 문제의 핵심은 비대하게 큰 시장에 있다.
따라서 사교육을 잡고 싶다면 양극화를 줄여야 한다. 양극화의 심화가 과열된 교육수요의 근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의 생존이 힘들어진다.
다른 말로 바꾸어 보자면, K-1 링 위에서 단도를 든 사람을 이겨야 할 때에도 주먹만 사용할 수 밖에 없는걸까? 물론 주먹만 써서 제압한다면 되는 일이긴 한데 그럴 정도로 강했으면 단도와 붙을 일 자체가 없었겠지...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 악명높은 하민혁님의 블로그를 구독중이다.[각주:1]최근에 올라온 글을 읽고 그런 느낌이 든다. 비열하지 않은 방법으로 비열한 상대를 이길 수 있는가? 이긴다면 그야말로 최상이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공평하지 못하더라. 생각보다라기보다는 매우 공평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 옳으려나...
사견으로 확실히 독재는 아니다.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독재라는 막장테크를 타지는 않았다는 반증이니까.[각주:2] 하지만 또 민주사회냐 그렇게 물으면 아닌데(오래 전 이 글에 입장을 정리해 두었다), 그래서 얼마나 민주적임에 다가섰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
어릴 때 '남들이 농땡이칠 때에는 나도 농땡이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더불어 채근담에는[각주:3]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도 있었던 것 같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와 비슷한 맥락의 말들이라고 생각은 하는데(그래서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각주:4] 글쎄. 요즘 들어서는 다시 예전의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가려는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어릴적부터 좀 강박적인 자세가 있는 것 같다. 물리공부를 하면서 실제로 이 식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전까지는 절대 그렇구나 했던 적이 없으니까(수학도 그런 면이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갈수록 엄밀한 증명을 요구했던 것 같기도 하다.[각주:5]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숙제를 하면 웬만해서는 솔루션을 안 보려고 하고, 보더라도 무조건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하는데 그런 성격이 확실히 성적은 보답해 주니까.
다시 예전의 입장으로 돌아갈 것 같다. 나에겐 더없이 엄격하더라도 남에게는 그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그런 입장. 노예근성이라면 노예근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긋는 선을 안 넘을 수 있으려나.... 넘을 때 잠깐 괴로와하고 다시 넘어가는 선은 무의미한데 말이다.
3.
차라투스트라를 요즘 조금씩 읽고 있는데(절판이라는 백석현 번역. 도서관에서 어떻게 찾기는 했다. 번역이 조금 속악하기는 한데 그것도 하나의 매력.) 니체는 확실히 반민주적 인사이란게 느껴진다. 글 전체에 모여서 아둥바둥대는 사람들을 싸그리 모아다가 무가치하게 취급하는 그런 분위기가 흐른다.
그 뭐랄까, 아Q의 정신승리법 같은 느낌도 묻어있고...[각주:6] 그래도 새겨둘 말은 많은 책이다. 이전에 비슷한 책으로 르 봉의 군중심리가 있겠다. 하지만 대중을 무시하는 니체의 입장이 꼭 틀렸다고 찝어서 말할 수는 없다. 사람은 사람을 떠나 생각할 수 없지만, 너무 사람들과 가까이 있으면 저열해지니까. 사람이 본능적으로 너무 다가오는 타인을 피하는 이유라고도 할 수 있겠지.
어차피 신은 죽었다. 기준이 없으면 스스로 기준을 만들어서 나아가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겠지. 어떻게 보니까 자기정당화 같기도 하다. 스스로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려는 태도의 자기정당화.
여명의 뻘글은 여기서 스탑. 차라투스트라는 좀 다양한 번역을 읽어 볼 생각이다.(물론 지금은 백석현 번역도 읽기 벅차다. 두께가 두께이다 보니...) 개인적으로 제일 처음 읽었던 번역은 비추하게 될 것 같다. 2/3이나 잘라먹어서 그런가 연결이 잘 안 될 때가 많으니까.
원래는 비판적인 관점을 기르려고 일부러 반대 성향의 블로그를 찾아나선 것이었는데, 꼭 그렇다고 볼 블로그는 아닌 것 같다. 약간은 덜 중요한 부분을 걸고 넘어진다는 인상을 받기는 하지만. [본문으로]
독재라는 막장테크를 탔으면 대한민국은 그냥 답이 없는 상태가 되는거다. 지금은 돌파구가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답은 있으리라는 희망은 존재하는 상태니까. 그리고 반증 하니까 기억난건데, 원래 반증은 '틀림을 증명하는 것'이다. 어느새 증명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 시작하고 있는데 철학을 가르치던 교수님이 불평했던 기억이 난다. 뭐, 그냥저냥 잡담. [본문으로]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은 그래도 새겨두어야 할 것 같기는 하다. 어차피 인간 사회에 발 붙이고 살아가려면 어떻게든 타인과 엮일 수 밖에 없으니까. [본문으로]
가장 기억나는 사례는 물리학실험 퀴즈에서 무한솔레노이드의 자기장을 구하라는 문제가 있었는데, 이걸 어째서 외부의 자기장은 0이 될 수 밖에 없는가까지 강박적으로 증명하려고 했었던 것이 있겠다. 사실 맥스웰방정식이나 앙페르의 법칙, 비오-사바르의 법칙은 자기장이 기준에 비해 얼마나 더 큰가를 나타내어줄 뿐이니까. [본문으로]
뭐 그러니까 '후훗 너희들 비천한 녀석들은 나의 높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이런 류의 오만함을 말한다. 니체의 글 전반에는(그래봤자 차라투스트라) 그런 분위기가 흐른다. 인간이 넘어서야 할 존재이기 때문에 일부러 부정적으로 찔러주는 건가? 뭐 그래도 재미있는 아이러니는 이런 구제불능들이 넘어서서 니체가 그렇게 바라던 초인이 된다는 것에 있다. [본문으로]
'노무현'이라는 상징이 죽음이라는 대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떼어놓기 힘들겁니다. 박정희처럼 말이죠. 생각해보면 충무공처럼 끝까지 살아남을지도...-_-;; (모두 새로 열은 블로그에 끄적거리려다가 때려 친 글이니 크게 신경쓰지 마세요.) 그래서 무작정 '노무현은 아니다'라고 외치고 들어가는 순간 gg.
그나저나 정권도 이번 주가 고비가 될 거라는 걸 인식했는지 철벽모드네요.(아까 그 글에서 말했듯 이번 주가 이후 흐름의 큰 틀을 결정지을겁니다 아마) 아까 버스에서 라디오를 듣는데 당분간은 시청앞광장을 닭장차로 강강수월래 할 거라던데...
그 이전 글에서 한나라당이 '내각제 개헌'을 뽑아들 가능성이 높다고 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내각제에 대해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수립되면 한나라당 주도의 1.5당 체제로 돌입(일본처럼이라는데 저야 그런것과는 안드로메다 거리에 있으니)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구요. 쉽게 말하면 정권교체 불가능.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