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 카테고리 오픈 기념으로 본격적인 망상을 하나 끄적거려 보려고 합니다.

예전에 썼던 뻘소리도 조금 옮겨놓고(매우 시니컬하던 시절의 글들입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적어놓고 끝맺으려고요. 과제가 있어서...(먼산)

뭐... 별 내용은 아니고 이 댓글을 쓰고 나서 이 댓글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좀 더 정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적는 글입니다. 링크타기 귀찮으신 분들을 위해 간단히 긁어 오겠습니다...

사람이 하나의 자아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조금은 무서운 일 아닐까요? 뭐 그냥 끄적끄적...

그나저나 이 상황에서 파동함수를 생각하고 있는 저는 안드로메다인...-_-;;

원 글 내용은 사이코패스 이중인격 뭐 이런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라 단순히 '가상공간과 실제공간에서 나타나는 사람의 인격은 다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배우고 있는 실존론(사르트르?)의 한 꼭지가 생각나네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였나...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은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존재하기 전 부터 존재합니다. 하지만 '특정한 개인'이라는 본질(그러니까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특질)은 그 개인이 실제한 이후에나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각주:1]

잡설은 여기서 그만두고, 다시 다중인격론(?)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은 순수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순수하다는 것은 19금 보고 '잇힝 부끄러워' 그러는 순수함이 아니라 순수악, 순수선과 같이 '다른 것이 배재된 상태'를 말합니다. 제아무리 완전한 좌파라고 해도 보수적인 면이 있을 수 있고, 제아무리 극단적인 천재라고 해도 실수는 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것처럼 모든 사람은 상반되는 두 가지 이상의 속성을 모두 조금이나마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사람을 보는 기본적인 관점 중 하나입니다.[각주:2]

여기서 파동함수가 등장합니다.(-_-;;) 양자역학에서 다루는 파동함수는 독특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분해된다는 속성이지요. 파동함수는 basis라고 불리는 몇몇 함수들의 합으로 표현이 가능합니다(이를 전문 용어로 선형조합(linear combin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 함수들은 각각 서로와는 독립적인 속성을 가지며, 이를 직교성(orthonormality)라고 부릅니다. 좌표평면에서 y축 성분은 x축 성분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비유를 음악에 대입시켜 보면, 음악은 (예를 들어 '발키리의 비행(Walkürenritt)' 등[각주:3]) 각각 악기별 연주로 분해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고, 왜 파동함수가 떠올랐는가 적어 보겠습니다. 입자의 상태를 나타내는 파동함수는 한번 측정을 한 뒤에는 그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러니까 주사위에 비유하자면, 주사위는 던져저서 땅바닥에 도착하기 전(측정 전)까지는 어떤 눈(상태)이 나올 지 알 수 없습니다. 확률만 알 뿐이지요. 하지만 일단 눈이 나왔으면(측정 후), 다른 측정을 하기 전까지는 그 눈을 그대로 유지합니다.[각주:4] 이제 완전한 본론, 왜 파동함수가 떠올랐는가를 말할 차례인 것 같군요.

파동함수가 떠오른 것은 간단합니다. 파동함수가 기준 함수들(basis)의 합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도 몇몇 속성의 합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파동함수를 측정함으로서 하나의 상태로 줄여버리면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것처럼, 사람의 본성을 블로그라던가 말과 같은 수단으로 인위적으로 뽑아 내면 웬만해서는 그 사람의 본성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즉, 게시판에서 뻘글이나 쓰는 사람은 뻘글러라는 속성이 측정됨으로서 그 게시판에서는 뻘글러라는 특성만 남게 되고, 블로그에서 은근히 무게잡는 사람의 경우는 블로그라는 수단을 통해 무게잡음이라는 특징을 측정하여 그 무게잡는다는 성질만 남게 됩니다. 뭐 그런 거지요.

결론은 '순수한 인간은 없다.'



Inspired by
다중, 알고리즘

덧. 그러고 보니 만우절 기념 카테고리 오픈이군요. ㄷㄷㄷ
  1. 아마 여기서 말하는 특질은 '삶의 이유'와 같이 성격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것이라고 하던데, 무엇이 근본적인 것인지 어떻게 아는지는 조금 궁금하군요. 그리고 제 생각에 아무래도 전 사르트르의 사상을 재구성해버린 것 같습니다. [본문으로]
  2. 이건 제가 '이성의 순수한 결정체'여야 할 과학자에게도 비이성적인 미신이 있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아니,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겠군요. 그리고 필요하지 않다면 적절히 섞인 상태가 안정하고(엔트로피가 등장하는군요 -_-) 또 편하지 않겠습니까? [본문으로]
  3. 요즘 동아리 일로 우석훈 씨의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읽고 있는데, 독일 제국주의가 생각나는군요. 제국주의의 특징으로 지배적인 문화(?)를 들으셨던 것 같은데, 니벨룽겐의 반지 때문인가 생각납니다. 뭐,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에서... [본문으로]
  4. 이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중이라더군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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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살다보면 많은 우연과 마주치게 된다. 때마침 내려와 기다림의 지루함을 없애주는 엘리베이터의 배려와 같이 가까운 곳의 우연에서부터 알렉산더 플레밍과 처칠의 꼬여있는 우정과 같은 소설같이 멀리 떨어진 우연이 있고, 미립자들의 분해와 같은 자그마한 우연에서부터 우주의 시작이라는 빅뱅과 같은 커다란 우연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주변은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 과장을 약간 보태어 말한다면 이런 우연의 누적을 기록해 둔 것이 바로 우주와 인류의 역사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라는 존재조차도 우연의 누적이 만들어낸 하나의 결과물 중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다. 시작부터 아버지의 그 수많은 정자들 중에서도 그 특별한 하나가 선택되었던 것은 우연이었다. 다른 정자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 '그' 특별한 정자가 되어서 내가 된 것이다. 또 생각해보면 난자의 두 핵 중에서 '그' 특별한 핵이 난자로 성장하고 다른 핵이 극체로 퇴화하였던 것도 어찌 보면 우연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저 선대의 '그' 특별한 아무개들의 눈이 마주쳤던 우연, 그 인연들이 쭈욱 누적된 것이 나를 만들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다. 이처럼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수록 우연이라는 것이 지금의 세상에 미쳤던 영향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우연이라는 단어에 대한 경외감마져 불러일으킨다. 하긴,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들부터 우연의 또다른 이름인 확률로 설명된다는 것을 곰곰히 떠올려 보면 우연이 이처럼 거대한 힘을 가졌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련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세상에는 필연적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 일들도 있다. 자그마한 향수병을 열면 그 속에는 콧속을 간지럽히는 향수의 분자들이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무도회는 완전히 우연의 지배 하에 일어나게 되지만, 결국에는 방 전체에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베이리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에디슨이 전구의 필라멘트로 대나무 숯을 생각해 내었던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지만, 에디슨의 우연이 없었더라도 인류의 밤에 대한 지배의 욕구는 전구가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을 통해 어떻게든 밤을 지배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일들은 우연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지만, 알고보면 필연이었던 경우도 더러 존재한다. 이렇게 우연과 필연이라는 상극은 '양극은 서로 통한다'는 말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흔히들 운이 좋았다라는 말을 한다. 우연이 어쩌다가 자신의 편을 들어 준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우연이라는 탈을 쓴 필연은 아니었을까? 난 '지금의 내가 그때 그 일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상상을 가끔씩 하곤 한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내가 이렇게 살아가리라는 것이 필연에 의한 것이었다면 필연이 정해준 운명을 받아들여 필연에 부합하도록 치열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것과, 내 생각대로 우연의 절묘한 조합에 불과했다면 그 인연이 나를 선택해 준 것에 대한 감사함을 표시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세계가 우연이 만나고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었든, 필연에 의해 계획된 일이었든 간에 어떻게든 몸부림치고 한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세계에 대한 도리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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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위험한 생각들' 이라는 책을 얼핏 본 것도 영향이 있겠지만(나중에 한번 사서 읽어보려고 한다.), 뭐랄까 내가 갖고 있던 위험한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잇을 것 같아서 글을 쓰려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기는 한 것 같다. 뭐 따로 이런 것에 대해서 말할 놈이 주위에는 없어서(괜히 꺼냈다가는 싸움으로 번지기만 한다는 것을 난 잘 알고 있다.) 적당히 순화(?)시켜 블로그에나 올리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인간중심주의자' 이다.
세상은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세계를 자기 중심으로 해석한다'.
정의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수의 이익'이고,
자연보호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연을 떠나서 인간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보호를 주장하는 것이다.
'자연이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인류를 지구상에서 멸종시켜야 한다'는 사상을 가진 사람이 미치광이 과학자 (혹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분류되는 이유도 '모든 것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학문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인류에게 잠재적인 이득이 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솔직히 생각해보자. 기초과학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어떤식으로 응용되어 '인간 생활'에 이득을 가져올 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것이 학문이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종교도 결국 따지고 보면(이건 정말 위험한 생각이다. 기본적으로 나도 종교인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라는 '인간을 위한 것' 이다.
언제나 인간 생활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적자생존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 혹은 자기 종족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 발전하지 않았다면 인류가 지금처럼 생존이 가능했을까?

둘째, 난 동물보호니 뭐니 하면서 인도적인 처사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고 생각한다.
채식주의도 마찬가지이다. 동물이 불쌍하니 식물이나 먹자? 식물은 무생물인가?
생명이 존중의 가치가 있다면 모든 생물체에 동등한 생명의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물론 내가 인간이 인간을 죽여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건 '인간 사회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전쟁과 평시와 다른 법이 적용되는 것이다. 전쟁시에는 '인간이 인간을 죽이지 않으면 사회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채식의 이유가 '동물이 불쌍해서' 라고 한다면 그건 인간의 자기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자위라고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 생명존중을 외치는 사람들에게는 과일만 먹으라고 말하고 싶다(실제 이런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Fruitarian인가?). 아, 곡식까지는 봐주겠다. 그 두가지는 식물이 먹으라고 일부러 다른 생명체에게 내어주는 부분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잎이나 뿌리를 캐 먹는 사람들이 생명 존중을 외칠 자격은 없다고 본다. 식물은 동물과 다르단 말인가? 혹 건강을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모를까, 생명 존중이라는 단어를 채식에는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국 누군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박테리아가 하나도 죽지 않는다면 일주일도 채 못되서 온 지구는 박테리아로 뒤덮이게 되고, 박테리아를 제외한 다른 생물체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박테리아가 죽어야 다른 생물이 살 수 잇다. 결국 어떤 생명체가 살려면 다른 어떤 생명체는 죽어야만 한다. 내가 생명 존중이라는 가치가 완전 허구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쎄, 글을 쓰고 나니 너무 직설적으로 써서 그런가 길이가 얼마 되지 않는다. 내 사상이 위험한 사상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안다. 누군가가 이 사상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게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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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NASA 홈페이지에서 찾은 지구의 사진. 제목 Blue Marble. http://visibleearth.nasa.gov/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를 골자로 하는 지동설과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이 서로 싸우기 전부터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 물론, 지금처럼 초등학생들도 지동설을 신봉하는 시대에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부정할 방법이 없는 진리로 여겨지고 있다. 사람이 고철덩어리를 타고 날 수 있는 시대에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조롱거리로 비하되기도 한다. 하지만, 난 묻는다. 지구는 과연 둥근가?

 난 지금 지구라는 물체의 수학적인 성질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수학적으로 지구라는 물체는 적도반지름이 극반지름보다 약 70km 긴 타원체이므로 둥글지 않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땅은 평평하므로 지구는 평면이다라는 멍청한 소리를 하려는 것 도 아니다. 이쯤 되면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눈치 챘으리라 믿는다.

 지구는 둥글지 않다. 결코 둥글지 못하다. 여태 둥글지 못했고, 앞으로도 둥글지 못할 것이다. 아니, 이대로라면 앞으로는 둥글어지기는 커녕 더욱 찌그러 들 것이다. 지구의 한 지역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서 죽어가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 누구는 책상에 앉아 돈을 버는 반면, 누구는 나뭇잎을 따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둥글지 못한 것은 아니다. 변화가 없기 때문에 둥글지 못한 것이다.

 변화가 없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죽은 시체는 자력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지구도 마찬가지이다. 난 지구가 완전히 둥글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는 일정 수준 이상 울퉁불퉁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울퉁불퉁한 것을 시간에 대해서 평균을 냈을 때에는 둥글어져야 한다. 튀어나온 곳은 계속 튀어나와 있고, 들어간 곳은 계속 들어가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어야 하고 지옥으로 추방되는 천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역동적인 변화 과정 속에서 지구는 생명을 얻는다.

축구가 재미있는 이유는 흔히 축구공이 둥글기 때문이라고 말을 한다. 지구도 둥글어지면 더욱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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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07. 9. 3. 00:46 Daydreams

다원화의 고찰

다원화. 중학교 사회와 도덕시간에 귀 터지도록 듣는 단어이다. 과거 사회와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차이이며, 현대 사회의 아노미 현상을 일으키는 주범이자, 기술의 발달로 이룩해 낸 성과이다.


무엇이 다원화를 가속시키는가? 그것이 오늘 내가 잡소리를 늘어놓을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학교의 어느 분이 말했듯이 다원화는 혼란을 가져왔다. 자신이 바라볼 비전을 자신이 세우게 만든 것이다. 근간이 약한 사람들은 이런 비전을 갖지 못하고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으로 사회에 악영향을 미친다. 그 '어느 분'의 말씀은, 이런것을 막기 위해서라며 자신이 세계정부를 세워 세계를 통치하겠다고 한다. 이쯤 되면 나와 같은 학교인 분들은 누군지 알겠지만, 여기까지만 말하기로 한다.


세계정부를 세워 세계를 획일화 하는 것. 표준교육으로 학생을 규격화된 블록으로 만들어 내는 것. 편리하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관료제는 그 편리성 때문에 사람들을 표준화 시켰고, 교도소에서는 죄수를 수로 부르는 이유가 규격화의 편리성 때문이다. 주민등록번호로 사람을 번호 하나에 대응시키는 것도 규격화가 가져오는 편리성 중 하나이다. 그런데 왜 규격화는 비판을 받는 것일까?


그것은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여행을, 모험을 꿈꾸는 이유는 변화를 찾기 위해서이다. 나그네가 집이 있는 자의 아늑한 침대를 꿈꾸는 이유가 너무 많은 변화가 가져온 혼란에서 온 것이라면, 집이 있는 자가 나그네의 자유를 꿈꾸는 이유는 생활이 너무나도 단조롭기 때문이다.


변화는 이 세상의 기본 원리이다. 누군가가 그러지 않았던가.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는 모든것이 변한다는 것이다"라고. 변화가 자연선택을 불러오고, 변화가 적자생존을 일으키며, 변화는 진화를 이룬다. 이것이 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이다.


현대는 자연선택의 시대이다. 다원화가 가져온 혼란을 견뎌내는 자는 다원화가 가져온 변화의 이익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것이 내가 남과 다르게 보고, 다르게 들으려는 모험의 이유이다. X-10에서출발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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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인간은 누구나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물며 저 작은 개미도 배를 눌르면 살기위해 바둥거리고 눈에 보이지조차 않는 그 조그마한 짚신벌레들은 위협이 닥쳐오면 섬모를 버려 가면서까지 도망치는데, 인간이라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 어느 인간이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여기서 공공을 위해 죽음을 자청한 사람들은 무시하도록 하자.) 그렇기에 인간은 죽음에서 달아나고자 의학이라는 것을 발달시켰고, 그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키기 위해 믿음이라는 것을 만들었으며, 영원을 동경하여 불로장생의 영약과 영원한 신 등을 상상해 내었다. 현재까지도 의학이라는 것은 계속 발달하여 인간게놈프로젝트와 신 항암제 개발 등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마지막 대책으로서 육체에서 벗어난 의식, 즉 의식의 디지털화나 영혼의 기계화까지 추구하고 있다.

뭐 여태까지의 발전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그에 앞서 나는 하나의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인간은, 왜 생명은 죽을 수 밖에 없는가? 1859년 Chales Darwin은 종의 기원(the Orgin of Species)를 발표하며 적자생존, 혹은 자연선택을 주장하였다. 누구나 알듯이 그 이론은 '환경에 가장 적합하게 적응하는 개체 혹은 종이 자연에게 선택받아 살아남는다'이며 이것의 다른 결론으로 '개체 혹은 종은 자연에 적합화, 혹은 진화한다'가 있다.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의 이론에 따르면, 진화는 35억년 전 Stromatolite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후부터 계속 진행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또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왜 이 과정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는 것일까? 어째서 생물은 그 기나긴 35억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기 자신을 영원히 수리하여 영원히 살게 할 수 있는 mechanism을 개발하는 대신 자신의 clone을 만들기로 결정한 것일까?

35억년이라는 세월이 그런 mechanism을 개발할 시간을 주지 못했는지도 모르지만, 여태 그런 mechanism이 존재한 적이 없다고 할 수만은 없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mechanism을 개발한 한 개체가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자. 그 mechanism을 가진 개체는 전 세대의 clone을 만드는 능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종은 엄청난 속도로 불어날 것이다. 하지만 공간은 작고 자원은 부족하다. 엄청난 속도로 불어난 그 종은 결국 급격히 줄어들고 말 것이고, 자연은 clone을 덜 만드는 개체에게 손을 들어줄 것이다. 결국에는 clone을 만드는 능력을 상실한 개체가 만들어질련지도 모른다. 하지만, clone을 생산하기 포기한 시점에서 이미 이 종족은 자연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단계에 와 있는 것이다.

엘프를 아는가? 수백년간 생존한다는 상상속의 종족으로 이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마음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상이 결합된 결과이다. 여러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만큼 그들과 관련된 이야기는 셀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는 그들의 멸망기이다. 원래 엘프는 실존하는 종족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clone을 만드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하나 둘 죽어가자 결국에는 clone이 없던 엘프는 멸망했다는 것이다. 이런 엔딩이 아니더라도 clone을 생산하지 않는 종은 멸망할 수 밖에 없다. clone은 종의 유지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clone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필연적인 도박에서 그 종은 진화의 가능성을 얻는다. 그만큼 재생산이 활발한 종에서는 진화 속도가 매우 빠르다. 상대적으로 clone을 적게 생산하는 종은 진화가 더딜 수 밖에 없다. 진화가 된 종이 자연에 더 적합하다면 진화가 더딘 종은 결국엔 멸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엔 진화가 더딘 영생하는 개체들은 자연적으로 제거되고 만다.

사람들은 영생을 꿈꾸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편 자연은 영생을 부정해 왔고, 진화가 더딘 개체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인류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진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진화 방법을 얻기 전까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만화지만 Hellsing중 인상깊게 읽었던 글이 하나 있었다. "나는 뱀파이어들이 불쌍하단다. 그들은 죽지 못하기 때문이지"였던가? 영생하는 뱀파이어들을 동경했지만 막상 되고나니 모든 것을 잃었어도, 모든 것이 떠나가도, 자신은 그것을 계속해서 볼 수 밖에 없는 뱀파이어들과같은 존재가 되어 버리면 그것이 과연 유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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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 내성적이면 이성적인 면이 강하게 발달한건가?

순간 드는 생각.

내성적이면 공격적인 면모가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격성은 본능적인 것.

그런 공격성을 잘 가두고 있다는 점에서 내성적일수록 이성적인 두뇌가 발달한 것은 아닐까?

(또 헛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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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머그컵을 스테인리스 스틸로 둘러싸면 어떨까?

깨지지도 않고 좋을 것 같은데...

보온효과도 좋고..

특허 한번 내봐도 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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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화의 고찰  (0) 2007.09.03
진화적 입장에서의 죽음에 대한 고찰  (5) 2007.08.22
성격과 두뇌개발현황에 대한 고찰?  (0) 2007.07.27
Posted by 덱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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