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끝나감에 따라 멘탈이 허약해지고 있어서 멘탈 강화를 위해 소소하지만 결과가 있는 일을 해보았습니다. 멘탈이 가루가 되어갈 때에는 이렇게 작은 일을 해 보면서 물을 뿌려 단단히 다지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서요.


가끔 교수님들이 링크로 걸어놓곤 하시는 스티븐 와인버그의 글을 옮겨보았습니다. '과학자로서 첫 발을 내딛는 학생들을 위한 조언'이라는 말이 붙어있는데, 이건 번역을 안 했네요.


번역에 대한 신조(?)는 '최대한 자연스럽게'라서 의역을 기본으로 채택했습니다. 가령 첫 문단의 중간 쯤 나오는 '익사하거나 이겨내거나'는 'sink or swim'의 번역인데, 도저히 가라앉음과 수영으로는 두음 운율을 맞출 수가 없어서 '이겨내다'란 의역을 사용했습니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어 pdf로도 만들어 올립니다.


네 귀중한 교훈들.pdf





수정 - 27 Feb 2014


아래 댓글에서 어떤 분이 지적해주셨다시피, "역사가 당신의 연구에 도움이 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유입니다"는 "The least important reason for this is that the history may actually be of some use to you in your own scientific work"의 번역문입니다. 직역하면 "역사가 당신의 연구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은 가장 덜 중요한 이유입니다"이고 의미상으로는 "역사가 당신의 연구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이유들 중 가장 중요도가 낮은 이유입니다"가 됩니다. 그런데 한국어에서는 이런 표현을 쓰지 않죠(...) 그래서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만드려다 보니 문장이 꼬여버렸네요. 해당 문장은 보다 자연스럽고 의미가 통하는 문장으로 수정하였습니다.




네 귀중한 교훈들(Four golden lessons)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


제가 학부 졸업장을 받았을 때 - 백 년은 전이었던 것 같은데 - 물리학은 구석구석까지 살펴본 뒤에야 나만의 연구를 시작할 수 있는 드넓은 미지의 대양같았습니다. 어떻게 남들이 했던 일을 모르고서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운 좋게도 대학원 첫 해에 만난 선배 물리학자들께서는 일단 연구를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을 익히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익사하거나 이겨내거나였지요. 그리고 놀랍게도 이 방법이 먹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빠른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 제가 물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는데도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요.


다른 교훈을 바다에 빗대어 말해보자면, 익사하지 않고 파도를 이겨내고 있는 한 더욱 거친 파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1960년대 후반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MIT)에서 교직을 맡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제 전공인 기본입자(elementary particle physics)보다는 일반상대론(general relativity)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일반상대론이 매우 잘 정립된 학문인 반면에 다른 하나는 엉망진창으로 보인다는 이유에서였지요. 제게는 반대로 행동해야 할 아주 좋은 이유였습니다. 입자물리는 아직 창조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는 분야였습니다. 1960년대에는 정말 엉망진창이었지만 그 후 많은 이론물리학자와 실험물리학자들은 입자들을 분류하고 모든 것을 (뭐, 거의 모든 것을) 표준모형이라는 아름다운 이론으로 정리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제 조언은 난장판인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 할 것이 있는 곳이니까요.


제 세번째 조언은 아마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자신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풀 수 있다고 아는 문제들(매우 심술궂은 경우가 아니라면)만 줍니다. 또한, 그 문제들이 과학적으로 중요한가는 상관없습니다 - 수업을 통과하기 위해서 푸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실세계에서 어떤 문제가 중요한지 알기는 매우 어렵고, 지금 이 순간 그 문제를 풀 수 있는지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20세기 초 로렌츠(Lorentz)와 아브라함(Abraham)을 포함한 많은 유명한 물리학자들은 전자에 대한 이론을 세우려 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이 지구가 에테르(Ether)를 통과하면서 일어나는 효과를 감지하는데 실패했는지 이해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죠. 모두 알듯이, 사람들은 잘못된 문제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양자역학이 발견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아무도 전자에 대한 성공적인 이론을 세울 수 없었지요.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탁월하게도 운동이 시간과 공간의 측정에 주는 영향이 풀어야 할 올바른 문제임을 알아차렸고, 이 발견은 특수상대성이론으로 이어집니다. 무엇이 노력해야 할 올바른 문제인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실험실이나 책상 위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은 낭비됩니다. 창의적이고 싶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창의적이지 않은 채 보내는 데, 혹은 지식의 대양에서 정체하는 데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조금이라도 과학사에 대해, 최소한 몸담고 있는 과학 분과의 역사에 대해 배우십시오. 역사가 당신의 연구에 도움이 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사실 중요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각주:1] 예컨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에서 시작해 토마스 쿤(Thomas Kuhn)과 칼 포퍼(Karl Popper)와 같은 철학자들이 제시한 과학에 대한 과하게 단순화된 모형들은 이따금 그 모형을 믿는 과학자들을 방해하곤 합니다. 과학철학에 대한 가장 좋은 해독제는 과학사에 대한 지식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과학사를 익혀 자신이 하는 일을 더 가치있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자가 되어 부자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친구들과 친척들은 보통 하고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할테고요. 더군다나 기본입자물리학과 같은 분야에서 일하게 된다면 당장 유용한 일을 한다는 보람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하고 있는 일이 역사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100년 전인 1903년을 되돌아봅시다. 1903년 대영제국의 국무총리가 누구였는지, 혹은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누구였는지가 지금 얼마나 중요합니까? 정말 중요한 일은 맥길 대학교(McGill University)에서 에른스트 러더포드(Ernest Rutherford)와 프레더릭 소디(Frederick Soddy)가 방사능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는 (당연하게도!) 실용적으로 응용할 수 있었지만 더욱 중요했던 것은 이 연구가 가진 문화적인 함의였습니다. 방사능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서 물리학자들은 어떻게 태양과 지구의 핵이 수백만 년이 지난 후에도 뜨겁게 유지되는지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지질학자와 고생물학자들이 지구와 태양의 긴 나이에 대한 과학적인 반론이라고 여겼던 주장이 사라졌지요. 이후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의 진실로 믿는 것을 포기하거나 지적 무책임함으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작업은 갈릴레오(Galileo)와 뉴턴(Newton), 다윈(Darwin)이 내딛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종교 독단주의(religious dogmatism)의 약화라는 여정의 한 발걸음이 되었지요. 아무 신문이나 하나 집어서 읽어보면 이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자부심을 느낄 만한 세련된(civilizing) 작업입니다.

  1. 오역이라는 의견이 있어 수정하였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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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The Ghost of the Executed Engineer (Reprint, Paperback) - 8점
Graham, Loren R./Harvard Univ Pr


소련이 가졌던 기술적 한계를 사형당한 광산학 전문가 페테르 팔친스키(Peter Palchinsky)의 삶을 통해 들여다본 책이다. 번역본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학기에 들었던 공학윤리와 리더쉽 과목에서 과제로 쓴 서평을 공유해본다. 확실히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니 원문이 한글일 때와는 다소 다른 느낌을 갖는 것이 느껴진다.[각주:1]



칼 레이문드 포퍼경은 그의 유명한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과학에서의 진보는 열린 사회에서 양육될 때에만 가장 크게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요 주장-전체주의적 정부의 악함에 대한 강한 신념-은 잠시 옆으로 치워두기로 하면, 과학의 진보에 대한 그의 논거는 매우 설득적이다. 하지만 과연 사실일까? 냉전 기간의 소비에트 연방의 급격한 발전을 고려하면 이 주장에 의문을 갖게 된다. L. D. 란다우와 같이 특출난 과학자들이 반례를 제공하지만, 로렌 R. 그래함의 『사형된 엔지니어의 유령The Ghost of the Executed Engineer』을 읽고 나면 포퍼의 선언은 합당해 보인다.


이 책은 불우한 러시아 엔지니어 페테르 팔친스키의 삶을 그린다. 팔친스키는 스탈린 치하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반역모의로 비밀리에 사형되었다. 그는 왜 혐의를 받았을까? 저자는 이 이유를 스탈린이 소비에트 혁명 이전에 교육받은 엔지니어들에 대해 가졌던 불신과 거대 산업 복합체를 지으려는 정부 계획에 대한 팔친스키의 강한 비판에서 찾는다. 이후 저자는 소련의 기술에 대한 관점과 엔지니어들이 받은 교육을 사형당한 전문가의 불운에 맞추어 설명한다.


페테르 팔친스키는 짜르 시대에 훈련받은 광산학 전문가였다. 그는 1901년 석탄 채굴량 감소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의 일원으로 우크라이나의 돈 분지(Don Basin)에 파견되었고, 노동자들을 조사하는 임무를 받았다. 노동자들의 생활환경에 관한 통계를 모은 팔친스키는 열악한 생활환경이 그들의 의욕을 꺾었다고 결론지었고, 이는 상부의 분노와 유배의 원인이 되었다. 저자는 이 경험으로 팔친스키의[각주:2] 기술만 고려해서는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믿음과 급진적인 정치관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팔친스키는 기술이 그 기술을 도입하는 사회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술이 사회적인 조건을 만들 뿐만 아니라 특정 사회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기술을 성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팔친스키와 스탈린의 기술에 대한 극단적인 견해차는 흥미롭다. 전자가 산업의 진보를 정치적, 사회적, 법적, 교육적 사안들과 분리할 수 없으며 인본주의적인 접근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한 반면 후자는 기술을 모든 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취급했다. 팔친스키는 이러한 믿음 위에서 엔지니어들이 다양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가 우세하였고 많은 비효율과 노동자의 혹사를 야기했으며, 연방에서의 교육을 받은 엔지니어들이 터무니없이 제한된 교육을 받고 새로운 지도자들이 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저자가 만난 '종이 제작기에 들어가는 볼 베어링'에 대한 공학 학위를 받은 엔지니어는 터무니없이 좁은 소련의 교육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엔지니어가 가장 큰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팔친스키의 생각은-구글은 완벽한 사례이다- 자본가들의 탐욕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자본주의 국가에서 현실화된 것으로 보인다.


슬퍼라, 선견지명이 있었던 공학자의 말년을 읽으니.[각주:3] 팔친스키는 선의에서 조국을 위해 산업체의 효용을 최대화하는 통찰을 제공해려 했으나 나라의 지도자는 사보타주로 간주하고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책으로부터 판단할 때 팔친스키는 이미 같은 이유로 투옥된 적이 있기에 공개적인 비판이 가져올 목숨의 위협을 알고 있었다고 보여지나, 결과적으로 항상 석방되었기 때문에 간과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전문가의 의무를 이행했을까? 팔친스키의 경우처럼 생사가 걸리지는 않았으나 지금도 동일한 딜레마가 경제적인 지위를 볼모로 남아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거리낌 없이 의견을 내겠지만, 솔직하게 말한다면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스탈린을 기술 도입의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측면에 대해 무지한 것으로 혹평하는 것에서 냉전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느껴지지만 팔친스키를 순교자가 된 불우한 예언가로 우상화하려 하지 않았던 저자의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의 선견지명에서 신화적인 분위기를 제거하려 노력한 저자의 노력은 사형당한 엔지니어의 걸출한 탁월로 실패해 보인다. 산업화에서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는 관점은 인적 자본 개념을 40년 가까이 앞지르며, 효율적이려면 행복한 노동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그가 살던 시대를 너무 앞질러 보인다. 가끔은 더 작은 산업체가 거대 복합체보다 효율적이다는 그의 입장에서 대기업들의 효율에 대한 미신을 반성하게 되며, 그의 신조인 엔지니어의 폭넓은 교육에서 우리의 교육정책을 재고하게 된다.


이 서평의 서두에서 한 질문으로 돌아오면, 이 책은 학문에서의 진보가 가능하더라도 이의가 없는 사회에서의 산업과 기술에서의 발전은 비효율을 낳도록 예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포퍼경의 전체주의보다 열린 사회가 우월하다는 결론은 반박을 압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나는 우리가 공학과 자연과학의 전문가들에게 열린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의 전문가들이 정치적인 견해를 발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면 공학과 자연과학 출신의 정치적 비판은 우리의 규범에서는 자연스럽지 않은 편이다. 물론 공학과 자연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정치나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반론이 가능하나, 이 또한 다른 우려를 낳는다: 우리는 미래의 공학자들에게 이 사안들을 충분히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서평을 번역해놓고 보니 제목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추가한다. 저자는 폭넓은 식견을 가졌던 팔친스키를 사형한 소련은 그의 원한에 홀렸다고 표현하였다. 책의 제목은 거시적으로 볼 수 있는 전문가의 필요성을 사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에 투영한 결과물인 것이다.


하나의 유령이 소련을 배회하고 있(었)다. 팔친스키라는 유령이.


그 유령은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는가?


The Ghost of the Executed Engineer (Reprint, Paperback) - 8점
Graham, Loren R./Harvard Univ Pr

  1. 내가 쓴 글을 내가 번역하니 무언가 기분이 이상하다. [본문으로]
  2. 영어 수사법의 특징은 동일한 말을 최대한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같은 수사법을 따를 경우 글이 깔끔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갖게 되므로 최대한 단일한 표현으로 번역하였다. [본문으로]
  3. 도치를 살리려고 살짝 무리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디랙해Dirac sea를 항해하는 히치하이커들. 그들은 겔만의 팔정도Eightfold way를 가슴에 품고 파인만 도표Feynman diagram를 지도삼아 슈뢰딩거의 고양이Schrodinger's cat와 함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Heisenberg's uncertainty principle을 극복하며 나아간다.[각주:1] 그들을 위한 항해의 안내서를 공개하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 Second Creation
The Second Creation (Reprint, Paperback)
Crease, Robert P./Rutgers Univ Pr
현대 물리학이라고 하면 대부분 초끈이론을 떠올리지만 실세는 표준모형이다. 아직 초끈이론이 이론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반면 표준모형은 쏟아지는 새로운 물리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되었고 물리 현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실험적으로 검증된" 이론이다. 하지만 표준모형에 대한 교양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몇 안 되는 표준모형의 역사를 다루는 책인 Second Creation은 표준모형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항상 계산을 틀리고는 했다는 맨하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의 오펜하이머J. R. Oppenheimer, 말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디랙P. A. M. Dirac, 봉고를 치고 다니며 직관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파인만R. Feynman, 돈 벌어 먹고 살만한게 없어 물리를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주를 보였던 겔만M. Gell-Mann 등 표준모형이라는 건축물의 주춧돌을 깎아냈던 개성 넘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읽는 이의 시간을 흡입하는 마력이 있다.

더군다나 고등학교 물리 시간에 배우는 톰슨J. J. Thomson의 푸딩모형과 우리가 현재 원자력을 하면 떠올리는 원자핵이 가운데에 있고 전자가 그 주위를 도는 그림의 원인을 제공한 러더퍼드E. Rutherford의 실험들의 비화 또한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방사능의 위험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대에 고도로 농축된 방사성 물질으로부터 화상을 입어 가면서 새 물리학의 기둥을 새웠던 실험가들의 이야기와 양자역학을 태동시킨 보어N. Bohr,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 슈뢰딩거E. Schrodinger의 일화는 물리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깊게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덴마크 사람인 보어가 영국으로 유학가서 지냈던 불행한 시절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상대적으로 오래 된 책(80년대면 현대물리학에서는 근대이다)인지라 표준모형에 아직 3세대 입자, 그러니까 Top, Bottom 쿼크와 타우 입자Tauon가 도입되기 전까지의 역사까지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이론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과거와는 다르다고 해서 과거의 이해와 해석이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닌 것처럼, 누락된 역사는 이 책의 아쉬운 점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오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엘러건트 유니버스

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승산
초끈이론의 전도사라 할 수 있는 그린B. Greene의 초기작이다. 후속작이었던 『우주의 구조』는 어려워서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는데(106페이지였을 것이다) 이 책은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중학생이 소화하기에는 무리였던 것일까?

"현대물리학이란 초끈이론이구나"라는 스테레오타입을 만들어낸 장본인(그리고 미드 빅뱅이론은 이 편견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하기 쉽게 잘 쓰여진 책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괜찮은 책. 다만 현재 서점에 쏟아지는 책들이 죄다 초끈이론에 그 기반을 둔 책들인지라 새로운 관점을 원한다면 다른 책이 더 나을 것이다.


3. Concepts of Space
공간개념
막스 야머 지음, 이경직 옮김/나남출판
(원서가 없어 번역본으로 대체)
어렵다.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참고한다고 하니(칸트까지만 하더라도 시공간은 철학의 일부였다.) 그 난이도가 짐작이 가리라. 더군다나 책 중반 이후부터는 원문을 수록하는데 읽은 책이 영어였으니 수록된 원문은 불어와 독일어 등. 덕분에 인용문은 하나도 못 읽었다. 순전히 독자의 능력 부족이기는 하다만.

"공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생각부터 현대의 생각까지 상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옛 희랍 시절의 사람들이 기발한 논리로 공간을 무엇으로 정의하고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유대인의 카발라Cabala가 어떻게 기독교 세계관에 영향을 주었는지, 뉴턴의 공간에 대한 가설에 대한 당대 신학자들이 어떻게 비판하였는지 등에 대해서도 담고 있어 물리학 교양서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다. 더군다나 후반으로 갈 수록 현대물리학의 입김이 반영된 "시공간은 어떠한가"에 대한 답변은 관련 전공의 전공지식이 없으면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워진다. 불가해한 것으로 여겨졌던 문장들이 일반상대론을 조금 공부하고 나니 깨우쳐진다면 교양서로서는 낙제다.

또 다른 아쉬운 점이라면 서양쪽의 역사에 치우쳐 동양에서 공간의 개념은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나오지 않는다. 다만 현대의 시공간에 대한 관념은 거의 서양 사상이 원류가 되니 동양의 역사가 도입되면 오히려 책의 통일성만 방해할 위험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겠지.


4. Three Roads to Quantum Gravity
Three Roads to Quantum Gravity (Reprint, Paperback)
Smolin, Lee/Perseus Books Group
(번역본도 나와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이론들에 대한 책은 대부분 초끈이론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초끈이론은 미국에서 대단히 흥행하고 있는 이론이고 한국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물리학의 거장들이 활동하고 있는 다른 지역으로 렌즈를 돌리면 어떤 그림이 나오게 될까?

2차대전 이전에는 하이젠베르크와 아인슈타인A. Einstein, 슈뢰딩거 등 독일이 당대 물리학의 최전선에 서 있었고 2차대전 이후에는 그 사람들이 나치를 피해 건너간 미국에서 파인만, 겔만, 와인버그S. Weinberg 등이 현대물리학의 초석을 닦았다. 하지만 현대물리학의 거장들이 그들만 있던가. 뉴턴경Sir I. Newton의 역사를 물려받은 영국에는 펜로즈R. Penrose와 휠체어 위의 지성 호킹S. Hawking박사가 있다.

특이하게도 셋 다 중력에 대한 연구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중력의 양자화에 대한 전반적인 접근을 다루는 책이 영국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책은 제목에서처럼 중력을 양자화하는 접근법들에 대한 책이다.

중력을 양자화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잘 알다시피, 전하는 연속적인 분포를 갖지 않는다. 전자가 가지고 있는 전하량이 일정하고 이 전하량이 기본 단위가 되어 전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마치 158,259.82원짜리 핸드폰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실제 현금으로 이 핸드폰을 살 때에는 158,250원이나 158,260원으로밖에 거래를 못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식으로 물리 법칙에 근본적인 비연속성을 도입해주는 것을 양자화된 이론이라고 부른다. 플랑크M. Plank는 빛의 에너지에 비연속성을 도입해서 흑체복사black body radiation를 성공적으로 설명했고, 보어는 원자 궤도에 양자성을 도입해 수소원자의 스펙트럼을 설명하는데 성공했다. 디랙과 파인만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전자기력의 상호작용까지 양자화하는데 성공하는데, 이것을 두고 양자전자기학Quantum ElectroDynamics, 혹은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이라고 한다. 다만 아직 양자화가 완전하지 못한 힘이 있는데, 바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설명되는 중력이다.

중력에 양자성을 부여하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끈이론이 있고, 다른 하나는 약간은 생소한 루프 양자중력 이론이다. 둘의 접근방법은 약간 다른데, 초끈이론이 힘을 매개하는 입자들(보존boson이라고 부른다)의 존재에 뿌리를 둔다면 루프 양자중력 이론은 반대로 시공간이 양자화되어있을 경우 만족할 방정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마지막 한 가지 접근법은 아예 백지 상태로부터 출발해 물리 이론을 쌓아 나가는 것으로(예컨데 시공간이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지 않고 이론의 중간 과정으로 시공간을 정의하는 방식이다) 펜로즈의 트위스터 이론이 여기에 해당하나 다른 이론들도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앞서 서술한 이 세가지 이론들을 서로 비교하며 중력을 양자화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던 시공간의 다양한 측면들을 파헤친다. 초끈이론 말고 다른 현대물리학의 이론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신선한 충격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무엇이 궁극적인 중력의 양자이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저자는 현재 알려진 중력에 양자성을 부여하는 이론들은 결국 진짜 이론의 한 단면일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코끼리의 코를 만졌던 장님과 귀를 만졌던 장님의 대답이 달랐던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이론들은 맞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현실과 아예 동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의 바람처럼 수십년 이내에 중력의 양자적 성질이 전부 밝혀질 것인지 기대해 보자.

5. Programming the Universe
Programming the Universe (Reprint, Paperback)
Lloyd, Seth/Random House
(번역본도 나와 있습니다)
이미 한 번 서평을 쓴 적이 있는 책(2008/12/24 - [자연과학] 세스 로이드, 프로그래밍 유니버스)이지만 조금 부족한 것이 있다 싶어 부연설명을 단다.

다른 교양서적과는 다르게 이 책은 새로운 이론을 소개하는 책은 아니다. 단지 "새로운 해석"을 소개하는 것일 뿐. 초끈이론이 세계를 "고차원의 끈들이 공명하는 무대"로 묘사했다면 이 책에서는 우주가 "0과 1들이 벌이는 축제"로 치환된다. 이 책에서는 세계가 숫자들의 잔치라는 그림으로 그려지더라도 그 세계를 설명하는 수식들은 이전의 물리학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몬드리안P. Mondrian의 추상화에서 누구는 냉혹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구는 이성의 차가움을 느낀다는 것이 비슷한 비유이려나.

관측하는 순간 그 물체는 그 상태로 붕괴한다는 고전적인 코펜하겐 해석, 양자역학적으로 주어진 다양한 가능성들은 각기 그 가능성대로 발현한다는 다세계해석 말고 제 삼의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6. 생각의 기차
생각의 기차 1
이상하 지음/궁리
생각의 기차 2
이상하 지음/궁리
벤젠고리는 꿈에서 등장한 자기 꼬리를 문 뱀의 형상을 통해 유명해졌고, 페니실린은 열악한 연구실 환경에서 곰팡이가 잘못 자란 덕분에 여러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 비슷한 많은 사례들 때문인지 새로운 과학적 발견은 행운(serendipity)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간혹 있게 되는데, 실제 발견의 현장은 그러할까? 새로운 발견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 지는 것일까?

과학적 발견이라 하면 과학이 내딛는 걸음 하나 하나를 말한다. 지금 이 시대의 과학은 다각형과 사원소설로 우주 만물의 움직임을 설명하던 요람에서 보이지 않는 미립자들을 관측하고 수많은 괴질들을 정복하는 먼 길을 걸어왔다. 그 먼 길을 걷는 동안 남겨 놓은 발자국들이 모두 앞선 예제들처럼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가지지는 않았을 터. 그렇다면 과학이 남은 발자취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저자는 총 열 두가지 분류로 발자국들을 분류하고 그 분류를 따라 발자국들을 되짚는다. 그 발자취에는 과학이 발달하던 시대적 배경과 그 시대의 한계도 드러나고 새로이 발견된 현상들에 대한 과학자들의 대담한 가설과 보수적인 견해가 서로 배치되며 나타나기도 한다. 이 긴 여정 속에서 점차 분명해지는 것은, 으레 믿는 '과학은 천재들의 거대한 도약으로 쌓아올린 상아탑'이라는 신화가 과학이라는 빙산의 왜곡된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과학이라는 길을 걷고자 하나 자신의 능력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과학을 둘러싼 경외의 환상을 벋겨내고 자신감 있게 길을 내딛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7. Feynman's Rainbow

Feynman's Rainbow (Reprint, Paperback)
Mlodinow, Leonard/Grand Central Pub
(번역본도 나와 있습니다)[각주:2]
서점의 과학 코너에 들어가면 반갑게 맞아주는 수많은 책들로 이름을 널리 알리는 파인만씨. 그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저자는 박사과정을 막 마친 후 박사후연구원으로 물리학계의 전설 파인만과 겔만이 있는 칼텍으로 오게 된다. 낯선 환경, 잘 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만난 파인만. 이 책은 당시 항암 치료로 고생하며 젊음을 잃어버린 후년의 파인만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재구성한 것이다. 공자와 그 제자들 사이의 대화를 적은 『논어』에서 공자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책에서는 천재라는 베일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았던 파인만의 삶과 사상이 드러난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대화를 옮겨 본다.

"And what do you think was the salient feature of the rainbow that inspired Descartes's mathematical analysis?" he asked.
"I give up. What would you say inspired his theory?":
"I would say his inspiration was that he thought rainbows were beautiful..."
 
"그리고 데카르트가 수학적으로 분석하도록 한 무지개의 본질적인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해?" 그가 물었다.
"모르겠는데요. 데카르트의 이론에 불을 지핀게 무어라 하시겠습니까?"
"나는 데카르트가 무지개가 아름답다고 생각해서라 하겠어..."
p.s. 신판본도 있어 링크를 걸어둔다.
Feynman's Rainbow (Paperback)
Mlodinow, Leonard/Random House Inc


8.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
로버트 P. 크리즈 지음, 김명남 옮김/지호
우리는 왜 자연에 대해서 알기를 열망하는 것일까. 그건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에, 자연이 감추어 둔 보석을 드러내는 실험 또한 아름다울 수 밖에 없다.

책에 대한 평가는 이전에 쓴 서평으로 대신한다.(2011/06/05 - 로버트 P. 크리즈 저 김명남 역,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 부연설명은 불필요하다고 믿는다.


9. 기타
스트링 코스모스
스트링 코스모스
남순건 지음/지호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국내 과학자의 초끈이론에 대한 교양서. 얇고 무난하지만 두어 번인가 오타가 있어 신경쓰였다. 이전 서평(2009/03/24 - 남순건, [스트링 코스모스])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츠즈키 타쿠지 지음, 김하경 옮김/더블유출판사(에이치엔비,도서출판 홍)
오역만 기억나는 교양서. 소설의 형식을 차용해서 그런지 NNT의 블랙 스완이 연상되는 부분도 있다.[각주:3] 이전 서평(2009/04/14 - 츠즈키 타쿠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과학 철학
과학 철학
이상하 지음/철학과현실사
어렵기도 하고(후반부는 머리에 우겨넣는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과학철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혀 상관없는 책이다. 과학철학이 쿤의 패러다임과 포퍼의 반증가능성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다른 견해들을 접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듯. 에너지와 운동량에 대한 생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 왔는지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서평이 아직도 쓰다 만 채 보관고에서 숙성되는 모양이다.

싸우는 물리학자
싸우는 물리학자
다케우치 가오루 지음, 박재현 옮김, 전영석 감수/시공사
연예인 x파일이라는 것이 한창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물리학자 x파일이다. 물리학 교재에서 간간히 보이는 이름들의 인간적인(?) 부분을 볼 수 있다. 이전 서평(2009/03/14 - 다케루치 가오루, [싸우는 물리학자])

밤의 물리학
밤의 물리학
다케우치 가오루 지음, 꿈꾸는과학 옮김/사이언스북스
"밤의"이라는 수식어는 무림식으로 쓴다면 사파(邪派), 역사식으로 쓴다면 야사(野史). 물리학 전체 커뮤니티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가설들과 이론들을 다루는 책인데 워낙 이쪽 구석구석을 다 쑤시고 다니는지라 새로운 것은 없었다. 이전 서평(2009/01/07 - 다케우치 가오루, [밤의 물리학])



  1. 재미없는 말장난이다. [본문으로]
  2. 만 품절로 Fail [본문으로]
  3. 논리보다는 이야기가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 그런 구성을 취한다고 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트위터를 간간히 하던 시절에(요즘도 간간히 한다. 간간히의 주기가 길어서 그렇지) 했던 트윗 중 이런 것이 있었다. 찾아보니 최신 글이네.

물리학자란 자연의 아름다움을 수학으로 노래하는 시인들이다. (요즘 판타지를 너무 많이 읽었구나.)
-5월 2일 Tweet 

간간히의 주기가 1달 남짓이라는 신발견은 일단 제쳐두고(ABC마트 만세!), 난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과학자들은 알기를 원하고 자기가 얻은 앎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가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시리즈에서 말했던 적도 있고. 물론 자신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기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있다. 하지만 니체가 말하지 않았던가. "너 위대한 천체여, 네 빛을 받을 내가 없었더라면 네 빛이 무슨 소용이리"(여튼 비슷한 소리를 『차라투스트라』에서 했다) 명상은 결국 사람들에게 해줄 이야기를 얻기 위한 것이다.

그 점에서 개운하게 읽은 책 한 권을 소개하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 - 10점
로버트 P. 크리즈 지음, 김명남 옮김/지호

실험. 이론을 아름답게 여기는 부류에 더 가까운 나에겐 껄끄러운 존재이다. 학점이 잘 안 나온다는 것은 넘어가더라도, 아름다움으로 점철된 이론을 한방에 산산조각내는 가공할만한 위력을 지니지 않았던가. 실험은 항상 이론을 뒤엎을 준비만 하며 눈을 번뜩거린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실험은 이론과 친할 수 밖에 없다. "무엇을 실험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이론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론에서 보여지는 아름다움을 실험에서도 발견할 수는 없을까?

이 책의 저자는 그 질문에서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실험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아름다울 수 있다면, 아름다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래서 저자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꼽은 실험들을 모으기로 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그 실험들이 왜 아름다운지 설명해주며 그 아름다움에 동참하기를 주문한다.

절대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실험으로 꼽혔던 단 하나의 실험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아래의 실험이다. 전자는 양자역학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간섭무늬를 만든다. 하지만 전자가 간섭무늬를 만드는 것은 여러 개의 전자가 서로 상호작용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날아가면서 전자들끼리 서로 부딛치며 간섭 무늬로 내려앉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자를 하나씩 날려보낸다면 어떨까? 결과는 아래와 같다.


점차 점들이 밝아온다. 하나 둘 무작위로 쌓이던 점들은, 시간이 지나고 지날수록 스크린을 메우기 시작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무작위하게만 보이던 점들이 점차 모습을 갖추어간다. 마치 전자들이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빛이 하나 둘 밝아오는 은하의 별들처럼 조금씩 흩뿌려진 점들이 구조를 이루어 종대를 이룬다. 아름다움을 못 느끼더라도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할 수 있겠는가. 자의식조차 없는 미립자들이 무대에 하나 하나 들어서며 점차 군무를 완성해가는 발레리나들처럼 움직이는데, 누가 이 경이로움을 못 느낀단 말인가.

저자가 책을 구성한 방식은 흥미롭다. 실험을 한 가지씩 나열하면서 그 실험이 어떻게 모습을 갖추어 갔으며 왜, 어떻게 아름다운가를 설명한다. 저자가 캐번디시가 자신의 실험을 설계하고 거기에 개입할 수 있는 오류의 원인들에 집착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을 보노라면 마치 수학의 증명에서 느끼는듯한 엄격함에 소름이 돋는다. 이론과 간결한 수식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들이라면, 캐번디시의 편집증적인 엄격함에서 경외를 느낄 것이다. 하나의 실험에 대해 설명이 끝난 다음에는 간주라는 부분으로 넘어간다. 간주에서 저자는 실험의 아름다움에 대해 논한다. 실험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어째서 사람들이 실험에게서 비인간적인 것만 보는 것이 부당한지를 설명하고, 실험과 함께 살아가며 그 고된 작업을 마친 실험자들에게 바치는 찬가는 즐거움을 배가시켜 줄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다. 실험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그 간단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주변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도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 - 10점
로버트 P. 크리즈 지음, 김명남 옮김/지호
 
Posted by 덱스터
미학 오디세이 3권 세트 - 10점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즐거움과 함께 인간의 본질과 가장 맞닿아있는 감정이다. 사실 아름다움에서 즐거움이 나오고, 즐거움에서 아름다움이 파생되어 사실상 둘을 면도날로 자르듯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모든 세상은 자신이 느끼는 아름다움을 남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이다. 철학자들은 이성(理性)에서, 신학자들은 신성(神聖)에서, 과학자들은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느꼈고, 그것을 각자의 언어, 그러니까 논리, 성서, 수학으로 표현했을 뿐이라고.

이 사람들은 단지 다른 미적 감각을 가졌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학의 논의의 상당수가 철학과 겹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정신활동이고, 이성은 정신활동의 정수처럼 여겨지지 않던가? 더군다나 수많은 동기가 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즉 미각(美覺)에서 출발했다면 인간의 정신에 매력을 느끼던 사람들이 놓기 힘든 주제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학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활동에 대한 교양서 중에서 단연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책을 꼽으라면 진중권씨의 『미학 오디세이』시리즈이다. 그래서 읽게 되었다. 책을 사다가 5만원을 채우면 마일리지 2000점을 더 준다는 알라딘의 유혹(?) 때문에 그런 점도 있지만, 나온지 10년이 거의 넘어가는데도 아직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는 점이 눈을 끌었던 것 같다.

미학 오디세이 1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1권은 에셔(Escher)의 일러스트가 주로 나온다. 들어 본 사람만 많고 정작 읽은 사람은 적다는 『괴델, 에셔, 바흐』의 에셔 말이다. 내가 처음으로 에셔의 작품을 보았던 것은 일본에 갔을 때 둘러보다가 들렀던 어떤 박물관(미술관이었는지도 모른다)에서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잠깐 그 앞에 서서 서너 초 정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발길을 돌리는 자그마한 소년이 보였을테지만, 나에게는 영화 「컨택트(Contact)」에서의 시공간의 벽을 넘나드는 찰나의 여행이었다. 때문에 그 곳 기념품점에서 팔고있는 자그마한 저금통-들어간 동전이 쌀알보다도 작아지거나 작은 상자만이 떠 있는 공간 속으로 동전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들-을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나왔던 기억이 난다.


이런 애들 말이다. 내 기억으로는 동전도 엄청 작아졌었는데 다른 비슷한 건가?

1권과 동시대에 나온 책이 2권이다. 2권은 마그리트의 그림들을 다루고 있다.

미학 오디세이 2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에셔의 작품들처럼 마그리트의 작품들도 말이 안 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그리트의 작품들 중에는 딱히 기억에 남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이전 글에서 잠시 끌어왔던 이 그림이다. 허공에 떠 있는 성, 어디에서 많이 본 판타지적 요소 아닌가?



제 3권은 앞의 두 권과는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적 간극이 있기 때문에 앞서 소개한 두 권의 책과는 살짝 다른 분위기가 함께하고 있어 천천히 다루기로 하고, 위 두 권을 독자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말 하나는 잘 해서 안티와 팬 모두를 끌고다니는 진중권씨의 말빨이 그대로 녹아나 있는 괜찮은 책이라고 하겠다. 책이라는 것이 대화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던 전통을[각주:1] 그대로 따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서로 대화시키는 구성을 넣은 것은 분명히 오래된 기법이지만 그 전통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현대를 사는 나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름다움과 같이 보편적이면서도 난해한 대상을 이해할 때에는 직접 남과 토론하면서 배우는 것이 효과적인 학습법이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산문과 대화를 적절히 배합한 책의 구성이 얼마나 절묘한지 놀라게 된다.

트로이
아델 게라 지음, 강경화 옮김/열림원
조금은 상관없지만, 대화로만 구성된 현대 책 중 하나. 참고하시길...

앞서 말했듯이 3권의 분위기는 그 전의 두 권과는 조금 다르다. 아무래도 작가가 강산이 변하는 시간만큼 머리가 굵어진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다룬 주제 자체가 분위기의 변화를 유도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에 날 가르치셨던 은사분들 중에는 이른바 '시계추 이론'이라는 것을 주장하시는 분이 있었는데,[각주:2] 그 주된 내용은 모든 것이든 시계추처럼 한 쪽으로 기울었다가 그 반대로 기울게 되고, 다시 기울어진 쪽에서 원래 위치로 다시 기우는 주기적인 행동을 무한히 반복한다는 것이다. 서양 문화의 분위기가 인간 중심에서 신 중심으로, 신 중심에서 다시 인간 중심으로, 이런 식으로 계속 진동한다는 것을 가장 큰 근거로 내세우셨던 기억이 나는데 돌이켜보면 어떤 철학자가 주장한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튼, 공비가 -1인 기하급수처럼 끝없이 진동하는 역사 속에서 그 끝은 어디에 있을까? 0? 1? 아니면 다음의 식에서 r에 -1을 넣으면 얻는 값처럼 이도 저도 아닌 ½?

1 \,+\, r \,+\, r^2 \,+\, r^3 \,+\, \cdots 
\;=\; \frac{1}{1-r},
'기하급수적으로'라는 단어가 이 수열에서 나왔다.[각주:3]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발걸음이 무거울 수 밖에 없다. 철학이 이리 저리 시계추처럼 진동하다가 결국에는 끝나지 않은 기하급수처럼 어디로 가야 할 지 방향을 잃어버린 현대-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의 미학 또한 차가운 겨울 밤을 지낼 피난처를 찾지 못한 길거리의 나그네의 발걸음처럼 무겁다. 그렇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필자가 3권을 읽으며 느낀 첫 느낌은 '억지로 분위기에서 무게를 덜어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미학 오디세이 3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구는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가 앞으로 쓰지 않을 소설' 이었다. 한편으로는 적절한 소설을 찾아 헤매기 귀찮아하는(?) 저자의 게으름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게으름보다는 꽤 무겁게 흘러가는 현대철학과 그 무거운 발걸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주기 위한 장치라고 느껴졌다. 그 시도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책을 읽으며 굳어있었던 얼굴에 피식하며 스쳐 지나가는 미소를 안겨주는 효과는 있었다.



맑은 달밤에 베란다에 홀로 앉아 달과 함께 맥주캔을 홀짝이던 그대. 무엇이 그대를 베란다로 끌고 왔는지 궁금하지는 않던가? 오늘 한번 무엇이 그대를 불러냈는지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

미학 오디세이 3권 세트 - 10점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미학 오디세이 1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미학 오디세이 2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미학 오디세이 3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1. 플라톤의 책은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하는 구조로 이루어진 것들이 많다. 가까운 근대에서 찾는다면 갈릴레오의 책이 이런 방식으로 쓰여졌다. 가까운 지역에서 찾는다면 공자의 論語가 딱 이런 구성이다. [본문으로]
  2. 이상하게도 이 분처럼 조금은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강의하시는 분들은 아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아니면 내가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았던 선생님이 엄한 분위기를 가지고 계셔서 그때에만 주의를 집중했을 수도 있고. [본문으로]
  3. 파인만(R. Feynman)씨는 이 단어의 상위 개념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이라는 단어 대신 '경제학적'이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고 했다. 인플레이션을 생각해보면 경제학적 숫자가 무한대를 상징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을지도.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원문

-재미있는 글이라서 퍼왔습니다 -_-;;

흠... 원래 과학에서 말하는 신은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쪽에 가깝죠.(물론 여기서 신은 만물에 대해 중립적인 신을 의미) 그리고 존재와 존재하지 않음에 차이가 없다면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논리선별법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합당하다는 쪽이고요.

종교적인 의미의 신은 과학적인 증명을 때려 치는게 옳다고 보기는 합니다. 언제까지나 '무엇이 과학인가'의 문제인데, 믿음은 과학과는 좀 거리가 있어서요. 그런데 과학적으로 논증할 때 기준을 누구의 것으로 삼느냐가 문제네요. 포퍼의 논의가 어느 정도 우수하기는 하지만 역시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각주:1] 쿤은 '정상과학'이라는 지속적인 체계가 존재한다고 한 것에서만 의의를 찾을 수 있어서요. 그래도 포퍼의 기준을 들이대면 '가설에 반증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는가?'가 과학적인 명제의 기준입니다. 종교에서 그런 부분을 찾기는 힘들죠. 사람이 살아도 신의 뜻, 죽어도 신의 뜻, 이런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렇다고 무신론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인간이란게 세계를 인식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논리에 부분 부분 구멍이 있을 수 밖에 없고 이런게 비이성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거든요. 사실 비이성의 바다 위에 이성이라는 쪽배 하나 떠 있는 것이 인간의 심리일테고요. 글 자체는 유신론자의 논리가 비과학적이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1. 포퍼대로라면 반증 하나에도 이론이 뒤집혀야 하는데 실제로는 실험을 의심하는 사람이 더 많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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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 여태 성공한 사람이 없다.

포퍼의 반증가능성까지 들먹이며 진지하게 나가기는 귀찮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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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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