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많은 사람들이 들어는 보았지만 정작 제대로 읽어 본 사람은 거의 없다는 고전 중 하나. 그 신곡에 대한 특별강의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고전이라고 불리는 대다수의 문학작품들은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많은 고전문학이 글자가 없던 시대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구전문학이어서 일정한 음율(리듬이 있으면 외우기 쉽지요)을[각주:1] 가지고 있었던 이유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상류층의 풍류라고 한다면 소설보다는 시가 선호되었던 분위기도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만 보아도 한시를 지었지[각주:2] 한문소설을 짓는 경우는 거의 없었잖아요. 그나마 있는 소설들도 한시가 등장한 뒤 한참 뒤에서야 등장하였지요. 물론 예상하셨겠지만, 신곡도 시의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곡은 시입니다. 총 세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옥편 34곡, 연옥편 33곡, 천국편 33곡으로 총 100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옥편의 첫 곡을 인트로로 본다면(머리말처럼 말이지요) 각 편마다 33곡을 배치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수학적인 구성을 보아도 특이하다 할 수 있지요. 신곡의 전체적인 내용은 숲속에서 길을 잃은 단테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지옥에서 시작하여 연옥, 천국을 두루 돌아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지옥, 천국과 같은 사후세계가 나오는 것에서 눈치를 채셨겠지만 단테 신곡은 중요한 기독교문학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제 책에 대해서 소개할 차례이군요 ^^;; 책은 단테 신곡에 대한 일종의 해설서입니다. 자습서와 비슷한 느낌이지요.[각주:3] 신곡의 내용이 모두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신곡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에 대한 강의를 모은 책입니다. 강의하는 사람이 단테 전공자가 아니라는 것도 하나의 큰 특징입니다. 이런 특징이 신곡을 기존의 틀이 아닌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각주:4]
또, 이 책의 다른 특징은 일반적으로 신곡에 대해서 배운다고 하면 첫 줄부터 읽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것이 아니라 신곡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 즉 서사시의 역사라던가 기독교사상에 대한 강의로 시작합니다. 이런 특징은 신곡에 대한 또 다른 깊이있는 이해를 가능하게 해 주는 구성입니다.
신곡을 굳이 읽지 않았더라도 도전해볼 만한 책입니다. 생각해볼 거리를 많이 던져주어서 좋더군요 ^^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순수학문이 일본을 따라가기에는 아직도 멀었다는 슬픈 생각도 떠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서야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을까요?
실제로 많이 사용하는 기억술 중 하나가 일정한 리듬을 부여하는 방법이라지요?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이처럼 구전으로 전해오는 시가 거의 변화가 없더라는 어느 한 노학자의 연구 결과였습니다.(p 28) [본문으로]
별은 4.7/5.0 정도? 2% 아쉬운 책입니다. 물론 그 부분은 찾아낸 두개의 오타[각주:1]와 제가 기독교인이라 성경과 약간 어긋나게 쓰인 부분 때문에 그렇고,[각주:2] 내용적인 부분에서는 A+도 못 준 학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망설임 없이 올해 읽은 최고의 책이라 할 수 있겠네요.
이런 책과 동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행복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과장이 좀 심하네요 -_-)
이전에 정치와 관련된 사항에는 무관심한 친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에겐 알게 모르게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이 쿨한 것으로 비추어지는 것 같더군요. (전 비록 10대 끝자락이지만) 많은 20대의 생각이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이런 기사도 있었잖아요. 20대 투표율이 그야말로 바닥이라고. 지금 찾아보니 이런 기사도 있네요.
위 기사 중 '투표율 20%대를 밑도는 20대 대학생'이란 부분이 있습니다.(8번째 문단) 확실한 것은, 우리 세대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글의 학생이 여러분은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대학생 ㄱ군은 집안이 가난합니다. 너무나도 가난해서 학자금대출 이자도 갚기 벅찬 상황이지요. 그런데 ㄱ군은 장학금을 알아보지 않습니다. 대학 등록금은 자기가 번 돈으로 내는 것이 쿨한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단과대학에서 1, 2등을 다투는 학점을 갖고 있지만, 오늘도 ㄱ군은 과외를 찾으러 아파트 단지를 배회합니다.
전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분들이 위의 ㄱ군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집니다. 한정된 의미의 정치라도[각주:1] 자신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는 굳이 명시하지 않더라도 느끼고 계시지 않은가요?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은 쿨한게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위의 ㄱ군처럼 무언가 부족하다는 듯 한 느낌도 들구요. 쿨하다는 착각, 버려 주세요. 착각은 자유라지만 이건 그래도 좀 심한 것 같네요.
전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를 주로 사용합니다만, 그건 '하나의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을 일컫는 말이어서 여기서 사용하려는 정치의 의미와는 좀 괴리된 감이 있네요. [본문으로]
바쁜 하루가 지나고 나서 너무나도 심심해서(...) 정치적 성향 테스트도 좀 해보고 그러면서 아나키즘 검색도 좀 해보고 하다가 보니 자연스럽게 놈 촘스키로 흘러들어가게 되었습니다.(촘스키 교수는 잘 알려진 아나키스트중 하나입니다 ^^;) 그중에 이런 글이 외부 링크로 걸려있더군요.
그냥 읽고서 누군가가 싸지른 말이겠거니 싶어 넘어가려고 하는데, 잠자리에 들어서도 계속 생각이 나길레 그냥 끄적거리고 갑니다.
첫 째, 네 번째 문단에서 언급한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의 공산화 과정에서 있었던 대학살을 사회혁명이라고 칭찬하고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허구라고 주장한 촘스키"라는 부분에 대해서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네요.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에서 놈 촘스키는 분명히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을 뿐이라고[각주:1]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주장이 무엇이든지간에 자신의 주장을 표현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각주:2] 이를 근거로 판단해 보건대 위의 글은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는 것을 근거로 그 주장을 지지한다고 판단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듭니다.
둘 째, 다섯 번째 문단에서는 촘스키의 사상을 그의 행동을 근거로 비판하는 듯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장자의 행동은 주장자를 공격하는 논리가 될 수는 있지만 주장 자체의 허구성을 나타내지는 못한다 입니다. 앨 고어는 환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앨 고어가 말로만 환경운동을 외쳤던 사람이라는 비판이 많은 것은 아시나요? 네, 그런데 이렇게 앨 고어가 말로만 환경을 보존해야 한다고 외쳤다고 하더라도, 환경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허구라는 증거는 되어주지 않습니다. 주장자의 설득력을 떨어뜨릴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근본적으로 주장자의 행동은 주장자만 공격할 수 있을 뿐 주장 자체는 공격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촘스키 교수가 이처럼 위선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촘스키 교수의 주장을 공격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셋 째, 여섯 번째 문단이 참 거슬리는군요. 분단 국가이기 때문에, 전쟁중이기 때문에 사상의 자유는 침해될 수 있는 건가요? 전 이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아무래도 국가의 정의가 차이나서 그런가 봅니다.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태초에 개인이 있었다. 개인들은 모여 국가를 만들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어딘가 비슷하게 보이는군요. 그런데 이 글을 쓴 허문명 논설위원은 이게 아닌가 봅니다. 오히려 이쪽에 가까워 보이는군요.
태초에 국가가 있었다. 국가는 지배할 개인을 만들었다.
음... 뭐 사상적 기반이 그렇다면 전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상당히 이상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취향은 존중해 드리기로 하겠습니다만, 전 이후 제 논리로 이 주장을 까보겠습니다. 님도 제 취향을 존중해 주셔야지요.
대한민국은 분단 국가이고, 전쟁중(비록 휴전이기는 하지만)입니다. 당연히 이런 상태에서는 적을 이길 수 있도록 적절한 통제가 이루어 지기는 해야 하지요. 그런데 그 통제가 사상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이라면 곤란합니다. 자유는 어떤 경우에도 보장되어야 합니다. 왜냐고요? 개인들이 국가를 만들었기 때문에, 국가는 언제까지나 개인을 위한 종으로 역할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국가가 우선이 아니라 개인이 우선이니까요.
그러면 있는 적을 이겨야 하는데 어쩔꺼냐? 사상의 자유는 보장하되, 그 주장에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통제하는 것이라면 저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J. S. 밀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직접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므로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각주:3] 말이지요. 그 주장이 국가에 대해 피해를 끼치지만 않도록 힘을 빼앗기만 하면 되는겁니다. 국가는 자유 자체에 대해서는 제한할 권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한국에서 사상의 자유가 의미하는 바는 미국이든 아마존 밀림 속 오지이든 어디이든간에 거기에서 사상의 자유가 의미하는 바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아나키스트 성향을 가지고 있고,[각주:4] 촘스키 교수의 글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제 글에 대한 반박의 근거가 되나요? 어디 한번 답변을 들어보고 싶네요, 논설위원님. 논설지도 하셨을테니 이정도 글에 대한 반박은 쉽게 기대해도 좋겠지요? 더군다나 요즘 '표현의 자유 침해'로 방송통신법 개정안이 욕 많이 먹고 있는데, 이 쯤의 주장에 대한 반론의 근거는 충분히 준비해 두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닌가요?
놈 촘스키 저 강주헌 역,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시대의 창, 2008, p 41 [본문으로]
전 사실 조중동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금 일명 보수언론이라는 언론사들이 너무나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을 뿐이지요. [본문으로]
John Stuart Mill, 'On Liberty' ed. Gertrude Himmelfarb, Penguin Books Ltd. , 1985, p 71 [본문으로]
사실 검사 결과는 사민주의와 아나키즘의 경계면에 걸리더군요. 그리고 생각보다 사회주의적인 면이 강하고 자유주의적인 면이 약하게 나타나더군요. 제 생각엔 이것이 제가 어느 정도 보수적인 면(일례로 '자유의 방어를 위해서라면 극단적인 경우(조커와 같은 -_-)에 사형을 실행할 수 있다'라거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라면 전통은 존중해야 한다(고리타분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래봬도 저, 혼전순결주의자입니다 -_-)'와 같은 부분) 때문에 그렇게 나온 것 같아요. [본문으로]
블로그파업까지 제안하신 분들이 있더군요 ^^;; 그런데 전 한가지 주제로만 글을 쓰면 이 주일에 하나 정도밖에 글을 올리지 못하기 때문에([물리의 벽을 깨라!] 시리즈가 생각나는군요..쿨럭;; 두번째 글 빨리 포스트하도록 하겠습니다;;) 차마 파업에 동참은 못하고 지지선언만 합니다 ^-^;;;
일단 당분간은 예전의 포스트 방식과 큰 차이가 없을겁니다. 이 포스팅 이후, 파업과 관련된 글에만 [파업지지] 태그를 붙일 생각이니까요. 대신 블로그 제목에 부제를 달 생각입니다.
흠... 90년생인 제가 살아서 언론노조 총파업을 볼 줄은 꿈도 못 꾸었는데 말이지요... 아직도 군부와 민주정부 사이의 과도기를 제대로 이겨내지 못한 건가요? 그래도 이것 하나는 믿습니다. 벼랑 끝에 내몰리면 사람은 어떻게든 변한다잖아요.[각주:1] 사회도 옳은 방향으로 변하길 기원합니다. 물론, 일단은 벼랑 끝에서 어떻게든 버텨 내야겠지요.
민주당 의원님들, 욕 많이 드실껍니다. 국회 문을 무력으로 걸어잠그다니요. 하지만 법안 통과를 막아내지 못하면 더 커다란 욕 드실 것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실망과 함께 말이지요.
제가 왜 이 파업을 지지하냐고요? 정의는 이거다라는 뭐 그런 낯간지러운 말 없이도 언론이 떨어지고 나면 바로 제가 공략대상이 되니까요.(특히나 깝친게 많은 전 많이 위험하군요 -_-;;)
이 시가 생각나는군요.(찾는데 좀 힘들더군요 -_-)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로
네, 다음엔 접니다. 총파업 지지는 사회정의구현이라는 북극성 같은 포기할 수 없는 이상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 다음이 바로 저이기 때문입니다. 생존의 투쟁이라구요 ㅇ-ㅇ
이 땅에 민주주의가 들어선 것은 언제즈음인가요? 이 땅만 따지면 60여년 정도 되겠고 전 지구적으로 따진다면 그 개념은(현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 말입니다) 약 300여년 정도 되겠군요. 인류(H. sapiens)가 등장한 것이 약 이십만 년 전이라고 하니까, 정말 근대의 마지막 1초에 혜성처럼 등장한 체제입니다. 이런, 블로그에서도 불필요할 정도로 거대한 머리가 나오게 되는군요 -_-;;
뭐 어찌되었든 민주주의와 함께 발달한 것이 '자유'라는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자유에 대해서 가장 유명한 책이라면 역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있겠지요. 아직 5개 부 중에서 첫 부밖에 읽어보지 못했지만(1800년대 책이라 그런지 단어가 좀...-_-) 여기서 제시된 자유의 개념은 현대에도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자유의 개념과 동일해 보입니다. 첫 째, 자유는 강자(여기서는 전제정권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입니다)의 힘에 소수자가 말 그대로 '사냥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발전한 것이라는 것과, 둘 째, 이런 보호의 의미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자유라는 개념은 이후에 자기와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 이익집단을 만들고 정치적인 압력을 행세하는 보다 넓은 부분으로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제대로 읽은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네요 단어가 역시...)입니다. 그러면서 등장한 것이 자유의 삼 대 원칙입니다.
첫 째, 자신의 행동이 남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경우까지가 자유의 적절한 범위이다.
둘 째, 이런 자유에 따라 사람은 자신이 쫓고자 하는 이상을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다.
셋 째, 개개인은 이런 원칙이 동등하게 적용되는 단체를 자유로이 구성할 수 있다.
같은 책에서 밀은 사상과 출판의 자유에 대해서도 다룹니다. 제 2부인데, 아직 이 부분은 읽어보지 못했네요.(1부도 한번 읽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되어 한번 더 읽고 있습니다.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말이지요 -_-) 사실, 이 두번째 부분이 자유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들 하더군요. 사상의 자유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니 말이지요. 그래도 마지막 부분에서 사상과 출판의 자유에 대해 '이 자유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다르게 생각될 여지가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첫 번째 원칙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이해 했습니다. 단어가 정말 안드로메다이군요 -_-)' 라고 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자기가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던 간에 그게 직접적으로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니까 사상에 대해서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는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지요.
제가 읽은 책은 Penguin Classics에서 나온 것인데 이제는 다른 책과 묶어서 나오나 보네요;;
물론, 그 이전에 밀은 한가지 전제를 합니다. 인류가 충분히 성숙하여 이런 자유가 부과되었을 때 그 자유를 성실하게 이용할 수 있을 때에만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전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 도대체 '성숙했다는 것은 누가 결정하는 거야?!' 였습니다. 물론 자유가 위의 원칙대로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아무에게나 주어질 수는 없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저것도 말을 알아듣는 사람한테나 주어져야지 말도 못알아 듣고 자유로워졌다고 그 힘을 무작정 휘둘러대는 괴물한테는 주면 안되는 것 아닙니까.[각주:1] 그래도 누가 이 '성숙함'을 결정하는 가는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그런데 이런, 한나라당이 그 '판결자'로 나선 것인가요?
기사를 찾아봤더니 너무나도 알려진 것이 없더군요. 방송통신법 개정에 대해 찾아보았는데, 이건 뭐 구체적인 법안도 공개조차 안 되어 있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번 연말에 어떻게든 통과시키겠다고 한나라당에서는 벼르고 있더랍니다. 주요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어찌저찌 해서 힘들게(?) 구한 자료 올려봅니다. 자료는 저번에 독설닷컴이 주최한 '언론장악 7대 악법 간담회'에서 얻어온 자료입니다.
1. 대기업 방송진입 허용.
현행법에서는 자산규모 3조원 이상의 법인을 대기업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이 기준을 10조원 이상으로 올린다고 하더군요.(12월 공포될 시행령)
2. 신문-방송 교차소유 허용
역시 현행법에서는 이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일간신문과 뉴스통신은 지상파방송, 보도·종합편성채널을 겸영하거나 그 지분이나 주식을 소유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 한나라당에서는 이를 지상파방송에 대해서는 20%, 보도·종합편성채널에 대해서는 49%까지 주식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군요.
3. 외국인 방송진입 허용
원래는 허용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종합편성, 보도채널의 20%까지 허용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원래는 불가였던 것 같네요.
4. 신문법 개정
일간신문의 복수소유 제한 조항, 경영자료 신고 의무 조항을 삭제하고 신문발전위원회, 신문유통원, 한국언론재단을 통합하여 법인 형태의 독임제 한국언론진흥재단을 신설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신문사끼리 인수합병 허가, 신문이 버는 돈을 공개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를 공개하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것과 마지막 하나는 각종 법인을 하나로 합쳐버리겠다는 의미입니다. 참, 신문사끼리 인수합병 제한하는 조항을 삭제한다는 말도 있군요.
5. 사이버모욕죄
이건 뭐 말 안 해도 잘 아시리라...;; 전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예전부터 권력자들은 대중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사실 귀찮잖아요. 저마저도 사촌동생들이 제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고 할 때마다 탄압(?)하는데 국가라고 그러지 않으란 법 있습니까? 그런데 요즘 시대에는 그게 아니란 말이지요. 권력자들 머리 위에 올림픽경기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해도 이거 원, 주먹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무너저 내리는 것도 시간문제이고 하니 그러질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이 사용하는 것이 언론입니다. 촘스키 교수의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를 보셨다면 이 부분에 대해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뭐 전 이런걸 다루려고 하는 건 아니니, 이 쯤 해서 정말 하고 싶은 말로 넘어가야겠네요.
첫 개정안 - 대기업의 언론진출 - 에 대하여
먼저 첫 번째 개정안을 봅시다. 대기업의 방송진출 허용. 지금 법률은 대기업이 방송에 진출하는 것을 완전히 막고 있지는 않다고 합니다. 다만, 시사를 다루는 방송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을 원천금지하고 있을 뿐이지요. '드라마를 만들든 예능프로그램을 만들든 그건 북치고 장구치고 알아서 해라, 대신 뉴스에 발 들이려고 했다간 쪽박찰 줄 알아라' 이게 현행법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모든 대기업들에 대해서 지상파방송에는 20%까지만 지분소유를 허용하고, 보도·종합편성채널에는 49%까지 허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발언권은 있지만(이 부분은 저도 애매하네요;;) 완전히 가지고 놀지는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 대기업의 기준을 상향조정한답니다. 종부세와 같은 논리인가요? 하긴 돈 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기업의 기준이 상당히 높을 수 도 있겠다만 말입니다.. 뭐 하여튼 이 개정으로 얻는 효과는 '대기업의 방송 진출이 수월해진다'는 것입니다. 대기업이 시사를 다루는 방송영역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기업을 대변하는 방송국이 생겨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언론은 많은 경우 기업에 호의적입니다. 아니 그걸 어쩌겠어요. 원래 사람은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한법...(이게 반대되어 강자 앞에 강하고 약자 앞에 약하면 우리는 그를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강자인 기업에 호의적이지 않은 경우는 보통 다른 기업이 뒤를 봐 주기 때문입니다. 표현이 조금 이상하긴 한데, 그러니까 다른 기업이 어느 특정 기업을 깐다고 해서 그 언론에 대해 적대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시되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공영방송의 경우 어떻게 되어도 국가에 기댈 수 있으니까 당연히 기업에 대해 (상대적으로) 공격적이고요.
참, 우리나라의 SBS는 조금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3대 지상파 방송사 중 2개가 공영이기 때문에 지상파 방송은 이미 기업을 까는 쪽으로 대세가 잡혀 있습니다.[각주:2] SBS는 어쩔 수 없이 이 대세에 동참하고 있구요. 대신 다른 두 방송사보다는 덜 공격적이지요. 민영화가 상당히 진행된 방송사이다 보니까 그렇겠지요...
원래 '왜 기업은 자신을 대변하면 안 되는가'라는 의문을 가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해 보니까, 뒤에서 대기업이 각종 돈줄을 넣어주면 어떻게든 그 방송국은 승승장구 할 수밖에 없고 영향력이 과도하게 거대해질 것이다라는 결론이 내려지더라구요. 과도하게 거대한 영향력이 왜 좋지 않은지는 둘 째 개정안에 대해서 다룰 때 같이 다룰 생각입니다. 이미 첫 째 개정안에 대해서 다룰 때 너무 길어져서 말이지요 ^^;;
둘 째 개정안 - 신문의 방송 겸용 - 에 대하여
두 번째 개정안은 신문사가 방송에 진출할 수 있게 하는 제도입니다. 조중동이 지상파로 흘러나올 것을 생각하면 좀 안습이네요 -_-;; 그 잔소리를 신문이어서 안 볼 수 있었는데 TV에서까지 보아야 한다니..(비록 전 기숙사라서 거의 안 보기는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자기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는 것 또한 자유가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자유는 남에게 해가 가지 않는 정도까지가 자유입니다. 그 선을 넘어서면 폭력이지요. 언론이 너무 거대해져서 여론의 다양성이 상실되면 대중이 멍청해진다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사실 대중은 매우 똑똑한 존재입니다.[각주:4] 전 이것이 민주주의를 채택한 이유라고 보고 있구요.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대중이 그 지혜로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정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Decentralization, 탈집중화입니다.[각주:5] 여론에 다양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하나의 언론이 너무 강해지면 여론의 다양성이 실종될 우려가 너무나도 큽니다. 이건 파국을 가져올 뿐이지요.
파국을 가져오는 것, 이건 개개인에 대한 권리의 침해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한 권리의 침해입니다. 이건 더 이상 자유의 범위가 아니예요. 폭력의 범위이지.
셋 째 개정안 - 외국인의 진출 허용 - 에 대하여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 잘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외국인이 진출 가능해진다고 한다면, 외국 자본이 무지막지하게 크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첫 째 개정안에서 우려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기업이나 자본이 성역에 놓여 버려 언론이 비판기능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지요.
넷 째 개정안 - 신문법 개정 - 에 대하여
이미 하고 싶은 말은 위에서 거의 다 했습니다. 신문사끼리 인수합병 불가능 조항은 '일간신문의 복수소유 제한'에 해당하는데, 위의 신문과 방송 겸용에 대해서 다룰 때 이런 조치는 여론의 다양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고, 이것이 파국으로 치닫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경영자료 신고 의무 조항은 돈이 어디서 들어왔는가를 밝히라는 말 같은데, 이 부분은 사실 처음엔 의문이 많이 가기는 했지만 이제 보니 왜 이런 조항이 있는지 알 것 같네요. 정치인과 언론사가 결탁하면 뭐가 되지요? 예 바로 그겁니다 -_- 돈이 어디서 들어오는지 확실히 함으로서 정치인과 언론사 사이에 카르텔이 형성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입니다.
여러 법인을 하나로 합치는 것은 3권분립을 무시하고 하나의 절대권력으로 생성시키려는 노력과 어딘가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신문을 견제하는 법인이 하나 뿐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기 하나만 잡고 휘두르면 신문사들을 전부 잡고 휘두를 수 있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아무래도 언론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이래서는 안될 것 같네요.
쓰다 보니까 갈수록 내용이 없어지네요 ^^;; 뭐 결국 이 문제들은 하나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표현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이런 법 개정도 반대할 이유는 없겠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이 법률들이 개정되면 표현의 자유가 표현의 폭력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제한없는 자유는 폭력일 뿐이니까요. 특히 그것이 강자의 것이라면 말이지요.
이번에 3대 방송사 모두 파업을 한다고 하네요. 이제 두시간 가량 남았네요. 저야 뭐 나불대기밖에 못하지만(...) 힘 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꼭 이기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제 입이 피곤해질 것 같거든요. 지금도 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_-
아무래도 말을 못 알아듣는 짐승한테는 말로 알아들을 때까지 말로 해결해야 하느냐 아니면 바로 도끼 들고 슥~ 해버려야 하느냐 그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은데, 가능성이 아예 없다면 후자로 가야 한다는 결론으로 정리된 것 같네요. 일단 말을 알아듣는 사람들은 살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 못알아 듣는 녀석 때문에 말 알아듣는 애들이 멸종해 버리면 안되지요. 일종의 방어기작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방어의 목적이 아니면 그냥 방목해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으로]
이 부분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 지상파 방송이 마구 허락되면 친기업적인 접근이 대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본문으로]
귀스타브 르 봉 저 김성균 역, 『군중심리』, 이레미디어, 2008, pp. 188~189 [본문으로]
James Surowiecki의 저서 중 The Wisdom of Crowds라는 책이 있습니다.(번역본 『대중의 지혜』) 여기서 이 주장이 나오는데, 제가 보기엔 타당해 보입니다. 사실 다수결의 원칙도 많은 사람이 결정을 내린다면 그 결정이 정답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서 출발한 것 아닙니까. [본문으로]
『군중심리』에서 르 봉은 군중이 멍청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결국 르 봉이 군중을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정의를 했기 때문에 탈집중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본문으로]
크리스마스라 그런지 이벤트를 하더군요. 산타가 들어와서 질문을 하고 답을 맞추면 티켓을 주는데, 심심할 때 마다 인형 던져줍니다. 전 뭐 이런거 원래 귀찮아하는 사람이니... -_-
'나는 산타에효' 하면서 인형 끌고 들어온 산타
승냥이떼처럼(..) 손 드는 사람들 -_-;;
영화는 괜찮았습니다. 외계인이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인류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종말을 끌고 온다는 설정인데 역시 예상하시는 바와 같이 외계인은 지구인의 선함에 '잇힝 나 감동했음' 하고 파괴를 그만두고 떠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픽은 상당히 괜찮더군요. 단지 마지막 2분 직전까지 긴장을 잘 이끌어 가다가 마지막 2분에 허무하게 놓아버리는 것이 좀 아쉽더군요. 생각해볼 만한 요점만 정리해서 올려봅니다.
1. 외계인, 발전된 문명의 능력
역시 제일 눈길이 가는 것은 외계인 클라투(키아누 리브스 역)의 능력입니다. 전자 장비를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있던데, 참 신기하더군요. 나간 전화에 손 한번 슥 대니까 다시 들어오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끼고있는 이어폰으로 괴상한 소리 내보내서 전부 전멸(..)시키고 모든 전자장비를 의지대로 움직이더라구요.
사실 조그마한 벌레로 갈라지는 로봇(외눈박이 거대한 로봇이 그놈입니다)이랑[각주:1] 만병통치연고(나중에 영화 보면 아실 겁니다)가 가장 신기하더군요 ^^
2. 지구가 멈추는 날, 제대로 된 환경운동 영화
사실 그 무엇보다 이 부분이 제일 강조된 영화 같았습니다. 설정 자체가 '외계인이 지구를 인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인류를 막으러 내려왔다' 이니까요. 내려와서 하는 말중에 가장 기억에 나는 말이 있다면 '지구는 너희의 행성이 아니다' 가 있겠네요. 쓰고보니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은 인도인을 말하는 잘못된 표현이라고 하더군요)의 편지[각주:2]가 생각이 나네요. 땅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팔 수 없다는, 그 말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어느새 우리는 많은 것들에 가격을 붙여버렸지요.
이타적인 유전자 관련 연구로[각주:3] 노벨상을 수상한 석학으로 설정되어 있는 칼(찾아봤는데 역시 가상의 인물이더군요 -_-)의 변명(?)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인류는 항상 벼랑의 끝에서 어쩔 수 없이 변해왔다. 그것은 너희도 마찬가지 아니냐.' 뭐 항상 느끼는 것이다만 언제에야 인류가 벼랑까지 내몰리지 않고도 변화할 수 있을까요? 특정 시기에 이르러야지 수많은 종이 탄생하고 수많은 종들이 사라지는 것처럼[각주:4] 이런 것이 원래 자연의 법칙일까요?
그래도 외계인들이(참고로 말하자면 여기서 외계인은 하나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 인류에 대해 어떤 알 수 없는 애착을 갖게 되는 것을 보면 감독의 희망의 시선이 느껴진달까요? 뭐, 아직 우리에겐 변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네요.
3. 역시 미국이야 -_-
어떤 나라가 안 그러겠냐만은(이 부분에선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전 미국을 깡패국가로 봅니다. 심심하면 약한 국가들 미사일로 툭툭 건드려주고, 돈의 힘으로 각종 으름장을 놓으면서 강제적으로 시장을 개방하라고 하고 그러면서 자기가 불리하면 쑥 들어가고... 도대체 동네 양아치하고 다른게 무엇입니까? 물론 이런 비판은 미 정부에만 해당하는 것이긴 하지만 미 정부가 사실상 미국의 대표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비판을 피해가진 못하겠지요.[각주:5] 물론 대한민국 정부도 힘이 없어서 미사일로 툭툭 건드려주는 것은 하지 못하지만 강대국의 거대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도상국에 들어가서 부리는 행패에서 자유롭지는 못하지요.
사실 미국의 대통령은 미국 시민의 대표가 아니라 미국 기업인들의 대표였습니다(조지 부시 말입니다 조지자 부시자 -_-). 오바마는 달라질 것이라고 믿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구요. 노무현처럼 의도는 좋았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대통령이라는 우려[각주:6]가 이곳 저곳에서 보이지 않습니까. 아, 다시 미국 대통령 이야기로 돌아가서 미국의 대통령과 미국 정부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행동은 여태 보였던 이런 행동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적대적, 변화 거부(교토의정서 불참은 이미 유명하지요) 이 두가지가 정말 제대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4. 이야기 상의 아쉬운 점
평가 중 이런 말도 있더군요 ^^;;
'미안해서 밥을 한번 더 사주게 되는 영화'
평점은 1점을 주었던 것 같네요. 전 무지하게 재미있게 보다가, 마지막 2분에서 정말 허무했습니다. 아니 왜 외계인은 떠날 때 인사 한마디 안하디? 이 감정은 예전에 보았던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에서도 느꼈던 것 같네요. 정말 끝나기 5분 전까지는 엄청나게 몰입해서 보다가 급허무...-_-;;
사실 이런 초월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영화나 소설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이야기상의 한계인 듯 합니다.
음.. 전체적인 평점은 3.7/5.0 정도로 줍니다. 저야 영화 공짜로 본 케이스지만 돈 내고 보기는 조금 아까울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이름이 '고트' 입니다. Gort. 이번 영화에서는 Genetically Organized Robotic Technology의 약자로 쓰였다고 하네요. 이 영화가 리메이크작이란 것은 말 안했나요? [본문으로]
링크는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32쪽에 있는 '인디언의 편지'인 듯 싶습니다. 본문은 여기로 가세요. http://www.hongsehwa.pe.kr/zbxe/56040 [본문으로]
왜 하필이면 이타적인 유전자와 관련된 연구일까요? 전 여기에 감독이 '인류는 이타적으로 변할 것이다'라는 희망을 담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네요 ^^ [본문으로]
지질학 공부하다 보면 기가 자주 바뀌는 것을 보실 겁니다. 이 기 사이를 나누는 것이 '특정 생물종의 출현'이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공부해 보신 분이라면 잘 아실 테구요. [본문으로]
현재 생존하고 있는 종 중에서 가장 인류와 가깝다고 알려진 보노보 이야기입니다. 보노보가 라이터를 사용할 줄 알고, 그림도 그리고, 돌로 석기도 만들고, 팩맨까지 하는군요 -_-;;; 이거 털만 없고 좀 더 크면 사람하고 구분이 안될 지경입니다.
솔직히 보면서 신기하다고 느끼는 만큼 두렵네요. 인류가 지구상에서 지배적인 구도를 형성한 것이 단순한 운에 의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됩니다. 언어가 인류 외의 종에게도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고, 도구도 그렇고 그런데 문자까지라... 완전한 문자는 아니지만 저런 그림들이 후에 발전하여 현재 사용되고 있는 한자로까지 이어져 온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충분히 문자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미래의 모습은 어떨까요? SF 영화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다양한 종들이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해서 생활하고 있을 것인지, 아니면 인류의 배타적인 공격성이 여기서도 발동되어 보노보는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네요. 자연, 보면 볼수록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입니다.
1, 2권 나뉘어서 출판되었습니다. 좀 길어요. 나중에 서평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이 책은 읽은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제대로 된 서평을 쓸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사실 하는 말은 단 한가지, '세상을 비틀어 봐라 그리하면 천재가 될 것이다' 이거지만 어디 비틀어 보기가 쉽습니까. 뭐 전 오늘도 어떻게 하면 세상을 비틀어 볼 수 있을까 궁리만 합니다.
단테의 신곡은 어디서 삘이 꽃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많이 읽고 싶었던 책 중 하나입니다.(그 지옥 관련된 내용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많이 듣기도 했구요. 물론 기독교문학이기는 하지만 그건 모태신앙인 저에게 문제될 만한 내용은 아니지요.(읽으시려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이 책은 사실 신곡의 해설서에 가깝습니다. 자습서처럼 느껴진달까요? 그래도 정말 읽기 쉽고, 여러가지 측면에서 신곡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총 15 강의를 모아 놓은 것인데, 강의를 읽다 보면 잠깐 덮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잠깐 덮고 자러 가기도 하지요 ^^;;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해 주는 책입니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마지막 강의가 남아있군요) 베스트 선정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 되겠습니다. 촛불 이후에 읽어서 그런지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같네요. 백여 년이 지난 책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정확하더군요. 역시 고전은 고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사회심리학이 시작되게 된 기반을 마련한 책이라고들 하더군요. 예전에 서평을 써 둔 것이 있으니 연결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귀스타브 르 봉, 군중심리
전 사실 이 책을 국방부가 추천해주기 전에 읽어서...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좀 자세히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이 들어서 구입했던 책이라고 기억합니다. 아니면 그냥 단순히 책 표지들을 스윽 훑다가 갑자기 눈에 띄어서 발견한 것일지도...-_-;;
제일 기억나는 부분은 이것이군요.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결코 친하지 않다.' 자본주의는 지폐 한 장당 표가 주어지는 제도이고 민주주의는 사람 한 명당 표가 주어지는 제도인데 양립이 가능하냐는 그런 부분이었지요. 재미있었습니다. 나중에 집으로 귀양보낸 책을 돌려받으면 서평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실 위에 적은 것 말고도 무소유도 읽었고, 프로그래밍 유니버스도 있을 테구요(사실 이 책은 작년이랑 올해 겹치는 기간 동안에 읽었던 거라 제외했습...-_-;;), 또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책들이 있을 겁니다(아마도;;). 아, 끌림이랑 대한민국사 4권을 빼먹었군요;; 뭐 어찌되었든간에 제 도서성향을 보면 문학, 특히 소설쪽은 매우 취약하네요. 이런 이런, 그렇지 않아도 감성이 상당히 메말라 있다고 (자체적으로) 진단받았는데 문제가 있겠군요. 내년엔 좀 나아지려나 모르겠네요 ^^;;
Programming the Universe.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위 번역본의 역할이 상당히 컸습니다. 처음에 시작하기를 '태초에 비트(Bit)가 있었다'라면서 창세기를 패러디하는데, 이 부분이 상당히 인상깊었던 것이지요. 일단 제가 예~~전에 썼던(네이버 블로그를 운영할 때 썼던) 글을 옮겨보겠습니다.
뉴턴 이래 우주는 하나의 기계장치로 인식되어 왔다. 물리적인 법칙에 따라 점차 움직이는 기계장치로.
이러한 패러다임은 대부분의 과학의 기본적인 뼈대가 되어 왔다.
이제, 이런 패러다임을 바꿀 시간이 온 것일까?
이 글의 저자, Seth Lloyd는 그렇다고 답한다. 기계장치보다는 하나의 계산하는 장치(컴퓨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보를 처리하는 기계"로.
우주는 복잡(complex)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있는 필자도 그렇고,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도 그렇고, 모두 간단한
톱니바퀴 장난감과는 비교되지 않는 복잡함을 갖고 있다. 인체의신비와 같은 인체 내부를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졌다면(그림으로라도
상관없다), 인체 내부가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한 체계인지 알 것이다. 생물을 공부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런 복잡함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
분명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물리법칙은 간단하다. 중력의 법칙만 하더라도(근사적이긴 하지만) 몇 안되는 문자들을 가지고
간단하게 나타낼 수 있다. F=GMm/r^2. 이런 간단하고 단순한 법칙들에서 어떻게 우리가 보는 복잡한 세계가 만들어지게 된
것일까?
기존의 물리학자들은 이를 동전을 던지는 것에 비유했다. 동전을 여러번 던지다 보면, 언젠가는 원했던 배열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HTTHT라는 배열을 얻고 싶다고 하자. 그러면 동전을 여러번 던지다 보면 언젠가는 끝의 다섯번의 배열이
원했던 배열과 같아질 것이라는 말이다. 다른 비유로는 타자기를 치는 원숭이에 비유될 수 있다. 원숭이가 무작위로 타자를 치다
보면, 언젠가는 (아마도 이 우주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의 시간보다도 더 이후에) 지금 내가 쓰고있는 글과 같은 글을 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설명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알다시피 간단한 몇가지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타자기를 치고 있는
원숭이가 "뉴턴 이래 우주는" 다음에 "하나의" 이라는 단어를 칠 가능성은 매우 낮다(이 예는 이 글의 서두이다). 하지만,
우주는 "뉴턴 이래 우주는" 다음에 꼭 "하나의"이라는 단어를 치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확률에 의한
복잡성은 그다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우주를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이 글을 제대로 읽었다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타자기를 치는 원숭이"가 아닌 "컴퓨터 자판을 치는 원숭이"가 이 우주의 모델이라고 말한다. 우연적인 요소는
"원숭이가 친 글"이 만들어내지만, 이후에는 컴퓨터가 계산하면서 "뉴턴 이래 우주는" 다음에 "하나의"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다.
우연적인 요소가 없진 않지만, 초기에 그 요소가 갖추어진 다음에는, 일사천리로 우주를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기존의 물리학을 약간 익힌 나에게는, 새로운 관점에서 물리를 다시 보게 되는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우주를 관찰하고 싶은 사람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뭐 위의 글을 읽으셨는지 안 읽으셨는지는 제가 알 바 아니지만(응?) 예전에 썼던 글로 날로 먹기는 그런지라 다시 한번 써 보겠습니다. 뉴턴 시대부터 우주는 하나의 기계장치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정교한 기어 하나 하나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한 칸 씩 전진해 나가는 그런 시계와 같은 기계장치로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는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세계는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잡하며 아름다운데, 식들은 너무나도 간단했던 것이지요. 이 세상은 몇 줄의 수식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합니다. 사람 하나에 대해서 자서전을 써도 책 한권이 얻어지는데 물리 법칙 몇 줄로 이런 복잡함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런 복잡함이 어디서 얻어진 것일까요?
리처드 도킨스는 그이 저서 『눈먼 시계공』에서 이런 복잡함을 조물주의 작품으로 설명하려는 자들을 비판하였습니다. 세스 로이드도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이런 다양성은 사람들이 세계를 '컴퓨터가 아닌 기계'로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컴퓨터는 단순한 기계에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부과된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 작은 차이가 정말로 작은 차이일까요? 지금 제 손목에 채워져 있는 손목시계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랩탑을 비교해 볼까요?(물론 가격에서부터 차이나기는 하지만 그건 고려하지 말자구요 ^^;;)
시계야말로 전형적인 기계입니다. 그 작동 원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정교하고, 또 보다 보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투명한 유리 속에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기어를 보면 드는 생각이 없으신가요? 그렇지만, 시계는 시계일 뿐입니다. 복잡하기는 하지만, 그 복잡함이 만들어낸 최종적인 움직임은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컴퓨터를 봅시다. 이 녀석은 훨씬 복잡합니다. 하지만 '정보'를 취급한다는 차이점이 있어서 그런지, 다룰 수 있는 범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동영상을 볼 수 있고, 저같이 가끔씩 나불대기를 즐길 수도 있구요, 또 즐거운 게임을 마구마구 할 수도 있습니다. 복잡함이 더욱 복잡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보의 성격을 보아도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원래 기계장치에서는 처음에 시작할 때의 작은 변화가 후반에 커다란 변화가 되어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시계가 1초 전부터 시작하든 1초 후부터 시작하든 끝까지 가면 결국 1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요. 하지만 정보라면 그 결과는 어떨까요? 이 경우엔 카오스계에서처럼 예측하기 어려워 집니다. 왜냐하면 정보는 자기 자신에 피드백을 걸고, 그 피드백에 의해 또 새로운 값이 되어버리고 그러거든요. 조그만 차이가 커다란 차이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기계보다는 컴퓨터의 모델이 이런 카오스적인 부분을 더 잘 설명해 주니까,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인식도 단순한 기계가 아닌 컴퓨터로 바뀌어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사실 요즘 물리학 교양서적들은 대세인 '초끈이론'에 중심이 맞추어 져 있습니다. 그것도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말이지요. 물론 13차원(?)의 매력을 제가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너무 집중되어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자컴퓨팅 쪽의 전문가인 세스 로이드 교수가 쓴 이 책은 신선한 충격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한나라당의 일명 '언론장악 7대 악법'에 관련된 일들이 좀 많더군요. 전 사실 표현의 자유가 제일 우선시되어야 하고 이를 제한하는 것은 도덕이나 윤리와 같은 분야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 지금 있는 일명 명예훼손법이니 실명확인제니 하는 모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가능성이 있는 법률'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를 뒷받침하려면 기초교육기관에서 윤리교육과 인성교육이 충분해야 한다고 봅니다만, 이건 이미 안드로메다 이야기가 되어버리는군요. 괜히 초딩이란 단어가 있는게 아닙니다.
잡설은 여기서 그만두고, 이번엔 이 책에 대해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갑자기 지식채널 e의 한 영상이 생각나는군요. 침묵의 나선 이론이었던가? 아, 찾아보니 '1.3cm의 권력'이라고 해서 투표와 관련된 동영상이었군요. 과연 당신의 생각이 '온전한 당신의 생각인가?' 하고 묻는 영상입니다. 영상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답은 '아니오'라고 하는군요.
프롤로그와 첫 두 챕터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한 잡담입니다. 예전에 촘스키 교수가 홀로코스트는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반유대적 사상을 가진 포리송 교수의 책 서문을 써준 일이 있었는데(사실 써준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을 대변하는 글을 알아서 쓰라고 보냈더니 프롤로그로 사용해 버린 것이라고 하는군요) 그것은 자신이 반유대주의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보장해 주어야 하기에 그렇게 썼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세 번째 챕터부터 본 내용이 시작됩니다.
이 책에서 교수는 주장합니다. 대기업과 정부는 서로 동맹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언론과 지식인은 이 카르텔을 방어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이죠. 그냥 쉽게 말해서 '대기업이 정부와 언론과 지식인을 매수해 버렸다'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사실 미국의 경우는 우리나라보다 대기업이 언론에 진출하는 진입장벽이 낮은 편이라고 합니다.(들은 내용이라 확신하지는 못하겠군요.)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는 듯 하더군요. 사실 미군이 공습하는 장면을 어쩌다가 잡힌 생중계처럼 내보내기 위해 미리 기자들에게 연락해 두었다는 부분이 있었는데, 사람 목숨을 갖고도 이런 코메디를 할 수 있구나 싶더이다. 뭐 어쩌겠습니까. 우리나라 정부도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말이지요.
이 책에서 놈 촘스키 교수는 이 말을 하고 싶어하는 듯 합니다. '스스로 똑똑해져라.' 촘스키 교수는 책에서 대중은 답을 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예시로 그 유명한 베트남 전쟁을 제시합니다. 사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더 높았지만(70% 정도 되었다고 하네요. p168), 매스미디어에서는 찬성하는 논조의 방송을 내보내거나 이에 대해 다루지 않음으로서 대중에게 암묵적으로 동의하도록 하는 수법을 쓴다고 했습니다. 언론장악 7대 악법 간담회에서 들은 내용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군요. '언론이 여론을 다루는 방법은 연필을 펜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연필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책에서도 위와 같은 많은 국민이 전쟁에 반대한다는 내용은 한 번만 다루고 만다는 식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이것입니다. 방송이 이익을 추구하다 보니 입력에 비해 출력이 적은 시사와 관련된 내용들은 줄어버리고 예능 관련 부분만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어디였는지는 찾아보았는데 못 찾겠더군요 -_-;; 언론의 민영화에 대한 말이 많은데, 왜 일부 언론은 국영으로 운영될 필요가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큰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발전하려면 Devil's Advocate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영화된 언론은 이런 역할을 전혀 해내지 못할 것 같은데 말이지요.
22일 월요일 오전 10시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연구원(61동) 320호에서 위의 주제문을 발제로 한 긴급토론회가 열렸습니다. 토론회의 주최는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전국 교수모임'이었고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서울대학교 교수모임'이 주관하였습니다. 토론회는 먼저 '4대강 하천정비사업의 실체는 무엇인가??(박창근 관동대 토목공학과 교수)', '지역균형발전, 4대강 하천정비사업으로 가능한가?(변창흠 세종대 행정학 교수)', '경기회복, 4대강 정비사업이 대안인가?(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이라는 주제문으로 프레젠테이션이 이루어졌고, 이후 김정욱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와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토론문 발표 후 방청객과의 질의응답 순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첫 프레젠테이션을 맡은 박창근 교수
이미 관련 기사가 많이 났으니 이번 포스트에서는 제 개인적인 감상 위주로 글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 같네요.
첫 프레젠테이션에서는 4대강 정비사업이 얼마나 대운하와 연관성이 높은지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예산부터 시작해서 4대강 정비사업에서 사업계획이 짜여 있는 부분들이 대운하 공사와 얼마나 유사한지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결국, 4대강 정비사업은 대운하의 전신이라는 주장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두 번째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지역균형발전과 관련되어 4대강 정비사업이 효율성이 없다는 주장을 피력했습니다. 정치인의 정치적인 능력을 보통 그 정치인이 그 지방에 끌어 온 개발예산의 크기로 판단하는 현 사회의 분위기 안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주장과 함께, 4대강 정비사업은 최근의 수도권 규제완화와 함께 갑자기 튀어나온 지방의 상대적 소외감에서 튀어나온 불평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지방균형발전사업을 지속하려면(지금은 '균형'이란 단어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알아봐야겠습니다) 건설을 통한 개발이 아닌 교육이나 문화산업과 같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세 번째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실질적인 치수(治水)대책을 위해서는 위의 예산이 커다란 4대강이 아닌 지방군소하천에 집중되어야 하며, 건설업을 통한 경기부양은 알려진 바와는 달리 다른 산업에 비해 그 효과가 적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균형발전을 위해 저소득층에 투자하는 것이 부유층에 투자하는 것보다 경기 부양에 유리하다고 주장하면서, 양극화가 심화되면 경제성장률이 둔화될 수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토론문을 발표하고 있는 김정욱 교수
이후 토론문 발표때에는 '이제는 토목건설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개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주제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질문이었던 '도로나 철로와 같은 일상생활에 보다 더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업을 벌였을 경우엔 이처럼 반대가 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에 대해 답변을 받았습니다. 이준구 교수께서는 '단순한 토목공사일 뿐이라면 반대할 것'이라고 하셨고, 도로 부분에 대해서는 홍헌호 연구위원께서 '이미 도로는 충분히 지어져 있다'는 답변을 주셨습니다. 물론 도로에 대해서는 그 절대적인 양이 아니라 얼마나 네트워크가 잘 이루어져 있는가가 주요 문제가 되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교수님들 사회에서는 반발이 심하더라도 이런 부분에서는 상대적으로 어두운 서민층에서는 반발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아니, 오히려 환영할지도 모르겠군요...)
토론회를 갔다 오고 나서 대운하는 단순히 '물길을 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닌 '경기를 어떤 사업으로 부양시킬 것이냐의 문제'라는 보다 커다란 틀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사실 저는 대운하를 그 효용성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입장이었지만(느리고 그렇다고 싸지도 않은 배를 이용할 바에는 차라리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배는 낫다는 생각이지요) 이제 보니 대운하 사업은 개발사업 하면 일단 토목공사를 생각하게 되는 깊은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교수들이 해야 할 일은 연구인데 시민단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으니 골치아프다는 하소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 대한민국에서의 연구환경이었습니다. 연구는 포스트닥과 교수가 함께 해야 하는데, 대한민국에서는 포스트닥이 없고 교수만 연구를 하고 있으니 이것 참 골치아프다는 내용으로 기억합니다. 하긴, 예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순수학문은 진짜 먹고 살 걱정 없는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여겨진 면도 있으니... 약간은 슬프더군요.
대운하에 배정된 예산은 14조원 가량 된다고 합니다.(4대강 정비사업도 비슷한 수준입니다.) 한편, 이공계 살리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행되고 있는 BK21사업의 경우(물론 이 정책이 제대로 된 정책은 아니다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매해 2천억원 정도의 지원금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운하를 포기하고 그 금액의 절반이라도 BK21로 돌리기만 해도 뭔가 커다란 성과가 얻어질 것 같다는 느낌은 저만 드는 것인가요?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전국 교수모임'은 대운하 포기선언 이후 해체되었다가 4대강 정비사업 발표 이후 다시 모였다고 합니다. 언제야 그분들 말씀대로 '원래 해야 할 일'에 매진할 수 있을까요?
고재열 기자님이 섭외(?)하신 이벤트에 잠깐 다녀왔습니다. 재미있을 것이라고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잡담로거에 가까운 저에겐 좀 많이 엄한 자리더군요 ^^;;
'언론장악 7대 악법' 관련 포스팅은 조금 이후로 미루겠습니다. 저도 좀 더 자료가 필요할 것 같으니까요.
설명회가 끝난 이후 YTN 해직 기자분들과 해직 교사분들과 함께 만담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전 구석에서(...-_-) 미디어몽구의 몽구님과 끼었다가, 저쪽에서 일명 '고대녀'로 유명하신 김지윤씨 옆에서 잡담을 듣다가, 그쪽에서 Aquarius님과 조금 대화하고, 이쪽에서 Skyjet님이랑 아프로켄님이랑 뒷다마(?)까다 뭐 그랬습니다.(이상하게 필명이 실명보다 편하군요 -_-) 약간은 겉돌은 느낌도...
뭐 제가 했던 일들에 대한 잡담은 그만두고, YTN 기자분들과 교사분들이 나누셨던 대화는 좀 많이 기억에 남는군요. 그것보다, 마지막에 자리를 파하면서 그 분들이 하셨던 말씀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그 분들은 모두 다 '난 평범한 사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평범한 꿈을 갖고, 평범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이, 갑자기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전 홀로코스트와 함께 너무나도 평범했던 할아버지 아이히만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평범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수십만의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주변 환경이 그를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전 이렇게 평범한 사람을 평범하지 않게 만들어 버리는 주변 환경을 그분들에게서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드는 생각입니다. '평균은 있지만 전형은 없다'. 과연 평범한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일까요?
YTN 기자님들과 교사님들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자리를 파하면서 나오는데 눈이 오고 있더군요. 하늘의 힘을 내라는 말로 믿고 싶습니다.
요즘 buckshot님이 Read&Lead에서 알고리즘 포스팅을 하시고 계십니다. 전 물론 이보다는 좀 더 나아가서 인간 자체가 '특정 알고리즘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는 기계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자세한 것은 다음에 다루어 보아야겠네요.
이런 제 관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을 보면 참 다양한 법칙이 있습니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이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가끔 발견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처럼 놀라는 경우도 없지요. 이 책도 그런 부분에서 놀라게 되더군요.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 입니다. 예전에 대학국어 서평과제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쓴 적이 있는데, 잠깐 공개해 볼까요?(사실 그리 잘 쓴 서평은 아닙니다만...-_-) 상당히 기니까 열기 전에 잠깐 생각해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합리적이었던 개인은 왜 집단에서 합리성을 잃어버리는가?
방대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은 자연 현상을 예측하고 대비하기 원했다. 곡물을 심어야 할 시기나 비가 오는 시기, 강이 범람하는 시기 등 많은 자연 현상들은 잘못 예측하였다가는 당장의 생계가 위협받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과 별들을 연구하여 달력을 개발하였고, 비가 오거나 강이 범람하리라는 사실을 예측하게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문명을 세웠다. 이후 세월이 지날수록 문명은 더욱 발전하였고, 인류가 예측하는 현상의 정확도와 범위는 점차 넓어져 지금은 영원이라고 느껴질 만큼 먼 미래 - 태양이 약 60억 년 뒤에는 붕괴할 것이다 따위 - 까지도 어느 정도 합리적인 예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예측을 좀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 발달시킨 것들을 학문이라 부른다. 학문은 그 범주가 매우 넓어 인문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 다양한 종류로 분류한다. 이런 다양한 학문의 수만큼 학문에서 사실에 접근하는 방법의 수는 다양하나, 대부분의 경우 그 과정은 서로 유사성을 보인다. 대표적인 유사성은 그 학문에서 예측하고자 하는 대상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에서의 행동을 예측하는데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에서는 생명체를 연구할 때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세포를 연구하며, 물리학에서는 미립자들의 행위를 연구한다. 또,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심리를 다단계로 나누어 가장 기본이 되는 단계를 연구하기도 하며, 경제학에서는 경제적인 개인의 행동을 연구한다. 이런 접근 방법을 취하는 이유는, 자연 현상은 단순화하지 않으면 너무나도 복잡하여 이해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화의 힘은 매우 강력해서, 이런 접근 방식으로 얻어진 많은 지식들은 매우 정확한 예측을 보장한다. 물론,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가장 작은 단위에서 얻어진 지식들은 가끔 전체적인 흐름을 전혀 예측치 못하기도 한다. 이러한 예는 매우 다양하다. 일례로 뇌와 지능을 떠올려 보자. 뇌는 뉴런(신경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이런 뉴런들은 간단한 장난감처럼 간단한 신호밖에 처리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간단한 신호만 전달할 수 있는 하나하나의 세포가 모이게 되면 세포 하나하나의 특성에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현상인 지성을 만들어낸다. 또, 미국의 대공황도 좋은 예이다. 당시 각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은 경제학이 예측하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었지만, 경제는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전체적인 불경기의 경우 미시적인 입장에서의 경제가 아닌, 전체적인 관점에서 경제를 바라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들에서 집단으로 모인 개개인은 원래 가졌던 특성과는 다른 새로운 특성이 발현된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귀스타브 르 봉(군중의 심리학적 특성에 관한 연구로 널리 알려진 사회심리학자이다.)의 저서 『군중심리』(원작 La psychologie des foules)는 이런 부분을 잘 잡아낸 책이다. 개개인의 심리 상태가 개개인이 모인 상태인 군중의 심리상태와 같을 수 있을까?
르 봉의 대표작 『군중심리』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1부에서는 군중으로 모인 개개인들이 갖는 심리상태와 정신적 능력을 서술하고 있으며, 2부에서는 1부에서 알아본 심리상태와 정신적 능력이 군중의 신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와 이 신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여러 외부요인들을 살펴보았다. 마지막 3부에서 저자는 다양한 군중들을 분류하고, 그렇게 분류한 군중들이 각기 다른 부류들과 대조되는 특징들을 알아보았다. 제 3부의 내용은 그 내용의 특성상 『군중심리』의 부록이라 볼 수 있으며, 중요한 내용들은 거의 1부와 2부에 집적되어 있으므로 이 서평에서는 보다 큰 중요도를 갖는 1부와 2부의 내용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르 봉은 먼저 군중의 하향 평준화되는 지적 능력을 지적한다. 이러한 특성이 군중의 행동에 의식적인 요소보다는 무의식적인 요소가 더 강하게 작용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설명하며, 따라서 군중은 이성보다는 감성적인 요소에 더 끌린다고 르 봉은 결론내리고 있다. 또한 이런 감정적인 요소가 고립된 개인은 시도할 수 없는 많은 행동들을 가능하게 하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군중으로 모인 개인들은 항상 범죄적 성향만 갖지는 않는다고 서술한다. 이어서 그는 군중의 의견과 믿음에 대해 서술한다. 여기서 그는 앞에서 서술한 군중의 퇴보된 사고 능력 때문에 군중은 단순화된 이념만 수용한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이렇게 군중은 우매하다는 특징에 입각하여 민주주의의 많은 주장에 대해 비판 - 기초교육은 사회적 낭비일 뿐이다 나 군중은 독재자를 원한다 등 - 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필자는 민주주의가 사회의 기반적인 사상적 배경이 되는 사회에서 자란 탓에 이러한 민주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을 놓지는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은 너무나도 정확하게 현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날카로운 현상에 대한 서술은 그가 서론에서 말한 듯이 ‘일종의 관찰기록과 비슷한 가치를 지닌 책으로 읽히기 기대’하고 저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서술들을 읽으면서 필자는 부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을 때 느꼈을 법한 두려움을 느꼈다. 필자는 군중에 가담한 기억이 있는데, 이후 이 책을 읽고서 르 봉이 서술한 일반적인 군중의 특징이 군중에 있었을 때의 나를 되돌아보았을 때와 너무나도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배타적인 무한한 증오와 자신의 주장의 근거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같은 많은 특성들은 당시의 나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단어들이었다. 군데군데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그의 날카로운 분석들은 이미 출판된 지 1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책을 읽으며 누군가 몸 속 구석구석을 관찰하는 듯한 불편한 기분을 느꼈던 원인은 그의 냉철한 직시에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에서 제시하는 군중을 지배하기 위한 조언들은 실제 역사 속에서도 쓰였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자서전 『나의 투쟁』(원작 Mein Kampf)에서 르 봉이 제시한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라디오를 활용한 반복적인 암시로 80%를 가뿐히 넘는 엄청난 지지율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미국 루즈벨트 정부의 노변담화를 벤치마킹했다는 이명박 정부의 라디오 연설을 괴벨스의 라디오 활용 방법과 비교하면서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 무엇보다 언론의 독립성이 민주주의가 가장 필요로 하는 기반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것 등은, 아직까지도 그의 주장이 유효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편, 책을 읽다 보면 저자는 결국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저자는 군중이 결코 지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매우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하지만, 저자 역시 책에서 대중은 전문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현상이 있음을 서술하고 있으며, 이는 대중에 의한 지배체제가 이전의 군주정치나 귀족정치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아니함을 강하게 증명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예측에 있어서 전문가보다는 다수의 대중이 내놓은 의견을 통계적으로 잘 처리한 답안이 보다 높은 적중률을 자랑한다는 통계자료를 생각한다면 군중이 우매하기만 하다는 그의 인식은 분명히 편향되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또한, 르 봉은 그의 저서에서 여성과 어린아이 등 소위 말하는 약자 계층에 대해 이성적인 면 보다는 감정적인 면이 강하여 열등하다는 의견을 드러낸다. 이런 사회적인 편견은 태어날 때부터 남녀에게 지속적으로 걸리는 암시의 영향을 제거해야만 비교할 수 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하나, 이것을 차치하고서도 감성적인 것이 열등하다는 것은 고양이보다는 강아지가 우월하다는 견해와 같은 종류의 편견일 뿐이다. 물론 20세기 초까지 여성의 참정권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이러한 의견이 당시에는 어느 정도 일반적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지만, 지금의 시대에는 너무나도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또 다른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러한 현상들의 원인에 대한 답을 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상이 있으면 그 현상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뒤따라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법인데 이 책에서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피하고 있다. 저자가 말했듯이 이 책은 사실들에서 일반적인 경향을 유추해내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기에, 이런 현상들이 왜 생겨나는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들에 대한 설명만 있고 왜 그러한가에 대한 설명은 없었던 점은 분명히 아쉬운 부분이다. 필자는 현대에 와서 두드러지게 발전하고 있는 진화심리학과 같은 기타 관련 분야에서 이러한 부분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논의를 해 주리라고 희망한다.
저자는 책 전반을 통해 군중은 결코 똑똑할 수 없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을 민주주의는 잘못된 것이라고 확대 해석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개개인보다는 하나의 집단으로 모인 개인들의 판단이 더욱 합리적인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이는 The New Yorker의 편집장인 제임스 수로위키(James Surowiecki)의 책 『대중의 지혜』(원작 The Wisdom of Crowds)에 잘 나와 있다.) 오히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대중의 우매함’은 귀족정(Aristocracy)을 옹호하는 증거로 쓰이기보다는 민주주의가 놓칠 수 있는 사각지대를 비추는 한줄기 섬광으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된다. 분명히 군중으로 모인 대중조차도 신이 아닌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놓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제가 직접 제 서평에 대해 평가를 하자면, '용두사미'같은 느낌이 든다고 할 수 있겠네요. 시작은 인류의 역사를 들먹여대면서 가는 거창하고 오만함의 극치이지만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책 한권...-_-
사실 이 책을 읽다보면 좀 울화통이 터지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볍신같이 책을 쓸 수 있는거지?' 위의 서평에서도 조금 언급했지만, 이분 민주주의를 엄청 싫어하십니다. 근데 그것도 결국은 자기가 말한 '어떤 지식인이라도 시대적인 군중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싶네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민주주의는 아니다' 라는 인식이 팽배했다고 하는군요. 주성영 의원님이 좋아하시는 '천민민주주의'적 관점이 대세였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상당히 정확합니다. 저도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더군요. 지난 촛불 때,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게 다 이 책 덕분인 듯 합니다. 역시 이 책의 의의는 '민주주의 때려치자'가 아닌 '민주주의가 놓칠 수 있는 사각지대를 바라보자'가 되겠군요. 권력자에게 휘둘리기 싫으시면 한번 쯤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물론 읽다 보면 조금은 인간에 대한 회의가 느껴질 수 있어요. 그런 반응에 대해 전 이렇게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러시아의 단편 작가이자 극작가인 안톤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하는군요(물론 전 TED에서 보았지만, 인터넷에는 전혀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은 그가 어떠한지 알게 되면 진보한다.
(Man will become better when you show him what he is like)
야심한 밤, 잠도 안오고 해서 어제 MT에서 돌아오면서 얼핏 이야기가 나왔던 한 책에 대해서 말해 보려고 합니다.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 되겠습니다. 상당히 오래된 책인데다가 마지막으로 읽은 지 1년 가까이 되었군요.
엔트로피(entropy)는 엔탈피(enthalpy - 맞는지는 모르겠군요)와 같은 어원을 공유하는 단어로, 어원은 '열'을 뜻하는 엔탈피엔(enthalpien - 아마도 맞을 겁니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한문으로 번역하면 '무질서도', 즉 무질서한 정도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물리학에서 무엇을 질서있고 무엇을 질서없다고 하는지 알아두어야 할 것 같네요. 물리학에서 질서있다는 말은 원하는 상태로 가는 방법이 적음을 이야기합니다. 무질서하다는 것은 이와 반대되는 것이니 가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뜻이 되겠지요. 트럼프 카드를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합이 3이 되는 두 장의 카드 조합이 A와 2를 합친 하나밖에 없는 반면 합이 11이 되는 두 장의 카드 조합은 A-10, 2-9, 3-8 ... 등 5개의 조합이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적은 방법으로밖에 도착할 수 없는 조건인 '합이 3이 되는 카드의 조합'은 '합이 21이 되는 카드의 조합'보다 질서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하나의 법칙에서 시작합니다. 열역학 제 2법칙이라고 불리는 '엔트로피 증가 법칙'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거나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법칙이지요. 이 법칙이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법칙이라고 설명하기도 하는데(다른 물리법칙은 시간이 역으로 흘러도 변하지 않지만 이 법칙만은 예외이지요), 여기서는 그런 논의보다는 '항상 증가하는 것이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 '항상 증가하는 것'은 더 이상 쓸 수 없는 버려지는 것이라는 것에도 말이지요.
이렇게 버려지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도 더 이상 쓸 수 없고 계속 늘어나기만 하는 것이라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요? 저자는 이에 대해 절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쩔 수 없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최대한 적게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책을 읽은 다음의 당분간동안 식사를 줄여보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나네요. 나부터 쓸데 없이 소모하는 열량을 줄이자가 목적이었던가 그렇게 기억하는데, 요즘은 그냥 먹기 귀찮아서 가끔 굶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 책이 제 사고방식에 그렇게 많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매우 딱딱한 책이긴 한데, 이런 종류의 책이 재미있으신 분들은 재미있게 읽으실 것 같네요. 한 200대 후반까지는 그럭저럭 읽을 만 합니다만, 이후가 좀 지루했습니다. 284페이지쯤부터 흥미를 약간 잃었던 기억이 나네요.
목차를 보니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엔트로피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누적된 사회는 붕괴한다'는 부분과 '컴퓨터의 예를 들어 엔트로피가 감소했다고 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지금 시대에 만들어진 컴퓨터들이 만들어내는 엔트로피를 총합하면 에니악이 만들어냈던 엔트로피를 상회한다'는 부분입니다. 황금의 시대에서 시작해서 철의 새대로 내려오면서 인간이 불행해졌다는 부분도 인상깊게 읽었는데, 생각해 보니 어른들은 항상 '우리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ㅉㅉㅉ'이러더군요.
이 책에 불만이라면 역시 물리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그런가 엔트로피의 개념이 물리학에서 말하는 그 엔트로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에너지를 소비하는 속도'에 오히려 가까운 감이 있더군요.
지금 마지막 과제 실패로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3학점짜리 전공은 예상보다 좋은 성적이 떠서 기분이 좋습니다.(원래 어느 정도 잘 주는 과목이긴 하지만..;;) 재수강 각오했던 일반교양 과목은 너무나도 감사한 학점이 떴네요 ^^;;
물리는 좀 더 잘 받았으면 좋았을텐데 싶더군요. 중간만 평균이상 했으면 한 등급 높아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아쉽습니다.(방정식의 상수를 반대쪽에 써서 맞을 뻔 한 문제를 틀렸다지요 -_- + 혼자만의 기호법을 만들어내서 휘갈겨 적은것이 패인인 듯 하군요)
통계학은 이거... 예상치도 못하게 갑자기 성적이 올랐습니다. 누군가 클레임을 대신 걸어주신 듯 한데, 저야 매우 감사합니다 ㅠㅠ 덕분에 3*0.3 해서 총점 1점 가까이 올랐군요.
이제 발표는 국어만 남았습니다. 시험을 못 봐서 걱정됩니다 ㅠ 아 외각주도 못 달고 참고문헌 엉망으로 쓰고(순서 다 뒤바뀐 것 같더군요 -_- 형식은 맞는데 단행본끼리 묶고 논문끼리 묶고 하는걸 틀린 듯 합니다)... 단지 위안거리라면 한자시험을 잘봤다는 것 정도?(이것도 상대적인 것인데다가(물론 양 극단에서 위쪽 극단에 속하기는 하지만 -_-) 비중도 그리 높지 않아서...)
MT에서 이른 차타고 돌아왔는데 나쁜 소식만 기다린 것이 아니라 다행이군요.
덧. 아무리 공대라지만 MT는 술퍼먹는게 목적이 아니면 안되나요 ㅠ(이건 제가 3잔에 취할 정도로 술이 쥐약이기 때문이 절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