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들의 제국주의』는 대한민국의 거시적인 경제 흐름을 분석한 책입니다. 외부에서 흘러 들어오는 자원이 없이는 홀로 살아가지 못하는 형태, 그러니까 농민들 삥뜯기와 칼 휘두르기는 잘하지만 정작 농사는 못 짓기 때문에 홀로 떨어지면 굶어죽어버릴 것만 같은 도적과 같은 상태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특성은 근대의 제국주의의 속성과 매우 닮았기 때문에 저자는 이를 제국주의의 하나로 분석합니다. 하지만, 그 제국으로 나아가려는 방식이 너무나도 구식이라 '촌놈들의 제국주의'라는 이름을 붙여주지요.
그러면서 이런 '제국주의적 성향'에 대해 경계하라고 주문합니다. 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만난 국가들끼리 만나면 결국에는 전쟁으로 귀결되고 만다는 것이지요. 하긴, 식민지에 미쳐 살던 시대에는 심심하면 전투가 벌어졌는데(조선 말기만 따져도 세건이 넘네요 -_-;;), 지금이라고 다를까요? 이미 미국은 심심하면 미사일로 다른 나라 찔러보는 국가가 되었습니다(이번엔 바뀌려나...). 또, 이런 제국주의화라는 흐름은 한중일 세 국가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고, 실질적으로도 전쟁의 가능성이 점차 증대되고 있다고 합니다(총알 날아다니고 폭탄 터지는 전쟁이 아닌, 자원 확보를 위해 벌이는 조용한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고도 하더군요...).
결론적으로 저자는 '평화만이 해답인' 경제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전쟁 친화적인 흐름은 결국 언제 전쟁을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사회를 만들어 버릴 것이라면서 말이지요.
전체적인 설명은 옳아 보입니다. 특히 한국의 십대들이 억압당하기 좋도록 키워지고 있다는 말에는 절대적으로 동의할 수 밖에 없더군요. 저의 경우야 많이 특이해서 그나마 억압이 적은 편이었지만[각주:2] 제 동생만 보아도 한숨만 나오더군요. 어째 저보다 더 힘들게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제가 그나마 경쟁이 적은 시절을 살았기 때문인지도..)
그리고 '제국주의'라는 틀에 맞추어 분석을 하는 것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뭐 저야 사회과학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매우 적은 인물이라 그네들이 그렇다면 '오오 그렇구나' 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걸리는 것이 몇 가지 있더군요. 가장 큰 것은 문화에 대한 부분입니다.
현재 이른바 '제국'을 건설했던 많은 국가들은 그 나름대로의 색을 지녔습니다. 사실 영국의 경우에는 자신이 이룩한 개성에 너무나도 도취되어서 남들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가르치려다가 비극적으로 끝나게 된 것이거든요.[각주:3] 이런 것은 본문에서도 확인됩니다. 본문에서 예시로 든 '제국주의적 문화'의 흐름이라는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다 자신만의 '독립적인 문화'를 건설하려던 노력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독일의 [니벨룽겐의 반지] 라던가, 이탈리아의 [아이다] 라던가, 또 아니면 프랑스의 [카르멘] 등이 예시로 등장하는데,[각주:4] 이게 뭐 어때서요.
우리나라의 경우 외래어를 많이 쓰면 쿨하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당장 저부터 이걸 부인 못하겠는데다가, 거리 나가보면 순한글 간판의 너댓배는 영어나 불어입니다. '문화식민지'라는 비판이 괜히 있겠어요? 그런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런 흐름은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의해야 할 것은 있겠지요.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얼핏하면 배타적으로 흐르기 쉬운데, 이렇게 튀어나가 버리면 그것만한 비극도 없지요. 당장 지난 세기의 세계사만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괜찮은 책입니다. 특이한 관점이 마음에 들더군요. 그렇긴 한데, 약간은 무리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는 것 같네요.
전 좀 많이 특별한 경우입니다. 어릴 때부터 학원에 가기 싫어했지요. 공부하기 싫어서 가기 싫어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학원에서 공부한다는 사실 때문에 가기 싫었습니다. '난 학원따위 안 다니고서도 공부를 잘 할수 있다는 것을 보이겠어'란 알량한 자만이었지요. 뭐, 결국 수학과학정도는 다녔지만(경시대회는 학원 없이는 안되는 구조더군요 -_-) 그래도 그나마 적게 다닌 편에 속합니다. 고등학교를 특수목적고등학교로 다녔다는 것이 차이를 가져온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요... [본문으로]
실제 영국은 자신의 제국을 Benign Empire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타 국가의 좋지 않은 관습들이 고쳐질 때 까지 그 나라의 통치를 잠시 맡고, 그 나라가 자신의 힘으로 설 수 있게 되었을 때 주권을 돌려주겠다는 의미이지요. 생각해 보면 J. S. 밀의 자유론에서도 비슷한 시각이 나오는군요. 자유는 그 대상이 충분히 성숙하기 전까지는 주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누가 충분히 성숙했다는 것을 결정하지요? 결국 죄다 자만에 불과합니다. [본문으로]
먼 곳을 돌아가면서 찾아봤는데 여는 글에 있더군요 =_=;; p 26 입니다. [본문으로]
음.. 네이버 블로그를 쓰던 때 읽었던 책이고, 그 블로그의 기록을 뒤져보니 무려 07년 10월에 읽었군요. 이제 1년 반이 다 되어가네요. 간단하게 글만 긁어서 접어둡니다.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라는 책을 읽어 본 독자들은 끈 이론에 대한 나름대로의 지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끈이론을 다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엘러건트 유니버스'란 책은 확실히 일반인들에게 어려운 물리 개념을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한 좋은 책이다.
그런 점에서 난 이 책을 더 높게 평가하고 싶다.
외국에서 번역되어 들여온 책들은 분명히 좋은 책들이지만, 근본적인 단점을 갖고 있다. 번역이라는 과정이다. 번역이라는 것은 언어에 있어서의 필터와도 같다. 자기가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걸러주는 역할도 하지만, 필터를 거치면서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는 것은 절대적인 사실이다. 번역이라는 것이 원래 작가가 하려던 말을 번역가가 들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번역가의 번역에 의해 원 작가의 의도가 바뀌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한국어 원본으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이다.
책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평이하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와 내용을 비교하게 되어 점수가 낮아졌을지도 모르지만,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 돋보인다.
중간중간에 삽입된 저자의 경험담과 과학자들의 생애는 지루하게 흘러버릴수도 있는 부분을 잘 처리했다.
교정(proofreading)작업도 매우 잘 된 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1. 완벽하지 못한 교정작업; 128쪽의 LISA 프로젝트가 LIGO프로젝트로 오기되었다. 유일한 오타.
2. 해상도가 높지 못한 사진; 인물 사진은 대체적으로 해상도가 좋지만, 그래픽으로 처리된 사진들(예; 공간의 모형)의 해상도가 떨어진다.
이 두가지이다. 이 두 부분만 고쳐준다면 아주 좋은 책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책의 깊이는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원제 The elegant universe)』, 『우주의 구조(원제 The fabric of the cosmos)』나 미치오 카쿠의 『평행우주(원제 Parallel worlds)』에는 살짝 못 미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비록 『우주의 구조』와 『평행우주』는 끝까지 읽은 것이 아니지만..) 초끈이론에 대한 설명은 다른 책들과 거의 동등한 위치에서 서술해주고 있지만(어떤 면에서는 더 낫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게이지 변환(gauge tranformation)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처음 봤거든요.), 책이 얇은만큼 기타 다른 내용, 그러니까 초끈이론이 아니라 물리학 일반에 관련된 내용이 적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주의 구조에서는 뉴턴이 제안한 회전하는 물통 실험이 들어가 있으며(제가 이 부분까지 읽고 읽기를 포기했지요. 그 전까지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흑)[각주:1] 평행우주에서는 우주 진화론에[각주:2] 대해 나와 있지요. 이런 '초끈이론 외 물리학'에 대한 설명은 조금 부족합니다.[각주:3]
그래도 이 책이 가진 최고의 장점은 위의 네이버 블로그 소개글에서도 썼듯이 '한국인 저자'입니다. 사실 전 번역을 잘 못 믿는 편이라 여건이 되는 한 원서로 보려고 하는데(그래서 웬만한 영어를 원서로 가진 책들은 다 원서로 보지요..) 한국인 저자가 썼다면 번역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리고 실제로도 글이 매우 매끄럽고요(번역투라고 불리는 비문이 거의 없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조금은 날로 먹는 글이긴 한데, 바쁜 처지 좀 이해해 주시고(;;) 그럼 전 이만 물러갑니다...
먼저 표지 그림이 인상적입니다. 표지판은 왼족 아래를 가리키고 있지만 표지판 앞에 서 있는 남자의 그림자는 오른쪽 위로 가야 한다고 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림자가 맞다는 듯이 왼쪽 아래에서는 칼을 든 강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상황은 A를 말하고 있어 B를 말하는 네 직감이 틀렸다고 할 수 있지만, 직감이 맞다."는 것이 책의 주된 내용이니만큼 내용을 잘 반영한 표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내용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이 책은 두 부(part)로 나뉘어저 있으며, 제 1부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계산, 혹은 무의식적인 알고리즘이 얼마나 잘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 2부는 이 알고리즘이 실제 상황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지요.
첫 장은 전체적인 내용에 대한 서술입니다. 이른바 직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장에서 특히 재미있었던 부분은 날아오는 공을 받을 때 몸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다루었던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인체는 날아오는 공이 어디로 떨어질 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단지 시선처리를 잘 해서 쉽게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뿐이지요. 이것을 Gaze heuristic이라고 하는데, 한글로는 어떻게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웰던지기님의 말대로 heuristic을 어림법으로 번역했다면 조금은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번역이겠네요.)[각주:1]
둘 째 장은 무지의 유용성에 대한 장입니다. 많이 알려진 '아는 것이 힘이다'와는 대조되는, '모르는 것이 약이다'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생각난 것이 두가지가 있는데, 바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속담과 의대생증후군(Medical student syndrome)입니다. 첫 속담은 얕은 지식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의대생증후군은은 병에 대해 공부하는 의대생이 자신이 그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는 데에서 나온 말입니다. 둘 다 표면적인 지식보다는 차라리 무지한 것이 낫다고 말하고 있지요.[각주:2] 책에서는 이에 대해 제 7장에서 왜 그런가에 대해 분석해 놓았습니다.[각주:3] 더불어 둘 째 장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선택의 폭이 좁은 것이 다양한 선택 가능성보다 더욱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합니다. 다양한 선택의 폭은 선택하는데 더 많은 자원이 낭비되도록 하기 때문에 꼭 좋지만은 않다는 것이지요.
셋 째 장과 넷 째 장에서는 직관이 어떻게 작동하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흥미로운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리 중요도가 높아 보이지는 않습니다.[각주:4] 그리고 다섯 번째 장에서는 왜 직관적인 선택이 복잡한 분석보다 유용한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복잡한 분석은 다양한 선택과 마찬가지로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비경제적이라는 것이지요.[각주:5] 그리고 여섯 번째 장에서는 직관의 비논리성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 비논리성이 등장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숨겨진 정보를 인식하도록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각주:6] 예를 들어 말하자면, 대화를 하는 도중에 상대방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 사람들은 하늘에 무엇인가 떠 있거나 아니면 그 사람이 말을 똑바로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지요.
특별히 인상깊었던 내용 몇 가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사람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사람이 복잡하게 생활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복잡한 외부 환경 탓이다.
사람은 환경의 중요성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성격 탓으로 돌리는 것도 그중 하나겠지요. 이를 기본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고 부릅니다. 인간 행동에 대한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각주:7]
2. 몇 가지 중요 요소들에 입각하여 결정하는 것이 모든 요소를 고려하는 것보다 정확한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중요한 요소들은 적은 오류를 갖습니다. 때문에 다른 비중요 요소들을 고려할 때 보다 더 정확한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는군요. 왜냐하면 비중요 요소들은 중요 요소들보다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으며, 복잡한 계산으로 제거되어야 할 이러한 오류들이 오히려 증폭되는 현상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3. 사람은 정치적 판단을 할 때 선상에서 판단한다.
정치 성향에 대한 분석입니다.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그 정당에 대한 모든 정보를 검토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기가 가장 적당하다고 여기는 좌-우 스펙트럼 중의 기준점을 기준으로 가장 가까운 정당을 선택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새 정당에 대한 평가는 이 스펙트럼 위에 정당을 놓음으로서 이루어진다고 하네요.
이 기준점을 교육과 선전을 이용해 억지로 한 방향으로 이동시키는데 성공한다면 어떻게 될지, 그리고 지금의 우리나라의 상황이 이런 성격이 있지는 않은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heuristic을 어림법 말고는 어떤 단어로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 리뷰에서는 어림법으로 계속 나가려고 합니다. [본문으로]
『대중의 지혜』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더라도 그 사람들의 편견이 가진 오류가 서로를 상쇄시키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똑똑해진다고 하였습니다. 읽던 도중에 이 부분이 생각나더군요. [본문으로]
알고 있는가로 판단하는 인지도 어림법(recognition heuristic)이 상당히 높은 정확도(약 80%)를 갖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아는 것에 대해서 구분할 경우 정확도가 80%를 넘어서면 그때서야 '아는 것이 힘'이 되지요. 알더라도 정답을 구분해내지 못하는 경우에는 반만 아는 것이 정답을 구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본문으로]
혹시나 관심가지실 분들을 위해 일부분만 공개해 보자면, 직관은 크게 세 가지 단계의 구성을 가진다고 합니다. 첫 단계는 '물체를 인식한다'와 같은 진화로 얻어진 근본적인 단계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이 근본적인 단계를 서로 이어서 '물체의 움직임을 따라간다'와 같은 행동 단위이며, 마지막 단계는 이 행동 단위를 이어서 이루어지는 '날아오는 공을 잡는다'와 같은 직관적 행동입니다. [본문으로]
또한, 복잡한 분석은 이전까지의 정보가 내포하고 있는 오류를 확대해석할 우려가 있어서 예측의 정확도가 낮다고 합니다. 반면에 직관적인 선택은 주로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만 고려하며, 이 중요한 요소들은 오류를 덜 포함하기 때문에 것이지요. [본문으로]
법정심리학이 중요해진 이유가 이것 때문이지요. '깨진 유리창이 있었습니까?'와 '깨진 유리창을 보았습니까?'라는 두 질문의 답이 달라지는 이유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마음이 두 번째 질문에서는 '유리창은 깨졌구나'라는 암시를 받기 때문에 실제 없었던 깨진 유리창을 보았다고 대답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성격이 행동을 꼭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는데, 누구의 연구결과인지는 모르겠군요 -_- [본문으로]
르 봉이 『군중심리』에서 말한 비이성적인 군중의 행동이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군중심리』의 같은 내용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듯 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본문으로]
예전에 다케우치 가오루 씨의 다른 글도 읽었던 적이 있었지요. 『밤의 물리학』이라는 책이었는데, 많은 부분은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이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던 책입니다. 저야 이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니 무난하게 소화했지만, 지식이 전무하신 분들께는 조금 어려울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책이 물리학의 괴짜스러운 부분을 들추어냈던 이야기라면, 이 책은 괴짜 물리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사람끼리의 반목을 드러내었던 글과 사회와의 반목을 그려낸 글 이렇게 크게 둘로 구분지을 수 있습니다.
읽다 보니 제가 이름만 알고 있었던 몇몇 사람들이 실제로는 엄청난 획을 그은 일을 했었다는 것과 상당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말이 있어 놀랐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아하라노프-봄(Aharanov-Bohm) 효과의[각주:1] 봄입니다. 확실히 이 효과는 대단한 발견이긴 합니다만, 그가 매카시즘 열풍으로 미국에서 쫓겨났었다는 것은 몰랐던 사실이네요. 그리고 그의 세계관도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양자역학의 정통적인 해석인 코펜하겐 해석과는 전혀 다른 해석인데,[각주:2] 파동함수를 파면으로 보고 입자를 그 파면 위에서 물결에 휘둘리는 꽃가루로 보는 것이지요. 이 관점은 예전에 제가 공간을 파동함수를 매개하는 매개물들로 보면 어떨까 생각했던 것과[각주:3] 어느 정도 유사해서 관심이 가더군요.
그리고 친구들을 골려먹던 천재 물리학자의 이야기가 누구의 이야기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었는데, 그게 바로 란다우(Landau)였군요. 전설적입니다. 동료 물리학자에게 '자네 노벨상 후보자에 올랐으니 논문 정리해서 오게나'라고 해 놓고서는 농담이었다고 했던 그 사람이라네요. 제 친구가 양자장론 독학한다고 보려던 책 중 하나가 란다우의 저서여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런 사람인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왜 다 이렇게 못된 천재들이 많은 걸까요? 존 내시도[각주:4] 주변인을 아주 심하게 놀려먹었다는데(목숨을 건 장난을 자주 쳤다고 합니다 -_-;) 거 참...
가장 흥미로운 글은 아까 위에서의 범주에 들지 않는 상끼리의 비교입니다. 노벨상과 벤저민 프랭클린 메달을 비교한 글이었지요. 은근히 노벨상을 까는 분위기로 흐르는데, 뭐 역시 가장 좋은 것은 이런 상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제 갈길 가는것이겠지요. 연구하다 보니 상 받으라고 전화가 오더라, 이런 훈훈한 분위기(?)가 보편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 한 사람 정도는 상을 받았으면 좋겠네요. 그래야지 돈이 갈 생각을 죽어도 안 하는 기초과학 부문에 투자도 하고 그럴텐데 말입니다.[각주:5]
오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191쪽에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지만(원서 제목을 적는데 알파벳 하나를 밖에 남겨두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내용 상에는 큰 하자는 없습니다. 번역은 일어를 번역한 것이라 그런지 잘 된 편이구요.
주된 내용은 물리학자들의 연구 업적보다는 그들의 사상과 생활 전반에 대한 것이니 물리의 물자도 모르는 분도 쉽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전 제 관심(전공??;;) 분야라서 재미있게 읽었지만 물리에 전혀 관심이 없으신 분들도 재미있게 읽으실 것이라는 장담은 못하겠군요.
코펜하겐 해석은 '측정 전에는 그 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기존의 관점과 상이한 해석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과 같은 것이지요.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사과가 떨어졌다. 사과가 떨어지면서 난 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했으므로, 사과가 떨어지면서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안적인 해석으로는 다세계해석(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세계가 분열한다는 관점) 등이 있습니다. [본문으로]
소리는 공기가 없으면 전파되지 못합니다. 이것과 비슷한 원리로, 파동함수가 전파되기 위해서는 파동함수가 흘러갈 수 있는 공기와 같은 매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본문으로]
뷰티풀마인드의 존 내시입니다. 내쉬 균형으로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지요. [본문으로]
제 친구 녀석이 한국에서는 안 살 것이라면서 빨리 해외로 나가서 학위나 취득해야겠다던데 솔직히 할말은 없더군요. 저도 제가 하고 싶은 것 하려면 이 땅에서는 못 사는 것 잘 아니까 말입니다. 제가 지원 과 바꾼 이유가 그거라니까요. [본문으로]
이미 많은 분들이 내용에 대해 정리하고 공감을 표시했으니, 전 이번 리뷰에서 내용 요약보다는 감상 및 의문점 정리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주로 책을 읽고 중간 중간에 느낀 감상을 포스트잇으로 짧게 정리해 둔 것인데, 옮겨봅니다.
1. 1984년 FAO 평가 - p37
'지금의 생산력으로 120억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모두 하루 2,400~2,700Kcal의 영양분을 제공할 수 있다' 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지금의 인구는 약 65억명입니다. 한 사람당 약 5.000Kcal의 식량을 제공할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중국의 미등록 인구까지 고려하더라도 최소한 3,500Kcal는 제공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저 숫자가 1984년의 숫자란 말입니다. 지금은 수가 훨씬 늘어났을텐데 지금은 어느정도의 생산력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군요.
하지만 저 곡물이 전부 인간에게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농장에서 재배되는 소들도 곡물을 섭취하고 있고, 더군다나 요즘은 대체에너지로 바이오에너지가 부상하면서 에탄올을 만드는 데 곡물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단백질을 얻는 데 귀한 곡물이 들어가는 것은 제거할 수 있지만(가능성은 비록 매우 낮다 하더라도) 에탄올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각주:1]
2. 간호사의 슬픔 - p51
에티오피아 간호사가 살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 살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을 분류하고 살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거절을 표현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워낙 물자가 부족하니 살 가능성이 있는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는 것이지요.
고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적절한 치료를 받아 살아난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받을 때, 잠깐동안 막혔던 숨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겠지요. 하지만 다시 거절을 해야 하는 상황에 도달했을 때, 심연의 물통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어야 하는 고통이 되살아나겠지요.
무기력하군요.... 바뀔 수 있지만 바뀌지 않는 현실이란..
3. 꿈에 대하여
마지막 강의에서 랜디 포시 교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원서를 기억나는 대로 번역해 적는 것이니 굳이 대조하지는 않아주셨으면...)
"물론 세상엔 시급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 온 것은 꿈입니다. 꿈을 제시하는데 돈이 사용되는 것은 비판받을 일은 아닙니다."
옳은 소리입니다. 하지만 꿈을 꿀 수 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꿈이 해독제가 되어줄 수 있을까요?
꿈과 현실,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어 보입니다.
4. 아옌데 정권의 붕괴 - p101
아옌데 정권은 다국적기업 네슬레와 미국 정부의 비협조, 아니 방해로 인해 개혁에 실패합니다. 이후 미국 정부에서는 CIA를 통해 이 정부를 뒤집습니다.
미국의 깡패적인 면모를 들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 왜 그렇게 다들 미쳐있었는지에 대한 유감을 표시하고 싶을 뿐입니다.
분명히 글에는 명시되어 있습니다. '... 아옌데 정권의 사회주의적 개혁정책을 꺼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당시는 1970년대,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였겠지요. 이데올로기건 뭐건 사람 살자고 만들어놓은 것인데 그것 때문에 사람이 죽어야 한다니 아이러니한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사막화, 현대에 와서 문제가 된 이유는? - p109
아프리카의 여인들은 나무를 때어 식사를 준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왜 이런 행위가 예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요?
옛날에는 사람은 적고 나무는 많아서 베어진 나무들은 사람들이 돌아올 때 즈음이면 다시 원상태로 자라나 있어서 그러지 않았을까라고 살짝 예상해 봅니다.
그리고 조금은 엉뚱한 것을 추가적으로 덧붙입니다. 석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금은 석탄이 매우 좋은 화석연료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석탄이 대중화될 때에는 이런 석탄을 보고 '검은 돌을 때워 불을 만든다'는 의식이 강했다고 합니다. 나무가 없어서 꿩 대신 닭으로 석탄을 이용한 것이지요. 나무와는 달리 태울 때 독한 연기가 풍겼으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6. 르 아이으 주민들의 이야기 - p120, 124
고통은 연대와 기이한 공생관계를 가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드라마같은데서(전 거의 보지 않지만) 자주 그러잖아요. 부잣집 아들딸들은 유산 놓고 싸우다가 완전 콩가루 집안이 되어버리는 반면에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은 잘 지내는 것처럼. 신의 저울대는 참 신기한 것 같네요. 무언가 하나가 만족이 되면, 항상 다른 무언가는 만족되지 못합니다.
그것보다도 이분들은 무엇으로 삶을 유지하는지 궁금하더군요. 경제활동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는데 어디서 먹을 것을 얻었을까요...?
7. 토마스 상카라와 박정희 - p151
닮았습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나라를 개혁하려고 했지요. 그리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살해당했습니다. 하나는 4년간 정권을 잡았고, 다른 하나는 그 네배의 기간동안 정권을 잡았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했던 악행들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고,[각주:2] 전 여기서 개혁이라는 것이 그 국가의 내부적인 요인뿐만이 아니라 외부적인 환경에 얼마나 크게 영향받는지를 논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토마스 상카라의 경우입니다. 토마스 상카라의 경우에는 주변 국가들의 부패한 대통령들의 외압으로 인해 결국 살해당했다고 나옵니다. 더불어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지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개혁 자체는 성공했습니다.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였지요. 여기서 재미있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대한민국의 경우 주변 국가중에는 부패한 독재자가 없었다. 주변 국가라고 해 봐야 일본뿐이니(냉전시대입니다. 북한과 중국은 적이던 시대예요.) 말 다 했지요. 둘째,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극한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땅 위에 서 있었다. 전 90년생이라 7-80년대의 반공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들은 건 있어서 이념대립이 무지하게 심했다는 사실 하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두 특징이 절묘하게 조합되어 성공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주위에 부패한 독재자가 없었다는 것은 개혁을 시도했던 박통에 딴지를 걸 외부세력이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는 부패한 권력자가 없으니 개혁에 태클을 걸어야만 하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냉전의 효과가 가장 컸다고 보여집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방어선의 최전방에 서 있습니다. 적어도 미국의 입장에서는 말이지요. 사회주의는 보통 경제가 침체된 국가에서 주로 퍼지기 때문에 미국은 2차대전 이후 서부유럽의 재건에 많은 돈을 썼다고 알고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사회주의에 그다지 흥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지요. 하물며 유럽에서도 그랬는데, 아시아에서 이념대립의 최전선에 서 있는 국가에서 잘 살아 보겠다고 아둥바둥 거리는 것을 방해할 이유는 없지요. 물론 여기에는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노선을 타고 있었다는 것도 한 몫 할 것입니다.
"In physical science the first essential step in the direction of learning any subject is to find principles of numerical reckoning and practicable methods for measuring some quality connected with it. I often say that when you can measure what you are speaking about, and express it in numbers, you know something about it; but when you cannot measure it, when you cannot express it in numbers, your knowledge is of a meagre and unsatisfactory kind; it may be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you have scarcely in your thoughts advanced to the state of Science, whatever the matter may be."
- PLA, vol. 1, "Electrical Units of Measurement", 1883-05-03
요즘 한 숫자에 사람들이 죽고 삽니다. 경제성장률이라는 숫자입니다. 도대체 이 숫자가 무엇을 나타내길레 이 숫자 하나에 죽고 사는 것일까요?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은 탓, 제가 매우 어렸던 탓도 있겠지만, 전 제 생활이 저 숫자에 의해 흔들리거나 뒤바뀌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저 숫자가 높으면 행복한 삶을 보장해 주고 저 숫자가 낮으면 어쩔 수 없이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요? 747이라는 작명소에서 지은 공약이 생각나는군요.
그리고 통장에 찍히는 숫자 하나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생각나네요. 먹고 살 정도의 돈을 제한 나머지는 사실 불필요한 통장의 숫자에 불과하지 않나요? 거대한 자본을 움직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하는 말입니다.[각주:3] 하긴, 제가 욕심이 너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써 놓고 보니 파생되어 나온 내용이 너무나도 많네요. 그만큼 많은 생각을 던져주었던 책인가 봅니다. 다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실제로도 바이오에너지는 식량난을 부추기기 때문에 적절한 대체에너지는 아니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본문으로]
그렇다고 박정희가 좋은 대통령이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 해야지요. 그 당시에 경제성장률이 매우 높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본문으로]
물론 이 숫자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무조건 잘못된 삶은 아닙니다. 65억의 사람 수 만큼 65억가지의 다른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지요. 하지만 전 이 분들이 자유라는 이름을 내세워 남을 갈취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프로복서와 초딩의 권투경기가 자유로운 경기가 아닌 것처럼, 이 분들이 원하는 자유는 자유라는 이름의 폭행일 뿐입니다. [본문으로]
예전에 책을 한꺼번에 지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지른 책 중 하나입니다. 사실 책을 구입한 동기는 별 것 아닙니다. 5만원을 맞추어 주문을 하면 보너스 마일리지가 있는데 책 주문하면서 괜찮은 책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베스트셀러라는 이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이지요. 별로 읽을 생각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어느 대학원생분이 쓰신 글이 있는데, 그분이 이 책을 읽고 대학원 온 것에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시더라구요(정확히는 대학원 온 데 의미를 찾았다 정도?). 이 말에 관심이 가게 되었지요. 결국 여차여차 해서 저번 주 금요일 즈음부터 읽기 시작해(아직 읽는 중인 책이 대엿권이 넘는 주제에) 어제 막 다 읽었습니다. 사실 전 번역본이 아니라 원서로 읽어서(원서가 더 싸더군요 OTL) 원서 링크를 걸어두고 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그런데 원서마다 가격이 다르더군요 - 원서도 종류가 많네요).
쉽게 쓰인 책입니다. 강의를 책으로 옮겨놓아서 그런지 약간 구어체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구요.[각주:1]
책의 저자는 말기 암 환자입니다. pancreatic cancer, 즉 췌장암에 걸렸지요. 그래서 여섯 살 먹은 큰아들 딜란(Dylan)과 세 살 먹은 작은아들 로건(Logan), 그리고 18개월이 된 딸 클로에(Chloe)를 위해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고민하다가,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던 마지막 강의를 선물로 남겨주기로 결정합니다(강의들은 유튜브 등에서 돌아다니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 책은 그 때의 강의를 모아서 묶어 낸 것입니다.
사실 전 글쓴이가 하는 말들보다는 글쓴이의 삶에 대한 태도가 부럽더군요.[각주:2] 말 그대로 '제대로 된 낙천주의자'입니다. 삶의 순간순간을 즐기며 살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 도피하지는 않고 말이지요. 경찰관에게 속도위반딱지를 떼이게 생겼을 때 자기가 말기암 환자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그러니 경찰관이 반신반의 하다가 그의 흉부에 난 칼자국을 보고서는 넘어갔다는 일화를 보면서 얼마나 건강한 사람같았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몇 몇 조언은 정말 괜찮았습니다. 몇가지 적어봅니다.
필요하기 전에는 결론내리지 말아라[Never make a decision until you fave to] - p23
텔레마케터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고 있을 때 끊어라[각주:3] - p109
대안을 질문으로 제시해라[Phrase alternatives as questions][각주:4] - p143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적어놓고 해서 그런가,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도덕 교과서와 같은 조언들도 나오기는 하지만, 원래 조언이란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말을 하면 다 알아듣지만 그것을 처음으로 생각해내는 사람이 위대하다는 것 말이지요(콜럼버스의 달걀이 생각나는군요). 엄청난 낙천주의자(그것도 현실감각을 잃지 않은)를 만나고 싶으신 분에게는 강추합니다.
책에서 제외된 챕터라고 합니다. 이 글을 보시면 어떤 식으로 글을 썼는지 대충은 감을 잡으실 듯 해서 주소 남겨둡니다. http://thelastlecture.com/lostchap.htm [본문으로]
죽음을 앞둔 사람은 다섯 가지 단계에 걸쳐 심리가 변화한다고 하지요(Kübler-Ross model)? 이분은 그 중 몇몇 단계를 스킵한 것 같더군요 -_-;;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문으로]
천재더군요 -_-;; 말하고 있는 도중에 끊으면 연결 상태가 불량한줄 알고 다음 통화로 넘어간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부드럽게 말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그런지 이건 반 정도 내면화되었더군요. 회의나 미팅을 주로 하시는 분들에게 좋은 조언일 듯 싶습니다. 덧붙이자면 35장은 특히 그런 조언이 많더군요. [본문으로]
웰스의 타임머신입니다. 1900년대가 되기 직전에 나온 100년이 넘은 오래된 고전입니다. 전 이 소설을 책보다는 영화로 먼저 만났는데, 영화의 줄거리는 소설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더군요. 비록 그리고 있는 미래상은 상당히 비슷하지만 말입니다. 제가 먼저 본 것은 영화이니 영화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알렉산더 하트켄)은 사고로 약혼녀(엠마)를 잃게 됩니다. 이후, 약혼녀가 죽는 사고가 생기는 것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주인공은 타임머신을 만들고, 약혼녀가 죽지 않도록 다르게 행동합니다(미래를 바꾸어 보려는 행동이지요).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과하고 약혼녀는 다시 죽어버립니다. 이후, 주인공은 과거에는 답이 없다고 믿고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날아가게 됩니다.
한편 책은 시간 여행자(Time Traveller)의 영웅담을 듣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의 시점과 비슷하지요.[각주:1] 서술자는[각주:2] 두 번의 저녁식사 모임을 갖는데, 첫 모임에서 시간 여행자는 시간 여행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합니다. 모임에 있던 사람들은 그럴 듯 한 설명에 이해는 하지만 반신반의 합니다. 워낙 시간 여행자의 분위기가 신뢰성 떨어지는 천재(?)이다 보니, 믿기는 좀 애매했던 것이지요. 이제 두 번째 모임에서 시간 여행자는 몰골이 엉망인 체로 홀에 들어옵니다. 시간 여행자는 씻고 온 뒤 식사를 하고 흡연실로 들어가 모임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이제 다시 영화로 돌아와 봅시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총 두번의 여행을 합니다. 한번은 가까운 미래로, 한번은 먼 미래로 말이지요. 가까운 미래는 문명이 발전하여 달에 기지를 건설할 정도로 진보했습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슈퍼컴퓨터의 인공지능(복스)이 자신에게 말을 걸 정도이지요. 하지만 달에 폭탄을 잘못 설치하는 바람에 달이 산산조각이 나고, 그 조각이 지구에 떨어지면서 완전한 혼돈을 일으킵니다. 주인공은 이 혼돈을 피해 다시 먼 미래로 여행을 떠납니다(이 여행때에는 잠깐 정신줄을 놓았던 것 같네요). 이제 주인공은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움막집밖에 없는 녹원에 도착합니다.
책에서는 시간 여행자는 한번의 실험을 합니다. 시작하는 레버를 누른 후 바로 멈추는 레버를 눌렀는데, 실험실에는 별 변화가 없어 약간은 실망하지요. 하지만 10시가 되기 직전이었던 시계가 세시 반 정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고서는 놀랍니다. 이제 시간 여행자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미래로 향합니다. 롤러코스터의 느낌처럼 불쾌한 기분과 함께 점차 주변 풍경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시간 여행에 속도가 붙으면서 교대로 나타나던 밤과 낮은 뭉뚱그려진 회색 덩어리가 되어버리고, 어느새 녹원으로 변한 평지는 흰 눈으로 깜박거립니다. 그리고, 시간 여행자는 기원 후 802,701년에 도착합니다.
책과 영화, 둘 모두에서 서로가 보고 있었던 미래는 너무나도 똑같습니다. 땅 위, 엘로이(Eloi)들의 너무나도 평화로운 세계와, 그 윗 세계가 가리고 있는 지하 멀록(Morlock)의 세계. 둘로 나뉘어 갈라진 인류의 미래를 보게 됩니다. 이후 내용을 적으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으니 이 정도에서 그만두어야겠네요 ^^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볼만한 차이점 몇 가지 추가합니다. 접어 놓을께요.(스포일러 방지 - 다 읽으신 뒤에 읽으라는 말입니다 -_-;;)
1. 시간 여행 횟수
영화에서는 총 두번의 여행을 합니다. 가까운 미래(22세기(?)에 기대하는 미래)와 주된 내용이 있는 머나먼 미래로의 여행 말이지요.
한편 책에서는 총 세번의 여행을 합니다. 한번은 실험, 한번은 주된 내용이 있는 기원후 802,701년(이게 영화에서의 머나먼 미래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번은 도망치듯 더 먼 미래로 떠나갑니다. 마지막에 도착한 미래는 생명은 거의 흔적만 남아 있고 거대한 게들이 슬금슬금 기어다닙니다. 바다 끝자락은 말라붙어 소금 결정이 비대해진 붉은 태양광을 핑크빛으로 반사하고 있는 완전 멸망한 시대입니다. 아, 도망치는 것과(게가 위협하자 바로 미래로 도망칩니다) 돌아오는 것, 그리고 시간여행의 증거를 찾아 다시 다른 시간대로 떠난 것(이후 돌아오지 않습니다 -_-;;) 이렇게 세번까지 합치면 총 여섯 번의 여행을 한 셈인가요?
2. 갈라진 인류의 후손 - 어떻게 알았는가?
인류는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영화에서도 그렇고 소설에서도 그렇고 말이지요. 영화에서는 이 둘이 빛의 종족과 어둠의 종족으로 나뉘어지고, 빛의 종족은 지금 우리의 삶과 매우 비슷한 반면에 어둠의 종족은 스타크래프트의 저그와 비슷하게 한 통치체(?)가 지능이 떨어지는 나머지 떨거지들을 통솔하는 체제를 취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인류가 이렇게 둘로 갈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타임머신을 되찾으러 어둠의 종족의 심장부까지 쳐들어갔을 때(?) 그 통치체에게 전해 들어서 알게 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편 소설에서 시간 여행자는 이를 추론해 냅니다. '그랬을 것이다'라는 가정이란 말이지요. 브루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에 귀족과 천민과 같은 계급이 생겨나고(계급을 뛰어넘는 혼인이 사라져 버려서), 이후 이 계급과 같은 것이 백작들은 땅 위에서 햇볕을 받으며 평화롭게 사는 동안 노동자들은 땅 아래의 생활에 익숙해져 버리면서 종이 나뉘게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에서 이러한 설정을 한 것이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의 우생학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한 듯 하다는 것입니다.[각주:3] 골턴의 우생학의 주된 내용은 '우수한 사람들끼리 혼인을 시키면 더 우수한 인류가 될 수 있다' 정도입니다.(...-_-;;) 이제 이런 '우수한' 교배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자기가 서술한 것과 같은 양분된 미래가 나타나게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3. 빛의 종족과 엘로이
영화에서는 지상에 남게 된 인류의 후손을 빛의 종족이라고 부릅니다. 소설에서는 엘로이라는 이름을 갖고요. 이 종족은 사람과 너무나도 유사합니다. 실제 영화에서는 '이거 사람과 다른게 뭐야' 싶을 정도이지요. 더군다나 영화에서는 '영어'를 사용합니다.(-_-;;;) 한편 소설에서는 난장이와 비슷하게 나옵니다. 더군다나 지능도 많이 떨어지는(4-5세 아동 수준의 지적 능력을 보였다고 하는군요) 편이고 말이지요. 말은 당연히 다른 언어를 사용합니다. 단,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것으로 보였다는군요. 추상적인 것을 지칭하는 단어는 하나도 없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영화에서 보았던 종족과는 넘사벽의 차이가 느껴지는군요.
책의 주석을[각주:4] 뒤져보면 랑케스터(E. Ray Lankester)의 퇴화에 대한 이론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지능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면 퇴화해 버린다는 것이지요. '사람은 생각을 줄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라던 어느 심리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4. 교훈(?)
영화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인 듯 싶습니다. '미래를 바꾸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난 계속 나아갈 것이다'.(사실 본지 너무 오래 된 영화라 구체적인 내용을 기억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 이런 것이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_-;;)
소설에서 웰즈가 하고 싶었던 말은 위의 프랜시스 골턴의 우생학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와 사회 문제(당시에는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던 시대였다는 것(1895)을 알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에 대한 변화의 촉구로 보입니다. 엘로이를 가축처럼 사육하는 멀록들은 과거 엘로이의 조상들이 피지배계급을 지하로 내쫓은 원죄에 대한 벌일 것이라고 서술하는 부분에서 이 주제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각주:5] 어떻게 보면 이 문제제기는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인간의 지능을 물려받은 멀록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이었다는 말을 합니다. 엘로이와 같이 하나된 뿌리, 바로 자신에서 나온 미래 세대이지만 전혀 동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말이지요. 보통 사람은 사람을 다른 짐승과 구분할 때 '이성'의 존재를 중요시합니다. 이성이야말로 인류를 백수(百獸)와 다른 점이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시간 여행자는 우리가 그렇게 중시하는 이성을 물려받은 멀록보다(멀록은 지하 세계에 살면서 상당한 수준으로 기계를 다룹니다.) 일반적으로는 이성보다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는 감성을 물려받은 엘로이에게 애착을 느낍니다. 사람이 사람을 정의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이성이 아닐 지도 모르겠군요.
5. 덧
책 중간에는 40회의 세차운동(지구의 자전축이 약 25,800년 동안 서서히 회전하는 현상을 말합니다)이 일어난 후의 미래는 어쩌구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주석에는 정확히는 31회 정도일 것이라는군요 -_-;; 여튼 웰즈의 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처음부터 책을 원서를 들고 나와서 이번에는 번역본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도 팔리고 있는 종류는 한 다섯가지 정도 되어보입니다. 순서는 늦게 출간된 순서입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책입니다. 예전에 『나무야 나무야』를 어쩌다가 읽게 되었는데(논술 관련된 학원에서 필독서로 쥐어주었던 것 같네요 -_-;;) 이때 이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나 봅니다. 잠시 일이 있어서 시내에 나갔을 때 시간을 때우고자 서점에 들렀다가 이 책을 보고서는 바로 집었거든요. 그 상태로 쭈욱 읽었습니다.
결국 책을 사기로 마음먹은 것은 30쪽부터 시작하는 <청구회 추억>이라는 글 때문이었습니다. 8장 가까이 되는 장문의 글이었는데, 글에서 사람사는 냄새가 난다고 하나요? 아이들(저보다는 어른이겠지만...-_- 전 당시 존재 자체가 없었으니)과의 작은 추억에서 묻어나는 따뜻함에 망설임 없이 책을 계산대로 가져갔습니다.
지금 제가 가진 책에는 포스트잇이 잡초처럼(-_-;;) 돋아나 있습니다. 읽다가 '오 이글 괜찮다 나중에 다시 읽어야지' 싶은 글들은 전부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는데, 얼핏 보아도 20장 정도 붙어 있네요.(혹시나 해서 세어보니 23장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특징은, 포스트잇이 책의 뒤 끝으로 갈수록 많이 붙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징역살이의[각주:1]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사색의 깊이가 점차 깊어졌기 때문이겠지요. 아니면 단순히 제가 더 쉽게 감동하는 체질로 바뀌었거나요 ^^;;
첫 포스트잇은 87쪽에 붙어있습니다.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이네요. 사람을 사랑할 때에는 그 겉모습만 보지 말고 속까지 보아라라는 아주 대표적인 도덕책 내용을 다룬 편지지만[각주:2], 제가 이 글에 포스트잇을 붙였던 이유는 이 구절 때문입니다.
너는 아직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하겠지만 요즘 세상에는 같은 가격이면 그 염색료만큼 천이 나쁜 치마이기 십상이다.
이 부분을 읽고 잠시 벙찐 얼굴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신선한 충격을 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처음의 충격은 '아 이런 생각을 왜 여태 하지 못했던가'이라면 요즘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입니다.
두 번째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쪽은 책장을 휘리릭 넘겨(알고보니 세장이군요 쳇) 93쪽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엽서인데, 제가 배워왔던 해석과는 또 다른 신선한 해석이었습니다. 보통 이 경구는 자기 자신을 수양하는 데서 천하를 평정하는 것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서신에서는 이 금언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자기 자신을 가다듬는 것과, 가족을 안정케 하는 것, 나라를 다스리는 것, 그리고 천하를 평안케 하는 것 모두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라는 것입니다. 제가 없는 수신은 이기주의[각주:3], 치국 없는 제가는 계급간의 불화[각주:4], 평천하 없는 치국은 침략전쟁에[각주:5]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105페이지에도 포스트잇이 붙어 있네요. 버림과 키움이라는 제목의 서신입니다. 예전에 이 글을 읽고 그 인상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글을 하나 쓴 적이 있는데, 지금 보아도 그때 그 느낌이 살아있습니다. 책상 정리를 한 지 두어달 되가는 듯 한데, 다시 날 한번 잡아서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네요. 어차피 기숙사에서 이사하면서 한번 정도 버릴 것은 버리고 가져갈 것은 가져가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뭐 굳이 이런 다양한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이 책은 저에게 상당히 많은 영향을 준 책입니다. 블로그 초기에는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경어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요(더불어 지금은 구어체를 주로 사용하고 있군요 으음..). 처음 경어체를 사용해야겠다고 느끼게 된 데에는 이 책의 역할이 좀 컸다고 기억합니다. 더불어 처음으로 경어체를 사용한 포스트도 이 책과 관련이 있는 포스트이구요(생각해 보니 이 포스트는 일부러 편지 형식으로 썼던 것 같기도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재미있는 점 중 하나는, 뒤로 갈수록 ~이다, ~했다와 같은 일상적인 어투는 점차 사라지고 높임말이 주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그건 아무래도 받는이가 갈수록 부모님이나 계수님, 형수님과 같이 높임말을 아니 쓸 수 없는 대상으로 바뀌어 간다는 것이 제일 크겠지만[각주:6], 벽으로 둘러쌓인 세월동안 말의 모난 부분이 점차 닳아 둥글어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으셨겠지요. 그래도 한번 정도는 책장 구석에서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책을 꺼내드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덧. 이 책에 있는 많은 편지들을 스캔한 그대로 인쇄하여 펴낸 책이 있더군요. 좀 가격이 비싸긴 하지만, 정말 소장하고 싶은 책입니다. 비록 책에 가끔씩 보이는 편지의 손글씨는 잘 못 읽겠지만 말이지요 -_-(한문은 더더욱...)
대한민국사 4권에서는 이런 일화가 있네요. 정향 선생님이 교도소에 새로 생긴 서도반에 글씨 지도를 해 주러 오셨다가 신영복 교수님(당시에는 죄수였지요 ^^;)을 만나고는 '아, 이분들은 귀양 온 사람들이구나'하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징역살이라고 쓰고 귀양살이라고 읽으니 느낌이 색다르네요 ^^ - 한홍구, 『대한민국사』 4권, 한겨레출판, 2008, p208 [본문으로]
사랑에 관한 글 중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글은 같은 책의 350쪽에 있는 구절입니다. 사실 사랑이라기보다는 결혼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말이지요. 어느 한 시나리오에서 기억나는 구절을 적어 본다고 되어 있는데, '내가 그와 같이 있으면 더욱 나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결혼을 결심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싶을 때 한번 쯤 곱씹어보아야 할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으로]
꼭 가정이 아니더라도 여기서 의미하는 제가는 이웃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으로]
책에서는 '부옥(富屋)의 맹견(猛犬)과 그 높은 담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꼭 이런 의미가 아니더라도 부정부패와 연계해서 생각하게 되네요. 확실히 검은 돈은 치국 없는 제가 아니겠습니까. [본문으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이 생각납니다. 사실 전쟁이라고 하기도 그렇지요. 초딩과 최홍만의 싸움을 싸움이라고 부르기 뭣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본문으로]
오늘 책이 도착해서 바로 읽어보았습니다. 한 한시간 정도 써서 돌파한 것 같네요. 좀 새로운 것을 기대했더니만, 이상하게 반 이상은 이미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나오는 이론도 반 정도는 과제를 한다면서 미약하게나마 공부했던 것들이고 말이지요. 아무래도 제 자신이 이런 쪽은 볼 수 있는대로 다 보아 두어서 나올만한 이야기들은 다 뻔하디 뻔한 이야기일뿐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알라딘 리뷰 중에서는 '이 책이 대중을 위해 쉽게 쓰인 책이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접근했다가 당황했다는 글도 있더군요 ^^ 뭐 저야 큰 무리 없이 대부분 이해한 듯 하지만(하지만 허블과 관련해서 나오는 허수시간은 좀 애매하군요 -_- 허수인 시간은 어떻게 측정할까나? 허수에서 실수로 시간이 바뀌는 것도 고려해야하고...-_-) 그거야 제가 이 방면으로 공부하는 사람들 중 하나니 그렇고요..-_-
이 책에서는 물리학계에서 정설로 여겨지는 이론들과 함께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준정설과 이단설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여기서 이단설로 나오는 갖가지 가설들 중에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가설도 있지요. 예를 들어 빅뱅 이론과 대치대는 많은 가설들 중 하나에는 정상우주론이 있습니다. 우주가 한 점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원래 태초부터 이런 모습이었고 우주가 팽창하면서 물질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는 이론이지요. 지구과학II를 공부하셨다면 아시겠네요 ^^
전반적으로 쉽게 쓰였습니다. 대중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약간은 난이한 책입니다. 스트링 코스모스 정도의 난이도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우주의 구조나 엘러건트 유니버스보다는 쉽고 가볍지만 말이지요. 책은 200페이지가 못 되니 정말 가볍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예전에 읽은 책들과 대비되는 부분이라면 역시 인물들에 대한 평가 부분입니다. 다른 교양서의 경우 대부분 이론 소개에도 벅차 보이던데(말은 쉽게 쉽게 하는데 엄청나게 길지요 -_-) 이 책에서는 이론 소개만큼이나 물리학사에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뒷이야기나 인품에 대한 평가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수의 길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는군요. 학문만 하고 살 줄 알았는데 개인적으로 우러러보던 교수님이 각종 연구 압박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서는 교수의 길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저널리스트(?) 쪽으로 활동하고 있다면서요. 저도 얼핏하다간 이 길로 빠질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리라는 학문 자체는 정말 매력적이지만, 그걸로 먹고 살 정도로 잘 한다고 생각하지는[각주:1]...-_- 뭐 일단 시도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겠지만 말이지요.
가끔씩 간단하게 특이한 이론을 찾고 싶을 때 참고하면 좋을 것 같네요. 아니면 (물리)문제의 답이 도저히 보이지 않아서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푸앙카레는 이를 부화incubation 단계라고 불렀다지요) 읽으면 딱인 책입니다.
더군다나 교수 잘하려면 정치적 능력이 상당히 요구된다는데 전 그런 것이랑은 거리가 상당히 멀어서요 -_-;;; [본문으로]
먼저 12월 31일 20시에 프레스센터에서는 언론장악법에 반대하는 기자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19시 반 쯤 시청역에서 나와 프레스센터 앞에서 고재열 기자님께 전화를 했는데, 거기 있으면 20시부터 시작할거라고 하시더군요.
물론 이 사건은 방송에 안 나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MBC에서만 촬영하더군요.
19:30분 쯤 프레스센터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스피커는 설치되어 있었고, 광야에서가 흘러나오더군요(맞나;;). 프레스센터 안에는 생각외로 사람이 좀 있더군요.
피켓 세트를 들고 지나가는 행인1 입니다.
경찰차도 있더군요. 언론차와 경찰차의 나란한 동침. 적과의 동침인가요? 저 안에서 경찰들이 째려보더군요 -_-;;; 저 차 말고도 많은 경찰차들이 주변에 있었습니다. 버스까지 해서 4~5대 정도?
50분 즈음일 겁니다. 행사 시작 10분전. 플랜카드도 걸리기 시작하고 그러더군요. 갑자기 사람이 많아지더군요. 저기서 피켓을 들고 계신 분들은 나중에 알고 보니 예비 언론인들이더군요. '아랑' 이었나?
촛불을 위해 준비된 듯 한 상자들입니다. 재미있네요. MB노믹스의 핵심은 양초와 종이컵 산업의 발달로 인한 경제회복인가 봅니다.
아까 말했던 예비 언론인 모임의 깃발입니다. 아랑 맞는지 헷깔리는군요.
승리의 MBC. 카메라 기자는 MBC 밖에 없었습니다. 여론통제의 핵심이 뭔지 아십니까? 아젠다 설정입니다. 요즘은 책상 위의 연필에 대해서 펜이라고 하는 것이 통제가 아니라, 연필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통제입니다. 뭐가 문제인지 눈치 채셨겠지요?
개인방송인 듯 합니다. 아프리카 방송팀 1
여기도 있네요. 방송팀 2
방송팀 3. 인터뷰 중입니다. 저분 연필이 너무 많이 남아서 떨이라고 나누어 주시더군요. 연필깎이가 없어서 받지는 않았지만 기념품(?)으로 하나정도는 챙겨둘 걸 그랬습니다. 뱃지는 하나 챙기긴 했지만(주황 파랑 이렇게 두가지가 있더군요 ^^), 기념품 많으면 좋지요.
눈을 조금만 돌려보면 촛불. 이미 시작되었군요. 저 학생(?)은 마스크를 썼고 말이지요. 인터뷰도 받던데...
전체적인 뷰 입니다. 깃발이 이곳저곳에~ 피켓도 있고~ 음악은 흘러나오고~ MB가 싫을뿐이고~ 투표 다시 하고 싶을뿐이고~(비록 난 당시 투표권이 없기는 했지만 ^^;;)
KBS 젊은 기자분들의 플랜카드. 저도 재벌방송 싫어요. 대기업 대변인은 변호사로 충분합니다.
한창일 때의 피켓. 카메라는 돌아가고~ 우리는 노래할 뿐이고~
전 추워서 프레스센터 안에 들어갔다 다시 나왔다 하면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일제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_-;;; 아무래도 종각 쪽으로 간 듯 해서 전 홀로(원래 싱글플레이는 제 주특기입니다) 종각으로 향했습니다. 종각역에서 어쩌다가 고재열 기자님을 본 듯 하기도 하고...-_-;;;(만약 맞았더라면 이 자리를 빌어 죄송하다고 빌어야겠네요 쿨럭;;) 뭐 하여튼 이제 방송에서 다루지 않은 장면들 다시 나갑니다.
흔들렸네요 -_- 역시 똑딱이(컴팩트디카)의 한계입니다...ㅠ 방패입니다. 왜 들고있을까? 나중에는 보니 한손방패도 등장하더군요.
대본을 읽고있는 아나운서 ^^;; 이건 그냥...;;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습. 노란 풍선에는 일제고사반대로 해임된 교사들의 복직을 촉구하는 문구가 적혀있었습니다. 경찰은 풍선이 보이는 대로 빼앗아 날렸다고 하더군요. 어쩐지 가끔씩 하늘에 떠다니는 노란 풍선이 보인다 싶었습니다.
모여있는 사람들입니다. 22시 즈음부터 마이크로 평화 집회를 부탁하는 안내 방송이 울려퍼졌습니다.
의경들. 의경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모인 사람의 반은 되어보이더군요. 곳곳에서는 이런 수많은 경찰에 불만이 있었는지 의경에게 윽박지르는 시민들이 있더라구요. 의경이 무슨 죄입니까. 까라면 까야지...-_-
아 물론 저 회색 옷을 입은 경찰분들은 안전요원 같았지만, 검은 옷을 입은 분들은 짱이더군요 -_- 딱 촛불 들고 풍선 들고 깃발 들고 그런 분들만 찾아서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오해이든 아니든 그건 충돌이 생길 만한 이유이지요.
충돌. 곳곳에서 충돌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강제로 채증한 것 때문에 그런 것 같더군요. '폭력경찰 물러가라'라는 구호가 들렸습니다. 이때가 22시 반 정도입니다.
어쩌다가 인파에 휘말려서 안쪽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맨 앞줄에 있었지요. 제가 제일 처음 무대 앞으로 들어선 사람들 중 하나일 겁니다.
KBS의 실수 ㅋㅋ. 피켓이 지나갑니다.
아까 위에서 있었던 일을 찍은 것 같더군요. 이후 사람들의 모습을 찍을 때에는 멀리서 찍기만 하고 사람 하나하나는 안 찍는 주도면밀함을 보이더군요. 의제 숨기기. 제가 말했던 여론 통제의 하나입니다.
수많은 깃발들. KBS 방송만 보셨으면 깃발이 있었는지조차 모르셨겠군요.
줌인해서 찍었습니다. 카메라는 좀 더 높이 들고요. 풍선도 보입니다.
이건 사람들이 다 들어온 이후에 찍은 것 같네요. 깃발 정말 많았습니다.
2009년의 시작. 풍선을 날리던 장면입니다. 올해에는 근심거리(한나라와 리만브라더스 -_-)가 저 하늘의 풍선들처럼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군요.
죄송하지만 전 다음날 일정도 있고 얼어 죽을 것 같은 추위도 있고 해서 종을 치자 마자 인파에 휘말려서 나왔습니다 -_-(아마추어의 한계입니다 -_-) 이 이후에는 물대포도 등장하고 난리가 아니었다고 하는데, 그때까지는 못 있었네요.
전 정말 행운아인가 봅니다. 제가 2008년에 고3이었으면(90년생.. 쿨럭) 대학 못갔을껄요? -_-(물론 지금 학점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참 세상 한번...-_- 2009년은 좀 낫기를 기대합니다(만 이놈들이 벌써 삽질을 시작했다는군요 으읅)
신곡. 많은 사람들이 들어는 보았지만 정작 제대로 읽어 본 사람은 거의 없다는 고전 중 하나. 그 신곡에 대한 특별강의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고전이라고 불리는 대다수의 문학작품들은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많은 고전문학이 글자가 없던 시대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구전문학이어서 일정한 음율(리듬이 있으면 외우기 쉽지요)을[각주:1] 가지고 있었던 이유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상류층의 풍류라고 한다면 소설보다는 시가 선호되었던 분위기도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만 보아도 한시를 지었지[각주:2] 한문소설을 짓는 경우는 거의 없었잖아요. 그나마 있는 소설들도 한시가 등장한 뒤 한참 뒤에서야 등장하였지요. 물론 예상하셨겠지만, 신곡도 시의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곡은 시입니다. 총 세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옥편 34곡, 연옥편 33곡, 천국편 33곡으로 총 100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옥편의 첫 곡을 인트로로 본다면(머리말처럼 말이지요) 각 편마다 33곡을 배치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수학적인 구성을 보아도 특이하다 할 수 있지요. 신곡의 전체적인 내용은 숲속에서 길을 잃은 단테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지옥에서 시작하여 연옥, 천국을 두루 돌아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지옥, 천국과 같은 사후세계가 나오는 것에서 눈치를 채셨겠지만 단테 신곡은 중요한 기독교문학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제 책에 대해서 소개할 차례이군요 ^^;; 책은 단테 신곡에 대한 일종의 해설서입니다. 자습서와 비슷한 느낌이지요.[각주:3] 신곡의 내용이 모두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신곡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에 대한 강의를 모은 책입니다. 강의하는 사람이 단테 전공자가 아니라는 것도 하나의 큰 특징입니다. 이런 특징이 신곡을 기존의 틀이 아닌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각주:4]
또, 이 책의 다른 특징은 일반적으로 신곡에 대해서 배운다고 하면 첫 줄부터 읽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것이 아니라 신곡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 즉 서사시의 역사라던가 기독교사상에 대한 강의로 시작합니다. 이런 특징은 신곡에 대한 또 다른 깊이있는 이해를 가능하게 해 주는 구성입니다.
신곡을 굳이 읽지 않았더라도 도전해볼 만한 책입니다. 생각해볼 거리를 많이 던져주어서 좋더군요 ^^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순수학문이 일본을 따라가기에는 아직도 멀었다는 슬픈 생각도 떠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서야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을까요?
실제로 많이 사용하는 기억술 중 하나가 일정한 리듬을 부여하는 방법이라지요?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이처럼 구전으로 전해오는 시가 거의 변화가 없더라는 어느 한 노학자의 연구 결과였습니다.(p 28) [본문으로]
이 땅에 민주주의가 들어선 것은 언제즈음인가요? 이 땅만 따지면 60여년 정도 되겠고 전 지구적으로 따진다면 그 개념은(현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 말입니다) 약 300여년 정도 되겠군요. 인류(H. sapiens)가 등장한 것이 약 이십만 년 전이라고 하니까, 정말 근대의 마지막 1초에 혜성처럼 등장한 체제입니다. 이런, 블로그에서도 불필요할 정도로 거대한 머리가 나오게 되는군요 -_-;;
뭐 어찌되었든 민주주의와 함께 발달한 것이 '자유'라는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자유에 대해서 가장 유명한 책이라면 역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있겠지요. 아직 5개 부 중에서 첫 부밖에 읽어보지 못했지만(1800년대 책이라 그런지 단어가 좀...-_-) 여기서 제시된 자유의 개념은 현대에도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자유의 개념과 동일해 보입니다. 첫 째, 자유는 강자(여기서는 전제정권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입니다)의 힘에 소수자가 말 그대로 '사냥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발전한 것이라는 것과, 둘 째, 이런 보호의 의미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자유라는 개념은 이후에 자기와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 이익집단을 만들고 정치적인 압력을 행세하는 보다 넓은 부분으로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제대로 읽은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네요 단어가 역시...)입니다. 그러면서 등장한 것이 자유의 삼 대 원칙입니다.
첫 째, 자신의 행동이 남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경우까지가 자유의 적절한 범위이다.
둘 째, 이런 자유에 따라 사람은 자신이 쫓고자 하는 이상을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다.
셋 째, 개개인은 이런 원칙이 동등하게 적용되는 단체를 자유로이 구성할 수 있다.
같은 책에서 밀은 사상과 출판의 자유에 대해서도 다룹니다. 제 2부인데, 아직 이 부분은 읽어보지 못했네요.(1부도 한번 읽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되어 한번 더 읽고 있습니다.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말이지요 -_-) 사실, 이 두번째 부분이 자유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들 하더군요. 사상의 자유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니 말이지요. 그래도 마지막 부분에서 사상과 출판의 자유에 대해 '이 자유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다르게 생각될 여지가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첫 번째 원칙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이해 했습니다. 단어가 정말 안드로메다이군요 -_-)' 라고 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자기가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던 간에 그게 직접적으로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니까 사상에 대해서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는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지요.
제가 읽은 책은 Penguin Classics에서 나온 것인데 이제는 다른 책과 묶어서 나오나 보네요;;
물론, 그 이전에 밀은 한가지 전제를 합니다. 인류가 충분히 성숙하여 이런 자유가 부과되었을 때 그 자유를 성실하게 이용할 수 있을 때에만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전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 도대체 '성숙했다는 것은 누가 결정하는 거야?!' 였습니다. 물론 자유가 위의 원칙대로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아무에게나 주어질 수는 없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저것도 말을 알아듣는 사람한테나 주어져야지 말도 못알아 듣고 자유로워졌다고 그 힘을 무작정 휘둘러대는 괴물한테는 주면 안되는 것 아닙니까.[각주:1] 그래도 누가 이 '성숙함'을 결정하는 가는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그런데 이런, 한나라당이 그 '판결자'로 나선 것인가요?
기사를 찾아봤더니 너무나도 알려진 것이 없더군요. 방송통신법 개정에 대해 찾아보았는데, 이건 뭐 구체적인 법안도 공개조차 안 되어 있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번 연말에 어떻게든 통과시키겠다고 한나라당에서는 벼르고 있더랍니다. 주요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어찌저찌 해서 힘들게(?) 구한 자료 올려봅니다. 자료는 저번에 독설닷컴이 주최한 '언론장악 7대 악법 간담회'에서 얻어온 자료입니다.
1. 대기업 방송진입 허용.
현행법에서는 자산규모 3조원 이상의 법인을 대기업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이 기준을 10조원 이상으로 올린다고 하더군요.(12월 공포될 시행령)
2. 신문-방송 교차소유 허용
역시 현행법에서는 이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일간신문과 뉴스통신은 지상파방송, 보도·종합편성채널을 겸영하거나 그 지분이나 주식을 소유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 한나라당에서는 이를 지상파방송에 대해서는 20%, 보도·종합편성채널에 대해서는 49%까지 주식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군요.
3. 외국인 방송진입 허용
원래는 허용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종합편성, 보도채널의 20%까지 허용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원래는 불가였던 것 같네요.
4. 신문법 개정
일간신문의 복수소유 제한 조항, 경영자료 신고 의무 조항을 삭제하고 신문발전위원회, 신문유통원, 한국언론재단을 통합하여 법인 형태의 독임제 한국언론진흥재단을 신설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신문사끼리 인수합병 허가, 신문이 버는 돈을 공개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를 공개하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것과 마지막 하나는 각종 법인을 하나로 합쳐버리겠다는 의미입니다. 참, 신문사끼리 인수합병 제한하는 조항을 삭제한다는 말도 있군요.
5. 사이버모욕죄
이건 뭐 말 안 해도 잘 아시리라...;; 전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예전부터 권력자들은 대중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사실 귀찮잖아요. 저마저도 사촌동생들이 제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고 할 때마다 탄압(?)하는데 국가라고 그러지 않으란 법 있습니까? 그런데 요즘 시대에는 그게 아니란 말이지요. 권력자들 머리 위에 올림픽경기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해도 이거 원, 주먹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무너저 내리는 것도 시간문제이고 하니 그러질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이 사용하는 것이 언론입니다. 촘스키 교수의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를 보셨다면 이 부분에 대해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뭐 전 이런걸 다루려고 하는 건 아니니, 이 쯤 해서 정말 하고 싶은 말로 넘어가야겠네요.
첫 개정안 - 대기업의 언론진출 - 에 대하여
먼저 첫 번째 개정안을 봅시다. 대기업의 방송진출 허용. 지금 법률은 대기업이 방송에 진출하는 것을 완전히 막고 있지는 않다고 합니다. 다만, 시사를 다루는 방송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을 원천금지하고 있을 뿐이지요. '드라마를 만들든 예능프로그램을 만들든 그건 북치고 장구치고 알아서 해라, 대신 뉴스에 발 들이려고 했다간 쪽박찰 줄 알아라' 이게 현행법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모든 대기업들에 대해서 지상파방송에는 20%까지만 지분소유를 허용하고, 보도·종합편성채널에는 49%까지 허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발언권은 있지만(이 부분은 저도 애매하네요;;) 완전히 가지고 놀지는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 대기업의 기준을 상향조정한답니다. 종부세와 같은 논리인가요? 하긴 돈 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기업의 기준이 상당히 높을 수 도 있겠다만 말입니다.. 뭐 하여튼 이 개정으로 얻는 효과는 '대기업의 방송 진출이 수월해진다'는 것입니다. 대기업이 시사를 다루는 방송영역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기업을 대변하는 방송국이 생겨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언론은 많은 경우 기업에 호의적입니다. 아니 그걸 어쩌겠어요. 원래 사람은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한법...(이게 반대되어 강자 앞에 강하고 약자 앞에 약하면 우리는 그를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강자인 기업에 호의적이지 않은 경우는 보통 다른 기업이 뒤를 봐 주기 때문입니다. 표현이 조금 이상하긴 한데, 그러니까 다른 기업이 어느 특정 기업을 깐다고 해서 그 언론에 대해 적대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시되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공영방송의 경우 어떻게 되어도 국가에 기댈 수 있으니까 당연히 기업에 대해 (상대적으로) 공격적이고요.
참, 우리나라의 SBS는 조금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3대 지상파 방송사 중 2개가 공영이기 때문에 지상파 방송은 이미 기업을 까는 쪽으로 대세가 잡혀 있습니다.[각주:2] SBS는 어쩔 수 없이 이 대세에 동참하고 있구요. 대신 다른 두 방송사보다는 덜 공격적이지요. 민영화가 상당히 진행된 방송사이다 보니까 그렇겠지요...
원래 '왜 기업은 자신을 대변하면 안 되는가'라는 의문을 가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해 보니까, 뒤에서 대기업이 각종 돈줄을 넣어주면 어떻게든 그 방송국은 승승장구 할 수밖에 없고 영향력이 과도하게 거대해질 것이다라는 결론이 내려지더라구요. 과도하게 거대한 영향력이 왜 좋지 않은지는 둘 째 개정안에 대해서 다룰 때 같이 다룰 생각입니다. 이미 첫 째 개정안에 대해서 다룰 때 너무 길어져서 말이지요 ^^;;
둘 째 개정안 - 신문의 방송 겸용 - 에 대하여
두 번째 개정안은 신문사가 방송에 진출할 수 있게 하는 제도입니다. 조중동이 지상파로 흘러나올 것을 생각하면 좀 안습이네요 -_-;; 그 잔소리를 신문이어서 안 볼 수 있었는데 TV에서까지 보아야 한다니..(비록 전 기숙사라서 거의 안 보기는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자기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는 것 또한 자유가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자유는 남에게 해가 가지 않는 정도까지가 자유입니다. 그 선을 넘어서면 폭력이지요. 언론이 너무 거대해져서 여론의 다양성이 상실되면 대중이 멍청해진다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사실 대중은 매우 똑똑한 존재입니다.[각주:4] 전 이것이 민주주의를 채택한 이유라고 보고 있구요.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대중이 그 지혜로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정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Decentralization, 탈집중화입니다.[각주:5] 여론에 다양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하나의 언론이 너무 강해지면 여론의 다양성이 실종될 우려가 너무나도 큽니다. 이건 파국을 가져올 뿐이지요.
파국을 가져오는 것, 이건 개개인에 대한 권리의 침해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한 권리의 침해입니다. 이건 더 이상 자유의 범위가 아니예요. 폭력의 범위이지.
셋 째 개정안 - 외국인의 진출 허용 - 에 대하여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 잘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외국인이 진출 가능해진다고 한다면, 외국 자본이 무지막지하게 크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첫 째 개정안에서 우려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기업이나 자본이 성역에 놓여 버려 언론이 비판기능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지요.
넷 째 개정안 - 신문법 개정 - 에 대하여
이미 하고 싶은 말은 위에서 거의 다 했습니다. 신문사끼리 인수합병 불가능 조항은 '일간신문의 복수소유 제한'에 해당하는데, 위의 신문과 방송 겸용에 대해서 다룰 때 이런 조치는 여론의 다양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고, 이것이 파국으로 치닫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경영자료 신고 의무 조항은 돈이 어디서 들어왔는가를 밝히라는 말 같은데, 이 부분은 사실 처음엔 의문이 많이 가기는 했지만 이제 보니 왜 이런 조항이 있는지 알 것 같네요. 정치인과 언론사가 결탁하면 뭐가 되지요? 예 바로 그겁니다 -_- 돈이 어디서 들어오는지 확실히 함으로서 정치인과 언론사 사이에 카르텔이 형성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입니다.
여러 법인을 하나로 합치는 것은 3권분립을 무시하고 하나의 절대권력으로 생성시키려는 노력과 어딘가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신문을 견제하는 법인이 하나 뿐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기 하나만 잡고 휘두르면 신문사들을 전부 잡고 휘두를 수 있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아무래도 언론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이래서는 안될 것 같네요.
쓰다 보니까 갈수록 내용이 없어지네요 ^^;; 뭐 결국 이 문제들은 하나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표현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이런 법 개정도 반대할 이유는 없겠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이 법률들이 개정되면 표현의 자유가 표현의 폭력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제한없는 자유는 폭력일 뿐이니까요. 특히 그것이 강자의 것이라면 말이지요.
이번에 3대 방송사 모두 파업을 한다고 하네요. 이제 두시간 가량 남았네요. 저야 뭐 나불대기밖에 못하지만(...) 힘 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꼭 이기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제 입이 피곤해질 것 같거든요. 지금도 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_-
아무래도 말을 못 알아듣는 짐승한테는 말로 알아들을 때까지 말로 해결해야 하느냐 아니면 바로 도끼 들고 슥~ 해버려야 하느냐 그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은데, 가능성이 아예 없다면 후자로 가야 한다는 결론으로 정리된 것 같네요. 일단 말을 알아듣는 사람들은 살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 못알아 듣는 녀석 때문에 말 알아듣는 애들이 멸종해 버리면 안되지요. 일종의 방어기작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방어의 목적이 아니면 그냥 방목해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으로]
이 부분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 지상파 방송이 마구 허락되면 친기업적인 접근이 대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본문으로]
귀스타브 르 봉 저 김성균 역, 『군중심리』, 이레미디어, 2008, pp. 188~189 [본문으로]
James Surowiecki의 저서 중 The Wisdom of Crowds라는 책이 있습니다.(번역본 『대중의 지혜』) 여기서 이 주장이 나오는데, 제가 보기엔 타당해 보입니다. 사실 다수결의 원칙도 많은 사람이 결정을 내린다면 그 결정이 정답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서 출발한 것 아닙니까. [본문으로]
『군중심리』에서 르 봉은 군중이 멍청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결국 르 봉이 군중을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정의를 했기 때문에 탈집중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본문으로]
크리스마스라 그런지 이벤트를 하더군요. 산타가 들어와서 질문을 하고 답을 맞추면 티켓을 주는데, 심심할 때 마다 인형 던져줍니다. 전 뭐 이런거 원래 귀찮아하는 사람이니... -_-
'나는 산타에효' 하면서 인형 끌고 들어온 산타
승냥이떼처럼(..) 손 드는 사람들 -_-;;
영화는 괜찮았습니다. 외계인이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인류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종말을 끌고 온다는 설정인데 역시 예상하시는 바와 같이 외계인은 지구인의 선함에 '잇힝 나 감동했음' 하고 파괴를 그만두고 떠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픽은 상당히 괜찮더군요. 단지 마지막 2분 직전까지 긴장을 잘 이끌어 가다가 마지막 2분에 허무하게 놓아버리는 것이 좀 아쉽더군요. 생각해볼 만한 요점만 정리해서 올려봅니다.
1. 외계인, 발전된 문명의 능력
역시 제일 눈길이 가는 것은 외계인 클라투(키아누 리브스 역)의 능력입니다. 전자 장비를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있던데, 참 신기하더군요. 나간 전화에 손 한번 슥 대니까 다시 들어오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끼고있는 이어폰으로 괴상한 소리 내보내서 전부 전멸(..)시키고 모든 전자장비를 의지대로 움직이더라구요.
사실 조그마한 벌레로 갈라지는 로봇(외눈박이 거대한 로봇이 그놈입니다)이랑[각주:1] 만병통치연고(나중에 영화 보면 아실 겁니다)가 가장 신기하더군요 ^^
2. 지구가 멈추는 날, 제대로 된 환경운동 영화
사실 그 무엇보다 이 부분이 제일 강조된 영화 같았습니다. 설정 자체가 '외계인이 지구를 인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인류를 막으러 내려왔다' 이니까요. 내려와서 하는 말중에 가장 기억에 나는 말이 있다면 '지구는 너희의 행성이 아니다' 가 있겠네요. 쓰고보니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은 인도인을 말하는 잘못된 표현이라고 하더군요)의 편지[각주:2]가 생각이 나네요. 땅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팔 수 없다는, 그 말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어느새 우리는 많은 것들에 가격을 붙여버렸지요.
이타적인 유전자 관련 연구로[각주:3] 노벨상을 수상한 석학으로 설정되어 있는 칼(찾아봤는데 역시 가상의 인물이더군요 -_-)의 변명(?)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인류는 항상 벼랑의 끝에서 어쩔 수 없이 변해왔다. 그것은 너희도 마찬가지 아니냐.' 뭐 항상 느끼는 것이다만 언제에야 인류가 벼랑까지 내몰리지 않고도 변화할 수 있을까요? 특정 시기에 이르러야지 수많은 종이 탄생하고 수많은 종들이 사라지는 것처럼[각주:4] 이런 것이 원래 자연의 법칙일까요?
그래도 외계인들이(참고로 말하자면 여기서 외계인은 하나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 인류에 대해 어떤 알 수 없는 애착을 갖게 되는 것을 보면 감독의 희망의 시선이 느껴진달까요? 뭐, 아직 우리에겐 변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네요.
3. 역시 미국이야 -_-
어떤 나라가 안 그러겠냐만은(이 부분에선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전 미국을 깡패국가로 봅니다. 심심하면 약한 국가들 미사일로 툭툭 건드려주고, 돈의 힘으로 각종 으름장을 놓으면서 강제적으로 시장을 개방하라고 하고 그러면서 자기가 불리하면 쑥 들어가고... 도대체 동네 양아치하고 다른게 무엇입니까? 물론 이런 비판은 미 정부에만 해당하는 것이긴 하지만 미 정부가 사실상 미국의 대표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비판을 피해가진 못하겠지요.[각주:5] 물론 대한민국 정부도 힘이 없어서 미사일로 툭툭 건드려주는 것은 하지 못하지만 강대국의 거대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도상국에 들어가서 부리는 행패에서 자유롭지는 못하지요.
사실 미국의 대통령은 미국 시민의 대표가 아니라 미국 기업인들의 대표였습니다(조지 부시 말입니다 조지자 부시자 -_-). 오바마는 달라질 것이라고 믿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구요. 노무현처럼 의도는 좋았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대통령이라는 우려[각주:6]가 이곳 저곳에서 보이지 않습니까. 아, 다시 미국 대통령 이야기로 돌아가서 미국의 대통령과 미국 정부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행동은 여태 보였던 이런 행동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적대적, 변화 거부(교토의정서 불참은 이미 유명하지요) 이 두가지가 정말 제대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4. 이야기 상의 아쉬운 점
평가 중 이런 말도 있더군요 ^^;;
'미안해서 밥을 한번 더 사주게 되는 영화'
평점은 1점을 주었던 것 같네요. 전 무지하게 재미있게 보다가, 마지막 2분에서 정말 허무했습니다. 아니 왜 외계인은 떠날 때 인사 한마디 안하디? 이 감정은 예전에 보았던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에서도 느꼈던 것 같네요. 정말 끝나기 5분 전까지는 엄청나게 몰입해서 보다가 급허무...-_-;;
사실 이런 초월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영화나 소설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이야기상의 한계인 듯 합니다.
음.. 전체적인 평점은 3.7/5.0 정도로 줍니다. 저야 영화 공짜로 본 케이스지만 돈 내고 보기는 조금 아까울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이름이 '고트' 입니다. Gort. 이번 영화에서는 Genetically Organized Robotic Technology의 약자로 쓰였다고 하네요. 이 영화가 리메이크작이란 것은 말 안했나요? [본문으로]
링크는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32쪽에 있는 '인디언의 편지'인 듯 싶습니다. 본문은 여기로 가세요. http://www.hongsehwa.pe.kr/zbxe/56040 [본문으로]
왜 하필이면 이타적인 유전자와 관련된 연구일까요? 전 여기에 감독이 '인류는 이타적으로 변할 것이다'라는 희망을 담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네요 ^^ [본문으로]
지질학 공부하다 보면 기가 자주 바뀌는 것을 보실 겁니다. 이 기 사이를 나누는 것이 '특정 생물종의 출현'이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공부해 보신 분이라면 잘 아실 테구요. [본문으로]
1, 2권 나뉘어서 출판되었습니다. 좀 길어요. 나중에 서평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이 책은 읽은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제대로 된 서평을 쓸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사실 하는 말은 단 한가지, '세상을 비틀어 봐라 그리하면 천재가 될 것이다' 이거지만 어디 비틀어 보기가 쉽습니까. 뭐 전 오늘도 어떻게 하면 세상을 비틀어 볼 수 있을까 궁리만 합니다.
단테의 신곡은 어디서 삘이 꽃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많이 읽고 싶었던 책 중 하나입니다.(그 지옥 관련된 내용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많이 듣기도 했구요. 물론 기독교문학이기는 하지만 그건 모태신앙인 저에게 문제될 만한 내용은 아니지요.(읽으시려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이 책은 사실 신곡의 해설서에 가깝습니다. 자습서처럼 느껴진달까요? 그래도 정말 읽기 쉽고, 여러가지 측면에서 신곡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총 15 강의를 모아 놓은 것인데, 강의를 읽다 보면 잠깐 덮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잠깐 덮고 자러 가기도 하지요 ^^;;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해 주는 책입니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마지막 강의가 남아있군요) 베스트 선정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 되겠습니다. 촛불 이후에 읽어서 그런지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같네요. 백여 년이 지난 책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정확하더군요. 역시 고전은 고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사회심리학이 시작되게 된 기반을 마련한 책이라고들 하더군요. 예전에 서평을 써 둔 것이 있으니 연결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귀스타브 르 봉, 군중심리
전 사실 이 책을 국방부가 추천해주기 전에 읽어서...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좀 자세히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이 들어서 구입했던 책이라고 기억합니다. 아니면 그냥 단순히 책 표지들을 스윽 훑다가 갑자기 눈에 띄어서 발견한 것일지도...-_-;;
제일 기억나는 부분은 이것이군요.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결코 친하지 않다.' 자본주의는 지폐 한 장당 표가 주어지는 제도이고 민주주의는 사람 한 명당 표가 주어지는 제도인데 양립이 가능하냐는 그런 부분이었지요. 재미있었습니다. 나중에 집으로 귀양보낸 책을 돌려받으면 서평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실 위에 적은 것 말고도 무소유도 읽었고, 프로그래밍 유니버스도 있을 테구요(사실 이 책은 작년이랑 올해 겹치는 기간 동안에 읽었던 거라 제외했습...-_-;;), 또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책들이 있을 겁니다(아마도;;). 아, 끌림이랑 대한민국사 4권을 빼먹었군요;; 뭐 어찌되었든간에 제 도서성향을 보면 문학, 특히 소설쪽은 매우 취약하네요. 이런 이런, 그렇지 않아도 감성이 상당히 메말라 있다고 (자체적으로) 진단받았는데 문제가 있겠군요. 내년엔 좀 나아지려나 모르겠네요 ^^;;
Programming the Universe.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위 번역본의 역할이 상당히 컸습니다. 처음에 시작하기를 '태초에 비트(Bit)가 있었다'라면서 창세기를 패러디하는데, 이 부분이 상당히 인상깊었던 것이지요. 일단 제가 예~~전에 썼던(네이버 블로그를 운영할 때 썼던) 글을 옮겨보겠습니다.
뉴턴 이래 우주는 하나의 기계장치로 인식되어 왔다. 물리적인 법칙에 따라 점차 움직이는 기계장치로.
이러한 패러다임은 대부분의 과학의 기본적인 뼈대가 되어 왔다.
이제, 이런 패러다임을 바꿀 시간이 온 것일까?
이 글의 저자, Seth Lloyd는 그렇다고 답한다. 기계장치보다는 하나의 계산하는 장치(컴퓨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보를 처리하는 기계"로.
우주는 복잡(complex)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있는 필자도 그렇고,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도 그렇고, 모두 간단한
톱니바퀴 장난감과는 비교되지 않는 복잡함을 갖고 있다. 인체의신비와 같은 인체 내부를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졌다면(그림으로라도
상관없다), 인체 내부가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한 체계인지 알 것이다. 생물을 공부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런 복잡함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
분명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물리법칙은 간단하다. 중력의 법칙만 하더라도(근사적이긴 하지만) 몇 안되는 문자들을 가지고
간단하게 나타낼 수 있다. F=GMm/r^2. 이런 간단하고 단순한 법칙들에서 어떻게 우리가 보는 복잡한 세계가 만들어지게 된
것일까?
기존의 물리학자들은 이를 동전을 던지는 것에 비유했다. 동전을 여러번 던지다 보면, 언젠가는 원했던 배열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HTTHT라는 배열을 얻고 싶다고 하자. 그러면 동전을 여러번 던지다 보면 언젠가는 끝의 다섯번의 배열이
원했던 배열과 같아질 것이라는 말이다. 다른 비유로는 타자기를 치는 원숭이에 비유될 수 있다. 원숭이가 무작위로 타자를 치다
보면, 언젠가는 (아마도 이 우주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의 시간보다도 더 이후에) 지금 내가 쓰고있는 글과 같은 글을 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설명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알다시피 간단한 몇가지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타자기를 치고 있는
원숭이가 "뉴턴 이래 우주는" 다음에 "하나의" 이라는 단어를 칠 가능성은 매우 낮다(이 예는 이 글의 서두이다). 하지만,
우주는 "뉴턴 이래 우주는" 다음에 꼭 "하나의"이라는 단어를 치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확률에 의한
복잡성은 그다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우주를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이 글을 제대로 읽었다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타자기를 치는 원숭이"가 아닌 "컴퓨터 자판을 치는 원숭이"가 이 우주의 모델이라고 말한다. 우연적인 요소는
"원숭이가 친 글"이 만들어내지만, 이후에는 컴퓨터가 계산하면서 "뉴턴 이래 우주는" 다음에 "하나의"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다.
우연적인 요소가 없진 않지만, 초기에 그 요소가 갖추어진 다음에는, 일사천리로 우주를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기존의 물리학을 약간 익힌 나에게는, 새로운 관점에서 물리를 다시 보게 되는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우주를 관찰하고 싶은 사람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뭐 위의 글을 읽으셨는지 안 읽으셨는지는 제가 알 바 아니지만(응?) 예전에 썼던 글로 날로 먹기는 그런지라 다시 한번 써 보겠습니다. 뉴턴 시대부터 우주는 하나의 기계장치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정교한 기어 하나 하나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한 칸 씩 전진해 나가는 그런 시계와 같은 기계장치로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는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세계는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잡하며 아름다운데, 식들은 너무나도 간단했던 것이지요. 이 세상은 몇 줄의 수식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합니다. 사람 하나에 대해서 자서전을 써도 책 한권이 얻어지는데 물리 법칙 몇 줄로 이런 복잡함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런 복잡함이 어디서 얻어진 것일까요?
리처드 도킨스는 그이 저서 『눈먼 시계공』에서 이런 복잡함을 조물주의 작품으로 설명하려는 자들을 비판하였습니다. 세스 로이드도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이런 다양성은 사람들이 세계를 '컴퓨터가 아닌 기계'로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컴퓨터는 단순한 기계에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부과된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 작은 차이가 정말로 작은 차이일까요? 지금 제 손목에 채워져 있는 손목시계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랩탑을 비교해 볼까요?(물론 가격에서부터 차이나기는 하지만 그건 고려하지 말자구요 ^^;;)
시계야말로 전형적인 기계입니다. 그 작동 원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정교하고, 또 보다 보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투명한 유리 속에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기어를 보면 드는 생각이 없으신가요? 그렇지만, 시계는 시계일 뿐입니다. 복잡하기는 하지만, 그 복잡함이 만들어낸 최종적인 움직임은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컴퓨터를 봅시다. 이 녀석은 훨씬 복잡합니다. 하지만 '정보'를 취급한다는 차이점이 있어서 그런지, 다룰 수 있는 범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동영상을 볼 수 있고, 저같이 가끔씩 나불대기를 즐길 수도 있구요, 또 즐거운 게임을 마구마구 할 수도 있습니다. 복잡함이 더욱 복잡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보의 성격을 보아도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원래 기계장치에서는 처음에 시작할 때의 작은 변화가 후반에 커다란 변화가 되어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시계가 1초 전부터 시작하든 1초 후부터 시작하든 끝까지 가면 결국 1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요. 하지만 정보라면 그 결과는 어떨까요? 이 경우엔 카오스계에서처럼 예측하기 어려워 집니다. 왜냐하면 정보는 자기 자신에 피드백을 걸고, 그 피드백에 의해 또 새로운 값이 되어버리고 그러거든요. 조그만 차이가 커다란 차이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기계보다는 컴퓨터의 모델이 이런 카오스적인 부분을 더 잘 설명해 주니까,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인식도 단순한 기계가 아닌 컴퓨터로 바뀌어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사실 요즘 물리학 교양서적들은 대세인 '초끈이론'에 중심이 맞추어 져 있습니다. 그것도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말이지요. 물론 13차원(?)의 매력을 제가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너무 집중되어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자컴퓨팅 쪽의 전문가인 세스 로이드 교수가 쓴 이 책은 신선한 충격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한나라당의 일명 '언론장악 7대 악법'에 관련된 일들이 좀 많더군요. 전 사실 표현의 자유가 제일 우선시되어야 하고 이를 제한하는 것은 도덕이나 윤리와 같은 분야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 지금 있는 일명 명예훼손법이니 실명확인제니 하는 모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가능성이 있는 법률'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를 뒷받침하려면 기초교육기관에서 윤리교육과 인성교육이 충분해야 한다고 봅니다만, 이건 이미 안드로메다 이야기가 되어버리는군요. 괜히 초딩이란 단어가 있는게 아닙니다.
잡설은 여기서 그만두고, 이번엔 이 책에 대해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갑자기 지식채널 e의 한 영상이 생각나는군요. 침묵의 나선 이론이었던가? 아, 찾아보니 '1.3cm의 권력'이라고 해서 투표와 관련된 동영상이었군요. 과연 당신의 생각이 '온전한 당신의 생각인가?' 하고 묻는 영상입니다. 영상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답은 '아니오'라고 하는군요.
프롤로그와 첫 두 챕터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한 잡담입니다. 예전에 촘스키 교수가 홀로코스트는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반유대적 사상을 가진 포리송 교수의 책 서문을 써준 일이 있었는데(사실 써준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을 대변하는 글을 알아서 쓰라고 보냈더니 프롤로그로 사용해 버린 것이라고 하는군요) 그것은 자신이 반유대주의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보장해 주어야 하기에 그렇게 썼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세 번째 챕터부터 본 내용이 시작됩니다.
이 책에서 교수는 주장합니다. 대기업과 정부는 서로 동맹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언론과 지식인은 이 카르텔을 방어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이죠. 그냥 쉽게 말해서 '대기업이 정부와 언론과 지식인을 매수해 버렸다'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사실 미국의 경우는 우리나라보다 대기업이 언론에 진출하는 진입장벽이 낮은 편이라고 합니다.(들은 내용이라 확신하지는 못하겠군요.)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는 듯 하더군요. 사실 미군이 공습하는 장면을 어쩌다가 잡힌 생중계처럼 내보내기 위해 미리 기자들에게 연락해 두었다는 부분이 있었는데, 사람 목숨을 갖고도 이런 코메디를 할 수 있구나 싶더이다. 뭐 어쩌겠습니까. 우리나라 정부도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말이지요.
이 책에서 놈 촘스키 교수는 이 말을 하고 싶어하는 듯 합니다. '스스로 똑똑해져라.' 촘스키 교수는 책에서 대중은 답을 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예시로 그 유명한 베트남 전쟁을 제시합니다. 사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더 높았지만(70% 정도 되었다고 하네요. p168), 매스미디어에서는 찬성하는 논조의 방송을 내보내거나 이에 대해 다루지 않음으로서 대중에게 암묵적으로 동의하도록 하는 수법을 쓴다고 했습니다. 언론장악 7대 악법 간담회에서 들은 내용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군요. '언론이 여론을 다루는 방법은 연필을 펜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연필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책에서도 위와 같은 많은 국민이 전쟁에 반대한다는 내용은 한 번만 다루고 만다는 식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이것입니다. 방송이 이익을 추구하다 보니 입력에 비해 출력이 적은 시사와 관련된 내용들은 줄어버리고 예능 관련 부분만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어디였는지는 찾아보았는데 못 찾겠더군요 -_-;; 언론의 민영화에 대한 말이 많은데, 왜 일부 언론은 국영으로 운영될 필요가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큰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발전하려면 Devil's Advocate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영화된 언론은 이런 역할을 전혀 해내지 못할 것 같은데 말이지요.
22일 월요일 오전 10시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연구원(61동) 320호에서 위의 주제문을 발제로 한 긴급토론회가 열렸습니다. 토론회의 주최는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전국 교수모임'이었고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서울대학교 교수모임'이 주관하였습니다. 토론회는 먼저 '4대강 하천정비사업의 실체는 무엇인가??(박창근 관동대 토목공학과 교수)', '지역균형발전, 4대강 하천정비사업으로 가능한가?(변창흠 세종대 행정학 교수)', '경기회복, 4대강 정비사업이 대안인가?(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이라는 주제문으로 프레젠테이션이 이루어졌고, 이후 김정욱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와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토론문 발표 후 방청객과의 질의응답 순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첫 프레젠테이션을 맡은 박창근 교수
이미 관련 기사가 많이 났으니 이번 포스트에서는 제 개인적인 감상 위주로 글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 같네요.
첫 프레젠테이션에서는 4대강 정비사업이 얼마나 대운하와 연관성이 높은지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예산부터 시작해서 4대강 정비사업에서 사업계획이 짜여 있는 부분들이 대운하 공사와 얼마나 유사한지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결국, 4대강 정비사업은 대운하의 전신이라는 주장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두 번째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지역균형발전과 관련되어 4대강 정비사업이 효율성이 없다는 주장을 피력했습니다. 정치인의 정치적인 능력을 보통 그 정치인이 그 지방에 끌어 온 개발예산의 크기로 판단하는 현 사회의 분위기 안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주장과 함께, 4대강 정비사업은 최근의 수도권 규제완화와 함께 갑자기 튀어나온 지방의 상대적 소외감에서 튀어나온 불평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지방균형발전사업을 지속하려면(지금은 '균형'이란 단어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알아봐야겠습니다) 건설을 통한 개발이 아닌 교육이나 문화산업과 같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세 번째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실질적인 치수(治水)대책을 위해서는 위의 예산이 커다란 4대강이 아닌 지방군소하천에 집중되어야 하며, 건설업을 통한 경기부양은 알려진 바와는 달리 다른 산업에 비해 그 효과가 적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균형발전을 위해 저소득층에 투자하는 것이 부유층에 투자하는 것보다 경기 부양에 유리하다고 주장하면서, 양극화가 심화되면 경제성장률이 둔화될 수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토론문을 발표하고 있는 김정욱 교수
이후 토론문 발표때에는 '이제는 토목건설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개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주제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질문이었던 '도로나 철로와 같은 일상생활에 보다 더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업을 벌였을 경우엔 이처럼 반대가 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에 대해 답변을 받았습니다. 이준구 교수께서는 '단순한 토목공사일 뿐이라면 반대할 것'이라고 하셨고, 도로 부분에 대해서는 홍헌호 연구위원께서 '이미 도로는 충분히 지어져 있다'는 답변을 주셨습니다. 물론 도로에 대해서는 그 절대적인 양이 아니라 얼마나 네트워크가 잘 이루어져 있는가가 주요 문제가 되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교수님들 사회에서는 반발이 심하더라도 이런 부분에서는 상대적으로 어두운 서민층에서는 반발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아니, 오히려 환영할지도 모르겠군요...)
토론회를 갔다 오고 나서 대운하는 단순히 '물길을 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닌 '경기를 어떤 사업으로 부양시킬 것이냐의 문제'라는 보다 커다란 틀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사실 저는 대운하를 그 효용성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입장이었지만(느리고 그렇다고 싸지도 않은 배를 이용할 바에는 차라리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배는 낫다는 생각이지요) 이제 보니 대운하 사업은 개발사업 하면 일단 토목공사를 생각하게 되는 깊은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교수들이 해야 할 일은 연구인데 시민단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으니 골치아프다는 하소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 대한민국에서의 연구환경이었습니다. 연구는 포스트닥과 교수가 함께 해야 하는데, 대한민국에서는 포스트닥이 없고 교수만 연구를 하고 있으니 이것 참 골치아프다는 내용으로 기억합니다. 하긴, 예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순수학문은 진짜 먹고 살 걱정 없는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여겨진 면도 있으니... 약간은 슬프더군요.
대운하에 배정된 예산은 14조원 가량 된다고 합니다.(4대강 정비사업도 비슷한 수준입니다.) 한편, 이공계 살리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행되고 있는 BK21사업의 경우(물론 이 정책이 제대로 된 정책은 아니다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매해 2천억원 정도의 지원금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운하를 포기하고 그 금액의 절반이라도 BK21로 돌리기만 해도 뭔가 커다란 성과가 얻어질 것 같다는 느낌은 저만 드는 것인가요?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전국 교수모임'은 대운하 포기선언 이후 해체되었다가 4대강 정비사업 발표 이후 다시 모였다고 합니다. 언제야 그분들 말씀대로 '원래 해야 할 일'에 매진할 수 있을까요?
요즘 buckshot님이 Read&Lead에서 알고리즘 포스팅을 하시고 계십니다. 전 물론 이보다는 좀 더 나아가서 인간 자체가 '특정 알고리즘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는 기계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자세한 것은 다음에 다루어 보아야겠네요.
이런 제 관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을 보면 참 다양한 법칙이 있습니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이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가끔 발견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처럼 놀라는 경우도 없지요. 이 책도 그런 부분에서 놀라게 되더군요.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 입니다. 예전에 대학국어 서평과제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쓴 적이 있는데, 잠깐 공개해 볼까요?(사실 그리 잘 쓴 서평은 아닙니다만...-_-) 상당히 기니까 열기 전에 잠깐 생각해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합리적이었던 개인은 왜 집단에서 합리성을 잃어버리는가?
방대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은 자연 현상을 예측하고 대비하기 원했다. 곡물을 심어야 할 시기나 비가 오는 시기, 강이 범람하는 시기 등 많은 자연 현상들은 잘못 예측하였다가는 당장의 생계가 위협받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과 별들을 연구하여 달력을 개발하였고, 비가 오거나 강이 범람하리라는 사실을 예측하게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문명을 세웠다. 이후 세월이 지날수록 문명은 더욱 발전하였고, 인류가 예측하는 현상의 정확도와 범위는 점차 넓어져 지금은 영원이라고 느껴질 만큼 먼 미래 - 태양이 약 60억 년 뒤에는 붕괴할 것이다 따위 - 까지도 어느 정도 합리적인 예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예측을 좀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 발달시킨 것들을 학문이라 부른다. 학문은 그 범주가 매우 넓어 인문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 다양한 종류로 분류한다. 이런 다양한 학문의 수만큼 학문에서 사실에 접근하는 방법의 수는 다양하나, 대부분의 경우 그 과정은 서로 유사성을 보인다. 대표적인 유사성은 그 학문에서 예측하고자 하는 대상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에서의 행동을 예측하는데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에서는 생명체를 연구할 때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세포를 연구하며, 물리학에서는 미립자들의 행위를 연구한다. 또,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심리를 다단계로 나누어 가장 기본이 되는 단계를 연구하기도 하며, 경제학에서는 경제적인 개인의 행동을 연구한다. 이런 접근 방법을 취하는 이유는, 자연 현상은 단순화하지 않으면 너무나도 복잡하여 이해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화의 힘은 매우 강력해서, 이런 접근 방식으로 얻어진 많은 지식들은 매우 정확한 예측을 보장한다. 물론,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가장 작은 단위에서 얻어진 지식들은 가끔 전체적인 흐름을 전혀 예측치 못하기도 한다. 이러한 예는 매우 다양하다. 일례로 뇌와 지능을 떠올려 보자. 뇌는 뉴런(신경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이런 뉴런들은 간단한 장난감처럼 간단한 신호밖에 처리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간단한 신호만 전달할 수 있는 하나하나의 세포가 모이게 되면 세포 하나하나의 특성에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현상인 지성을 만들어낸다. 또, 미국의 대공황도 좋은 예이다. 당시 각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은 경제학이 예측하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었지만, 경제는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전체적인 불경기의 경우 미시적인 입장에서의 경제가 아닌, 전체적인 관점에서 경제를 바라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들에서 집단으로 모인 개개인은 원래 가졌던 특성과는 다른 새로운 특성이 발현된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귀스타브 르 봉(군중의 심리학적 특성에 관한 연구로 널리 알려진 사회심리학자이다.)의 저서 『군중심리』(원작 La psychologie des foules)는 이런 부분을 잘 잡아낸 책이다. 개개인의 심리 상태가 개개인이 모인 상태인 군중의 심리상태와 같을 수 있을까?
르 봉의 대표작 『군중심리』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1부에서는 군중으로 모인 개개인들이 갖는 심리상태와 정신적 능력을 서술하고 있으며, 2부에서는 1부에서 알아본 심리상태와 정신적 능력이 군중의 신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와 이 신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여러 외부요인들을 살펴보았다. 마지막 3부에서 저자는 다양한 군중들을 분류하고, 그렇게 분류한 군중들이 각기 다른 부류들과 대조되는 특징들을 알아보았다. 제 3부의 내용은 그 내용의 특성상 『군중심리』의 부록이라 볼 수 있으며, 중요한 내용들은 거의 1부와 2부에 집적되어 있으므로 이 서평에서는 보다 큰 중요도를 갖는 1부와 2부의 내용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르 봉은 먼저 군중의 하향 평준화되는 지적 능력을 지적한다. 이러한 특성이 군중의 행동에 의식적인 요소보다는 무의식적인 요소가 더 강하게 작용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설명하며, 따라서 군중은 이성보다는 감성적인 요소에 더 끌린다고 르 봉은 결론내리고 있다. 또한 이런 감정적인 요소가 고립된 개인은 시도할 수 없는 많은 행동들을 가능하게 하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군중으로 모인 개인들은 항상 범죄적 성향만 갖지는 않는다고 서술한다. 이어서 그는 군중의 의견과 믿음에 대해 서술한다. 여기서 그는 앞에서 서술한 군중의 퇴보된 사고 능력 때문에 군중은 단순화된 이념만 수용한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이렇게 군중은 우매하다는 특징에 입각하여 민주주의의 많은 주장에 대해 비판 - 기초교육은 사회적 낭비일 뿐이다 나 군중은 독재자를 원한다 등 - 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필자는 민주주의가 사회의 기반적인 사상적 배경이 되는 사회에서 자란 탓에 이러한 민주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을 놓지는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은 너무나도 정확하게 현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날카로운 현상에 대한 서술은 그가 서론에서 말한 듯이 ‘일종의 관찰기록과 비슷한 가치를 지닌 책으로 읽히기 기대’하고 저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서술들을 읽으면서 필자는 부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을 때 느꼈을 법한 두려움을 느꼈다. 필자는 군중에 가담한 기억이 있는데, 이후 이 책을 읽고서 르 봉이 서술한 일반적인 군중의 특징이 군중에 있었을 때의 나를 되돌아보았을 때와 너무나도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배타적인 무한한 증오와 자신의 주장의 근거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같은 많은 특성들은 당시의 나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단어들이었다. 군데군데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그의 날카로운 분석들은 이미 출판된 지 1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책을 읽으며 누군가 몸 속 구석구석을 관찰하는 듯한 불편한 기분을 느꼈던 원인은 그의 냉철한 직시에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에서 제시하는 군중을 지배하기 위한 조언들은 실제 역사 속에서도 쓰였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자서전 『나의 투쟁』(원작 Mein Kampf)에서 르 봉이 제시한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라디오를 활용한 반복적인 암시로 80%를 가뿐히 넘는 엄청난 지지율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미국 루즈벨트 정부의 노변담화를 벤치마킹했다는 이명박 정부의 라디오 연설을 괴벨스의 라디오 활용 방법과 비교하면서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 무엇보다 언론의 독립성이 민주주의가 가장 필요로 하는 기반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것 등은, 아직까지도 그의 주장이 유효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편, 책을 읽다 보면 저자는 결국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저자는 군중이 결코 지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매우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하지만, 저자 역시 책에서 대중은 전문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현상이 있음을 서술하고 있으며, 이는 대중에 의한 지배체제가 이전의 군주정치나 귀족정치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아니함을 강하게 증명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예측에 있어서 전문가보다는 다수의 대중이 내놓은 의견을 통계적으로 잘 처리한 답안이 보다 높은 적중률을 자랑한다는 통계자료를 생각한다면 군중이 우매하기만 하다는 그의 인식은 분명히 편향되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또한, 르 봉은 그의 저서에서 여성과 어린아이 등 소위 말하는 약자 계층에 대해 이성적인 면 보다는 감정적인 면이 강하여 열등하다는 의견을 드러낸다. 이런 사회적인 편견은 태어날 때부터 남녀에게 지속적으로 걸리는 암시의 영향을 제거해야만 비교할 수 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하나, 이것을 차치하고서도 감성적인 것이 열등하다는 것은 고양이보다는 강아지가 우월하다는 견해와 같은 종류의 편견일 뿐이다. 물론 20세기 초까지 여성의 참정권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이러한 의견이 당시에는 어느 정도 일반적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지만, 지금의 시대에는 너무나도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또 다른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러한 현상들의 원인에 대한 답을 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상이 있으면 그 현상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뒤따라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법인데 이 책에서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피하고 있다. 저자가 말했듯이 이 책은 사실들에서 일반적인 경향을 유추해내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기에, 이런 현상들이 왜 생겨나는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들에 대한 설명만 있고 왜 그러한가에 대한 설명은 없었던 점은 분명히 아쉬운 부분이다. 필자는 현대에 와서 두드러지게 발전하고 있는 진화심리학과 같은 기타 관련 분야에서 이러한 부분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논의를 해 주리라고 희망한다.
저자는 책 전반을 통해 군중은 결코 똑똑할 수 없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을 민주주의는 잘못된 것이라고 확대 해석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개개인보다는 하나의 집단으로 모인 개인들의 판단이 더욱 합리적인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이는 The New Yorker의 편집장인 제임스 수로위키(James Surowiecki)의 책 『대중의 지혜』(원작 The Wisdom of Crowds)에 잘 나와 있다.) 오히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대중의 우매함’은 귀족정(Aristocracy)을 옹호하는 증거로 쓰이기보다는 민주주의가 놓칠 수 있는 사각지대를 비추는 한줄기 섬광으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된다. 분명히 군중으로 모인 대중조차도 신이 아닌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놓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제가 직접 제 서평에 대해 평가를 하자면, '용두사미'같은 느낌이 든다고 할 수 있겠네요. 시작은 인류의 역사를 들먹여대면서 가는 거창하고 오만함의 극치이지만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책 한권...-_-
사실 이 책을 읽다보면 좀 울화통이 터지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볍신같이 책을 쓸 수 있는거지?' 위의 서평에서도 조금 언급했지만, 이분 민주주의를 엄청 싫어하십니다. 근데 그것도 결국은 자기가 말한 '어떤 지식인이라도 시대적인 군중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싶네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민주주의는 아니다' 라는 인식이 팽배했다고 하는군요. 주성영 의원님이 좋아하시는 '천민민주주의'적 관점이 대세였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상당히 정확합니다. 저도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더군요. 지난 촛불 때,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게 다 이 책 덕분인 듯 합니다. 역시 이 책의 의의는 '민주주의 때려치자'가 아닌 '민주주의가 놓칠 수 있는 사각지대를 바라보자'가 되겠군요. 권력자에게 휘둘리기 싫으시면 한번 쯤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물론 읽다 보면 조금은 인간에 대한 회의가 느껴질 수 있어요. 그런 반응에 대해 전 이렇게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러시아의 단편 작가이자 극작가인 안톤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하는군요(물론 전 TED에서 보았지만, 인터넷에는 전혀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은 그가 어떠한지 알게 되면 진보한다.
(Man will become better when you show him what he is like)
야심한 밤, 잠도 안오고 해서 어제 MT에서 돌아오면서 얼핏 이야기가 나왔던 한 책에 대해서 말해 보려고 합니다.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 되겠습니다. 상당히 오래된 책인데다가 마지막으로 읽은 지 1년 가까이 되었군요.
엔트로피(entropy)는 엔탈피(enthalpy - 맞는지는 모르겠군요)와 같은 어원을 공유하는 단어로, 어원은 '열'을 뜻하는 엔탈피엔(enthalpien - 아마도 맞을 겁니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한문으로 번역하면 '무질서도', 즉 무질서한 정도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물리학에서 무엇을 질서있고 무엇을 질서없다고 하는지 알아두어야 할 것 같네요. 물리학에서 질서있다는 말은 원하는 상태로 가는 방법이 적음을 이야기합니다. 무질서하다는 것은 이와 반대되는 것이니 가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뜻이 되겠지요. 트럼프 카드를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합이 3이 되는 두 장의 카드 조합이 A와 2를 합친 하나밖에 없는 반면 합이 11이 되는 두 장의 카드 조합은 A-10, 2-9, 3-8 ... 등 5개의 조합이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적은 방법으로밖에 도착할 수 없는 조건인 '합이 3이 되는 카드의 조합'은 '합이 21이 되는 카드의 조합'보다 질서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하나의 법칙에서 시작합니다. 열역학 제 2법칙이라고 불리는 '엔트로피 증가 법칙'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거나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법칙이지요. 이 법칙이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법칙이라고 설명하기도 하는데(다른 물리법칙은 시간이 역으로 흘러도 변하지 않지만 이 법칙만은 예외이지요), 여기서는 그런 논의보다는 '항상 증가하는 것이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 '항상 증가하는 것'은 더 이상 쓸 수 없는 버려지는 것이라는 것에도 말이지요.
이렇게 버려지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도 더 이상 쓸 수 없고 계속 늘어나기만 하는 것이라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요? 저자는 이에 대해 절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쩔 수 없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최대한 적게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책을 읽은 다음의 당분간동안 식사를 줄여보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나네요. 나부터 쓸데 없이 소모하는 열량을 줄이자가 목적이었던가 그렇게 기억하는데, 요즘은 그냥 먹기 귀찮아서 가끔 굶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 책이 제 사고방식에 그렇게 많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매우 딱딱한 책이긴 한데, 이런 종류의 책이 재미있으신 분들은 재미있게 읽으실 것 같네요. 한 200대 후반까지는 그럭저럭 읽을 만 합니다만, 이후가 좀 지루했습니다. 284페이지쯤부터 흥미를 약간 잃었던 기억이 나네요.
목차를 보니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엔트로피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누적된 사회는 붕괴한다'는 부분과 '컴퓨터의 예를 들어 엔트로피가 감소했다고 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지금 시대에 만들어진 컴퓨터들이 만들어내는 엔트로피를 총합하면 에니악이 만들어냈던 엔트로피를 상회한다'는 부분입니다. 황금의 시대에서 시작해서 철의 새대로 내려오면서 인간이 불행해졌다는 부분도 인상깊게 읽었는데, 생각해 보니 어른들은 항상 '우리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ㅉㅉㅉ'이러더군요.
이 책에 불만이라면 역시 물리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그런가 엔트로피의 개념이 물리학에서 말하는 그 엔트로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에너지를 소비하는 속도'에 오히려 가까운 감이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