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천문학의 교류에 대한 소고'가 과제로 나와서(...) 사게 된 책입니다. 문제는 과제를 다 한 다음에야 도착한다는 것 정도? 책 자체는 상당히 재미있습니다.(물론 제가 재미있다고 하는 책은 대부분의 경우 안드로메다의 그들을 위한 재미이지만 말이지요) 특히나 별보기가 로망인 분들에게는 엄청나게 끌릴만한 작품이고요. 문제라면 매우 두껍다는 정도....
이것도 동일한 과제때문에 산 책이네요. 비싸다는 것만 빼면 흠없는 책입니다(별점 하나 깎은 이유)[각주:1]. 위의 책이 중국인이 쓴 것이라 그런지 고대 중국의 천문학에 큰 비중을 두었다면, 이 책은 그 옆에서 살짝 빗겨나간 고구려에서의 천문학을 알아보는 책입니다. 고대에는 지금과는 달리 매우 다양한 하늘이 존재했다는 것도 볼 수 있게 되고요.(물론 그야 전세계에 따로노는 문명들이 많아서이겠지만...)
주로 '밤하늘이 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에 대한 책이라서 알아보려고 했던 관측 기술같은 것은 별로 안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뭐, 그런 중대기밀이(천문학은 고대사회에서 왕권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기밀이지요) 책으로 남아있으리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긴 합니다.
추천하신 신영복 교수님만 믿고 산 책입니다. 읽은지 좀 되어서 많이 까먹긴 했는데, 읽다보면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게 됩니다. 내용 자체는 평범한 것 같은데(사실 사기는 이 책으로 처음 보는 것이라...) 말입니다. 사실 사람사는세상이 다 거기가 거기라서 그런지 색다른 충격같은 것은 없네요. 중국 책이라 대한민국 현실사회와 조금은 떨어져 있는 말들이라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의외였던 부분은 진나라가 생각보다는 그리 가혹한 나라는 아니었다는 것 정도... 그래도 국가관 자체가 조금 달라서 그런지 살짝 이질감이 들더군요.
사실 이 책들 말고도 읽다가 중단한 책이 상당히 많은데(그래서 전 책갈피를 자주 삽니다 OTL) 언젠가 한번은 지름신을 제대로 구석에 봉인해 두고 전독을 해야겠습니다.
5점은 잘 안 주지만 4점은 많이 주는 편인데, 이 책도 그 얇은 두께에 3만원에 가까운 가격만 아니었으면 4점을 주려고 했습니다. 무슨 전공책도 아니고...-.-;; 하지만 전 책에는 아낌없이 투자하는 편이라 거리낌없이 질렀...(사 놓은 책의 50%는 전시용이란게 문제지만...) [본문으로]
사실 대단히 '일반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야 따로 놀고 있지만, 20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기술-과학-인문학 이 셋은 서로 주고 받으면서 진화하는 관계였거든요.[각주:1] 가장 쉬운 예시라면 인문학에서 사람과 우주의 본성에 대해 서술할 때 그것을 당시의 기술로 묘사했다는 것이 있겠구요.(기계적인 운명론이라면 항상 정교하게 만들어진 시계가 세계에 대한 묘사로 등장했었지요)
굳이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개천에서 용 솟을 구멍이 작아진다는 것은 기술에 대한 접근도의 편차가 매우 커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당장 보아도 시골과 도시의 인터넷 연결 속도 사이에는 넘을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기술의 차이가 커 보았자 어느 정도 인간의 능력으로 그 틈을 메꾸는 것이 가능했던 고대사회나 중세사회와는 달리, 현대사회에서는 기술의 차이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격차를 만들어주고 있으니까요. 칼을 든 사람과 주먹밖에 없는 사람의 싸움에서는 주먹만 가진 사람이 높은 수준으로 무술을 연마하면 칼 정도는 쉽게 피하고 제압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제 아무리 암산 트레이닝을 받은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계산기 하나 든 사람의 계산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의료보험제도가 열악한 편인 미국에서 자금의 유무가 의료기술과 접촉할 권리로 치환되는 것이 한 좋은 예이겠지요.
기술은 보통 '상상을 현실로'라는 모토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지요. 순식간에 수많은 계산을 해내는 컴퓨터도 따지고 보자면 '순식간에 탄도의 궤적을 계산해주는 기계는 없을까'라는 상상에서 나타난 것이고, 로켓은 당연히 '저 별들 사이를 날아다닐 수 없을까'라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휴머노이드 로봇의 '인간이 아닌 인간'에 대한 상상처럼 현존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생각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기술은 끝없이 진보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모든 이들의 상상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기술이 나아갈테고, 누군가 조금이라도 위험한 상상을 하면 그 상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컨데 누군가가 자기의 짝사랑의 생각을 알고 싶어 사람의 감정을 읽는 기계라도 개발된다면, 꼭 누군가는 그 기계를 이용해서 사람을 통제할 수는 없는가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기에 기술이 개발되면 그 기술은 무슨 내용을 골자로 하고, 어떤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 전반적인 논의가 꼭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냥 미친듯이 기술을 개발해 놓고, 그 기술을 어떻게 쓸 것인가 소수의 사람들이 결정한다면 민주주의는 왜 채택한 건데요.
뭐, 그나저나 상품이 오면 펜이 하나 늘어나는군요 -_-+
지금도 기술-과학의 연결은 상당히 강력하지만, 기술-인문학이나 과학-인문학의 연결은 상당히 느슨해져 있습니다. 당장 문이과 나누어 가르치는 것부터 보세요.(그런데 생각해보면 자연과학은 공학보다는 문리쪽에 가까운데 말이죠. 대상만 같을 뿐, 접근하는 이유와 방법은 문과와 같다고 보아도 좋으니까요.) [본문으로]
난 다른 사람과 대화할때면 자주 정신줄을 놓는 편이다. 귀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니라(작은 소리는 잘 듣는데 사람 목소리를 언어로 번역해주는 장치가 살짝 맛이 갔다)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으면 대화는 이미 저 멀리 산으로...(문제는 딴생각은 내 취미이자 특기라는 거다)
오늘 동아리 면접을 봤다. 아, 물론 면접관으로(훗 -_-+). 사실 인생 자체가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리 흘러흘러 바다로 가세 이런 타입이라 질문을 잘 안하는 편인데(사람에 대한 평가도 지나치게 후한 편이다) 오늘 만난 한 면접관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역시나 다른 분들이 질문하고 난 정신줄 놓고 듣고 있었는데, 무언가 많이 유창하게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쪽에서 계속 같은 질문을 했다는 것.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나 보다.(정신줄...) 형태는 화려하지만, 속은 텅텅 비어있는 조각만 잘 된 보석함같은 대답이었나 보다.(아니면 엄청나게 거대하지만 내부는 다 썩어들어간 플라타너스라던지...[각주:1])
뭐 그래서 생각해 보는데, 신영복 교수님의 『강의』라는 책에서 나왔던 어떤 구절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아마도 한비자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그런데 찾아보니 한비자는 아닌 것 같다. 그 유명한 공자님 말씀이려나...[각주:2]), 한비자는 굉장히 말을 더듬거리며 했다고 한다. 이런 한비자가 한 시대를 풍미(?)한 법가사상의 정수였다는데, 여기서 프레젠테이션 능력이란 단순히 '말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말에 내용을 잘 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형식이 화려해도 내용이 별거 없으면 승하다고 공자님께서 그러셨다는데, 내용 없이 마구 말을 쏟아내는 것은 확실히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심리학개론에서 배운 두가지 언어장애가 생각난다.(역시나 안드로메다로 가는...) 하나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의 언어장애, 그러니까 언어는 전부 알아듣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건 뇌의 어느 부분이 손상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데 전공자가 아닌 이상 잊어버려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조금 관계있는 것인데, 이 언어장애에서는 '말은 하지만' 그 말에 아무런 내용도 없다고 한다. 예를 들어 '다람쥐가 버섯에 들어가 주전자를 먹는다' 따위? 아마 음성을 담당하는 뇌의 부분과 언어인식을 담당하는 뇌의 부분이 따로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나왔던 것 같은데, 별로 상관은 없어 보인다. 아니지, 잠시 내가 언어장애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지도...
여담이지만, (만약 이 나무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나무가 맞다면) 처음 북미 대륙에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 50m를 넘는 플라타너스로 뒤덮인 숲이 있었는데, 아직도 이 숲이 살아남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고 한다. 목재로 쓸 수 없어서..... 한편으로는 굶주린 뱃속으로 빨려들어가 살아진 버팔로가 불쌍하기도 하다. 나에게의 쓸모는 그대에게의 위험이구나... [본문으로]
책에서는 분명히 '더듬거리며 말하는 것이 최고의 말솜씨입니다.'라는 부분이 있었다. 첫째, 신뢰감을 심어주기 때문이고, 둘째, 더듬이며 말하면서 생각할 시간을 벌기 때문에 더 좋은 내용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학교에는 화장실이 있습니다. 최첨단(?) 화장실이라 사람이 들어가면 불이 켜지도록 되어 있지요. 사람이 전부 밖으로 나갔을 경우 불이 전부 나가는 인바이런멘트 후렌들리 화장실입니다.
제가 동아리 회의가 끝나고 화장실에 들어섰을 때, 화장실의 불은 켜져 있었습니다. 물론, 저 외에는 아무도 없었지요.
불은 왜?
뭐, 무언가 살짝 이상하기는 했지만 무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등이 안 들어오는게 문제이지 등이 들어와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니거든요. 시원하게 소변을 처리하고 세수하러(세수는 손을 씼는다는 의미이죠. 이상하게 얼굴까지 씼음을 의미하게 되었지만) 세면대로 다가갔습니다. 그냥 문에서 가장 가까운 쪽인 오른쪽 끝의 세면대를 택했지요. 장애인 후렌들리한(?) 학교에는 이런 끝에 있는 세면대에는 철봉을 대충 휘어 끌어당기기 쉽도록 손잡이를 설치해두죠. 아,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하여튼 어릴 때의 고양이세수질에서 진일보한 비누칠싹싹 손씻기를 한 다음(신종흘루 조심해야죠. 비누회사는 대박나려나?) 손을 털었습니다. 손을 털 때는 팔을 휘둘러 반지름을 확 늘여주어야 물이 잘 빠지지요. 없는 사이언검을 손등에 이미지로 그려내며 눈앞의 공기히드라를 설겅 설겅 베어냈습니다. 그때였지요. 갑자기 뒤에 있던 손 건조기가 작동하는 것이었습니다.
!!
'오오 이것이 폴터가이스트인가?'라는 덕스러운 생각이 스쳐감과 함께, 서늘한 기분이 느껴지더래죠. 물론, 아무 생각도 없이 '귀신 있으면 어때, 나만 안 해치면 장땡이지. 그리고 귀신도 불쌍한거 아님? 무슨 볼일 있다고 세상에 짱박혀 있는건데?'라는 대인배(?)스런 생각을 하고 화장실을 나섰습니다. 진짜 무슨 상관인가요. 나만 안 해치면 되지.
귀신을 보더니 미쳤나
미친게 아니라 관대한 거랍니다. 전 '관대하'죠. 훗.
그나저나 손을 털다가 날아간 물방울이 건조기를 작동시킨 것 같습니다. 역시 공돌이는 현실적인 답안을 내놓는 법이지요.
그러고 보니 이런 재미있는 농담(?)도 있군요. '기적이 일어났으면 그건 기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술이 마술이 아닌 이유와 똑같죠.
교수: 그렇다네. 그러면 말해보게, 세상에 악이 있는가?
학생: 네.
교수: 악은 어디에나 있지, 그렇지 아니한가? 그리고 신은 모든것을 만들었지. 맞는가?
학생: 네.
교수: 그렇다면 악은 누가 만들었는가?
(학생은 대답하지 않는다.)
교수: 세상에는 아픔, 부도덕, 추함 등의 추악한 것들이 존재하지, 그렇지?
학생: 그렇습니다, 교수님.
교수: 그렇다면 누가 그것들을 만들었나?
(학생은 대답하지 않는다.)
교수: 과학은 사람이 세상은 인지하는데 5가지 감각을 사용한다고 하지. 그렇다면 대답해보게 젊은이, 신을 본적이 있는가?
학생: 못 봤습니다, 교수님.
교수: 그렇다면 신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학생: 아니오, 교수님.
교수: 그렇다면 신을 느끼거나, 맛보거나, 냄새 맡은 적도 없는가? 신을 어떠한 감각으로도 인지한 적이 있는가?
학생: 아니오, 없습니다. 교수님.
교수: 그런데도 아직 신을 믿나?
학생: 네.
교수: 과학은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논증으로 신이 없다고 말하네. 자네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학생: 저는 단지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교수: 그래, 믿음. 그게 과학이 가지지 못 한 것이지.
학생: 교수님, 세상에 열이란 것이 있습니까?
교수: 물론이지.
학생: 그러면 차가움이란 것도 있겠지요?
교수: 그렇다네.
학생: 아닙니다, 교수님. 그런 것은 없지요.
(강의실은 이 반전에 순간 적막이 흘렀다)
학
생: 교수님, 많은 열, 더 많은 열, 초열, 백열, 아니면 아주 적은 열이나 열의 부재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가움이란
것은 없지요. 영하 273도의 열의 부재 상태로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이하로 만들 수는 없지요. 차가움이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차가움이란 단어는 단지 열의 부재를 나타낼 뿐이지 그것을 계량할 수는 없지요. 열은 에너지이지만, 차가움은 열의
반대가 아닙니다. 교수님. 그저 열의 부재일뿐이지요.
(강의실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학생: 그렇다면 어둠은 어떻습니까, 교수님? 어둠이란 것이 존재하나요?
교수: 그렇지. 어둠이 없다면 밤이 도대체 왜 오는가?
학
생: 그렇지 않습니다, 교수님. 어둠 역시 무엇인가 부재하기 때문에 생기지요. 아주 적은 빛, 보통 빛, 밝은 빛, 눈부신 빛이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아무 빛도 존재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이라 부르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실제로
어둠이란 것은 없지요. 만약 있다면 어둠을 더 어둡게 만들 수 있겠지요, 그럴 수 있나요?
교수: 그래, 요점이 뭔가, 젊은이?
학생: 교수님, 제 요점은 교수님이 잘못된 전제를 내리시고 있다는 겁니다.
교수: 잘못되었다고? 설명해 줄 수 있겠나?
학생: 교수님, 교수님은 이분법적인 오류를 범하고 계십니다. 생명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선한 신이 있으면 악한 신이 있다는 논지이지요. 교수님은 하나님을 유한한, 우리가 측정 가능한 분이라 보고 계십니다.
교수님, 과학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는 점조차 설명을 못합니다. 전기와 자기를 말하지만, 볼 수는 없지요.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건 물론이구요. 죽음을 생명의 반대로 보는 건 죽음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무지해서 그런 겁니다. 죽음은
생명의 반대가 아니라 단지 생명의 부재일뿐이지요. 교수님은 사람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고 가르치십니까?
교수: 자연 진화 과정을 말하는 거라면 그렇다네.
학생: 그렇다면, 진화의 과정을 눈으로 목격한 적이 있습니까, 교수님?
(교수는 논리가 성립되어감을 보고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학생: 아무도 진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목격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을 증명하지도 못했으니 교수님은 개인의 의견을 가르치시는 거 겠군요, 교수님. 마치 과학자가 아닌 연설가 처럼요.
(강의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학생: 이 강의실에 교수님의 뇌를 본 사람이 있나요?
(강의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학
생: 여기에 교수님의 뇌를 듣거나, 느끼거나, 맛보거나, 냄새 맡은 적이 있는 분에 계십니까? … 아무도 그런 적이 없는 것
같군요. 그러면 과학은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논증으로 교수님의 뇌가 없다고 말하는군요. 그렇다면 교수님의 강의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습니까?
(강의실은 고요했다. 교수는 심오한 표정으로 학생을 응시했다.)
교수: 사실을 믿는 수밖에 없겠군, 젊은이.
학생: 바로 그겁니다, 교수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믿음" 입니다. 그게 바로 모든 것을 움직이고 생명 있게 만드는 것이지요.
(교수는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학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교수의 시선에 따라 학생들의 시선이 옮겨졌다. 교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그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교수: 무슨 일인가?
사티레브: 저는 사티레브(Satirev)입니다. 이 대학의 졸업생이죠.
교수: 그래, 왜 손을 들었는가?
사티레브: 저 돌아버린 학생과 그 학생을 인정하는 어떤 멍청한 남자 때문에 이 강의실을 나갈까 해서 말입니다.
(사티레브의 말에 교수와 학생은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자신을 향해 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교수: 누구에 대한 불만인가. 나인가, 아니면 저 젊은이인가?
사티레브: 저 젋은이가 돌아버린 자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만, 교수님께서 이렇게 버벅 거릴 줄은 몰랐습니다.
학생: 제가 말한 것에 문제가 있습니까?
사티레브: 문제가 없는 게 뭐냐고 묻는 게 더 빠를 듯하군.
(사티레브는 강의실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학생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그를 보며 조용히 숨을 쉬었다. 학생과 사티레브는 서로 마주보고 서있었다.)
사
티레브: 자네는 전자기파에 대해서 언급했었지. 그럼 묻겠네, 자네는 분명 어떠한 감각기관으로도 신을 느끼지 못했다고 진술했지.
그리고 자네는 전자기와 신 모두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어. 그럼 자네는 어떻게 예시로 든 전자기파라는 것을 알고 논하는가?
전자기파도 믿는가? 퀄컴은 자네가 믿는 두 번째 신인가?
(사티레브의 말에 일각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학생: 오감으로 인지할 수 없는, 그러나 실재하는 것이 있음을 말하려 한 것입니다.
사
티레브: 말장난이네. 우리의 오감은 분명 한계를 가지고 있지. 그리고 우리는 오감으로 느끼지 못하는 걸 지각할 수 없다네.
고래의 초저주파, 박쥐의 초음파 등이 그러하지. 그러면 우리가 지금 논하는 초저주파, 초음파는 모두 믿음의 결과물이겠네, 안
그런가?
(학생은 말이 없었다.)
사티레브: 우린 지각할 수 없는 대상을 지각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기술을 개발시켜오고 있지. 들리지 않는 라디오 전파는 라디오 회로를 거쳐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바뀐다네. 아, 자네는 라디오
전파도 믿는가? 어느 채널을 믿는가?
(강의실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티레브: 우린 자네가 지각 불가능하다고 내민 예시를 이미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지각하고 있지. 그래프로든 소리로든 간에.
(학생은 긴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티레브: 신이 지각 불가능한 대상이라는 건 괜찮은 접근이라네. 불가지론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과학으로도 관측되지 않는, 바로 그 절대자 말일세. 하지만 말이야, 과학으로 관측되지 않는 개체가 또 있다네.
학생: 천사 말입니까?
사티레브: 아니네. 바로 제우스라네.
(제우스라는 단어가 나오자 강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학생: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를 말씀하십니까?
사
티레브: 아니라네. 그리스 경전의 제우스를 말하네. 자네에겐 그것이 신화일지 모르겠지만, 유대민족들이 믿던 신화에 비하면 그리스
경전은 더욱 감성적이고 인간적이며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예수의 희생도 프로메테우스의 희생에 비할 바가 못 되지. 야훼는
태초부터 존재하여 인간 세상에 오지랖이란 오지랖을 다 떨지만 제우스는 타이탄 신들과의 싸움을 통해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낸
개척자라네. 자네가 소위 성경이라 부르는 기독경은 제우스가 세상에 내린 두 번째 판도라의 상자라네. 그걸 연 자네는 그의 함정에
빠진 거라네.
학생: 어떤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집필자가 밝혀져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이것이 판도라의 상자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사티레브: 느낄 수 없다는 게 바로 판도라의 상자라는 증거라네. 교묘한 함정은 토끼가 전혀 느낄 수 없게 짜여있다네.
학생: 기존의 상식을 깨는 주장이군요.
사티레브: 반증이 가능한가? 나는 제우스와 믿음으로 관계하고 있다네.
(학생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판 논리의 함정에 빠졌음을 안 그는 당혹감을 느꼈다.)
사티레브: 그리고 제우스는 자네 같은 크리스찬들을 전부 타르타로스에 넣을 것이라 하였네. 가짜 신을 믿는다는 이유로.
학생: 그런 구절은 그리스 신… 경전에 없을 텐데요.
사티레브: 나와 제우스는 책이 아닌 믿음으로 관계한다네. 자네들이 성령이라 부르는, 그런 것과 비슷한 개념이 나에게 진리를 속삭인다네. 다만 나에게 온 성령은 자네의 성령과는 이름이 다르다네. 그리스령이라고 하지.
교수: 성령이라는 걸 자네가 입증할 수 있나?
사티레브: 자기 머리에 뇌가 있는지도 장담 못하는 교수님이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그리스령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아마 교수님은 X레이나 MRI로 머리를 찍어본다면, 인화된 사진을 벽에 붙여놓고 하루에 5번씩 기도하겠죠?
(교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나왔으나 교수가 그쪽을 바라보자 웃음소리가 멈췄다.)
사
티레브: 장난은 그만하도록 하지. 제우스 하나에 쩔쩔매는 주제에 시바(Shiva),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등은
어떻게 상대할 건가. 자네가 펴는 그 알량한 논리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다네. 심지어 야훼를 뜯어먹는
전설의 코요테를 생각해볼 수 있겠네.
학생: 예의에 어긋나는 표현입니다.
사티레브: 자네들이 소위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들에게 대하는 태도에 비하면 아주 신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지옥이니 심판이니 하며.
학생: 좋습니다. 제 논리가 악용될 여지가 있음은 인정합니다만, 논리 자체에서는 모순점을 찾지 못하신 것 같군요.
(사티레브는 크게 웃었다.)
사티레브: 지금, 자네는 자네의 논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 좋아, 그럼 자네가 언급한 걸 이야기해보지. 자네는 진화를 부정하는 것 같던데, 아닌가?
학생: 창조를 전 믿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 누구도 진화하는 과정을 본 적 없으며, 그건 단순히 이론에 불과합니다.
사티레브: 단순히 이론? 허… 자네가 진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진화하는 과정이 관측되지 않아서겠네, 자네의 말에서 유추하자면.
학생: 그렇습니다.
사티레브: 화석이 있지 않은가?
학생: 진화의 과정을 설명하기에 화석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미싱링크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학생의 말에 사티레브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강의실 왼쪽의 학생들도 입에 웃음을 머금고 상황을 바라보았다.)
사티레브: 자네는 내가 아기에서 지금의 성인의 몸으로 성장했다고 보는가?
학생: 그렇습니다.
사티레브: 자네가 내 성장과정을 관찰했나?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랬을 수도 있지 않은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교수는 민망함을 느끼고 등을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학생: 사진이 있을 것 아닙니까?
사
티레브: 물론이라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사진이 있지. 나머지 사진들은 애석하게도 집에 화재가
일어나서 잃었다네. 하지만 나의 성장을 말하기엔 사진이 턱없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 많은 화석도 충분치 않은 자네가 5장 밖에
안 되는 내 사진으로 나의 성장을 장담할 수 있겠나. 물론 내 사진이 백 장 넘게 있다고 해도, 자네에겐 하염없이 부족하겠지.
미싱링크라는 말, 들어봤나?
학생: 사티레브 씨에게 미싱링크가 있단 말입니까?
사티레브: 그렇다네. 난 태어나자마자 제니퍼 로페즈의 몸으로 살았다네. 그러다가 헤라 여신의 시샘으로 인해 지금의 평범한 몸이 되어버렸지.
(학생은 할 말이 없었다. 사티레브의 말장난이 주는 당황스러움과 그게 자신의 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그는 땀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
티레브: 당황스러울 거네. 난 자네의 논리를 하나하나 반박해야 할 의무감마저 느끼지 못하고 있네. 자네의 논리대로라면 난
제우스를 숭배하며 번개 걱정 없이 비오는 거리를 걸을 수 있고 남들에게 제니퍼 로페즈 시절을 자랑할 수 있지. 자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망상을 실재한다고 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버렸네.
학생: …
사티레브: 진화론은 양상이라네. 태초의
생명체를 설명하는 게 진화론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네. 함수로 보자면, x값이 0일 때의 y값을 찾는 게 진화론이라는 학문이
아니네. 우린 x값에 따른 y값의 변화 양상을 진화라 명명하고 그걸 연구할 뿐이네. 화석이 부족해서 진화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네는 수천 개의 점을 구해놓고도 그래프 하나 못 그리는 순수한 중학생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라네.
(학생은 잠깐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학생: 그러면 열, 빛에 관한 제 의견도 문제가 있습니까?
사
티레브: 당연하지. 선한 신, 악한 신에 대한 것 말인가? 자네는 열과 차가움, 빛과 어둠의 예시를 통해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저 교수를 눌러보려 했지. 하지만 선과 악은 분명 따로 존재한다네. 선이 약하면 악이 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는 걸세.
학생: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티레브: 애초에 이해를 했다면 그런 멍청한 발언은 꺼내지도 않았겠지. 예를 들어봄세. 자네가 빅맥을 먹고 싶은 데 50센트가 부족하다고 해보자. 만약 내가 자네에게 50센트를 준다면, 나는 선한가?
학생: 선합니다.
사티레브: 그럼 내가 자네에게 1센트를 준다면?
학생: 마찬가지로 선합니다.
사티레브: 내가 한 푼도 주지 않는다면?
(학생은 망설였다.)
사
티레브: 선하지 않지. 그러나 이게 악한 건 아니라네. 내가 자네의 1센트를 뺏는다면, 그건 악한 행동이겠지. 열의 부재가
차가움이라고 했지만, 선의 부재는 악이 아니라네. 선도 악도 아닌 그 중간적인 것이 자네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세상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자네에게 50센트를 주지도, 빼앗지도 않는 자들이 지천에 널려있다네. 이런데도 선의 부재를 악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있는가?
(학생들은 사티레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탄성을 질렀다. 교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
티레브: 정리하지. 자네는 선과 악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하여 다시는 나와 볼 일 없을 저 교수를 함정에 빠뜨렸고 진화론에 대한
자신의 이해 부족을 관측의 부족으로 보는 오만한 발언을 했다네. 신이 오감으로 지각되지 않는 대상이라며 이미 상식으로 인지하고
있는 전자기파를 예시로 들고 나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말이야,
(사티레브는 학생 앞으로 걸어갔다. 학생은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
티레브: 거증책임은 자네에게 있다네. 신이 있냐고 질문한 건 교수라네. 그럼 자네는 교수가 무엇을 얼마나 아느냐에 상관없이 신이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어야 하네. 결국 자네가 말한 것들 중 신이 있다는 증거 또는 논리를 내포한 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자네는
고작 교수의 말에 말도 안 되는 답을 해놓고서 결국엔 믿음이라는 결론을 내렸지. 자네는 신이 있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믿은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함을 밝힌 꼴이 되었지.
(학생은 답을 하지 못했다.)
사티레
브: 천하의 교수가 저 정도인데, 갓 유치원에 입학한, 또는 갓 중-고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얼마나 자네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겠는가. 허나 언제나 그러하듯 자네들의 말은 신이 존재한다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네. 자, 이제 신이 존재한다는 근거를
어디서 끌어올 건가?
학생: 성경이 있습니다.
사티레브: 자네, 아까 그리스 경전의 그리스령이 한 말을 잊었나? 판도라의 상자라니까. 반증할 수 있는가?
(사티레브는 웃으며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학생들도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교수와 학생을 힐끗 쳐다보며 밖으로 나갔다. 강의실에는 교수와 학생만이 남았다.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재미있는 글이라서 퍼왔습니다 -_-;;
흠... 원래 과학에서 말하는 신은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쪽에 가깝죠.(물론 여기서 신은 만물에 대해 중립적인 신을 의미) 그리고 존재와 존재하지 않음에 차이가 없다면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논리선별법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합당하다는 쪽이고요.
종교적인 의미의 신은 과학적인 증명을 때려 치는게 옳다고 보기는 합니다. 언제까지나 '무엇이 과학인가'의 문제인데, 믿음은 과학과는 좀 거리가 있어서요. 그런데 과학적으로 논증할 때 기준을 누구의 것으로 삼느냐가 문제네요. 포퍼의 논의가 어느 정도 우수하기는 하지만 역시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각주:1] 쿤은 '정상과학'이라는 지속적인 체계가 존재한다고 한 것에서만 의의를 찾을 수 있어서요. 그래도 포퍼의 기준을 들이대면 '가설에 반증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는가?'가 과학적인 명제의 기준입니다. 종교에서 그런 부분을 찾기는 힘들죠. 사람이 살아도 신의 뜻, 죽어도 신의 뜻, 이런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렇다고 무신론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인간이란게 세계를 인식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논리에 부분 부분 구멍이 있을 수 밖에 없고 이런게 비이성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거든요. 사실 비이성의 바다 위에 이성이라는 쪽배 하나 떠 있는 것이 인간의 심리일테고요. 글 자체는 유신론자의 논리가 비과학적이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포퍼대로라면 반증 하나에도 이론이 뒤집혀야 하는데 실제로는 실험을 의심하는 사람이 더 많죠. [본문으로]
6.54 [...]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
철학의 무용성(?)에 대해 적어놓은 명제집인 『논리-철학 논고』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명제인데, 뜻은 '내가 설명한 대상은 결국 존재하지 않으므로 나의 명제는 무의미하다' 이런 의미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리뷰를 적다가 말은 신영복 교수님의 『강의』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지요.(비록 어디였는지는 잊어버렸지만...)[각주:1] 생각해 보니 니체도 비슷한 말을 한 것 같네요. '너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배우는 것을 얼마나 '나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있는가 되돌아보게 됩니다. 양자역학이라는 틀이 완전히 정착해 버린 학문을 익히고 있어서 내 방식대로 구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하더라도 예전만큼 내 방식으로 소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느낌은 아직도 강하게 드네요. 중간과정에 살짝 느슨한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이런 글도 썼던 기억이 있는데...
독특한 취향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iGoogle을 기본 페이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심해서 오늘의 명언을 바탕에 깔아놓는데, 이런 글이 있네요. 레이건씨의 공산주의자 판별법입니다.
How do you tell a communist? Well, it's someone who reads Marx and Lenin. And how do you tell an anti-Communist? It's someone who understands Marx and Lenin.
서거는 죽음에 존경하는 마음을 덧붙여 높이 이르는 단어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서거란 사거(死去)의 높임말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거는 말 그대로 죽어서 떠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누구에게 서거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존경해야 하는 분께 서거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누가 존경해야 마땅한 인물인가는 전혀 자명하지 않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경외심을 갖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항상 뒤틀린 인물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는 현 시국에는 서거라는 단어가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예외없는 법칙은 없다는 경험법칙을 증명하려는듯이 서거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인물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선악도 무엇이 정답이다라고 말하기 어려운데, 존경해야 할 인물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렇다고 무한정 판단을 보류할수만은 없는데(내 특기이기도 하다. 반성중), 판단 없이 행동에 돌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행동하지 않음은 외부가 자연적으로 흐르도록 놓아두는 무위가 아니라 정체(停滯)에 불과하며 방임이자 포기이다.
어떻게 보면 자연과학은 참 속편한 학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이견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해석에서는 큰 편차를 보일 지 몰라도 적어도 숫자만큼은 누구나 동의하도록 얻어진다. 그리고, 현대 자연과학에서는 철학적 해석보다는 수학적 결론에 더 큰 비중을 둔다.) 하지만 사람들 속에 살면서 자연에 대해서만 탐구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2. 집회
발단
도서관에서 공부 중, 외부에서 법인화 반대 모임의 하늘이 울리는 노랫소리
학교가 법인화를 한다고 했다. 법인화 안내 책자까지 돌리던데, 역시 자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기는 했는데 다 불확정형이다. ~~~하겠습니다, ~~~일 것입니다 등. 결국 자금문제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했고 그냥 법인화를 밀어붙인다는 소리이다.
사실 법인화가 되면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지금보다 나빠지겠어 설마?(하지만 시대는 설마를 말하기 어렵게 한다) 그래도 법인화에 대해서는 아직도 부정적인데, 자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아직도 확답을 내놓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이 아니다. 미국처럼 대학을 입맛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미국은 최상위층을 제외하면 명문 그런거 없다. 장학금을 준다는 곳이 있으면 우왕ㅋ굳ㅋ 하면서 아이비리그도 버리는 것이 현실) 여기서는 대학이 입맛대로 입학자를 선발한다. 아마 이런 현실은 사회보장제도가 크게 개선되고 사회적으로도 대학이 불필요한 경우가 많아져야만 바뀌겠지만, 그런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이고, 온다고 해도 적어도 내 생애 동안 올 것 같지는 않다.
잡소리는 여기서 그만두고, 집회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도서관에서 양자물리를 공부하면서 연설하는 것을 얼핏 들었는데, 아무리 그 내용에 공감한다고는 해도 들었던 생각은 '촌스럽다'였다. 시대가 짱돌을 들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좀 세련되게 짱돌을 들면 안되려나? 표현이 내용을 못따라가면 야(野)하다고 했다. 이것이 내가 법인화 반대 집회에서 느낀 감정이었다. 완전히 부르주아의 물이 들어버렸군이라고 욕한다면 솔직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다른 집회방식은 없느냔 말이다. 물론 입만 나불거리는 소인보다는 한 등급 위라는 데 이견은 없지만....
3. 신영복
신영복 교수님의 책을 읽고 있다. 강의.
읽다가 생각나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다시 집어들었다. 이미 한번 읽은 적이 있는 책인데도 인상깊었던 부분은 계속 새로운 느낌을 준다. 이런 것을 명문이라고 하는 건가...
너는 아직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하겠지만 요즘 세상에는 같은 가격이면 그 염색료만큼 천이 나쁜 치마이기 십상이다.
한동안은 이런 문체에 경도되어서 비슷한 형식의 문장을 쓰곤 했었다. 뭐, 아직도 그 버릇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