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올린 글. 약간의 수정을 거쳐 재게재합니다.




요즘 들어 타임라인에 정치글이 많이 보이길레, 그냥 간단한(?) 상황 판단을 위한 가이드라인 올려봅니다. 아마도 내려갈수록 중요한 내용.


- 짤로 돌아다니는 내용으로 판단하지 말 것.

File Extensions

http://www.xkcd.com/1301/

짤은 언제까지나 인스턴트 정보이며, 인스턴트 정보로 얻을 수 있는 진실은 통조림 음식 수준밖에 안 됩니다.


- 그나마 인스턴트 치고는 괜찮을 수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건 토론 프로그램.

한 쪽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토론은 알맹이가 없고, 양 쪽이 치열하게 치고박고 싸우는 토론일수록 정보량이 많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괜찮은 토론 프로그램이 있나 모르겠네.


- 한 사안에 대해 판단을 할 때, '각 진영'에서 제공하는 최대한 양질의 '글'을 최소 5개씩은 읽고 다음 과정을 거칠 것.

1. 양질의 글이란 최소한 세 가지의 논거를 기반으로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한 것을 말합니다. 10-20줄짜리 글은 일단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비슷한 논거를 기반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글은 되도록 빼세요.

2. A4 한 장을 반으로 나누어 각 글에서 들고 있는 논거를 정리할 것. 통계 수치나 과거 사례 위주로.

3. 많은 경우 이렇게 하면 양 진영에서 같이 들고 있는 과거 사례가 있거나 서로 충돌하는 통계 수치가 있을겁니다. 이 경우엔 과거 사례를 해석하는데 취한 입장도 같이 정리하고 양쪽의 통계 수치의 신뢰성을 확인.

4. 여기까지 하는데 짧으면 2-3시간, 길어야 5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이 정도 시간도 투자 안 하고 진실을 얻겠다고 하신다면 통조림 수준의 진실밖에는 구할 수 없다는 말씀 드리기로 하죠.

5. 마지막으로, 혼자서 백분 토론을 거칠 것. 한 쪽에 최대한 빙의해서 다른 쪽을 공격하고 이 쪽을 방어하는 훈련을 해 봅니다. 이 일을 양 진영에 대해 다 해볼 것.

0.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 20~30쪽은 되어보이는 글은 도저히 못 읽겠다고 질 나쁜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건너뛰는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단문이 대세인 인터넷 시대에 긴 글은 길어봤자 A4 5쪽 이내예요(논문이나 보고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5번을 할 때 한쪽 진영에 대해 별로 호감이 안 간다고 불성실하게 빙의하지 마시고요.


- 신문 읽는 법. 전 신문을 안 읽습니다만, 도움이 될 사람이 많을 거라 생각해서.

1. 신문 기사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확인. 단어마다 고유한 분위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신문 기사에서 그 대상에 대해 어떤 인상을 심으려 하는지 볼 것.

2. 신문 기사에서 말하지 않는 논리적 기반을 확인. 쉽게 말해 신문 기사가 무엇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지 확인하라는 의미입니다.

3. 신문 기사간 관계를 확인. 온라인상으로 읽을 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지면으로 읽을 땐 신문 기사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지면에 '경제 상황이 나빠 꿈을 잃는 대학생들'이라는 식의 기사와 '경제가 안 좋은데 파업이라니' 이런 식의 기사가 같이 있다면 그 신문은 대학생과 파업을 대립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겠죠. 가장 많은 훈련이 필요한 항목.

0. 정리한다면, '신문 기사를 많이 읽어라'가 아니라 '신문 기사를 깊게 읽어라'가 되겠네요. 많이 읽는건 양질의 선택을 하는데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 주장하는 사람의 순수함과 주장하는 내용의 합리성은 완벽한 독립변수.

순수한 의도로 악을 행할 수 있고,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게 된 아돌프 아이히만이 전자의 한 사례고[각주:1], 자신이 이득을 얻겠다고 거래를 제안해오는 사람이 모두 내게 불리한 제안만 하는 것은 아니죠.


-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자신도 믿지 말 것.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항목. '나도 틀릴 수 있다'란 생각을 항상 하시길.



사실 첫 번째 항목이랑 마지막 항목이 제일 중요해요. 그것만 되어도 판단의 질이 150% 개선됩니다.




중요하니까 다시 한번 말하도록 하죠. 근본없는 짤방 같은 인스턴트 진실은 그만 드시고, 자신에 대한 과신은 제발 좀 버리세요. 순수함에 대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아무래도 앞의 둘보다는 중요도가 떨어져서. 참고로 순수는 편의점에서 500원에(코카콜라에 가는 로열티 포함) 200ml짜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내용은 대체로 캡콜(capcold.net/blog/‎)님이나 민노씨(http://minoci.net/)님의 가이드라인을 기억 속에서 대충 짜깁기한 것. 저도 인간인지라(쿨럭) 가운데 둘의 매우 긴 녀석들은 못 하고 있지만 나머지 넷 정도는 대충 탑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항목 때문에 교수님들한테 자신감이 없다고 까였던건가...


그러면 오늘도 진실을 찾는 여정을 떠나는 많은 분들께 바다의 가호가 있기를.(오글)


  1. 다만 아돌프 아이히만의 '순진함'은 연기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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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The Ghost of the Executed Engineer (Reprint, Paperback) - 8점
Graham, Loren R./Harvard Univ Pr


소련이 가졌던 기술적 한계를 사형당한 광산학 전문가 페테르 팔친스키(Peter Palchinsky)의 삶을 통해 들여다본 책이다. 번역본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학기에 들었던 공학윤리와 리더쉽 과목에서 과제로 쓴 서평을 공유해본다. 확실히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니 원문이 한글일 때와는 다소 다른 느낌을 갖는 것이 느껴진다.[각주:1]



칼 레이문드 포퍼경은 그의 유명한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과학에서의 진보는 열린 사회에서 양육될 때에만 가장 크게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요 주장-전체주의적 정부의 악함에 대한 강한 신념-은 잠시 옆으로 치워두기로 하면, 과학의 진보에 대한 그의 논거는 매우 설득적이다. 하지만 과연 사실일까? 냉전 기간의 소비에트 연방의 급격한 발전을 고려하면 이 주장에 의문을 갖게 된다. L. D. 란다우와 같이 특출난 과학자들이 반례를 제공하지만, 로렌 R. 그래함의 『사형된 엔지니어의 유령The Ghost of the Executed Engineer』을 읽고 나면 포퍼의 선언은 합당해 보인다.


이 책은 불우한 러시아 엔지니어 페테르 팔친스키의 삶을 그린다. 팔친스키는 스탈린 치하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반역모의로 비밀리에 사형되었다. 그는 왜 혐의를 받았을까? 저자는 이 이유를 스탈린이 소비에트 혁명 이전에 교육받은 엔지니어들에 대해 가졌던 불신과 거대 산업 복합체를 지으려는 정부 계획에 대한 팔친스키의 강한 비판에서 찾는다. 이후 저자는 소련의 기술에 대한 관점과 엔지니어들이 받은 교육을 사형당한 전문가의 불운에 맞추어 설명한다.


페테르 팔친스키는 짜르 시대에 훈련받은 광산학 전문가였다. 그는 1901년 석탄 채굴량 감소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의 일원으로 우크라이나의 돈 분지(Don Basin)에 파견되었고, 노동자들을 조사하는 임무를 받았다. 노동자들의 생활환경에 관한 통계를 모은 팔친스키는 열악한 생활환경이 그들의 의욕을 꺾었다고 결론지었고, 이는 상부의 분노와 유배의 원인이 되었다. 저자는 이 경험으로 팔친스키의[각주:2] 기술만 고려해서는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믿음과 급진적인 정치관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팔친스키는 기술이 그 기술을 도입하는 사회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술이 사회적인 조건을 만들 뿐만 아니라 특정 사회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기술을 성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팔친스키와 스탈린의 기술에 대한 극단적인 견해차는 흥미롭다. 전자가 산업의 진보를 정치적, 사회적, 법적, 교육적 사안들과 분리할 수 없으며 인본주의적인 접근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한 반면 후자는 기술을 모든 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취급했다. 팔친스키는 이러한 믿음 위에서 엔지니어들이 다양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가 우세하였고 많은 비효율과 노동자의 혹사를 야기했으며, 연방에서의 교육을 받은 엔지니어들이 터무니없이 제한된 교육을 받고 새로운 지도자들이 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저자가 만난 '종이 제작기에 들어가는 볼 베어링'에 대한 공학 학위를 받은 엔지니어는 터무니없이 좁은 소련의 교육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엔지니어가 가장 큰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팔친스키의 생각은-구글은 완벽한 사례이다- 자본가들의 탐욕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자본주의 국가에서 현실화된 것으로 보인다.


슬퍼라, 선견지명이 있었던 공학자의 말년을 읽으니.[각주:3] 팔친스키는 선의에서 조국을 위해 산업체의 효용을 최대화하는 통찰을 제공해려 했으나 나라의 지도자는 사보타주로 간주하고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책으로부터 판단할 때 팔친스키는 이미 같은 이유로 투옥된 적이 있기에 공개적인 비판이 가져올 목숨의 위협을 알고 있었다고 보여지나, 결과적으로 항상 석방되었기 때문에 간과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전문가의 의무를 이행했을까? 팔친스키의 경우처럼 생사가 걸리지는 않았으나 지금도 동일한 딜레마가 경제적인 지위를 볼모로 남아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거리낌 없이 의견을 내겠지만, 솔직하게 말한다면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스탈린을 기술 도입의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측면에 대해 무지한 것으로 혹평하는 것에서 냉전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느껴지지만 팔친스키를 순교자가 된 불우한 예언가로 우상화하려 하지 않았던 저자의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의 선견지명에서 신화적인 분위기를 제거하려 노력한 저자의 노력은 사형당한 엔지니어의 걸출한 탁월로 실패해 보인다. 산업화에서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는 관점은 인적 자본 개념을 40년 가까이 앞지르며, 효율적이려면 행복한 노동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그가 살던 시대를 너무 앞질러 보인다. 가끔은 더 작은 산업체가 거대 복합체보다 효율적이다는 그의 입장에서 대기업들의 효율에 대한 미신을 반성하게 되며, 그의 신조인 엔지니어의 폭넓은 교육에서 우리의 교육정책을 재고하게 된다.


이 서평의 서두에서 한 질문으로 돌아오면, 이 책은 학문에서의 진보가 가능하더라도 이의가 없는 사회에서의 산업과 기술에서의 발전은 비효율을 낳도록 예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포퍼경의 전체주의보다 열린 사회가 우월하다는 결론은 반박을 압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나는 우리가 공학과 자연과학의 전문가들에게 열린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의 전문가들이 정치적인 견해를 발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면 공학과 자연과학 출신의 정치적 비판은 우리의 규범에서는 자연스럽지 않은 편이다. 물론 공학과 자연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정치나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반론이 가능하나, 이 또한 다른 우려를 낳는다: 우리는 미래의 공학자들에게 이 사안들을 충분히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서평을 번역해놓고 보니 제목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추가한다. 저자는 폭넓은 식견을 가졌던 팔친스키를 사형한 소련은 그의 원한에 홀렸다고 표현하였다. 책의 제목은 거시적으로 볼 수 있는 전문가의 필요성을 사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에 투영한 결과물인 것이다.


하나의 유령이 소련을 배회하고 있(었)다. 팔친스키라는 유령이.


그 유령은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는가?


The Ghost of the Executed Engineer (Reprint, Paperback) - 8점
Graham, Loren R./Harvard Univ Pr

  1. 내가 쓴 글을 내가 번역하니 무언가 기분이 이상하다. [본문으로]
  2. 영어 수사법의 특징은 동일한 말을 최대한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같은 수사법을 따를 경우 글이 깔끔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갖게 되므로 최대한 단일한 표현으로 번역하였다. [본문으로]
  3. 도치를 살리려고 살짝 무리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오랜만에 강하게 나갑니다.


1.
가장 많이 듣는 비판(비난이 더욱 적절하겠지만 말입니다) 중에는 그 의도를 물고 늘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선동하지 마라'라던가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것 등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 묻겠습니다. 그런 비판은 선동적이지 않다거나 정치적이지 않다고 말 할 자신 있으신가요?


2.
정치(政治)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

-다음 국어사전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요? 예전에 들었던 말 중 '교수를 하려면 정치적 능력도 좋아야 한다'는 말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여기서 사용한 정치란 단어는 위의 뜻과는 조금 다르겠지요. 이번엔 다른 사전으로 가서 정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펴보겠습니다.

정치라는 용어는 국가의 제도와 행정뿐만 아니라 각 민족국가들간의 권력투쟁이나 국가 내에 존재하는 여러 집단에서의 의사결정 등 국제정치와 시민사회 내에서의 정치영역에서도 자주 사용된다. 이와 같이 정치라는 용어를 폭넓게 사용할 수 있는 핵심적 이유는, 모든 집단과 사회에는 그 구성원 전체를 구속하는 통일적 결정을 만들어내는 기능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정치'또는 '정치적'이라는 용어는 그러한 기능이나 그것에 따르는 다양한 현상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다음 백과사전/브리태니커

결국 정치란 것은 '개인의 의도를 사회에 반영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 자체는 중립적인 가치를 지닐 뿐이지요.(물론 한다는 것들은 시궁창에서 세수해도 깨끗해질 정도이지만..)


3.
싫어하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상당히 인상깊게 보았던 유시민 씨의 동영상 하나를 첨부합니다. 약 3분 30초부터 나옵니다.


서울대 강연 中 - 전체 강연

진정성을 묻지 말라는 부분입니다. 다르게 돌려 말하면, 의도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수도 있겠지요. 결국 중요한 것은 '그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저올 것인가'입니다.[각주:1] 선동적이건, 정치적이건 간에 그것의 결과물이 나쁘지 않다면 비난할 이유는 없습니다.


4.
자, 그러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비판, 선동하지 말라는 비판이 정치와 선동과는 거리가 먼 비판인지 말입니다.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는 비판은 비판의 대상이 힘을 얻는 것을 막기 위한 정치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선동하지 말라는 말은 반응하지 말라는 선동에 불과합니다. 순수한 것을 찾으신다고요? 순수한 의도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겁니다. 순수하게 무의식적으로 일을 저지른다면 모르지만, 이성적인 사고과정을 통해 이끌어낸 결과물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는 그것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자기의 이성을 사회에 투영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5.
정치는 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으시죠? 정치는 죽음만큼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관이 당신과는 상관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죽음만큼은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갚아야 하는 빚인 것이지요. 죽음과 마찬가지로 정치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면 살아가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행위부터가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6.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행위들입니다. 선동적이기 때문에, 정치적이기 때문에 싫어한다는 변명 하지 마십시오. 그냥 관심이 없는 겁니다. 그것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지혜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덧. 피곤하네요 -_-;; 과제 중간에 블로깅을 하는 센스...-_-


  1.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은 옳다고 봅니다. 단, 여기서 말하는 결과는 물리적으로 나타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구요. 범인을 잡기 위해 동네의 모든 집을 뒤집어 엎었다면 온동네를 뒤집어 엎은 것조차 결과이기에 정당한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사고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결과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은 상관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건 이성이 감성의 뒤를 뒤따르는 것과 닮았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이전에 정치와 관련된 사항에는 무관심한 친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에겐 알게 모르게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이 쿨한 것으로 비추어지는 것 같더군요. (전 비록 10대 끝자락이지만) 많은 20대의 생각이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이런 기사도 있었잖아요. 20대 투표율이 그야말로 바닥이라고. 지금 찾아보니 이런 기사도 있네요.

민주당 “대학생, 세상과 소통하다”  (이지폴뉴스)

위 기사 중 '투표율 20%대를 밑도는 20대 대학생'이란 부분이 있습니다.(8번째 문단) 확실한 것은, 우리 세대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글의 학생이 여러분은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대학생 ㄱ군은 집안이 가난합니다. 너무나도 가난해서 학자금대출 이자도 갚기 벅찬 상황이지요. 그런데 ㄱ군은 장학금을 알아보지 않습니다. 대학 등록금은 자기가 번 돈으로 내는 것이 쿨한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단과대학에서 1, 2등을 다투는 학점을 갖고 있지만, 오늘도 ㄱ군은 과외를 찾으러 아파트 단지를 배회합니다.

전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분들이 위의 ㄱ군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집니다. 한정된 의미의 정치라도[각주:1] 자신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는 굳이 명시하지 않더라도 느끼고 계시지 않은가요?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은 쿨한게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위의 ㄱ군처럼 무언가 부족하다는 듯 한 느낌도 들구요. 쿨하다는 착각, 버려 주세요. 착각은 자유라지만 이건 그래도 좀 심한 것 같네요.
  1. 전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를 주로 사용합니다만, 그건 '하나의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을 일컫는 말이어서 여기서 사용하려는 정치의 의미와는 좀 괴리된 감이 있네요.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예전에 모아두었던 유시민 의원의 '진정성을 묻지 마라'는 강의가 생각난다.


누구나 자기가 옳다고 확신한다. 일단 어느 쪽에 서게 되면, 그쪽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시각은 편향되어 버린다.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고, 이것이 계속되면 자신의 입장만 진실이라는 오만에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뾰족한 산 꼭대기에 놓인 커다란 돌과 같다.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영원히 그 방향으로 굴러내려가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진실'을 찾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내린 결론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살면서 항상 어떤 입장에 설 수 밖에 없고, 이렇게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항상 눈을 가려버릴 위험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성을 인정해 주어야 할 필요가 여기에서 나온다. 진보든 보수든 간에, 그쪽 나름대로 우선시하는 가치가 있고, 이 가치들은 모두 틀린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우선순위가 다른 것일 뿐이다. 그들의 시각에 대해 존중해 줄 줄 알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진정한 '진실을 찾는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가차없이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한다면, 세상은 더 이상 나아가는 데 실패할 것이다. 요즘 일명 '보수세력'들의 주장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오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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