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ppery slope, 또는 미끄럼틀 현상은[각주:1] 논리학에서 다루는 여러가지 오류 중 하나입니다. 오류이기는 하지만, 그 오류가 이끄는 결론은 꼭 거짓이지는 않지요.

예컨데 이런 것을 미끄럼틀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예 1

1. 작은 숲이 있다.
2. 숲에서 나무 하나가 넘어지면 옆의 나무가 넘어질 가능성은 95%이다.
3. 나무가 하나 넘어지면, 옆의 나무도 넘어진다.
4. 넘어진 나무가 다른 나무를 같이 넘어뜨린다.
5. 4가 반복되어, 작은 숲은 무너지게 된다.

예 2

1. 머리카락이 없는 사람을 대머리라고 부른다.
2. 머리카락이 하나 많은 것과 하나 적은 것은 구분할 수 없다.
3. 대머리보다 머리카락이 하나 많은 사람은 대머리와 구분할 수 없다. 따라서, 대머리보다 머리키락이 하나 많은 사람은 대머리이다.
4. 따라서, 머리카락이 하나뿐인 사람도 대머리이다.
5. 위의 사람보다 머리카락이 하나 더 많은 사람도 대머리이다.
6. 어떤 큰 수도 1을 반복적으로 더해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머리카락을 가지든 그 사람은 대머리이다.
7. 모든 사람은 유한한 머리카락 수를 가지므로, 모든 사람은 대머리이다.

예 1에서는 '나무가 다음 나무를 넘어뜨리지 않을 확률'이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나무가 넘어지면 다음 나무를 무너뜨린다'를 탄탄한 가정으로 사용했기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예 2의 오류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지금 이 글 보시는 여러분 모두가 대머리이신가요? ^^

요즘에는 이 '미끄럼틀 현상'이 이런 오류를 지칭하는 데 쓰이는 것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일련의 사건을 나타내는데 쓰이기도 합니다. 유명한 시를 하나 끌어와 보겠습니다.

예 3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로

소수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에 침묵하면, 그 침묵이 다른 소수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에 침묵하도록 만들게 되고, 이것이 이어지다 보면 결국 전체주의 사회만 남게 되겠지요. 이런 식으로 사소한 하나의 사건이 연쇄적으로 반응을 일으켜서 엄청나게 커다란 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것을 '미끄럼틀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미끄럼틀의 위쪽 끝에서는 살짝만 밀어주어도 끝까지 떨어져 나가는 것에서 그 이름을 얻었지요. 이 예는 약간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예를 또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예 4

1. 한 국가에서 식량 확보를 위해 밀의 수출을 제한한다(세금을 올리거나 따위).
2. 밀의 공급이 감소하여 전세계적으로 밀의 가격이 오른다.
3. 밀의 수요가 높아지고, 각 국가는 식량 확보 목적으로 밀의 수출을 더욱 제한한다.
4. 밀의 가격이 더욱 오른다.
5. 밀의 수요로 대체제(감자, 쌀 따위)의 가격이 오른다.
6. 곡물의 전반적인 가격이 오른다.
7. 식량을 구하기 힘들어지자, 각 국가는 곡물의 수출을 더 크게 제한하게 된다.
8. 곡물의 가격이 더욱 오른다.
9. 각 가정에서 먹거리에 들이는 비용이 오른다. 즉, 엥겔 지수가 오른다.
10. 식품 외 품목에 들이는 수입의 비율이 감소하여 기타 품목의 소비가 위축된다.
11. 소비의 위축으로 기타 품목의 가격은 하락하고, 가격 하락을 견디지 못한 기업은 파산한다.
12. 일부 기업의 파산으로 실업률이 증가한다.
13. 실업률 증가로 대중의 소비 능력이 감소하고, 식품 이외의 가격은 더욱 하락한다.
14. 기업들의 파산이 가속화된다. 더불어 실업률도 급증한다.
15. 14가 계속되고 전 세계적 공황이 온다.[각주:2]

위처럼 '한 국가의 밀 수출 제한'이라는 작은 사건이 '전 세계적 공황'이라는 예기치 못한 사건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미끄럼틀 효과'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보면 나비효과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이것도 위에서 언급한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단계 사이에 확실한 연결고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예컨데, 하나의 국가가 수출을 제한해서 밀 가격을 올리게 된다면 다른 국가들은 원래 수입하던 밀에 붙이던 세금을 거두어서 가격을 원래대로 돌려 놓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맨 마지막의 공황이라는 사태가 꼭 달나라 너머 안드로메다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는 이런 오류를 가진 논증이라고 하더라도 그 결론이 항상 그릇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런 사건들은 미끄럼틀 현상이라는 이름보다는 나비효과라고 부르는 것이 더 옳아 보입니다. 제가 보기엔 다음의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예가 적당한 미끄럼틀 현상의 한 예라고 생각됩니다.

[만화]산낙지를 잘먹는 아이

만화에서 아이는 어쩌다가 산낙지를 한번 먹게 됩니다. 산낙지를 먹는 아이를 어른들은 신기해하고, 점차 아이는 '산낙지를 잘 먹는 아이'라는 명성(?)을 얻게 됩니다. 전 이 과정이 미끄럼틀을 탄 어린아이가 놀이터 흙바닥에 닿고 마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것이지요.

1. 아이가 산낙지를 먹는다.
2. 어른들은 아이가 산낙지를 잘 먹는 것을 보고 신기해한다.
3. 아이는 이런 반응을 즐거워한다.
4. 아이는 산낙지를 더 먹게 된다.
5. 어른들은 더욱 신기해하게 되고, 아이는 이런 반응들을 더욱 즐기게 된다.
6. 결국 아이는 4, 5번의 현상이 반복되어 '산낙지를 잘 먹는 아이'라는 딱지를 얻는다.

만화 속의 아이는 처음에 산낙지를 먹었을 때 그 느낌을 별로 안 좋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위의 반응을 보고서는 싫어하는 눈치를 보여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꾹 참고 먹습니다. 시간이 좀 지난 뒤, 산낙지의 느낌에 익숙해질 무렵엔 여태 보여왔던 산낙지를 먹으면서 행복해하는 모습 때문에 산낙지를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 버립니다.[각주:3] 결국, 주변의 사회가 한 사람을 이름붙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 이름에 따르는 행동을 더 많이 하게 되고 결국 그 이름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례로는 평범했던 사람이 어쩌다가 극성 종교 단체에 가입하고서 성격이나 재산을 완전히 말아먹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꼭 사람뿐이 아니라 미디어도 이런 성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새로 창간된 잡지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잡지에 보수적인 성향의 글이 하나 실립니다. 이 일로 잡지는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더 많이 사 보게 되고 진보 성향의 구독자는 줄어들게 됩니다. 잡지는 이런 구독자의 성향을 분석하고, 보수적인 글을 실는 것이 판매에 더욱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보수적으로 변한 잡지에 진보적인 구독자는 사라지고 보수적인 구독자가 늘어나면, 이 순환이 계속 반복됩니다. 결국에 이 잡지는 극우적인 정치성향을 지닌 글만 실리는 잡지로 남습니다.

생각을 좀 더 전진시켜 보면,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현상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만 해도 지금의 제가 가진 '활자중독'적 특징이 제가 원해서 얻은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가 엄한 글 하나 읽은 것으로 주변 친구들이 나에게서 '엄한 글 많이 읽는 아이'라는 기대에 부합하려고 하면서 얻게 된 것인지 애매하거든요. 뭐 가장 일반적인 극단적인 상황을 보자면 '공부 잘 하던 아이가 시험 한번 망치는 바람에 자살하는 경우'를 들 수도 있습니다. 어쩌다가 한번 시험 점수를 잘 받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변에서 이 아이에게 높은 시험 점수를 기대하게 됩니다. 아이는 이 기대를 느끼고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고, 이후 공부를 잘 하는 아이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아이는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의무감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각주:4] 결국 어쩌다가 시험을 한번 망치게 되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취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공부를 잘 하도록 내몰리게 되었다는 것이지요.[각주:5]

가끔씩은 내가 내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최첨단을 달린다는 것만큼 즐거운 극단도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극단은 광신도와 같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Inspired by
지식인, 광대, 개념인
  1. 미끄럼틀 효과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용어 통일을 위해 현상으로 이어가겠습니다. [본문으로]
  2. 이거 완전 소설이군요 -_-;;; [본문으로]
  3. 인지부조화 이론입니다. 인지부조화란 자신의 행동과 자신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이 인지부조화를 줄이도록 자신을 변화시켜 나간다는 것이지요. 이미 겉으로 드러낸 행동은 변경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는 생각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본문으로]
  4. 여태까지의 학교 생활로 미루어 볼 때 공부 잘 하는 아이가 공부 못 하는 아이보다 공부에 대해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은 진리인 것 같습니다. [본문으로]
  5. 생각보다 '생각 없이 공부만 했던 사람'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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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abmucza.com BlogIcon 밥먹자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장문 포스팅이군요. 예시때문에 이해가 잘 갑니다.
    약간 다른 것 같지만, 갑자기 모 영화의 "그 사람의 인생은 그의 이미지다"라는 대사가 생각나는군요.^^;;

    대학 다닐 때 제가 스스로를 그렇게 내몰아서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후회2만배입니다..ㅠㅠ 왜 그렇게 힘들게 했는지...쩝...;;

    2009.03.08 21:06
  2. Favicon of https://yatyat.tistory.com BlogIcon Hammerheart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트랙백 잘 받았습니다.
    자기를 올바르게 인식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2009.03.17 00:1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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