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24. 12:33 Writer/Short

이야기꾼

간이 플라스틱 의자가 불편해질 즈음이었다.

"내가 어디까지 말했었더라?"

그는 태양을 등진 채 잔 두개가 놓여있는 네모난 플라스틱 쟁반을 들고 있었다. 나는 시린 햇살에 손그늘로 눈을 쉬게하며 대꾸했다.

"'사람이 반영구적으로 살게 된다면'까지 말하고 음료를 받으러 갔지"

두 잔이 탁자 위에 놓였다. 그를 위한 얼린 잔에 담은 시원한 흑맥주, 그리고 나를 위한 따뜻한 화이트 카페모카. 그는 살얼음이 떠 있는 흑맥주를 들이키고는 향을 음미했다. 이 녀석은 소재가 떨어졌다니까 준다고 해놓고서는 묻어갈 심산인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을 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첫 부분을 놓쳐버렸지만.

"... 통합이 이루어지겠지. 지금 미디어 환경이 돌아가는 것을 생각해보자고. 갈수록 발언권이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고, 길이는 짧아지는데다가, 대화같은 모습을 띄기 시작한단 말이야."

"어, 잠깐만. 첫 부분 못 들었는데 다시좀.."

그는 말을 멈추더니 잠깐 한숨을 쉬었다.

"넌 어째 바뀐게 하나도 없냐. 정신 놓고 있다가 못 듣는것도 그렇고. 먼 미래에는 인류의 모든 정신이 통일된 하나의 유기체가 될 거라고."

"근거는?"

"그러니까 설명하고 있잖아. 미디어는 계속 '만인의 대화'로 수렴하고 있어. 모든 미디어의 원형인 기록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지. 원전은 대화로 쓰인 게 많다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탁자 위에 놓인 맥주잔으로 손을 뻗었다. 포도송이까지 있는 포도넝쿨 모양으로 깎아낸 나무를 기둥으로 세운 고급으로 보이는 유리탁자이다. 문득 이 카페 주인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진다. 플라스틱 의자에 이런 탁자를 조합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물론 맥주와 커피를 같이 판다는 것부터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언젠가 인간이 기계와 바로 접속하는 시대가 올꺼야. 「매트릭스」에서처럼 정신이 기계로 바로 들어가는거지. 물론 영화에서처럼 선을 사용하는 구식은 아닐테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오래된 영화를 끌어오는 너는 구식이지."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듣기나 해. 어쨌든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면 그 사람들의 생각을 연결하는 연결망은 어떤 모습이겠냐는거지."

"하이브마인드(Hivemind)라는 거냐?"

"그거야. 하이브마인드. 물론 개개인은 처음에는 나는 연결망에 접속된 다른 상대와 대화를 한다는 기분으로 살아가겠지. 하지만 그 후손들은 다를꺼야. 태어날 때 부터 그 거대한 연결망에 접속된 상태로 살아갈 거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이것이 나의 생각인지 연결망에서 내려온 생각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겠지. 점차 연결망과 융합하는거야."

커피를 들었다. 이 허무맹랑한 소리를 중화해줄 포도당이 필요하다. 달달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니 머리가 좀 덜 아파졌다. 그 와중에도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죽은 사람들은 잊혀진 기억들이 될 것이고, 태어난 사람들은 엉뚱한 발상들이 되겠지. 마치 바다의 물고기 떼와도 같아. 하나 하나 살펴본다면 이쪽 무리에 있다가 저쪽 무리에 있다가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각 무리를 살펴본다면 무리 자체의 모습은 변하지 않지. 미래에 우리의 뇌가 연결되어 있을 연결망도 비슷한 모습일꺼야."

"그런데 사람이 반영구적으로 사는 건 무슨 상관이야?"

그는 잠시 목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아, 그건 이제 중요해질꺼야."

그러면 처음에 다른 이야기로 시작할 것이지. 그가 주문한 것을 받으러 간 동안 떠올렸던 소설 첫머리가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일단 미래에 통합된 정신이 등장한다는 것은 합의를 보았으니까, 사람이 거의 무한히 살아가게 될 때를 생각해보자고. 일단 내 결론은 사람이 태어나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거야."

"왜냐하면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 내가 하려던 말은 어떻게 안거야?"

"내가 해줬던 이야기잖아. 대체로 낳는 자손의 수는 수명과 반비례하는데, 그건 동족간의 경쟁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현상이라고. 그렇다면 무한히 살아가는 생명체에게 생식은 먼 과거의 일이 되겠지."

한 삼사년 전에 말해준 공상인데 기억하고 있다니 살짝 놀랐다. 하긴, 그는 어릴 적부터 비상한 기억력으로 벼락치기 하나는 기똥차게 잘 했었지.

"어쨌든, 사람이 태어나지 않으면 미래의 인류 통합 사념체에게 재미있는 생각거리는 사라지게 되겠지. 특이한 발상의 진원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통합된 사념은 분할할꺼야."

그는 이 한 마디만 하고 다시 맥주잔에 손을 대었다. 아니 이게 뭔소리야? 마음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듯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혼자서 벽에다 대고 하는 이야기는 재미없잖아."

"이야기가 거기에서 왜 나와?"

"먼 과거부터 밤의 지루함을 달래주던 것이 이야기니까. 결국 새로운 자극이 없으니까 새로운 조합인 이야기를 지루함을 달래줄 약으로 선택하겠지. 하지만 혼자서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재미없어. 그러니까 그 통합사념은 나뉘어져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할 거야."

"아니 그래도.."

말 끝을 흐린건 여우비다. 파라솔이 없는 탁자여서 대화를 마치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에도 다른 말을 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밖에서 나누던 대화로 심란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오면서 들은 대답은 기억난다.

"아, 그런데 과연 태어나면서부터 그 연결망에 접속될 가능성이 있을까? 아직 덜 자란 아이에게 나타나는 폭력성이 얼마나 잔인한지는 알잖아?"

"초등학생이 적분을 배우는 시대인데 그런 부모의 극성이 사라질 것 같아? 그것보다도 난 성선설을 믿어서. 더군다나 그렇게 큰 집단에 자정능력은 당연히 존재하겠지."

여튼, 나는 지금 내 방의 책상 앞에 앉아있다. 모레까지 보내기로 한 단편 원고를 오늘까지 쓰고 내일은 퇴고해야 한다. 딱히 다른 소재를 찾을 시간도 없어서 그가 주었던 소재를 그대로 쓰기로 결정했다. 인류의 미래가 다중인격장애라니, 참 인류의 운명도 기구하다.

그래서 그게 이야기의 끝이야? 나태(懶怠)가 묻는다. 다언(多言)이 대답한다. 끝이야. 잠자코 있던 탐욕(貪慾)이 고개를 든다. 뭐야. 너답지 않게 이야기가 너무 단순한 것 같은데? 그런가? 내 나름대로는 다채로운 이야기였다고 생각하는데. 너라면 무언가 더 끄집어낼 줄 알았지. 탐욕의 말이 끝나자 나태가 다시 말을 꺼낸다. 교만(驕慢), 너가 한번 이야기해봐라. 다언이 거든다. 그래, 너 이야기 하나는 멋지게 하잖아. 잠깐의 침묵. 그리고 교만이 입을 연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최고의 이야기를 선사해주지. 교만은 점차 비대해지더니 모두를 집어삼킨다. 낮을 덮치는 어둠과도 같이.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둠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래, 이제 시작인거지. 한번 숨을 내쉬고, 연필을 다시 잡는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빛이 있으라."

말은 힘이요, 언어는 권력이었다. 자신으로부터 자라난 세계가 모태를 삼키리라는 것을 모르는 듯 말은 세계의 이것저것을 빚어내었다. 빛을 모아 낮을 만들자 어둠은 모여 밤이 되었고, 부스러기를 긁어모아 땅을 만들자 남은 먼지는 모여 바다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아직 말에게 힘이 있었던 시대의 일이다.

여기까지 글을 쓴 후, 잠시 연필을 내려놓았다. 이 말은 써야 할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고는, 종이를 뒤집고 연필을 다시 집어들어 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간이 플라스틱 의자가 불편해질 즈음이었다.



본격 수미상관 소설. 문법에 어긋나는 문장이 많은데, 너그러이 봐주세요.

소설 속 소설의 첫 부분은 번역투와 비문이 난립하네요. 그래도 분위기를 살리는 것 같아서 그대로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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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15. 01:38 Writer/Short

그 날의 기억

나는 그날, 그렇게, 봄날의 화사한 흑빛이 가득한 가로수 길 위에 서 있었다. 뚜껑을 닫다 만 향수병의 진한 향기처럼 우울은 주변을 물들여갔고, 우주는 내 피부를 경계로 서로 독립된 삶을 사는 것만 같았다. 길가의 작은 관목에서는 짙은 녹색이 녹색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겠다는 기세로 돋아나 있었고, 길 옆 풀밭 위에서는 들꽃들이 화려함을 겨루는 대회를 여는데다가,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자신의 가벼운 운명을 맡긴 채 산산히 흩어지는 벚꽃으로 푸른 하늘이 넘실거렸지만, 그토록 색채에 인색한 풍경은 경험해 보았던 사람조차 함부로 입에 올리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작년만큼은 아니지만 살짝 우울하네요. 해석이 불가능한 실험 결과물이 문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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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10. 17:47 Writer

but a grin without a cat!

방학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penguin classics 버전으로 사놓고 읽다가 수학자가 주석을 단 버전으로 갈아탔다. Martin Gardner 주석의 The Annotated Alice.

The Annotated Alice: The Denfinitive Edition (hardcover)
루이스 캐롤. 마틴 가드너 지음/W. W. Norton & Company
수학자가 보는 수학자의 소설은 어떤 모습일까?

penguin classics 버전은 작아서 좋지만 주석 보기가 영 불편하다. 그런데 이 녀석은 말 그대로 앨범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는 녀석이라 집에 모셔두고 보고 있다. 그래도 주석을 바로 옆에 처리해 주어서 읽기에는 좋다.(그리고 이 책의 주석이 내가 바라던 주석들이기도 하다)[각주:1] 문제라면 가격이겠지만...

제목은 여기서 따왔다.
[...]

  "All right," said the Cat; and this time it vanished quite slowly, beginning with the end of the tail, and ending with the grin, which remained some time after the rest of it had gone.
  "Well! I've often seen a cat without a grin," thought Alice; "but a grin without a cat! It's the most curious thing I ever saw in all my life!"

[...]

-Lewis Carrol/Martin Gardner, The Annotated Alice, p.67

책에는 'grin without a cat'이 현대 순수수학을 잘 설명하는 구(句)라고 주석이 달려있다. 사과 하나, 사과 둘, 사과 셋, ... 에서 시작했던 숫자들인데 사과는 어디로 가고 수만 남았을까?

---

과제를 하다가 잠시 쉬려고 이번에 사다 놓은 『괴델, 에셔, 바흐』의 앞 부분을 조금 읽다 말았는데, 서문에 '이 책의 내용은 어떻게 비생명체가 생명을 얻는가에 대한 고찰이다'라는 식으로 써 놓은 부분이 있었다. 재미있는 지적이다. 분명히 인체를 구성하는 것은 수학적으로 움직이는 원자들일 뿐이지만, 우리의 사고는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컴퓨터 모니터 상에 떠오른 알록달록한 점들이(내 블로그는 거의 흑백이긴 하지만) 어디에서 의미를 얻는 것일까? 원자들은 어디로 가고 우리의 우울한 생각들만 붕 뜬 채 남아버린 것일까?

Godel, Escher, Bach (Paperback)
Douglas R. Hofstadter 지음/Basic Books
번역본보다 싼 원서라니...

사실 생명체에만 한정시키지 않더라도 그런 현상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들은 0과 1을 어디에선가 갑자기 나타나버린 가상공간으로 만들어버렸고, 고등학생들이(대학생이라고 다르지는 않지만...) 1 레벨이라도 더 올리기 위해 밤을 새게 만드는 MMORPG들은 0과 1에서 그들의 분신들에게 몬스터를 사냥할 무기를 쥐어주었다. 현대에 들어 이런 현상이 숨가쁘게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에만 이런 일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무려 고대부터도 비슷한 사례가 있으니까. 글을 쓸 영감(?)을 제공한 덧글을 소개한다.

진짜 로그인하게 만드는 글이다. 김용옥의 지난 글에 이한열의 죽음을 두고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의 생명은 실깨비다. 국가라는 것은 허깨비다. 어떻게 허깨비가 실깨비인 사람을 이유없이 죽일 수가 있는가?"

그렇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짓거리는 절대적으로 그 동기가 사람의 생명을 위한 것이어야만한다. 절대로 그 어떤 이유에서건 희생을 강요해선 안된다. 왜냐하면 그 희생의 과실을 따먹는 것은 국가나 민족이 아닌 바로 그 도적놈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노동자들을 '산업역군", 국가대표 축구선수를 "태극전사"라고 부르는 씨발 개잡것들아. 저 단어들에는 너거들 개인은 국가를 위해 희생해서 뒈지는게 가장 큰 영광이다라는 이데올로기가 깔려있다. 위험하고 더러운 환경에서 존나게 일하는 노동자들과 한겨울에 눈밭에서 팬티바람으로 체력테스트 해야하는 선수들을 힐끗 본 후에 룸살롱 찾아가고 유명 여자 탈렌트나 능욕하는 씨발럼들은 따로 존재한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 존나 치켜세우고 실제로는 정신적 육체적 폭력이 난무하는 온갖 비인간적 근무환경으로 굴종을 길들이고, 가끔씩 동족끼리 총겨누게 하거나 자국시민 학살, 그리고 천안함 사건같이 재수없게 죽으면 빠담=발린 주둥이로 "웁스"하면 그만인거다. 저 씨벌룸들은 그시간에도 룸쌀롱에 있고 탤런트를 능욕하며 재미보고 있거든.

결국 국가든 민족이든 계급적 각성없이 뭉퉁그려서 생각할 수는 절대로 없다. 니가 속한 계급과 꼬라지를 정확히 직시하고 그 후에 니 스스로의 판단으로 민족과 국가를 같다 붙이기 바란다. 무조건 존나 선진조국을 위해 니 한몸 희생하지 마라. 니는 살아있는 생명이지 소모품이 아닌거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서 국가가 되었지만, 국가라는 허공의 성채에서 사람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1. 11장까지는 penguin classics 버전을 읽어서 그 이전의 주석들을 확인해보질 못했는데, 확실히 Gardner 주석이 좀 더 내용이 많고 풍부하다. 삽화도 주석으로 처리되어 있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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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10. 4. 9. 02:44 Writer

새 물리 교과과정

학교에서 내일 발표할 ppt 준비하면서 블로그질 좀 하다가(팀원들께는 잉여하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물리 교과과정이 새로 짜였다고 하는 덧글이 올라왔길레 확인해봤다.

물리1
1.시공간과 우주

시간, 공간, 운동: 시간의 측정과 표준, 길이의 측정과 표준, 뉴턴 운동법칙, 운동량과 충격량, 역학적 에너지 보존법칙
시공간의 새로운 이해: 중력의 발견, 상대성이론, 블랙홀과 중력렌즈, 우주 모형, 4가지 상호작용과 기본 입자

2.물질과 전자기장

전 자기장: 전기장과 전기력선, 정전기 유도와 유전 분극, 자기장과 자기력선, 유도전류와 패러데이 법칙
물질의 구조와 성질: 에너지 준위와 빛의 방출, 에너지띠 이론, 반도체, 신소재

3.정보와 통신

소리와 빛: 음파와 초음파, 화음과 소음, 전기신호, 광전효과와 광센서, 색채 인식과 영상장치
정보의 전달과 저장: 전자기파의 스펙트럼, 안테나와 무선통신, 광케이블, 교류와 신호조절, 정보 저장장치

4.에너지

에너지의 발생: 기전력, 전기 에너지, 발전기, 핵발전, 핵융합과 태양에너지, 태양전지, 여러가지 발전
힘과 에너지의 이용: 힘의 전달과 돌림힘, 힘의 평형과 안정성, 유체의 법칙, 열역학 법칙과 열기관, 열전달, 상태변화와 기상현상, 전기에너지 이용

물리2

1.운동과 에너지

힘과운동: 위치벡터, 힘과 운동법칙, 포물선과 원운동, 운동량 보존, 가속좌표계와 관성력, 단진동
열에너 지: 절대온도, 기체운동론, 이상기체 상태방정식, 내부에너지, 열역학 과정, 엔트로피

2.전기와 자기
전하와 전기장: 전위, 전기쌍극자, 평행판 축전기, 전기용량, 유전체
전류와 자기장: 전류에 의한 자기장, 자기선속과 패러데이 법칙, 로렌츠 힘, 자기 쌍극자, 자성체, 상호유도, 자체유도, RLC 회로

3.파동과 빛
파동의 발생과 전달:호이겐스 원리, 정상파와 공명, 굴절과 반사, 회절과 간섭, 도플러 효과와 충격파
빛의 이용:거울과 렌즈, 광학기기, 엑스선과 감마선, 마이크로파, 레이저, 편광

4.미시세계와 양자현상
물질의 이중성: 플랑크의 양자설, 빛의 입자성, 드브로이 물질파와 입자의 파동성, 전자 현미경
양자물리: 불확정성원리, 슈뢰딩거 방정식, 파동함수, 원자모형, 에너지 준위, 양자터널 효과 

와우.

그런데 이거, 찾아보면 다루는 고등학교 교과서가 있기는 있다. 고급물리인가 하는 녀석인데 알라딘에도 안 나오는 것을 보니 마이너중의 마이너인가보다.



이 녀석, 참 위엄차다. 대학 1학년 과정인 일반물리학에서도 보통은 다루지 않는 시공간거리의 개념으로부터 상대론을 시작한다. 아는 이유는 고등학교때 조금 보았기 때문에(...) 일반물리학이 힘든 사람은 이걸 보아도 나쁘지 않을지는 모르겠다. 이게 더 어려울지도 -_-;;;

여튼, 물리2를 치는 사람은 마이너이고, 수능때 물리1,2와 화학1,2를 친 나는 괴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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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10. 4. 2. 00:35 Writer

로피탈과 한국문학

'극한'은 어쩌면 수능을 준비하는 모든 이과생들에게 그나마 쉬운 단원일지도 모른다. 정식 교과과정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수학의 정석』에 등장하기에 고등학교 수학과정의 정석인 로피탈의 정리(l'Hôpital's rule)가 극한을 단숨에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로피탈의 정리는 여러가지 모양새를 갖는다고 하지만, 일반적인 수험생에게는 다음의 공식이 가장 친근하다.

f(x),g(x)가 x=a에서 둘 다 동시에 0 또는 무한대로 발산한다면, g'(a)가 0이 아닐 때 다음 두 값들이 존재한다는 조건에서

http://www.sitmo.com/gg/latex/latex2png.2.php?z=100&eq=%5Cmathop%7B%5Clim%7D%5Climits_%7Bx%20%5Cto%20a%7D%20%5Cfrac%7Bf(x)%7D%7Bg(x)%7D%3D%5Cmathop%7B%5Clim%7D%5Climits_%7Bx%20%5Cto%20a%7D%5Cfrac%7Bf%27(x)%7D%7Bg%27(x)%7D

이다.

그런데 많은 수험생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 정리는 로피탈이 아니라 요한 베르누이가 발견했다고 한다.[각주:1] 로피탈은 베르누이가 발견한 수학적 사실을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 독점적으로 사용한다는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각주:2] 이 계약으로 '자신의 업적에 이름이 붙는 경우는 없다'라는 과학사의 속설에 엄청난 힘을 실어주고 대한민국의 엄청나게 많은 수험생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린 로피탈의 감각이 인상적이지 않은가? 비록 그가 발견한 사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게 한국문학과 무슨 상관일까?

"나는 왜 출판사 대표가 돼야 했나" (프레시안)
그 ‘혀’로 누가 거짓말 하나 (시사저널)

누가 요한일까? 잘 나가던(추측일 뿐이지만) 수의사가 일 때려치고 출판업에 뛰어들 정도로 감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에서 프레시안 쪽의 시각에 무게를 실어주고 싶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또 무작정 실어주기에는 시사저널에 등장한 사실들이 마음에 걸린다.

그것보다 내가 남의 글 베꼈다는 말 들으면 화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 유명 작가들이란 사람들의 반응이 좀 그렇다. 자존심이 없거나, 그런 '하찮은 것들'에는 초탈했거나 둘 중 하나려나.
  1. 이 집안이 참 대단하다. 나중에 이학/공학 방면으로 공부하면 오일러와 함께 항상 등장하는 이름이 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 시험범위는 절반이 되었겠지. [본문으로]
  2. 김홍종, 미적분학 1, 2008, p.10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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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10. 3. 25. 02:08 Writer

앎의 즐거움

예전에 '스펀지'라는 제목의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던 시절이 있었다. 새로운 지식, 일반 사람은 잘 모르는 지식을 주된 소재로 삼았던 프로그램이라 점차 소재가 고갈되어 인기가 사그러들었긴 하지만 '빛나라 지식의 별!'이라는 문구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나는 관대하다! 빛나라 지식의 별!

이런 프로그램들이 여태까지 많이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앎에서 일종의 즐거움, 그러니까 쾌감을 느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 공부는 지금과 같이 모든 학생들의 적이 아닌 유희의 일종이었다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앎의 즐거움이란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다. 넓은 의미로 살펴본다면 연예인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는 행위도 앎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비록 난 TV에 누가 나오든 '얼굴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에서 멈추지만.

그렇다면 이 즐거움은 어디에서 왔을까? 과제가 너무 많아서 하기 싫으니까 이런 생각만 하게 되는데, 일단 그런 현실은 전부 잊어버리고 이 즐거움의 뿌리를 찾아 삼만리 여행을 떠나보자. 먼저 확실한 사실은 지식이 많은 개체가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글을 쓰는데 무의식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 이 글에 인용된 글에서 말하길 지식보다는 추론능력이 중요했을 것이라고 하지만, 추론은 언제까지나 지식을 추상화하는 연장선에 서 있다. 결국 성인이 추론만 이용해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듯이, 어느 정도 충분한 양의 지식이 축적되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많은 문장을 접할수록 더욱 명문을 쓸 가능성이 높아지듯이, 대체적으로 많은 지식이 축적될수록 추론능력은 발전한다.

그렇다면 이제 진화심리학으로 돌아서 보자.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즐거움으로 기억하는 생명체는 생존에 유리하다. 이건 당연하다. 거식증에 걸린 사람이 오래 연명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연 상태에서 먹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생명체가 연명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수 많은 2세들이 생겨났을 때 앎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2세가 있고 앎에 의욕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2세가 있을 때, 생존에 유리한 2세가 자손을 남길 확률이 높으므로 자연적으로 앎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생명체가 세상을 가득 메울 것이다. 우리는 그 후손이다. 본능적으로 앎의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성 피드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식은 보상을 가져온다. 더욱 많은 지식은 더욱 많은 보상을 가져온다. 용돈을 더 많이 준다고 하면 공부에 열심인 것이 단순한 초등학생들의 세계 아니던가?(비록 많은 초딩들은 화내겠지만) 그런 간단한 사회 말고도 실제의 복잡한 사회에서도 기술, 노하우 등에 대한 지식은 확실한 보상을 가져온다. 괜히 많은 사람들이 자기계발서를 들춰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앎에 대해 보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조건반사라는 것이 생겨나게 된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종소리(지식)에 대해 침을 흘리는(쾌감을 느끼는) 것이다.[각주:1] 앎의 즐거움은 본능적인 데다가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즐거움인 것이다.



'이야기'라는 대상도 이런 관점의 연장선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것, 그러니까 지식을 나눈다는 것이다. 이 논리를 따라간다면,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은 앎의 즐거움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논의까지 하자니 과제가 기다리고 있어서 일단 여기에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쾌감이라는 것을 생각하다 보니 떠오른 것인데, 앞으로 문화산업(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절대로 무너질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늙은이들이나 할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현대 사회는 보다 쾌락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중세 시대에 원나잇이란건 교회 앞에서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존재하기는 하지 않던가? 성에 대한 쾌락이 이렇게 발전(?)했다면, 앎에 대한 쾌락도 또한 비슷한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으리라는 근거는 없다. 거기에다가 앎에 대한 쾌락을 부정하는 사상은 여태 존재한 적이 없지 않던가?

그런데 우리나라는 삽질에 올인하잖아? 우린 안될꺼야 아마
  1. 정확히는 '앎에 대한 충동'이 더 올바를 것 같지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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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티스토리 댓글 베스트와 트랙백 베스트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개콘 동혁이형마저 퇴출당하나 (하재근)

글에서 말하는 익명의 '보수단체'는 내가 알 바 아니지만 등록금 상한제와 같이 '직접적으로 등록금을 규제하는 것'이 포퓰리즘적인 정책이라는 비판에는 한 마디 해야겠다. 아니, 난 오히려 사회 구조를 아예 뿌리부터 뒤집어 엎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등록금 규제는 필요를 넘어 필수라고 생각한다.

이미 이전 글에서 끌어들여온 명제이기는 하지만, 등록금과 같은 사항은 자유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등록금 규제에 반대하는 사람 대부분의 입장이다. 오히려 시장을 규제하려고 들 때 더 큰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신문기사를 하나 또 열어보자.

"대학 등록금 상한제는 장기적으로 毒" (아시아경제)

진리를 쫓고 계시는 대학원장님께서 이런 무리한 주장을 하신다니 진리의 빛은 너무나도 강해서 눈을 멀게 만드나보다. 아니면 강렬한 진리의 빛을 필터링하느라 현실도 필터링하게 되셨는지도. 물론 여기서 나오는 근거 자체는 맞다. 가격을 억지로 조절하려고 들면 시장 자체가 붕괴해 버린다는 것은 경제학 개론 정도만 공부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안 원장은 가격을 통제했을 때 의도와 달리 더 큰 대가를 치르는 결과를 초래했던 역사적 경험을 근거 사례로 제시했다.

프 랑스 혁명 당시 생필품 가격이 올라 시민들 불만이 커지자 우유 가격을 올리는 상인은 단두대에 보내겠다는 엄포가 내려지자 우유 가격은 금세 급락하고 가격 통제 정책이 성공을 거두는 듯했으나 농민들이 젖소 사육을 포기하면서 공급량 부족으로 다시 가격이 뛰기 시작했다는 것. 결국 우유는 시민이 아닌 귀족들만 마실 수 있는 식품이 됐고 시민들의 불만은 예전보다 더 커졌다는 논리다.

이 에 앞선 284년부터 305년까지 로마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시민들의 생계를 돕기 위해 곡물 가격을 통제했으나 출하가 줄어 심각한 식량 부족 현상이 나타났고 결국 굶어 죽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안 원장은 설명했다.

식품만이 아니다. 가난한 세입자들을 위해 임대료를 통제했을 때도 결국 임대료가 치솟아 이사도 어려울 뿐더러 주택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도시가 황폐화됐다는 것이다.[...]
위 기사에서 인용

하지만, 그 사례를 대학에 적용하는 지점에서 주장의 허구성이 드러난다. 왜냐? 우유나 곡물, 주택과 같은 대상은 '누군가가 소비하면 나는 소비할 수 없다'. 남이 마신 우유를 위장 갈라서 꺼내마실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교육은? 강의실이 조금 바글거리기는 하겠지만, 대학강의를 내 옆자리 철수가 듣는다고 해서 내가 못 듣게 되는 것은 아니다. 특허나 학계가 작동하는 원리와 똑같다. 지식은 나누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식은 나눔으로 더욱 커질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접하고 새로운 지식을 덧붙이기 때문이다. '대학 강의'라는 물건은 우유나 곡물과 같이 소비되어 사라지는 물건들과는 다르게 공급비만 충분히 주어지면 거의 무한정 공급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유의 사례'를 바탕으로 한 대학원장의 주장이 현실과 괴리한다.

[...]안 원장은 "대학 등록금을 억제하면 대학 수입과 함께 장학금 규모가 줄어 가장 큰 피해자는 가난한 대학생이 될 것"이라며 "재원이 부족하게 되면 대학의 발전과 양질의 교육에 대한 투자도 줄게 된다"고 지적했다.[...]
위 기사에서 또 인용

그리고 원장님은 학문에만 열중하셨더니 장학금이 왜 필요한지 잊어버리신것 같다. 대학생들이 장학금을 받는 이유는 '등록금을 대기 위해서'이다. 등록금이 낮다면 애초에 장학금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반박의 근거로 이용한 '공급비만 충분하면 무한정 공급이 가능한' 특징이 없다고 하더라도, 등록금 규제가 필요한 이유를 또 댈 수 있다. 이 이유는 원장님도 잘 아시는 것 같으니 한번 들어보자.

[...]그는 이어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대학 교육을 받는 대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해 대학 등록금을 규제할 것이 아니라 대학 간의 경쟁이 제대로 되고 있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라며 "경쟁이 있으면 대학들은 될 수 있으면 낮은 등록금으로 질 좋은 교육을 제공하려고 할 것이지만 우리나라 대학 교육에는 이런 경쟁 구조가 없다"고 지적했다.[...]
다시 또 인용. 이거 사골 우려내면 뽀얀 국물이 나올 것 같다.

그렇다. '대학강의'라는 제품이 사고 팔리는 시장에는 경쟁이 없다. 이해하기 쉽게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자면, 대학강의 시장은 독점시장이다. 그리고 독점시장에서는 효율 극대화를 위한 국가의 개입이 정당화된다. 무조건 자유가 최고라고? 천국에서 차를 마시던 애덤 스미스가 울겠다. 경제학 공부한거 맞니?

독점시장이 아니라는 분들을 위한 퀴즈. 다음 두 가지 선택지만 존재한다면, 어느 대학에 가시겠습니까?

1. 대학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이 벌벌 떤다는 명문대. 단, 등록금은 엄청 좋은 직업이라도 7학기 등록금을 7년에 걸쳐 갚기 힘들 만큼 비싸다.
2. 대학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이 대학 맞냐고 묻는곳. 단, 등록금은 0원.
3. 일본을 공격한다.

내 주변을 돌아보면 백이면 백 전부 1번을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간혹 3번이 있긴 하지만)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들 주변도 그다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학생이 자신이 진학할 대학을 고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 대학이 받아들일 학생을 고른다. 판매자가 구매자를 결정하는 시장이 과연 제대로 된 자유시장인가? 진짜 자유시장에서 주도권은 구매자에게 있는 법이다. 그리고 이런 시장에서는 국가가 어떻게든 개입해야 시장이 붕괴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포퓰리즘은 개뿔. 진짜 포퓰리즘이라면 '전 국민에게 명문대 졸업장을' 정도는 되어야지.



사실 링크걸어 놓은 이전 글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이 문제가 다시는 튀어나오지 않게 확실히 묻어버리는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완벽한 답이 있다. '졸업장 필요없는 사회'. 이 사회가 그 위치를 능동적으로 찾아나서든 어쩌다가 날벼락을 맞고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져 결국 거기로 귀착하든 결국 졸업장이 필요없는 사회가 오기는 올 것이다. 어차피 대학 수준의 고등교육을 필요로 하는 직업은 전체의 50%도 될까 말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지나갈 곳이라면 강제로 가는 것보다는 능동적으로 가는게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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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10. 3. 4. 22:34 Writer

단상

인터넷에서 이른바 중2병이라고 통칭(?)되는 현상에 대해 쓰다가 만 글이 있다.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은거라 그 책에 대한 설명을 쓰다가 어떻게 끝맺을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 비공개로 돌려둔 글인데, 요지는 '중2병'이라는 현상이 명품 밝히는거나 허세부리는거나 그게 그거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누구보다빠르게난남들과는다르게'를 소비하는 방식이 다를 뿐, 본질은 같다는 의미이다. 물론 여기에는 중2병을 까는 사람들의 우월감도 포함되고, 이런 글 싸지르고 있는 내 근자감도 포함된다.

사람사는 곳 다 똑같다니깐. 아마 2만년이 지나 스타크래프트의 프로토스처럼 정신체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모를까 절대 변하지 않을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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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쓰다 말다 쓰다 말다 해서 적절한 발행 시기가 지난 것 같지만, 어쨌든 발행은 해야겠다 싶어서 마무리지어 내보낸다.



얼마 전 사형제에 대한 위헌심사청구에서 헌재는 결국 사형제는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 사형제 합헌결정 (매일경제)
'두번째 합헌결정' 숫자로 본 사형제 (조선)

반응은 다양하지만, 대체적으로 '아쉽다' 쪽으로 굳어지는 것 같다.

<사형제 합헌에 탄식한 `사형수 대모'> (연합뉴스)
[시론] 사형제 합헌 결정을 바라보며 / 공지영 (한겨레)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어떤 판단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에 따라 불편할 수 있음을 미리 전제해두고 시작하겠다.



고등학교 시절에 이 내용으로 토론을 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난 사형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는데, 지금은 바뀌었다고 해야할 것 같다. 당시 토론에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연쇄테러범과 같이 혹시라도 탈옥에 성공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회를 위험하게 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를 위해 사형은 이름뿐이더라도 남아있어야 한다'

돌이켜보면 살짝 어긋난 부분이 있다. 저런 극단적인 경우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지금 미국이 중동에서 눈에 불을 켜고 누구를 찾아 헤매는지는 모두 알지 않는가) 저 때에도 일반적인 법이 적용된다고 가정한 것이다. 저런 상황에서는 평상시에 적용하는 법이 아닌 전시에 사용되는 법이 적용된다. 사형제도가 폐지되든 말든 전시 특별법이 적용되는 상황에서는 누가 되더라도 죽기 마련이다. 그리고 전시에 적용하는 특별법을 만드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군대가 없는 세상이란 불가능하니까.



사실 '인간성'이라는 질적인 가치를 완전히 배제하고 이 문제에 접근한다면 사형제도는 필수적이고, 자연은 이미 사형제를 택하고 있다. 인간의 태아는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를 가지고 있지만, 점차 자라나면서 물갈퀴를 만들던 세포가 죽어 손가락의 모습을 갖추어 나간다. 이런 세포자살(apoptosis)이 없다면 생명체는 제대로 발생하지 못한다. 사회라는 것을 하나의 생명체로 가정한다면, 불필요하고 또한 후에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성원을 제거하는 것은 당연히 있어야만 하는 사건이다. 종신형에 처한 사람들이 사회에 돌아갈 세금을 축낸다는 것을 제외하고 사회에 도대체 어떤 영향을 준단 말인가?

물론 문제는 그처럼 간단하지 않다. 세포자살은 어떤 세포가 너무 오래 생존해서 암세포로 변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일어난다. 일종의 생명체판 고려장인 셈이다.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현대 사회에 고려장을 부활하자고 주장한다면 정신병원으로 후송되고 싶다는 것을 만천하에 광고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는다.[각주:1] 세포는 복잡하기는 하지만, 인간과는 매우 다른 역학을 가지고 움직이기에 생명체를 사회로 치환해서 동일한 논리를 적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군다나 사회와 생명체는 각자 다른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유기체 아니던가?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간은 빵만 가지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먹고 잘 곳이 있으면 옷과 TV를 요구하는 것이 인간이다. 어디에선가는 '인간성'이라는 것이 개입되어야만 한다.



사형제를 반대하는 주된 논거 중 하나는 '신이 내린 목숨을 인간이 심판할 권리가 어디 있는가'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신을 믿는 사람들만 공감할 수 있는 근거이기 때문에 다루지 않겠지만, 잘 살펴보면 무신론자들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신이 내린 목숨'을 '인권을 가진 인간'으로 바꾸면 사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논리로 변신한다.

인권이라는 것을 정의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겠지만, 지금의 논의에서는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과 같이 구체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단순히 '인간성을 유지할 선천적 권리'정도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남은 인생을 좁은 감방에 가두어 두는 것이 인간적인가, 아니면 그런 긴 고통대신 짧은 고통으로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 인간적인가.

이렇게 질문을 바꾸면 사형제도 찬반은 안락사 찬반과 맞닿는 지점이 생겨난다. 인간으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시체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논쟁 말이다. 보통 사형이 거론될 정도로 죄질이 나쁘다면 형벌을 받지 않고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하지 않고, 대체적으로는 종신형이 선고될 것이다. 더불어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이런 범죄자들이 수감될 감방은 들판처럼 넓지 못하다. 양계장의 닭과 같이 좁은 방에서 남은 일생을 지내도록 만드는 것은 과연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아무리 종신형이 비인간적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성이 회복될 여지는 남겨두지만 사형은 인간성이 회복될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행동이라는 사실 말이다. 가능성이 남아있는 것과 가능성의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위의 주장이 철학적인 기반에서 이루어졌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현실적인 근거를 다루어보자. 사형은 앞선 링크에서 공지영씨가 말한 바와 같이 '국가가 개인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이다.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사형이란 제도 자체는 근본적으로 국가에 의한 개인살해이란 말이다.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하면, 사회가 자신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구성원을 내몰고 살해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역사를 통해 몇몇 앞선 정치인들, 또는 사상가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혹자는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그런 야만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깔끔한 반례를 가지고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산화해간 유대인들은 그들이 태어났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나치 이전의 독일은 야만적인 국가였는가? 이 사건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비슷한 일은 지금 중동에서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뀐 채 일어나고 있다. 문명이라는 것은 거기에만 의존하기에는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이다.

하지만 문명의 연약함은 구조라는 경직된 보조장치로 견고하게 다질 수 있다. 사형제도를 개정하는 것으로 이런 구멍을 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사형제도를 실시하는 조건을 매우 엄격하게 제한해 놓으면 될 것 아닌가? 비록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넣고 실수했음을 자인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지 않았던가. 당장 검색창에 '재심', '무죄'라는 단어를 치고 검색해보라.



이번에는 좀 더 근본적인 지점으로 돌아가보자. 사람들은 인권이 침해되기 때문에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인권은 누가 갖는지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우리는 인육을 먹고 밤거리를 배회하며 사냥감을 찾아 헤매는 사람을 인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을 정의하는 방법은 크게 보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순수히 생물학적인 정의이고, 나머지 하나는 순수히 철학적(?)인 정의이다. 전자를 먼저 살펴보면, 외형이 인간답게 생긴 그러니까 둥그런 머리가 위에 붙어있고 사지가 몸에서 뻗어나와 있는 벌거벗은 생명체가 된다. 하지만 이 정의가 애매한 이유는 우리가 주로 만난(났다고 상상하는) 외계 생명체도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불의의 사고로 한 팔을 잃었다고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지 않은가? 좀 더 엄밀한 생물학적 정의를 따르면, 종은 '재생산할 수 있는 2세를 만들며 다른 집단과는 보통 생식하지 않는 생명체 무리'이다. 단어만 어렵지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으므로 이게 도대체 무슨소린가 싶으면 다시 읽어보길 바란다.

이 정의를 이용한다면 매우 깔끔하기는 하지만, 몇 가지 사소하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 첫 째, 생식불능[각주:2]이면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이 문제는 '정상적으로 자라는 경우'라는 단서를 다는 것으로 쉽게 피해갈 수 있으니 무시하자. 둘 째, 인간도 결국 진화라는 자연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두번째에는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시간이 충분히 흘러 사람들 사이에 생식불능인 2세가 나타나는 조합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직은 먼 세상의 이야기이니 지금은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두 번째 가능성인 '기술의 발달로 누군가 DNA를 가지고 장난쳐 그러한 생명체가 태어난 경우'를 생각해보자. 원숭이와 인간의 DNA를 여차여차 잘 조립했더니 사람과 아이를 낳으면 재생산이 가능한 생명체가 등장한 것이다. 인간복제도 높은 가능성 때문에 심각한 문제로 다루어지는데 이런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 경우 이 새로운 생명체는 인간으로 보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인간의 두 번째 정의, 철학적으로 인간을 정의하는 것을 살펴보자. 물질보다는 그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인간이 되려면 이른바 '제대로 된 이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기준을 들이댄다면 사형제도 자체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니 간단하게 해결되기는 한다. 하지만 기준의 모호함을 둘째 치더라도 '이성만 갖추면 인간이다'라는 주장은 외계인들에게도, 좀 더 나아가서 인공지능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부분에서 문제가 생긴다. 과연 기계'따위'에게 인권을 주고 싶어 할 '성인군자'가 존재하기나 할까? 기계에게도 인권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1900년대 초반의 백인우월주의보다도 더 커다란 공감을 얻을텐데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Matrix) 외전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기계들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인간의 배타성 때문이었다.

여태 순수수학처럼 현실에는 존재하지조차 않는 대상들을 다룬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대상을 너무나도 당연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물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물 밖으로 나오는 수 밖에는 없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의미없는 탁상공론이라 비판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탁상공론이 문명을 만들어오지 않았던가.



맨 처음 글에서 강조한 것처럼, 이 글에는 결론이 없다. 다만 이 긴 글을 전부 정독하셨을 일부 열혈 독자들을 위해 아무도 답하고 싶어하지 않던 수수께끼를 하나 남겨놓겠다. 어쩌면 위 글 전부를 필요없었던 말장난으로 만들어버릴수도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뭔데 인간만 인권을 갖냐?'
  1. 물론 고려장과 같은 제도는 구성원의 불안감을 조장하기 때문에 비효율을 증가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효와 같은 개념이 일종의 사회적 보험처럼 발전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본문으로]
  2. 속된 말로, '고. 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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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MB “등록금 싸면 좋지만 교육 질 떨어져” (데일리안)

가끔 헛소리 속에서도 무언가를 건져낼 때가 있다. 가끔씩 웃는게 웃는게 아닌때가 있는데, 이런 경우도 그 중 하나이려나.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어쨌든 기사를 읽다보면(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접속불량이었다) 무언가 건저낼만한 논리는 존재한다.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린다는 것. 중학교 공부만 제대로 해도 가격은 수요와 공급으로 조절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전체의 80%가 넘는 고등학생이 대학으로 진학한다는데 이건 당연히 고학력자의 초과공급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부제목, '사람이 적게 필요한 분야에서 많은 학생 공부하면 안돼'가 틀린 말은 아니다.[각주:1] 예컨데 제대로 따진다면 공대생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난 이유는(그리고 이공계 기피현상이 생겨난 이유는) R&D에 투자하는 비용이 적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관련 직업군에서 일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단이 맞더라도 처방전이 영 아니면 환자는 한방에 훅 간다. 요즘들어 계속 등록금상한제가 등장하는데 언제까지나 고름을 잠시 짜는 것이 될 뿐 환부가 낫지 못하면 고름은 언젠가 다시 차기 마련이다. 대통령이 입에 올린 직업학교는 언제까지나 실업대책일 뿐 등록금 대책은 아니다. 더군다나 대학생보다는 실업자 위주로 개편해서 실업자 구제대책을 활성화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대학생만 직업을 구하는 것은 아니니까.

초장기적인 대책이지만[각주:2]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학을 진짜 가고싶어하는 사람들만 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인구의 30% 정도만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한다면 등록금이 이렇게 큰 문제가 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인구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하는가?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한다면 복지를 강화해서 대학에 가야만 하는 필사적인 이유를 제거한다면 등록금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던 것 같은데 여유로운 사회가 되어야 해결된다는 말이다.

물론 대학 등록금 문제가 사라진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좋은 뜻'만 가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 대학 등록금 문제가 사라진다면 계급이 고착된다 즉 개천에서 용나는 것이 더욱 힘들어진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각주:3] 언제까지나 최상의 방향으로 사회가 발전한다는 가정에서의 이야기이지만, 이전에는 비좁은 개천에서 말라죽지 않기 위해 용이 되려 죽음을 각오하고 애쓰던 잉어들이 이제는 개천을 마음껏 휘젓고 다녀 용이 될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설명하면 될 것이다. 공자시대부터 내려오는 태평성대의 현대적인 모습이다. 귀족은 자애롭게 통치하고, 농민은 풍년을 즐긴다에서 귀족을 정치인 가문으로, 농민을 일반 노동자로 바꾸면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간혹 농민이 귀족으로 상승하고 귀족이 농민이 되는 일은 현대에나 존재하지만.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잉어가 말라죽지 않으려 용이 되려 해도 개천 위에 쳐저 있는 그물 때문에 용이 되지 못하는 사회이다. 자본이 사실상의 권력인 현대에는 워킹푸어(working poor) 즉 일해도 가난에서 못 벗어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사회이며 마이크로크레딧(micro credit)이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사회이기도 하다. 문제는 얼핏 흐름을 보아서는 이쪽 방향으로 수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복지를 삭감하면서까지 세금을 줄인다면[각주:4] 그 세금은 투자로 이어져서 생활수준을 전체적으로 높여야 하는데 부동산이라는 매력적인 투기처를 제끼고[각주:5] 설비에 투자할 사람이 과연 그렇게 많을까?


어떻게 해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으려나. 뭐 이 나라가 잘못된 투표 한두번에 쫄딱 망할 정도로 허약한 체질은 아닌 것 같고 이런 고민을 나보다 깊게 하는 고민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만, 가끔씩은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한다. 심심해서 사회란으로 발행.
  1. 때문에 사실상 수요가 증발해가는 학문을 할지 말지를 더욱 고민하고 있다. 과연 내가 이 적은 수요를 차지할 수 있을 만큼 능력있을까? [본문으로]
  2. 하지만 아무리 길어도 두 세대 정도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 같다. [본문으로]
  3. 이것도 뒤집어 말한다면 아직 계급이 굳어지지 않을 정도로 자본주의가 정착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본문으로]
  4. 복지가 줄어든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 그러면 그 많은 세수는 어디서 빵꾸난 것일까? 그리고 인플레이션이라는 복병도 고려해야 한다. [본문으로]
  5. 아직도 매력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두가 매력적이라고 믿는다면 부동산은 매력적인 투기대상이다. 버블의 구조와도 유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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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10. 1. 23. 12:56 Writer

무적의 거짓말: 통계


자주 보는 만화중 하나인데 이건 진짜 대박이다 싶어서 긁어왔다. 마침 이항분포의 극한이 정규분포라는걸 증명하느라 끙끙대고 있기도 했고 해서 이번 글은 눈길이 가는 4번에 대한 설명. 나머지 셋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여기서 질문 하나. 대통령 지지율은 어떻게 산출할까? 두 설문지를 준비했다.

설문지 1

최근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1. 아주 잘하고 있다.
2. 잘하는 편이다.
3. 보통이다.
4. 못하는 편이다.
5. 아주 못하고 있다.

이 경우 지지율은 전체 응답자 수 대 1, 2로 답한 응답자 수가 된다.

설문지 2

최근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1. 아주 잘하고 있다.
2. 잘하는 편이다.
3. 못하는 편이다.
4. 아주 못하고 있다.

1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설문지 2에서는 3번 항목 '보통이다'를 제외했다. 이처럼 중립평가를 제외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첫 설문지에서 3을 선택했을 사람들이 전부 잘하는 편인가 못하는 편인가를 결정내려야만 한다. 결과적으로는 지지율이 살짝 오른다. 물론 중립평가를 선택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면 지지율은 급등할 것이다. 어떻게 통계냈는지를 비교하지 않고 단순히 지지율만 가지고 대통령을 비교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이다.[각주:1] 열심히 써놓았더니 이런 글이 있었네 -_-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통계가 왜곡되는 상황중 하나를 링크해둔다.

통계라는 것은 미묘한 차이가 엄청나게 증폭되는 성격을 갖기 때문에 통계치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그 통계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재미있는 예로는 설문지를 돌리는 사람에 따라 통계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설문지를 흑인이 돌릴때와 백인이 돌릴때 통계가 변한다는 연구결과도 있고, 좀 더 가까운 예라면 소개팅에서 더치페이에 대한 설문지를 남자가 돌릴때와 여자가 돌릴때의 응답이 있다. 일반적으로 설문지를 작성하는 사람들은 설문지를 돌린 사람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결론은, 숫자도 볼 줄 아는 사람이 제대로 써먹을 수 있다는 것과, 숫자만큼 사기치기에 좋은 수단도 없다는 것? 세가지 거짓말이 그냥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과 통계라는 누구의 말을 잘 새겨두자.[각주:2]


ps. 고등학교때 다닌 수학학원 선생님 曰: 통계에 강한 사람들이 돈을 잘 번다. 왜 생각난거지...
  1. 지지율의 경향성은 비교적 훼손되지 않겠지만, 그건 하나의 대통령의 지지율을 비교하는 척도가 될 뿐 대통령끼리 비교하는 척도가 되지는 못한다. [본문으로]
  2. 마크 트웨인이 유행시킨 말이라니 놀랐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발단 : 「W 이론」의 창시자 - 서울工大 李冕雨 교수의 경고
부제 - 理工系 기피 현상은 한국이 조선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 (월간조선)

2004년 글. 자주 들르는 커뮤니티에 올라왔길레 짧은 감상평.

1. 기술은 중요. 자원이 없으면 희귀한 기술이라도 가져야지.
2. 이공계 답이 없는것도 정답. 그런데 이 문제는 복합적인 거라서 이공계 input이 과도하게 많다 + 위에서 기술의 중요성을 모른다 두가지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3. 기술도 중요하긴 하지만 더 쉽게 먹고사는 법도 있다. 문화. 물론 문화를 뒷받침할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각주:1] 근본적으로는 기술이 문제라고 볼 수 있을지도.

1, 2번은 대충 넘어가고, 3번은 이런 것이다. 잘 만든 영화 한편 팔아먹으면 자동차 수십만대를 팔아도 별 볼일 없어 보이게 만드는 것이랄까? 영화는 나름대로 잘 나가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문학을 생각해보면 정말 답이 없다. 우리는 브라질의 소설을 서점에서 돈 주고 사 읽는동안(대표작가 파울로 코엘료) 브라질의 사람들은 대한민국 소설가의 소설 제목을 알기나 할까? 미국이나 서유럽은 세계경제의 틀을 짜는 문화권이니 그쪽에서 우리를 전혀 모르는 것을 그렇다 치더라도, 브라질 정도면 대한민국하고 대충 경제/문화수준은 비슷할 것 같은데.[각주:2] 옆나라 일본은 일단 경제수준의 차이가 크다고 하더라도 1Q84가[각주:3] 영문위키백과에 등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일본 문학쪽은 꽤 잘 나가고 있는 것 같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긴걸까?

사실 이런 이유는 만들어서라도 댈 수 있다. 이미 후발 주자가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선도그룹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서일수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는 패배주의자들이 말하는 국민성도 댈 수 있다.[각주:4] 하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경제적인 여유.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 출발한다. 미친듯한 입시경쟁도 결국 '대학 못 들어가면 거지 꼴을 못 면하니까' 그런 것이고, 인문학과 순수과학이 고사하다 못해 화석까지 증발해버릴 정도인 이유도 '그거 전공해서 거지 꼴을 못 면하니까' 그런거다. 어떤 의미로는 마르크스가 말한 '경제적 토대가 사회를 규정한다'(맞나?)가 정확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결론은 아직도 틀렸다고 생각하지만.[각주:5]

결국 나는 좀 더 많은 임금인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부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모두가 야근없이 일주일에 8시간씩 5일 일하고 취미 하나에 몰두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적어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제수준을 생각해 볼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닐까?

뭐, 어차피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거울 속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작년에 신입사원 연봉을 얼마나 깎았더라?
  1. 인터넷이 대표적인 예이겠지만, 산업혁명 이전이라도 기술은 문화의 형성에 매우 중요했다. 예컨데 우주를 정교한 시계에 비유하는 세계관은 기계적인 시계가 없었다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고, 세계관은 문화의 가장 큰 중심축 중 하나이다. 더불어 도시가 형성될 수 있는 각종 기술들이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삶은 현재와 매우 달랐을 것이다. [본문으로]
  2. GDP에서는 밀리지만 1인당으로 따지면 월등히 앞선다. [본문으로]
  3. 읽어보진 않았지만 광고를 찌라시 뿌리듯이 하니 모를 수가 없더라 -_- [본문으로]
  4. 사람이 달라야 얼마나 다르다고 그런 소리를 해 대는지는 모르겠다. 문화가 다르다는 것은 납득이 가기는 하지만 문화야 바꾸면 되는거 아닌가. [본문으로]
  5. 요즘 책을 읽다가 보니 내가 공산주의에 대해 오해했었던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결국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개인적인 재산과 생산에 사용되는 자본을 엄밀히 구분할 수 있을까? 미래에 기술이 발달하면 한 사람이 하나의 공장만한 생산성을 갖추게 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고, 그가 그렇게 미사여구로 극찬하던 공산주의 세계는 헌법을 뒤적거리지 않는 한 복지가 매우 강화된 자본주의 세계와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학점이 잘 안 나와서(여러 일이 겹쳐 바빴던 것도 있지만) 기분이 그렇지 않아도 다운되어 있는데 문화일보에서 다음 기사를 냈더군요.

해돋이 명소 모텔 ‘1박에 16만원’ (문화)

싸이월드에서 본 기사인데, 댓글들 보다가 그냥 시비 한번 걸어봅니다. 법으로 저런 것 막아야 한다고 댓글(그것도 베스트 2위)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게 자본주의거든요? 싫으면 혁명 일으키던가.(나쁘지 않은데?)

더불어 줏어먹는 조선일보.

호텔비만큼 비싸네… 해돋이 명소 모텔 1박 16만원(조선)

조선일보는 불리해보이는 기사는 다 '어디서 저런대더라'라고 쓰는 습성이 있는듯. 기분탓이겠죠.
Posted by 덱스터
아바타 - 6점
제임스 카메론

25일의 금요일 이후 첫 글이네요.(24일은 목요일, 25일은 금요일...)

제목이 전부입니다. 진짜 그래픽 말고는 건질 것 하나도 없는 영화. 덕분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첫 장면뿐이네요. 얼굴 앞에서 물방울이 떠다니는 장면이죠. 3D 안경을 쓰면 화면 위에 물방울이 떠다니고, 안경을 벗으면 얼굴이 보이고 물방울은 나뉘어 보이고.(아니면 딱 두 장면이 전환될 때 안경을 쓴 것이거나)

그래픽은 일단 넘어가고, 내용은 조금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더군요. 스포일러 위험.


제가 기분 나빠서 이런 평가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연말에 이리저리 치여사는게 짜증나긴 하지만...
Posted by 덱스터
RSS 구독목록 중 재미있는 글이 올라왔다. 이 글은 그냥 그 글에 대한 주석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 싶다.(사실 공부가 안되서 쓰는 글이다)

호모 리시프로칸으로서 트위터리언들의 선택, 보복, 그리고 신뢰 (Gatorlog)

먼저 관련있다고 생각하는 책 리뷰 하나를 링크로 걸어둔다.

2009/03/16 - 게르트 기거렌처, [생각이 직관에 묻다]

호혜적 인간이란 말 그대로 은혜를 입으면 갚는 인간을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은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은혜보다는 넓은 개념이어서, 혜택이나 이익 뿐만 아니라 불이익까지 포함한다. 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실현하는 인간이라는 말이다. 거기에다가 이런 은혜를 갚을 때 자신은 충분히 비용을 지불할 의사를 갖는다. 내가 죽더라도 널 지옥에는 보내야겠다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호혜적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왜 이런 인간이 만들어졌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호혜적 인간에 '생물학적 뿌리'가 있을까? 악한 일을 행한 자에게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벌한 사람은 쾌락 중추가 반응한다. 이것은 악한 자에게 벌하려는 욕망이 자연적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1]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가진지는 관련 자료를 찾아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마도 상당히 높은 비율로 인간에게 나타날 것 같다.

얼핏 생각해본다면 쓸데없는 비용을 지불하려는 사람은 도태되어야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손해를 야기하는 구성원을 도태시키려는 사람이 없는 집단은 부패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집단 자체가 무한히 단단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는다면 자기에게 손해가 가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는 행동이 선택되어도 좋다. 분명히 그런 행동의 취하는 구성원이 몇 배는 더 잘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집단이 무너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느 정도 집단을 단단히 유지시켜주는 행동이 선택되어야만 생존이 보장된다. 집단이 무너지면 아무리 잘 나가던 구성원도 한순간에 몰락하고 말 것이다. 미국 정부가 갑자기 사라져 달러화의 화폐가치가 사라지면 제아무리 빌 게이츠라고 해도 달러화밖에 갖지 않은 사람은 알거지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진화는 집단 단위로 일어난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진화는 그 구성원이 가진 모든 유전자들의 집합(이것을 유전자 풀-gene pool-이라고 한다)이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각주:2] 여러 집단이 있고 집단 단위로 진화가 이루어진다고 할 때, 어느 정도 집단이 서 있을 수 있도록 모아주는 행동방식이 진화에 의해서 선택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호혜적 인간이 많은 집단이 자연적으로 선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그 집단 내에서도 악행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이익이 남기 때문에, 집단이 위태롭지는 않을 만큼의 이기적인 행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살인을 하려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어느 정도 거짓말을 하고 사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생각해보면 생물학, 특히 진화와 관련된 분야의 생물학과 경제학은 많이 닮아있는 것 같다. 서로 배울 부분이 있는가는 내가 그쪽을 깊게 공부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있을 것 같다. 특히 경제학을 '효율적인 집단의 틀을 짜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자연이 효율적인 집단을 선택해왔는가는 고려해보는 것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p.s. 자연계 자체와 자본주의의 구조 사이에는 어느 정도 닮은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지금 쓰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고, 나중에 제대로 떠오르면 한번 써 볼까 한다.
  1. 여기서 선택이라는 단어는 자연선택과 같이 일반적으로 쓰이는 선택이라는 단어와는 살짝 다른 의미를 갖는다. 자연이 직접 지목하여 선택하는 것이 아닌, 다른 선택지가 제거되어 강제적으로 채택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2. 가끔 가다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진화의 예시로 검은 날개 나방과 흰 날개 나방의 예를 드는 것에 태클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새가 잘 보이는 나방을 잡아먹어서 숫자가 변한 것이라는 주장인데, 그게 진화이다. 사람들이 진화를 아주 큰 변화로만 착각하는 것 같은데, 진화는 매 순간 일어나고 있다. 진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집단의 구성원이 불변, 즉 불로불사한 구성원만 존재할 때 뿐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인류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런 집단은 실재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세종시 갈등' 차기 대권경쟁으로 확산 양상 (서울경제)

[...]
친이명박계의 한 관계자는 "정 총리가 총장이었던 서울대의 공대를 세종시로 이전하는 방안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인사청문회를 겪으며 대권주자로서 신비감이 사라진 지금 세종시 수정 추진을 성공시킴으로써 다시 유력한 대권주자로 나서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

세종시와 관련되어 여러가지 말이 많은데, 그 중 하나는 서울대 공대의 이전이다. 표면상의 이유는 공대를 세종시로 이전하는 것으로 산학연의 연계를 꿈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은 위의 인용문이다. 이공계는 '당연히' 고위 인사들의 말을 따를 것이므로 정치적인 카드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부에서는 이공계를 호구로 보고 있다는 말이다. 호구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반발을 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모두 곧이곧대로 따르는 사람이 호구이다.

언제 서울대 공대의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세종시 이전에 대한 의견수렴이 이루어졌는가? 난 그런 의견수렴 과정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기사를 검색해봐도 나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내가 하자고 하면 이공계는 당연히 따라오겠지'라는 정부 고위직들의 마인드이다.

고위직의 인식이 이런데, 이공계로 진학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누가 호구가 되고 싶겠는가? 흔히들 말하는 이공계의 위기가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세종시의 서울대 공대 이전계획은 서울대의 문제가 아니라 이공계 전반의 문제이다. 이번에도 조용히 넘어간다면, 이공계는 영원한 호구로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Posted by 덱스터
과제. 사실상 혼자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해서 올린다.(예약발행) 그다지 잘 쓴 글은 아니다.



동서양 천문학의 교류에 대한 소고

1. 서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하늘의 빛나는 별을 보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보잘 것 없는 밤하늘의 빛나는 작은 점일 뿐이지만, 칠흑조차 삼켜버린 어두운 밤하늘을 그 작은 점들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수놓았기 때문이다. 비록 현대에 와서 별은 단순한 아름다움 그 이상의 가치를 대부분 잃었지만, 이렇다 할 특별한 기술이 없던 시절에는 별이 중요한 지표로 이용되기도 했다. 방향을 알려주는 지리적인 길잡이의 역할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이나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선지적인 길잡이의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후자의 전통은 아직까지도 내려와 점성술(Astrology)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세상에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 각 개인의 삶은 다른 사람과 배타적으로 구분되며, 때문에 그들은 동일한 사건을 두고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구체적인 사건에서조차 느끼는 것이 다른데, 사람들이 극도로 추상적인 밤하늘의 빛나는 점들에게서 서로 다른 그림을 보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인류가 실제 허공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된 시대의 사람들은 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났던 옛 사람들과는 다르게 하늘을 보듯이 말이다. 물론 현대에는 빠른 정보교환이 이루어져 지리적인 거리가 우주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되었으나, 정보교환이 드물었던 시기에는 이 차이가 매우 컸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바라본 하늘도 매우 달랐을 것이다. 그 시대에 지리적으로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던 사람들이 별을 보고 서로 어떤 다른 상상을 했으며, 그 둘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가를 알아보는 작업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2. 본론

  별을 분류하고 관측하는 현대적인 의미의 천문학(Astronomy)은 본래 점성술의 정확도를 보장하기 위해 발달하였다. 이 글에서는 천문학과 점성술이 본격적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시대에 대한 논의가 주가 되기에, 모두를 천문학으로 통일해 사용하도록 하겠다.

  인류는 진화의 첫 시기부터 천문현상에 큰 영향을 받으며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여성의 생리주기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여성의 생리주기는 약 28일로 달이 차고 기우는 기간(삭망월)인 29.5일과 거의 비슷하다. 이 현상은 생식활동이 사냥을 나갈 수 없는 밤(달이 뜨지 않아 어두운 밤)에 주로 일어났기 때문에 이 주기에 맞추어 생리주기가 변화한 결과로 보인다. 인간이 문명을 이루어 군집생활을 할 때에도 천문현상에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천문현상이 가진 주기성은 계절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져 농경에 절대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 천랑성(Sirius)이 뜨고 지는 시각을 이용해 나일 강이 범람하는 시기를 예측했던 것이 한 예이다. 때문에 인류는 자연적으로 하늘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하늘의 상태에 의미를 부여해 초자연적인 존재의 의지가 나타난다고 보게 되었다.

  이런 신적 존재의 의지를 해석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나라와 같이 거대한 집단에 적용하는 것으로 동양에서 발달하였으며, 나머지 하나는 태어난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보다 작은 존재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서양에서 발전하였다. 우선은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오늘의 운세’로 많이 알려진 후자에 대해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다.

  서양의 천문학의 첫 발전과정은 동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밤하늘의 별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별들 사이의 상대적 움직임[각주:1]에서 초자연적 의지를 엿보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점쳤던 것이다. 때문에 고대의 천문학은 왕권이나 권력 수뇌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이것은 모든 문명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한편으로는 천문학이 국가와 마찬가지로 개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게 되었고,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바빌로니아에서 개인의 천운을 점치는 천문학이 등장하였다. 생시의 천문상태에서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현재의 결정론적인 점성학은 당시의 천문학이 이집트에 건너가 토속신앙과 결부되어 완성되었고, 그것이 그리스에 넘어가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동양에서도 대체적인 발전과정에 큰 차이는 없으나 천문학이 왕권의 전유물로만 존재하였다는 것에서 차이를 보인다. 아마도 『주역』의 사주팔자가 개인의 흥망성쇠를 점치는 주된 방법으로 자리 잡아 개인적인 천문학이 발붙이지 못한 것도 있겠으나, 서양에서의 하늘이 확고한 신의 뜻을 전달하는 매개체였던 반면에 동양에서 하늘을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인격체로 인식한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동양의 천문학은 사람의 마음을 읽듯이 진행되어야 하는 성격을 갖게 되었고, 관측에 대해서만큼은 상당한 정밀도를 보여줄 정도로 발달하였지만 천문학은 인문학에 가까운 성격을 보이게 된다. 물론 인도에서는 개인적인 천문학이 발달하였고,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면서 인도의 천문학도 중국에 유행하여 개인주의적인 천문학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런 추세는 결국 송대(宋代)가 지나 점차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이제 천문현상의 해석에서 하늘의 관측으로 눈을 돌려보자. 하늘의 관찰에서 가장 쉽게 차이를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은 별들을 연결인 별자리이다. 물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별자리는 존재하지만(북두칠성은 비록 상징이 다르더라도 많은 문화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많은 경우 별들은 다르게 연결된다. 이것은 백도를 따라 나열되어 있는 별자리가 12궁의 열두 개인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28수의 스물여덟 개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런 관측법은 상대적으로 정밀한 체계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인지 다양하게 발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편인 중국과 고구려의 전통적인 별자리가 서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 좋은 사례이다. 하지만 완전히 독립적으로 보이는 별자리 체계들 사이에서도 희미한 교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중국 고대 천문학의 12차(次)라는 하늘의 구역 분류법을 한 례라 하겠다. 12간지(干支)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분류법은 이집트에서 발달한 12궁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하늘에 매달린 관측기구가 아닌 지상의 관측기구로 시선을 옮겨보면 또 다른 현상을 볼 수 있다. 일월과 행성의 운행은 거대한 사건의 징조를 의미하기에 여기에 대해서는 동서양 양쪽에서 모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매우 오래 전부터 상당히 정확한 관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고대의 관측 자료가 현대의 천체물리학에서도 이용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얼마나 정확하게 천체의 움직임을 기록하였는지 알 수 있다. 더불어 현재 남아있는 많은 고대문명의 유적들 중 상당수가 4방위를 매우 작은 오차로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당시의 경이로운 관측기술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관측기술은 많은 경우 독자적으로 개발했다고 생각한다. 당시에 천체의 관측에 대한 기술은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기밀이었을 것이고, 이런 기밀을 쉽게 교류하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3. 결론

  다른 기술과는 달리 천문학의 경우 큰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인들은 서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어 있기에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주로 교환했을 것인데, 그 대상에 천문학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천문학이 교류하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기밀로 취급되었거나 교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나 천문학이 어느 정도 이상 발달한 문명에서는 더 이상 외부의 천문학이 유입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교류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보는 것이 옳아 보인다. 직접적으로 응용이 가능한 공학기술들과는 달리 천문학과 관련된 기술은 속세와는 거리가 먼 편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서양의 그리스 신화에 기초한 밤하늘로 별들에 대한 시선이 획일화되는 현재의 상황을 보며 다양한 시각이 사라져가는 현실이 우려되기도 한다. 별자리는 신화를 담고 있고 신화는 함께 살아왔던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담고 있으므로 별자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살아왔던 사람들의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들을 잃어버리기 싫다면, 하나의 신화만이 밤하늘을 독차지하기 전에 다른 신화들을 발굴해 내야 할 것이다.

4. 참고문헌

김일권,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사계절, 2008
쟝샤오위엔 저, 홍상훈 역, 『별과 우주의 문화사』, 바다출판사, 2008



대충대충 썼기 때문에 각종 참고문헌 소싱따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물론 책이 두권밖에 없는 것도 있겠지만(그리고 많은 부분이 기억 속에 재구성되어 있는 것을 짜집기한 것이라) 간단한 과제에서까지 그렇게 빡빡하게 써내야 하나 고민되어서 그렇다.

분량은 A4 세장정도. 그리고 이 글을 참고가 아닌 복사해다가 과제하려는 생각은 되도록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남의 글 그대로 베끼는 것인데 자존심도 없는가?
  1. 행성(行星)은 본래 ‘움직이는 별’을 의미한다. 고대에는 항성과 행성들 사이에는 움직임 외의 본질적인 차이는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만화] 지우개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이에 대해 찬반논쟁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그냥 생각해봤다. '낙태에 대해서 이렇게 그린다면, 소나 돼지에 대해서도 이런 만화를 그릴 수 있다'는 반발을 보면서 예전에 떠올리고 기억의 모퉁이에 버려둔 것이 다시 떠올라 끄적거려 본다.

기본적으로 저기서 핵심은 '무엇을 인간으로 볼 것인가'라는, 선긋기의 문제이다. 결국 대부분의 존재는 배타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데[각주:1] 지금은 그 문제를 보류하기로 하고(왜냐하면 도대체 '무엇이 인간이길레!'라는 나무에서 내려온 원숭이 시절부터 이어내려온 질문에 대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살짝 빗겨난 의문을 가져보려고 한다. '왜 생명체는 존재하려면 다른 존재를 해쳐야만 할까?'

생명의 일반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첫 째, 에너지대사를 할 것. 둘 째,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고 항상성을 유지할 것. 셋 째, 자기복제를 할 것. 쉽게 말하면 첫 조건은 무언가를 먹고 배설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 째 조건은 누군가 건드리면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것, 셋째 조건은 후손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체는 정의와는 다른 특징을 더 많이 갖는데, 진화라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점진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과 다른 생명체와 배타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 등이 있다. 여기서 내가 의문이 드는 부분이 왜 생명체는 전부 배타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는 부분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왜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의 시체를 넘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가?

상처를 소독하는 것도 결국 박테리아를 죽이는 것이며, 연명하기 위해 무언가를 먹게 되면 이제는 살해의 범위가 눈에 보일 정도로 큰 대상으로 옮겨지게 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공생이라고 부르는 두 종 이상의 생명체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현상을 가져다가 모든 생명체가 그렇지는 않다는 말을 하려고 할 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공생 또한 '더욱 강한 배타성을 가지기 위해 연대하는 것'일 뿐이다. 거기다가 식물은 보이지만 않을 뿐 매우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고 있다. 식물이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각종 화학물질들, 햇빛을 잘 받기 위해 다른 식물을 견제하는 현상[각주:2] 등을 안다면 결코 식물이 배타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결국 어떤 생명체든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다른 생명체가 죽게 되어있는 것이다.

자연 자체가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 레드오션이기 때문인 것일까? 아니면 공격적인 생명체 집단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무기와 관련된 과학이 발달했다면서 인류를 공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만약 수많은 외계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과 비교하더라도 그다지 공격적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비배타적인 생명체들, 즉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자들'에 대한 동경은 보편적인 것 같다. 가끔씩 가다 보면 광합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헛소리도 나오고, 충분한 수련을 거친 사람은 신선이 되어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수십 수백년간 살며 세상을 떠돈다는 이야기들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특히 게임과 같은 곳에서는 우호적이고 기술력이 수십만배는 앞서는 외계문명의 구성원들이 먹지 않아도 되어 입이 퇴화했다는 설정이 간혹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각주:3] 이런 꿈은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다.

컴퓨터에 정신만 남아서 돌아다니는 세계가 오면 더이상 다른 생명체의 시체를 넘지 않아도 될까? 물론 컴퓨터의 용량한계를 생각해본다면 거기서는 한 바이트를 더 얻기 위해 다른 정신체의 시체를 넘게 되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진짜 '평화'라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기분밖에 안 든다. 물론 예외적인 것이 나쁘다고 할 수 있는것은 아니지만.[각주:4]

딱히 결론을 내리기 위해 쓴 글은 아니라서 결말이 이상해도 이해하길 바란다.
  1. 신영복 교수님의 『강의』가 생각난다. 존재 중심적인 가치관에서 관계 중심적인 가치관으로 옮겨가야 된다는 어조의 서문이 인상깊게 남은 것일듯 하다. 사실 난 관계론은 완전한 대체는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관계도 존재를 바탕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메타존재론으로 관계론을 말한다면 모를까 존재론의 대립적인 입장으로 관계론을 파악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책에서 '대비는 본질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신영복 교수님은 이 부분을 잘 알고 계시는 것 같다. [본문으로]
  2. 실제로는 이것 때문에 숲에도 나이가 존재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끼가 땅을 풍화하고, 이후에 작은 풀들이 풍화를 가속한 뒤 많은 햇빛 아래에서 잘 자라는 양수들로 구성된 양수림이 형성되고 이후에는 양수림의 그늘 사이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음수들이 숲을 넘겨받아 음수림이 된다. [본문으로]
  3.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사실 스타크래프트의 프로토스 이야기이다. [본문으로]
  4. 당신을 존재하게 하는 원자들의 배열 방식도 예외적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2009. 7. 12. 12:40 Writer

ICISTS-KAIST 2009

흠... 전 2007에 갔었더랬죠.(고등학생이 시간도 많다)

블로그를 너무 놀도록 놓아두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실상은 친구의 부탁을 받아서) 광고홍보글 하나 올립니다.

재미있어요. 적어도 2007은 재미있었어요.(물론 제 취향의 재미)

기회가 되면 가려고 했는데 이 몸은 좀 바쁘신 편이라....(-_-;;)

아래는 친구 글입니다.
http://blog.naver.com/mumbling/80074043510



5회 국제대학생컨퍼런스 ICISTS-KAIST

(International Conference for the Integration of Science and Technology into Society)

 

 

ICISTS-KAIST는 매년 여름마다 개최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국제 대학생 컨퍼런스입니다.  

 

ICISTS-KAIST는 과학기술과 사회의 융합이라는 큰 주제 아래 세가지 워크샵으로 펼쳐집니다. 참가자들은 각 워크샵별로 그 분야의 석학과 전문가들의 강연을 듣고, 팀 프로젝트, 토론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능동적으로 행사에 참여하게 됩니다.

 

 

 

 

Q) ICISTS-KAIST에 오면 무엇을 하게 될까요?

 

# 1. 훌륭한 연사와의 만남

2008년 여름에는 27세의 로봇회사 CEO 'Michael Pollitt', MIT 교수 'Steven Dubowsky', Hawai 미래연구센터 소장과 앨빈 토플러의 파트너이자 세계적인 미래학자로써 유명한  'Jim Dator' 등이 참여하여 행사를 빛내주었습니다.

ICISTS-KAIST 2009에서도 훌륭한 석학들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2. 과학 기술과 사회의 만남의 장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중요하게 작용하는 과학 및 기술 분야 주제에 대해 심도 있게 토론하고 배울 수 있습니다.

 

# 3. 다양한 국내외 학생교류
 전 세계 30여 개의 외국인 대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연세대, 고려대, 숙명여대, 성균관대 등 국내 Network를 통해 다양한 대학생들과 교류하게 됩니다. 행사의 마지막 날의 gala night이라는 시간을 통해 학술적인 만남 뿐만 아니라 5일동안 함께한 참가자들과 즐거운 친목도모를 할 수 있습니다.

 

 

과학 기술의 국경이 사라지고 전세계적 협력 아래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지금, 앞으로 다가올 과학 및 기술의 중요성을 논하고 관심을 일깨우며, 미래 다양한 분야에서의 차세대 리더를 미리 만날 수 있는 ICISTS-KAIST를 통해 당신의 꿈을 조금 더 드높이십시오.

 

 

 

ICISTS-KAIST 2009는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행사목적>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학생들을 이어줌으로서 기존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일깨움.

-비전공자 및 일반 학생들 또한 부담 없이 과학과 기술에 대해 논하고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다른 나라 및 다른 교육환경에서 자란 학생들 간 새로운 인적 네트워크 형성 및 글로벌화에 기여.

-과학과 사회에 대한 비전을 가진 새로운 차세대 리더의 양성

 

 

<행사개요>

1. 행사명: ICISTS-KAIST

2. 일 시: 20098 20()~23() (8 19일 수요일 Orientation)

3. 장 소: 대전 카이스트 캠퍼스

4. 행사내용: Workshop #1 : Climate Change

              Workshop #2 : Human-Computer Interaction

              Workshop #3 : Nano Clinic

               Workshop 중 하나를 선택하여 강연 및 토론에 참여

 

5. 주 최: 카이스트 국제학술회의 개최동아리 ICISTS

6. 참가대상: 관심 있는 대학생 및 대학원생 누구나. (전공, 학년, 국적 불문)

7. 참가신청: 1 : 2009 4 1~516

                   2 : 5 23~6 30

                   3 : 7 1~7 31

행사홈페이지 (http://www.icists.org)에서 application essay 작성

 

 

* 문의 : icists@icists.org / www.icists.org

* 자세한 내용은 첨부한 PDF 파일을 참조하십시오.


 

아! 그리고 대전에 계신 분 중  통섭, 우주로켓, 대안 에너지 에 관심 있는 사람 있다면 이 강연들 참여하시는 것 좋을 듯!

우리 동아리에서 기획한 공개 강연이고 저명한 연사 분들이시니 시간 되시면 들으러 오길! >_<

 

<행사개요>

1. 행사명 : <대전 시민과 청소년을 위한 공개 과학 강연>

2.   : 1강연 : 2009 7 21일 화요일 오후 2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

             2강연 : 2009 7 24일 금요일 오후 7 (이수용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연구원)

             3강연 : 2009 8 21일 금요일 오후 7(이필렬 한국방송통신대학 교수)
(
각 강연은 약 1~2시간씩 진행됩니다.)

3.   :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창의학습관(E11) 1층 터만홀

4. 참가대상 : 대전 시민 및 중,고등학생.

5. 참가 : 무료

 

<행사안내>

1)     : 21세기 문화와 지식의 통섭

일시 : 7 21일 화요일 오후 2~4

연사 :  최재천, 현 이화여대 자연과학대학 석좌교수

최재천 교수님은 책 통섭의 저자 에드워드 윌슨의 제자이자 그 저서의 엮은이이기도 합니다. 또한 개미제국의 발견’, ‘생명이 있는 것은 더 아름답다등의 저자이기도 한 최재천 교수님은 생물진화론적 시각에서 우리 사회의 흐름을 짚어보고 미래의 대안을 제시해 주실 것입니다.

내용 :  통섭은 다양한 학문 분야들을 가로질러 사실과 그 사실에 기초한 이론들을 한데 묶어 공통된 하나의 설명체계를 이끌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21세기 문화와 지식의 통섭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있는 것들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는 것도 중요하다는 내용의 강연을 해주실 것입니다.

2)     제목 : 우주로켓

일시 : 7 24일 금요일 저녁 7~9

연사 : 이수용,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발사체 미래기술팀

2002 11,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이수용 박사님 팀은 러시아와 손잡고 개발한 첫 위성 탑재용 로켓 KSR-3 발사에 성공하였습니다. KSR-3에서는 이수용 박사님이 개발하신 액체연료 기술이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이로써 엔진의 연소 불안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수용 박사님께서는 이번 대중강연을 통해서 인공위성에 쓰이는 기술에 대해서 이런 기술이 사회에 어떻게 응용되는 지에 관해서 강연을 해주실 것입니다.

내용: 올해는 대전 국제우주대회를 비롯하여 우주에 대한 관심이 큰 한 해가 될 것입니다. 나로우주센터에서 우주로켓 ‘나로’호의 발사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강연의 내용은 크게 로켓의 역사나 기초원리 그리고 우리나라의 개발현황에 대해서 소개하려 합니다.

 

3)     제목 : 미래의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할까?

일시 : 8 21일 금요일 오후 7~9
연사 : 이필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이필렬 교수님은 국내 태양에너지 분야의 권위자이시며 동시에 유럽에서 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파시브하우스의 국내 도입을 위해 노력하고 계시는 등 대안에너지의 실제적인 적용에 힘쓰고 계십니다. 대중들에게 대안에너지의 필요성과 구체적인 방안을 알려주는 강연활동에도 열심이며, 또한 이를 책으로도 만들어 "다시 태양의 시대로, 2004", "석유시대 언제까지 갈 것인가, 2002" 등의 책을 집필하셨습니다.

내용 : 녹색성장이 우리나라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손꼽히고 있는 요즘, 에너지 고갈의 문제를 제대로 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체에너지는 미래의 세계를 짊어질 청소년들이 꼭 알고 있어야 할 이슈입니다. 지금까지 개발되어 온, 그리고 앞으로 개발되어질 대체에너지는 무엇인지 알아보고, 구체적인 활용 방안으로 이미 유럽에서 활발히 건축되고 있는 '파시브 하우스'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대전 시민과 청소년을 위한 공개 과학 강연>은 과학기술과 관련된 저명한 학자들의 강연을 통해 비 이공계 전공자 및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과학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중한 다리를 만들어드리고자 마련되었습니다.

다른 문의사항이나 궁금하신 점은 icists@icists.org 에 문의하시거나 042)350-2942 또는 010)7242-2004(최선희)로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한번 가 보세요. 물론 문제는 전부 영어로 의사소통해야 한다는 거긴 하지만 어차피 저런 곳에서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술집에서 국어로 이루어집니다. 부담감 버리시고 가세요.

두 번째 껀 생각 좀 해 봐야 할 것 같네요. 계절학기 도중이지만 갈 수는 있는데, 동생이라는 놈을 가르쳐야 해서 시간이 나려나...
Posted by 덱스터
올블로그 추천 글 중에 네이버에 대한 글이 있더군요.

네이버가 망하기만 바라는 사람들

크게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좀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어서 몇 마디 적어봅니다. 이미 댓글에도 달린 내용이기는 하지만, 좀 더 길게 늘어보겠습니다.

흔히들 그런 말을 합니다. '조선은 당파싸움으로 망했다.' 밖의 일에 대해 대처할 생각은 안 하고 자기 이득만 생각하다가 다 같이 망해버렸다는 소리지요. 도덕 시간에 배우는 '공유지의 비극[각주:1]'과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문제의 해결은 간단해 보입니다. 공유지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에게 공유지를 관리해야 할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지요. 앞선 당파싸움에 적용해 보자면, 싸움을 없애고 한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공유지가 황무지로 바뀌는 것도 막을 수 있겠고, 조선이 식민지가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죠?

개소리입니다.

통일된 국론이라는 것은 광기(狂氣)입니다. 나치 정권의 지지율은 99%를 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보다도 통일된 여론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위의 논의대로라면 나치 정권은 세계 최고의 정권이 되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던가요?

사람은 여러가지 생각을 합니다. 그 중에서는 서로 상반되는 것들도 많지요. 그게 일반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일관적으로 하나의 입장만 고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꼴통이라고 부릅니다. 통일된 국론에 대한 동경이 환상인 이유와 같습니다.

조선시대의 정치를 떠올려 볼까요? 노론, 소론이나 서인, 남인 등등으로 나뉘어 한창 싸울 때가 더 좋았던 시대인가요, 아니면 하나의 파가 관직을 독점해서 썩어 문드러지던 때가 더 좋았던 시대인가요?

'서로를 까기 위한 비판'이 무용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에만 매몰되어서 '비판이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는 것은 무용함을 넘어 위험한 사상입니다.
  1. 잘 설명한 글이 있어서 링크 걸어둡니다. http://www.emh.co.kr/xhtml/tragedy_of_the_commons.html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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