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괄적 공범이라....

檢 "노무현ㆍ정상문 포괄적 뇌물 공범"(종합2보) (연합뉴스)

이전에도 '포괄적 공범'이라는 애매한 단어를 썼었던 기억이 난다.

檢, 노건평 `30억 공범' 입증에 주력 (아시아투데이)

왜이러냐 아마추어같이...

공범이면 공범인거고, 아니면 아닌거고, 좀 확실히 좀 했으면 좋겠다. 돈을 받으면서도 안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검찰이 눈치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특히 정치권의 입김에서 자유롭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인가?
Posted by 덱스터
오랜만에 강하게 나갑니다.


1.
가장 많이 듣는 비판(비난이 더욱 적절하겠지만 말입니다) 중에는 그 의도를 물고 늘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선동하지 마라'라던가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것 등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 묻겠습니다. 그런 비판은 선동적이지 않다거나 정치적이지 않다고 말 할 자신 있으신가요?


2.
정치(政治)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

-다음 국어사전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요? 예전에 들었던 말 중 '교수를 하려면 정치적 능력도 좋아야 한다'는 말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여기서 사용한 정치란 단어는 위의 뜻과는 조금 다르겠지요. 이번엔 다른 사전으로 가서 정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펴보겠습니다.

정치라는 용어는 국가의 제도와 행정뿐만 아니라 각 민족국가들간의 권력투쟁이나 국가 내에 존재하는 여러 집단에서의 의사결정 등 국제정치와 시민사회 내에서의 정치영역에서도 자주 사용된다. 이와 같이 정치라는 용어를 폭넓게 사용할 수 있는 핵심적 이유는, 모든 집단과 사회에는 그 구성원 전체를 구속하는 통일적 결정을 만들어내는 기능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정치'또는 '정치적'이라는 용어는 그러한 기능이나 그것에 따르는 다양한 현상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다음 백과사전/브리태니커

결국 정치란 것은 '개인의 의도를 사회에 반영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 자체는 중립적인 가치를 지닐 뿐이지요.(물론 한다는 것들은 시궁창에서 세수해도 깨끗해질 정도이지만..)


3.
싫어하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상당히 인상깊게 보았던 유시민 씨의 동영상 하나를 첨부합니다. 약 3분 30초부터 나옵니다.


서울대 강연 中 - 전체 강연

진정성을 묻지 말라는 부분입니다. 다르게 돌려 말하면, 의도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수도 있겠지요. 결국 중요한 것은 '그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저올 것인가'입니다.[각주:1] 선동적이건, 정치적이건 간에 그것의 결과물이 나쁘지 않다면 비난할 이유는 없습니다.


4.
자, 그러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비판, 선동하지 말라는 비판이 정치와 선동과는 거리가 먼 비판인지 말입니다.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는 비판은 비판의 대상이 힘을 얻는 것을 막기 위한 정치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선동하지 말라는 말은 반응하지 말라는 선동에 불과합니다. 순수한 것을 찾으신다고요? 순수한 의도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겁니다. 순수하게 무의식적으로 일을 저지른다면 모르지만, 이성적인 사고과정을 통해 이끌어낸 결과물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는 그것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자기의 이성을 사회에 투영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5.
정치는 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으시죠? 정치는 죽음만큼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관이 당신과는 상관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죽음만큼은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갚아야 하는 빚인 것이지요. 죽음과 마찬가지로 정치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면 살아가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행위부터가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6.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행위들입니다. 선동적이기 때문에, 정치적이기 때문에 싫어한다는 변명 하지 마십시오. 그냥 관심이 없는 겁니다. 그것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지혜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덧. 피곤하네요 -_-;; 과제 중간에 블로깅을 하는 센스...-_-


  1.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은 옳다고 봅니다. 단, 여기서 말하는 결과는 물리적으로 나타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구요. 범인을 잡기 위해 동네의 모든 집을 뒤집어 엎었다면 온동네를 뒤집어 엎은 것조차 결과이기에 정당한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사고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결과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은 상관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건 이성이 감성의 뒤를 뒤따르는 것과 닮았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Slippery slope, 또는 미끄럼틀 현상은[각주:1] 논리학에서 다루는 여러가지 오류 중 하나입니다. 오류이기는 하지만, 그 오류가 이끄는 결론은 꼭 거짓이지는 않지요.

예컨데 이런 것을 미끄럼틀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예 1

1. 작은 숲이 있다.
2. 숲에서 나무 하나가 넘어지면 옆의 나무가 넘어질 가능성은 95%이다.
3. 나무가 하나 넘어지면, 옆의 나무도 넘어진다.
4. 넘어진 나무가 다른 나무를 같이 넘어뜨린다.
5. 4가 반복되어, 작은 숲은 무너지게 된다.

예 2

1. 머리카락이 없는 사람을 대머리라고 부른다.
2. 머리카락이 하나 많은 것과 하나 적은 것은 구분할 수 없다.
3. 대머리보다 머리카락이 하나 많은 사람은 대머리와 구분할 수 없다. 따라서, 대머리보다 머리키락이 하나 많은 사람은 대머리이다.
4. 따라서, 머리카락이 하나뿐인 사람도 대머리이다.
5. 위의 사람보다 머리카락이 하나 더 많은 사람도 대머리이다.
6. 어떤 큰 수도 1을 반복적으로 더해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머리카락을 가지든 그 사람은 대머리이다.
7. 모든 사람은 유한한 머리카락 수를 가지므로, 모든 사람은 대머리이다.

예 1에서는 '나무가 다음 나무를 넘어뜨리지 않을 확률'이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나무가 넘어지면 다음 나무를 무너뜨린다'를 탄탄한 가정으로 사용했기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예 2의 오류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지금 이 글 보시는 여러분 모두가 대머리이신가요? ^^

요즘에는 이 '미끄럼틀 현상'이 이런 오류를 지칭하는 데 쓰이는 것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일련의 사건을 나타내는데 쓰이기도 합니다. 유명한 시를 하나 끌어와 보겠습니다.

예 3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로

소수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에 침묵하면, 그 침묵이 다른 소수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에 침묵하도록 만들게 되고, 이것이 이어지다 보면 결국 전체주의 사회만 남게 되겠지요. 이런 식으로 사소한 하나의 사건이 연쇄적으로 반응을 일으켜서 엄청나게 커다란 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것을 '미끄럼틀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미끄럼틀의 위쪽 끝에서는 살짝만 밀어주어도 끝까지 떨어져 나가는 것에서 그 이름을 얻었지요. 이 예는 약간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예를 또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예 4

1. 한 국가에서 식량 확보를 위해 밀의 수출을 제한한다(세금을 올리거나 따위).
2. 밀의 공급이 감소하여 전세계적으로 밀의 가격이 오른다.
3. 밀의 수요가 높아지고, 각 국가는 식량 확보 목적으로 밀의 수출을 더욱 제한한다.
4. 밀의 가격이 더욱 오른다.
5. 밀의 수요로 대체제(감자, 쌀 따위)의 가격이 오른다.
6. 곡물의 전반적인 가격이 오른다.
7. 식량을 구하기 힘들어지자, 각 국가는 곡물의 수출을 더 크게 제한하게 된다.
8. 곡물의 가격이 더욱 오른다.
9. 각 가정에서 먹거리에 들이는 비용이 오른다. 즉, 엥겔 지수가 오른다.
10. 식품 외 품목에 들이는 수입의 비율이 감소하여 기타 품목의 소비가 위축된다.
11. 소비의 위축으로 기타 품목의 가격은 하락하고, 가격 하락을 견디지 못한 기업은 파산한다.
12. 일부 기업의 파산으로 실업률이 증가한다.
13. 실업률 증가로 대중의 소비 능력이 감소하고, 식품 이외의 가격은 더욱 하락한다.
14. 기업들의 파산이 가속화된다. 더불어 실업률도 급증한다.
15. 14가 계속되고 전 세계적 공황이 온다.[각주:2]

위처럼 '한 국가의 밀 수출 제한'이라는 작은 사건이 '전 세계적 공황'이라는 예기치 못한 사건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미끄럼틀 효과'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보면 나비효과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이것도 위에서 언급한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단계 사이에 확실한 연결고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예컨데, 하나의 국가가 수출을 제한해서 밀 가격을 올리게 된다면 다른 국가들은 원래 수입하던 밀에 붙이던 세금을 거두어서 가격을 원래대로 돌려 놓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맨 마지막의 공황이라는 사태가 꼭 달나라 너머 안드로메다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는 이런 오류를 가진 논증이라고 하더라도 그 결론이 항상 그릇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런 사건들은 미끄럼틀 현상이라는 이름보다는 나비효과라고 부르는 것이 더 옳아 보입니다. 제가 보기엔 다음의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예가 적당한 미끄럼틀 현상의 한 예라고 생각됩니다.

[만화]산낙지를 잘먹는 아이

만화에서 아이는 어쩌다가 산낙지를 한번 먹게 됩니다. 산낙지를 먹는 아이를 어른들은 신기해하고, 점차 아이는 '산낙지를 잘 먹는 아이'라는 명성(?)을 얻게 됩니다. 전 이 과정이 미끄럼틀을 탄 어린아이가 놀이터 흙바닥에 닿고 마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것이지요.

1. 아이가 산낙지를 먹는다.
2. 어른들은 아이가 산낙지를 잘 먹는 것을 보고 신기해한다.
3. 아이는 이런 반응을 즐거워한다.
4. 아이는 산낙지를 더 먹게 된다.
5. 어른들은 더욱 신기해하게 되고, 아이는 이런 반응들을 더욱 즐기게 된다.
6. 결국 아이는 4, 5번의 현상이 반복되어 '산낙지를 잘 먹는 아이'라는 딱지를 얻는다.

만화 속의 아이는 처음에 산낙지를 먹었을 때 그 느낌을 별로 안 좋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위의 반응을 보고서는 싫어하는 눈치를 보여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꾹 참고 먹습니다. 시간이 좀 지난 뒤, 산낙지의 느낌에 익숙해질 무렵엔 여태 보여왔던 산낙지를 먹으면서 행복해하는 모습 때문에 산낙지를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 버립니다.[각주:3] 결국, 주변의 사회가 한 사람을 이름붙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 이름에 따르는 행동을 더 많이 하게 되고 결국 그 이름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례로는 평범했던 사람이 어쩌다가 극성 종교 단체에 가입하고서 성격이나 재산을 완전히 말아먹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꼭 사람뿐이 아니라 미디어도 이런 성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새로 창간된 잡지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잡지에 보수적인 성향의 글이 하나 실립니다. 이 일로 잡지는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더 많이 사 보게 되고 진보 성향의 구독자는 줄어들게 됩니다. 잡지는 이런 구독자의 성향을 분석하고, 보수적인 글을 실는 것이 판매에 더욱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보수적으로 변한 잡지에 진보적인 구독자는 사라지고 보수적인 구독자가 늘어나면, 이 순환이 계속 반복됩니다. 결국에 이 잡지는 극우적인 정치성향을 지닌 글만 실리는 잡지로 남습니다.

생각을 좀 더 전진시켜 보면,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현상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만 해도 지금의 제가 가진 '활자중독'적 특징이 제가 원해서 얻은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가 엄한 글 하나 읽은 것으로 주변 친구들이 나에게서 '엄한 글 많이 읽는 아이'라는 기대에 부합하려고 하면서 얻게 된 것인지 애매하거든요. 뭐 가장 일반적인 극단적인 상황을 보자면 '공부 잘 하던 아이가 시험 한번 망치는 바람에 자살하는 경우'를 들 수도 있습니다. 어쩌다가 한번 시험 점수를 잘 받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변에서 이 아이에게 높은 시험 점수를 기대하게 됩니다. 아이는 이 기대를 느끼고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고, 이후 공부를 잘 하는 아이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아이는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의무감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각주:4] 결국 어쩌다가 시험을 한번 망치게 되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취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공부를 잘 하도록 내몰리게 되었다는 것이지요.[각주:5]

가끔씩은 내가 내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최첨단을 달린다는 것만큼 즐거운 극단도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극단은 광신도와 같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Inspired by
지식인, 광대, 개념인
  1. 미끄럼틀 효과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용어 통일을 위해 현상으로 이어가겠습니다. [본문으로]
  2. 이거 완전 소설이군요 -_-;;; [본문으로]
  3. 인지부조화 이론입니다. 인지부조화란 자신의 행동과 자신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이 인지부조화를 줄이도록 자신을 변화시켜 나간다는 것이지요. 이미 겉으로 드러낸 행동은 변경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는 생각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본문으로]
  4. 여태까지의 학교 생활로 미루어 볼 때 공부 잘 하는 아이가 공부 못 하는 아이보다 공부에 대해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은 진리인 것 같습니다. [본문으로]
  5. 생각보다 '생각 없이 공부만 했던 사람'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요?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오늘 오후 세시 즈음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에서 용산 참사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공지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용산 참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있는 모습을 촉구합니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자유게시판)


예전에 제 입장은 몇몇 글에서 이미 드러내었다고 생각합니다. 철거민이 잘한 것은 아니지만, 공권력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꼭 감안해야만 하며 따라서 경찰이 더 큰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것이 제 주장이었지요. 빵을 훔친 아이 다리를 부러뜨려 놓는 빵집 주인이 더 큰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전 이 글을 보면서 이 분이 떠올랐습니다.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하신 분이시지요.(참으로 한탄스럽습니다만)


박근혜, 비겁하다 (MP4/13)


이런 경우에 자주 쓰는 관용어구(?)가 있습니다. '뒷북친다' 말이지요. 다른 말로는 '백드럼'이라고도 하지만, 이건 뭔가 이상하게 꼬인 영어라서 그리 호감이 가지는 않는 단어이군요.

인생은 타이밍입니다. '시대를 앞서 태어난'이라는 수식어가 천재성을 대변해주면서도 보이지 않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유는 바로 '시대를 앞섰기 때문'입니다. 즉, 적절한 시대가 아니라 너무 일찍 세상에 발을 들였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보통 불행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처럼, 언제 앞에 나서느냐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겁니다. 교통카드에 일억원이 들어있으면 뭐 합니까. 이미 버스는 정류장을 지나갔는데...

비록 촘스키 교수가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에서 소통의 속도보다는 그 깊이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이건 너무 늦은거 아닙니까? 두 시간짜리 중간고사를 볼 때에도 첫 한 시간이 지나면 고사장에 입장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참사가 발생한 것이 1월 20일이면, 지금은 3월 1일이니 다섯 주도 더 지났습니다. 여기서 잠깐 언론이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살펴보겠습니다.

20090120~20090126 :   5,269건
20090127~20090202 :   3,624건
20090203~20090209 :   3,612건
20090210~20090216 :   3,257건
20090217~20090223 :     927건
20090224~20090228 :     520건 (5일)
      전체 기간 총합 : 17,209건
-미디어다음 기간별 검색 결과, 검색어 [용산참사]

첫 네 주 이후로 기사의 수가 급감합니다. 물론 12일,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기사가 쏟아져 나왔던 주에 이 사태를 강호순 연쇄살인마 사건으로 무마하라는 이메일을 보내었다는 사실이 보도됩니다. 절묘하게도 그에 해당하는 주가 끝나자마자 기사 수가 급감하는군요. 어찌 되었든 간에 이미 이 이슈는 시쳇말로 '죽어버린'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늦은 시각에 죽어버린 이슈를 좀비화시켜서 다시 벌떡 일어나게 한 것에는 충분한 이유를 대야 할 텐데, 그런 이유는 전혀 대고 있지 않으니 무언가 아쉽다는 생각만 듭니다.

그리고 이 이슈가 너무 일찍 죽어버렸기 때문에, 특히나 다른 사건으로 덮어버리려는 음모(?)가 있는 것 같아 다시 살려야만 하겠다라고 생각해 이 글을 쓴 것이라면 이해는 하겠지만(비록 약간 늦기는 했습니다만 이정도 딜레이는 납득할 만 합니다.), 이 부분을 너무 비중이 낮게 다루었습니다. 마지막 하나의 제목에 단순하게 '진상조사를 요구합니다'라고 적으면 이 여론 조작 시도에 대한 비중이 너무 작게 배정되었다는 생각을 버리기 힘듭니다.

그리고 '그냥' 갑자기 용산 참사에 대해 한 마디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면 발언이 늦은 만큼 좀 더 깊이있는 화두를 제시해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보이는 새로운(사실 새로운 것인지도 애매하군요) 화두는 세 번째 화두 뿐입니다. 그리고 이 주제가 적절한 토론 대상인지도 의문입니다. 주거 문제는 기숙사라는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제가 기숙사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이런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참사가 일어난 지 다섯 주도 넘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 다섯 주라는 긴 시간을 설마 생각도 없이 보내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말을 하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말을 좀 빨리 할 수는 없나요? 음식점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나 이 음식점 별로 안좋아하는데'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고 속이 터지는 사람은 저 뿐만은 아닐 겁니다.


관련 글 모음
2009/02/12 - -_-;;;;

특별히 이 포스트에는 댓글을 불허합니다.
Posted by 덱스터
을 읽고서 갑자기 떠오른 것을 정리해 봅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이 책이더군요.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자주 들어보아서 대강은 알고있기 때문에 링크 걸어봅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한번 읽어보아야겠네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삼인

'안경'이라는 단어는 보통 '두 개의 광학장치(일반적으로 렌즈)를 두 개의 가지와 하나의 받침대를 이용해 코와 귀로 지지하도록 만들어진 물건'을 뜻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다리가 두개일까, 머리로 지지해 볼 수는 없는걸까(용접할때 쓰는 마스크처럼)' 하고 묻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일까요? 물론 실제로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른 모양으로 생긴, 가령 렌즈가 하나뿐인 안경들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보통 안경이라고 부르지는 않지요. 고글이라고 부르지.

See full size image
이런 놈들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두 개의 광학장치를 두 개의 가지와 하나의 받침대를 이용해 코와 귀로 지지하도록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특정 물건을 분류하는 틀을 안경이라고 부르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색다른 시각 보정장치는 안경이라고 부르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컨택트 렌즈를 안경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가 기계과이니 공학 쪽으로 조금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보통 자동차라고 하면 '네 개, 혹은 그 이상의 바퀴를 가진 운송수단'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자동차를 디자인하라고 하면 언제나 바퀴 네 개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바퀴가 세개이거나 하면 '거 참 특이하게 생긴 자동차네'하고 생각하지요. 더군다나 공상과학영화에서 날아다니는 자동차라도 바퀴는 달려 있는 것을 생각해 보아도 자동차라는 단어는 네 개의 바퀴와 떨어뜨려 생각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동차라는 것이 단순히 지상형 개인 운송수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퀴라는 것과 떨어질 수 없도록 정의되었다는 말이지요. 날개 없는 비행기를 생각할 수 없는 것도 비슷한 연유에서이겠지요. 공상과학영화에서 나오는 날개 없는 비행물체들을 비행기라고 하던가요?


미래의 차 디자인입니다만 바퀴는 아직도...

여기서 '정의'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정의라는 행위는 논쟁의 틀을 결정짓는 행위가 된다는 말이지요. 조금은 동떨어진 내용이지만, 적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승리의 첫 걸음이라는 말도 정의가 틀을 제공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틀이 왜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틀이라는 것은 생각이 발전하는 기반이 됩니다. 틀 속에서 생각이 발전하게 되고, 또 그 틀을 따라서 사고가 진화하게 됩니다. 간단하게 '동수는 맥주를 좋아할까?'라는 틀을 보겠습니다. 이 틀 안에서 제기할 수 있는 문제는 제아무리 격렬해진다고 해도 '술'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동수는 녹색을 좋아할꺼야'라는 말은 무슨 삼천포냐며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기 일쑤이지요. 이처럼 틀이란 것은 생각을 발전시켜주는 토대가 되지만, 그만큼 생각을 자기 자신과 동화시켜버려 구속하기 때문에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틀은 알게 모르게 생각의 방향을 결정지어 버리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틀을 깨라고 주문합니다. 그리고 역사라는 책 속에 자기 이름을 적어 넣은 사람들을 보면 대개(학문이나 예술의 경우)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낸 사람들입니다. 뉴턴은 물질세계를 숫자로 바라보도록 하는 하나의 틀을 제공했고, 아인슈타인은 시간을 공간에 흡수시켜 또 다른 틀을 만들어내었습니다. 다윈의 경우는 생물의 다양성을 '진화'라는 또 다른 틀에서 분석하였고, 르네상스 시대는 사회를 인간의 눈에서 바라보도록 하는 중심적인 틀을 만들어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틀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바로 정의를 통해서입니다. 의심하고, 새로운 정의를 사용해 보세요. 예컨데, '비행기'가 아니라 '비행형 운송수단'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색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ps.
원래는 틀에 대한 잡담을 하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 이렇게 됬네요. 역시 계획 없는 포스트는 안드로메다로...ㅠㅠ

ps2.
언어를 배우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언어를 사고가 작동하는 플랫폼으로 발전시키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영어를 진짜 잘하려면 영어로 생각하는게 가능해져야 하지요.

ps3.
언론이 무서운 이유는 틀을 만들어내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번 대선에서 경제대통령이라는 틀 대신 기업인이라는 틀로 네거티브 전략을 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ps4.
저 블로그 안 버렸습니다 -_-;; 이거 얼마만의 포스팅인지...
Posted by 덱스터
1.
TNM에 관련해서 말이 많습니다. 저야 별 상관이 없는 문제이기는 하지만(관심도 없고 그렇다고 TNM에 들어갈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몇가지 눈에 거슬리는 주장이 보여서 잠깐 끄적거립니다.


2.
결국에는 논쟁이 '자유'라는 주제로 수렴하게 될 듯 싶습니다. 블로그에 뭘 써내느냐는 것은 자유이다 자유가 아니다 등등.

이 즈음 해서 조선일보 등 일명 보수언론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댓글에서도 밝혔듯이, 전 조중동의 논조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습니다(싫어하기는 하지만). 단지 그 논조의 비합리성에 비해 너무 거대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문제삼는 부류이지요.

물론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누구도 사실을 곡해할 권리 따위는 없습니다. 이건 신의 할아버지가 와도 없는 겁니다.(이는 그 아래의 댓글에 대한 답으로 달아드립니다.) 사실을 창조해 내는 것은, 특히 그것이 영향력 있는 사람이 그랬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처벌의 수준은 그 제조된 사실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혔는가에 의해서 정해져야겠지만요.

이제 제 입장을 눈치채신 분들도 있을 듯 합니다. 전 기본적으로 '누가 뭘 써 내든 상관하지 않는다' 입니다. 전단지로 도배가 된 휴게실 게시판으로 블로그를 운영하든, 아무것도 없이 글만 나오는 담백한 블로그를 운영하든 그건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입니다.


3.
자, 이 즈음 해서 '자유는 그런 놈들 똥 싸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올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그 인간들이 보기엔 당신네 글들이 똥일 수도 있다는 것 말입니다.

자유를 쉽게 제한할 수 없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전 신나치주의자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신경 안 쓸 겁니다. 입이 있는 한, 무엇을 토해내든 그것은 제한할 거리가 되지 못하니 말이지요.

'블로고스피어의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분들은 '길의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점상을 쓸어버릴 수 있다'는 말과 둘 사이에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
그러면 절 양비론적 입장이라고 비판하실 분이 나올 듯 해서 덧붙입니다. 전 자유는 누구라도 제한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 한가지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남의 자유를 제한하게 될 경우입니다.

전 비폭력주의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한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남의 폭력이 자신의 존재를 위협할 경우, 그에 대한 방어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폭력은 용납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직후 적은 단상에서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나온 것 자체는 잘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에 대해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결국 자기 방어를 위한 마지막 선택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이지요. 제 견해는 공권력의 대응이 너무나도 비인간적이고 비합리적이기에 비판의 화살은 공권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간 삼천포로 흘렀습니다. ㅈㅅ)

그들이 삼성을 찬양하고(제가 대기업에 적대적인 입장이라는 것은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요) 광고질을 하는 것이 당신의 존재에 위협적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키보드를 뺏을 권리를 주장하지는 마십시오.


5.
그렇다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놔두어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비판할 권리는 있습니다. 대기업에 대해 찬양만 늘어놓는 것이 왜 나쁜가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권장되어야지요. 비판에서 발전이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비판의 단계를 넘어선 억압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길을 깔끔히 하고 싶다면 노점상을 밀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노점상에게 번듯한 가게를 차릴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이 정도로 썼으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 이해하셨으리라 믿겠습니다.



Posted by 덱스터
저번에 글을 업댓하면서 얼핏 생각난 4대강 사업을 한 번 검색해 보았습니다. 이 사건이 잊혀져가는 것은 아닌가 해서요. 검색한 기사들 중 중요하다싶어 보이는 기사 몇가지만 정리합니다.

죽도밥도 안될수 있는 4대강 올인 (세종신문)

구체적인 일정은 5월중에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뭐 이미 남한강은 예산이 확정되어있다고 하지만(예전에 4대강 시행과 관련해서 논란이 된 것이 이와 관련된 부분인 듯 합니다.) 예산만 짜이고 일정은 안 짜인 상태에서는 백지화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특이해 보이는 것은 역시 여러 '숙원사업'을 이 계획에 끼워넣었다는 것입니다. 잠깐 이 기사도 보고 논의를 재개하겠습니다.

이완구 “금강 살리기, 정책 논쟁은 이제 그만” (데일리안)

'개인적 소신으로 운하건설에는 반대하지만' 이라고 하면서 '금강 살리기는 운하사업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쓴 글이 생각나네요. '긴급토론회 - 4대강 정비사업, 대운하가 아닌가?'에서 지역개발사업은 주로 건설업에 치중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토건 위주의 개발정책이 아닌 새로운 개발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자, 이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지 않나요? 시·도지사의 능력은 그 시·도에 얼마나 많은 사업을 끌어다 주는가로 평가받습니다.[각주:1] 그런데 4대강 사업은 아주 좋은 사업거리입니다(결국엔 스팀팩처럼 몸만 깎아먹겠지만). 시·도지사들에게는 자기 능력을 한껏 과시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겠지요. 목숨 걸고 사업 유치에 달려드는 모습, 이건 결국 뽑은 사람들이 자초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에는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기를 바라며...

그리고 이미 건설업계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군요.

건설업계 경인운하 수주戰 ‘불꽃’ (헤럴드경제)

이 부분이 눈에 밟히는군요.

... 게다가 4대 강 정비사업이 ‘대운하’로 전환될 때를 대비한 사전 포석 차원에서도 ...

우리나라는 건축업이 이상하게 비중이 높다고 합니다. 17%라고 하던가요? 이건 뻔하게도 '부동산 재테크'라는 버블 덕분이겠지요. 어찌되었든, 이 기사에서는 4대강정비가 대운하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긴급토론회 - 4대강 정비사업, 대운하가 아닌가?'에서도 첫 프레젠테이션이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했었지요. 그런데 이런 (악어의) 눈물어린 건설업계 부양책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은가 봅니다.

대구시, ‘공공건설공사 적정이윤’ 보장 (데일리안)

사업이 많아도 수익이 나지 않는다고 징징대는 듯 한데요? 그리고, 4대강을 막기 위한 노력은 계속됩니다.

[200자 뉴스]‘4대강 동영상’ 鄭국토 고발 (경향)

'긴급토론회 - 4대강 정비사업, 대운하가 아닌가?'에서 이미 치수(治水)사업을 위해서는 큰 강이 아니라 작은 군소하천을 잡아야 한다는 프레젠테이션 내용을 요약해 드린 바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인 듯 싶습니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포크레인을 동원했다는 기사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제 검색 능력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네요.


  1. 제 부모님부터 그러십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헌법 제1조1항

민주주의. 초등학교때부터 귀에 못이 박힐 때까지 들어서 고막이 터지지는 않았나 걱정해야 할 정도로 주위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단어입니다. 한자로는 民主主義라고 쓰고, 말 그대로 해석하면 '민중이 주인이 되는 이념'이며, '국민이 주권을 갖는 사상 혹은 체제'라고 포장하기도 합니다. 정확한 의미는 '구성원 전체가 사회의 특정 사안에 대해 견해를 내고 이 견해가 투표 또는 선거의 방식으로 집계되어 사회에 반영되는 사회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원론적인 이야기였고, 이제 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민주주의는 어릴때부터 배우다시피 크게 두가지 체제로 나뉩니다.(일단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냐 자유는 쌈싸먹은 민주주의냐는[각주:1] 문제는 이 포스트에서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가 그것이지요. 직접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모든 사안에 대해서 대중이 직접 간섭하도록 되어 있는 체제입니다. 고대 아테네에서 이 체제를 시행했고(대신 여기서 말한 시민은 매우 제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요.), 현재까지 시행하고 있는 나라로는 스위스가 유명합니다. 간접민주주의는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군중의 일부가 대리인이 되어서 결정을 내리도록 되어 있는 제도입니다. 대의제라고 불리기도 하지요. 지금의 우리 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전통적으로는 직접민주주의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로 여겨졌다고 합니다.[각주:2] 사실, 말만 놓고 보면 직접민주주의가 원래의 민주주의의 의미에 가장 가깝기는 하지요. 그런데 현실은 시궁창입니다(이건 저 예전의 이집트때부터 그랬지요. '어린놈들은 버릇이 없어' -_-). 한나라당이 12월 말(벌써 작년이군요)에 억지로 통과시키려고 했던 85개 법안들만 봐도 처리할 일은 많지만 시간은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솔직히 말해서 전문가들을 제외한 일반인 중에서 저 85개 법안에 대해 전부 비판적으로 검토한 사람이 있을까요? 장담컨데 10만명중 한명이라도 찾기 힘들 겁니다.[각주:3] 그래서 등장한 것이 대의제입니다.

사실 대의제는 직접민주주의에서 현실적 대안으로 채택된 것이라기보다는 한 곳으로 몰려있는 권력을 구성원이 점차 뺐어오면서 얻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각주:4] 전제군주가 지방의 의견을 조율하는데 필요로 했던 각종 자문기구에서 근대적인 의회의 기본 개념이 탄생했다고 하는군요. 이처럼 대의제는 군주라는 1인 권력체제에서 의회라는 직접 선출된 집단이 권력을 갖는 다인(多人) 권력체제로 권력자의 범위가 확대된 현상입니다.[각주:5] 다음 단계로는 이 권력이 모든 사람들에게로 확대되어야 하겠지요. 물론, 대의제는 모든 사람에게 권력이 돌아간다고 홍보되고 있기는 하지만 과연 그러한지는 의문입니다.

이런 글들 덕분입니다.

일단 제가 이해하는 대의제부터 정의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대의제는 '국민이 투표로 자신의 대표자를 선택하는 정치체계'입니다. 채택된 이유는 '국민이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하고 설령 충분한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의사를 전부 반영하는데 무리가 있기 때문'이고요. 여기서 유의해야 할 단어는 '대표자'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변호사 같은 것이란 말입니다. 일반인은 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을 경우 법정에 설 일이 있으면 변호사를 고용합니다. 법의 테두리 내에서 어떻게 자신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조언을 받거나 자기의 의사를 변호사를 통해 잘 정제되게 실현시키고 돈을 지불하는 것이지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국민이 어떻게 하면 그 국가를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이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지 조언과 상담을 받고 그 의사를 실현시켜 주는 일종의 피고용자-고용주 관계라는 것입니다.

전 이런 의미에서 대통령 모욕죄는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합니다. 상사가 대리에게 '보고서 이따구로 쓸래?'라고 호통치는 것이 모욕입니까?[각주:6] 대통령은 왕이 아닙니다. 대의제는 덜 폭력적인 왕을 뽑는 것이 아닙니다.[각주:7] 언제까지나 대표자를 뽑는다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의 연장선상에서는 '자신이 뽑은 후보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일란성 쌍둥이라고 하더라도 생각이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길거리에 널린 서로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이해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니던 연인들이 족족 깨지는 것만 보아도 두 사람이 완전히 같은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거는 '자신을 가장 잘 대표해 줄 수 있는 대표자를 선택하는 행위'로 이해해야 합니다. 어느 후보자에게 투표한다는 것은 그 대표자의 모든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나마 제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가장 비슷한 생각을 가졌으니까 모든 면에서 같은 생각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제 손으로 뽑은 대표자라고 하더라도 자기와 생각이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반대할 권리를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니네가 뽑은 대통령이 일을 하겠다는데 왜 반대하냐?'라는 논의는 무가치해지게 됩니다.


일부 사람들은 '한번 대통령을 뽑았으면 임기동안에는 무조건적으로 그 대통령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그나마 덜 아프게 다스려 줄 군주를 뽑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저에게(또는 저와 생각을 같이하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그나마 나은 대표자를 뽑는 행위' 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아까 위에서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묻겠습니다. 당신의 민주주의는 무엇입니까?



덧.
원래 이 글은 4대강 논란과 대운하 등등이 문제가 되었을 때 '대통령이 하겠다는데 왜 반대하느냐'라는 댓글에 대한 제 입장정리로 쓰려던 글이었습니다. 지금은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한데, 어차피 이 내용은 대운하에 한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편적인 가치를 갖는다고 판단하여 마무리하고 올립니다.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또는 간단히 북한은 이쪽의 민주주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사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는가조차 의문이긴 한데...-_- [본문으로]
  2. 저도 사실 제일 이상적인 체제로 보고는 있습니다만 직접민주주의가 대한민국에 바로 도입되면 제 역할을 하겠느냐는 다른 문제군요..-_- 아직 60년입니다. 민주주의가 완전히 뿌리내리려면 아직도 한참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태 많이 걸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서너배는 오랫동안 민주주의와 살아온 나라들도 갈 길이 먼 것을 보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본문으로]
  3. 전 일단 언론과 관련된 법안들에 대해서 전부 반대하기 때문에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에 반대했지요. 나머지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입장도 미정이고요. [본문으로]
  4. 아쉽게도 온라인 브리태니커는 유료더군요.. 다음 백과사전에 링크를 걸어두었습니다. [본문으로]
  5. 물론 군주제 전에는 귀족정이 대세였지요. 정확히 보자면 혈연에 의한 권력의 세습에서 대중의 선택에 의한 권력의 이동이라는 관점으로 보아야 하겠네요. [본문으로]
  6. 인격적인 모독은 모욕죄가 적용 가능하지만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은 일 못한다고 호통치는 것이 모욕이냐는 말입니다. 당연히 자기가 고용한 사람이 일을 못하면 일 좀 열심히 하라고 닦달할 수 있지요. [본문으로]
  7. 촘스키 교수는 언론이 이런 면을 부추긴다고 한 적이 있지요. '투표 때에만 권리를 행사하고 그 이후에는 일자리로 돌아가서 조용히 일이나 하고 있어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놈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시대의창, 2002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내용추가>
2009/01/16 - MBC 백분토론(402회)에서 나온 내용 일부 추가합니다.
2009/01/19 - 재미있는 글이 있어서 추가합니다. 허위통신에 관한 내용입니다.

Minerva.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달의 여신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리스식 이름인 Athena가 더 많이 알려져 있지요. 전쟁과 시, 의술, 지혜, 상업, 기술, 음악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년(2008)에 다음의 아고라 경제방에서 많은 예측을 하고 또 그 상당수를 맞추었다는 사실로[각주:1] 유명해진 사람입니다[각주:2].

먼저, 생각해 볼 거리들을 떠올려 보면 크게 네가지로 정리가 가능합니다. 첫 째, 검찰이 구속하기로 한 미네르바가 진짜인가 아닌가. 둘 째, 검찰의 구속 수사가 정당한가. 셋 째, 미네르바는 죄인인가 아닌가. 넷 째, 사태의 의의는 무엇인가.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제는 하나로 묶어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일단은 나누고 시작하겠습니다.



첫 째, 미네르바 진위논란

사실 대중의 관심도가 제일 높지만 중요도는 떨어지는 사안입니다. 일단 저는 미네르바 다수설이 제일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정리는 민노씨 님께서 잘 정리해 주신 것 같네요. 일단 다음 글은 사실만 나열한 글이라고 보여지니, 링크 걸어두도록 하겠습니다.

미네르바 구속 단상 1 . 판단표준

음.. 또 다른 미네르바가 등장했다는 글도 보이네요. 도아 님 글 연결해 둡니다.

돌아 온 진짜(?) 미네르바

어차피 별 볼일 없는 논쟁이니 술집에서 소주 한두잔 마시고(전 맥주가 좋지만) 할 말 없을 때 쓸 시간 때우기용 가십거리로 남겨두고 다음 쟁점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둘 째, 구속영장 발부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구속 영장 발부 (KBS)

가장 중요한 쟁점입니다. 표현의 자유와 맞닿아있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제일 많이 지적되는 부분은 역시 '구속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입니다. 구속은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조건 하에서 할 수 있군요.

제70조 (구속의 사유)

①법원은 피고인이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피고인을 구속할 수 있다.<개정 1995.12.29>
1. 피고인이 일정한 주거가 없는 때
2. 피고인이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는 때
3. 피고인이 도망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는 때

②법원은 제1항의 구속사유를 심사함에 있어서 범죄의 중대성, 재범의 위험성, 피해자 및 중요 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우려 등을 고려하여야 한다. <신설 2007.6.1>

③다액 50만원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해당하는 사건에 관하여는 제1항제1호의 경우를 제한 외에는 구속할 수 없다. <개정 1973.1.25, 1995.12.29, 2007.6.1>

-형사소송법 [시행 2007.12.21] [법률 제8730호, 2007.12.21, 일부개정]

먼저 주거는 이미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증거 인멸에 대해서는 이미 증거는 충분히 확보했다는 논평이 많고, 또 이미 사실을 다 인정하고 있으므로 도망하거나 도망할 염려는 적다고 생각됩니다. 한 마디로, 구속은 불필요했다는 것이지요. 구속 이유가 국가신인도와 같은 사항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구속영장을 발부한다고 했지만, 이건 제1항에 대해 상대적으로 부수적인 내용인 제2항의 내용인데다가 재범가능성, 피해자 및 중요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우려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구속사유라고 보기에는 무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구속영장 발부에 대해서는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과도했다는 목소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순형 “미네르바 사법처리 당연하나 구속은 과잉”(뷰스엔뉴스)
이회창, "미네르바 구속 수사하려는 검찰의 태도 수긍하기 어려워"(중앙통신뉴스)
한나라 공성진 “‘미네르바 구속’ 지나치다”(파이낸셜뉴스)

많은 외국의 언론에서 이 뉴스를 신기한 일로 써냈다고 합니다. 후파장은 지켜보아야겠네요. 아니, 이미 후파장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군요.[각주:3]

<내용추가>
402회 백분토론에서는 첫 구속 사유에 도주의 우려를 넣지 않았지만 후에 적법심사에서 도주의 우려가 크다는 입장을 첨부했습니다(김성수 연세대 법대 교수). 이는 사태가 커지자 구속한 이유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됩니다.



셋 째, 범죄행위가 성립하는가

사실 두 번째 문제는 글을 올리는 것이 범죄행위인가 아닌가에 따라 답이 정해져 버리는 문제입니다. 범죄행위가 아니라면 구속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범죄 행위이다'라는 판단 기준과, 이것이 적당한 기준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먼저 위에 링크걸 글 중 민노씨 님의 글에서 구속 사유에 대한 정리가 잘 되어 있으니 참고하겠습니다.

제47조 (벌칙)

①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하여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1996.12.30>

②자기 또는 타인에게 이익을 주거나 타인에게 손해를 가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하여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한 자는 3년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1996.12.30>

③제2항의 경우에 그 허위의 통신이 전신환에 관한 것인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1996.12.30>

④전기통신업무에 종사하는 자가 제1항 또는 제3항의 행위를 한 때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제2항의 행위를 한 때에는 5년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1996.12.30>

-전기통신기본법 [시행 2008.3.21] [법률 제8974호, 2008.3.21, 타법개정]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정리합니다.

1. 악법도 법인가의 문제

위키백과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권창은 전 고려대학교 교수(철학)와 강정인 서강대학교 교수(정치학)는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라는 책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으며, 이 일화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적인 법 집행을 정당화하는데 악용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위키백과, <악법도 법이다>, 2009년 1월 12일 13:12

법은 도덕을 기초로 하고, 도덕은 윤리를 토대로 합니다. 그리고 윤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는 인권입니다. 인권 문제와 관련해서는 nooegoch 님의 다음 글이 제일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것 같아 링크 걸어둡니다. 인권위원회에서도 불만이 있는 모양이군요.

인권을 침해하는 집단을 거부한다!
안경환 인권위원장 "미네르바 구속은 과도했다" (세계일보)

인권을 침해하는 부분이 있는 법이라면,[각주:4] 이 법을 지켜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지금이 프랑스 대혁명 시대처럼 왕의 목을 자르고 해야지 인권이 보장되는 시대는 아니긴 하지만, 현재 사회에도 충분히 비합리적인 법은 존재하고 있으며 이 법들은 꾸준한 개정을 통해 보완되고 있습니다. '악법도 법이니 지키도록 하겠다' 라는 대답이 주저 없이 나오려면 폐지되어 효력을 상실한 악법에 의해 피해받은 사람들에게 보상할 것을 보장하는 법률 마련이 시급해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악법은 법이 아니므로 지키지 않겠다'는 태도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약간은 부적절한 예이긴 하지만, 다음 만화를 첨부합니다.



2. 법이 제대로 적용되었는가의 문제

한 발짝 양보해서 이 법이 정당한 법이라고 해도, 법이 제대로 적용되었느냐의 문제가 남습니다. 그가 글을 올린 목적이 공익을 해하기 위함이었는가의 문제입니다. 아까 위의 기사(KBS)에서 구속된 박모씨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개인의 재산상 손실을 막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물론 피해자의 입장이므로 일방적으로 취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공익이라는 것이 칼끝처럼 나누어지는 개념은 아니기 때문에 악의가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매우 불확실한 문제입니다. 사람의 호불호와 마찬가지로 정답은 없다고 보여지는 문제이기도 하고요. 전 일단 악의는 없었다고 믿고 싶네요.

<내용추가>
402회 백분토론에서 전원책 변호사는 공익을 여태 쌓은 법원의 판결을 기초로 하여 판단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네르바의 글과 급증한 외화거래량 간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는 것인 듯 하군요.

아고라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더군요. 전 뒷골목인터넷세상에서 처음 보았지만, 원문에 링크를 걸어둡니다.

"허위사실유포죄"란 것도 있냐? 이 눈먼 사법부야?

이 글에 따르면 '허위통신은 허위사실을 송출한 것이 아니라 없었던 통신 내역을 실제 있었던 것으로 가장하거나 통신의 대상자가 다른 사람인 것으로 위장하는 것'이라는군요. 법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넷 째,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일이 이렇게 커지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일단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미네르바가 알려졌던 미네르바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1. 미네르바, 그의 실체와 우리의 반응

당국자 “미네르바는 50대 초반의 해외경험있는 증권맨 출신” (데일리서프라이즈)
미네르바 추정 30대체포 (한국일보)

미네르바가 자신의 글에서 50대라고 밝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 그런 일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미네르바라는 필명을 쓰던 사람이 30대 무직에(프리랜서도 사실 무직이긴 합니다만...) 경제와는 관련 없는 길을 걸어온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예전에 알려진 50대에 금융계 관련자이며 명문대에서 수료했다는 이미지와 엄청나게 대비되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정부가 나서면서 거품이 커진 느낌이 듭니다. 사실 전 정보 당국이 그의 신원을 파악했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미네르바란 필명을 쓰는 사람이 있는지조차 몰랐거든요. 진중권 교수는 다음 글에서 미네르바 거품을 더욱 키운 것은 보수언론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신나는 미네르바 사육제

결국 거품은 터졌습니다. 보수언론은 전문대 졸과 무직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민노씨 님이 지적하신대로 학벌과 관련된 사회의 뿌리깊은 맹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왜냐면 이렇게 학벌을 강조하는 것은 은근히 대중한테 먹혀들어가거든요.

학교의 졸업장으로 그 사람의 모든것을 판단해 버리는 것. 학벌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능력의 보증서처럼 사용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지 능력이 중요한 것이 학벌의 보증서처럼 사용되기 때문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현상은 학벌에 대한 맹신, 그 오랜 학벌만능주의를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한다 하면서도 잡초처럼 질기게 살아남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단면입니다.

예전에 놈 촘스키를 비판한 동아일보 칼럼에 대해 쓴 글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주장이지 그 사람의 정체가 아닙니다. 멘델은 과학과는 거리가 먼 일개 신부에 불과했지만, 그의 주장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핵심은 주장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내용추가>
위에서 보수언론이 미네르바 추켜세우기를 부추긴 점이 있다고 진중권 교수가 주장했다고 했는데 이 점은 402회 백분토론에서 전원책 변호사도 인정했습니다.


2. 피해액 20억, 시체 정부

검찰은 구속 사유 중 미네르바의 글로 추가로 20억이나 지불해야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일단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은 둘 째치고,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글을 전개해 보겠습니다.

(외환전략)미네르바에 대한 소고(이데일리)

국가가 일개 네티즌에 의해 휘둘린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자본이라면 몰라도..) 한 사람에게 휘둘릴 정도로 약한 국가라는 것은 그 국가에 무언가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예로는 V에게 휘둘린 V for Vendetta의 정부를 들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정상적이지 못한 일은 신뢰 없는 정부입니다. 이건 제가 짤막하게 지적했던 사항이기도 하지만 말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대로, 미네르바가 처음 뜬 이유는 정부와는 달리 헛발을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축구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전 필드에 나가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헛발만 차는 선수는 월급을 내면서 팀에 머물고 싶다고 해도 필드에 내보내지 않을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정부의 그 유능하시다는 분들은('경제' 대통령부터[각주:5] 말이지요) 아마추어 한명한테 말 그대로 떡실신 당했습니다. 이건 명확히 정부의 잘못입니다. 애초에 일개 시민이 정부보다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하도록 잘 처신했어야 하는 겁니다. 일개 시민에게 휘둘릴 정도로 허약한 정부를 어떤 국민이 믿겠습니까.

그리고, 무조건 믿어 달라고 하지 말고 믿을 수 있도록 행동 좀 해 주길 바랍니다. 예전에 라디오 연설과 관련해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때에도 지적한 사항입니다. 국가운영은 종교가 아닙니다. 시민의 무조건적인 맹신은 정답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파국으로 치닫을 수 있는 최악의 수란 말입니다.


3. 사이버모욕죄, 그리고 표현의 자유

미디어토씨에서 재미있는 논평이 하나 있었습니다. 링크 걸어둡니다.

'미네르바' 후폭풍 경계하는 '조선' '중앙'
'미네르바' 체포, 차라리 잘 된 일이다

굳이 사이버모욕죄를 도입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아니 오히려 과도하게 현행법이 인터넷에 대해 감시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미 법이 있는데 도입하는 것은 옳지 않을뿐더러 인터넷의 본질에 반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더군다나 이 발언은 한나라당 의원인 원희룡 의원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제 입장은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전 글에서 밝혔지만, 떠드는 것은 자유롭게 놓아두어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에 힘만 안 실리도록 하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지요. 국회의원님들도 좀 대인배스러워지세요. 욕 얻어먹더라도 사회를 바꾸어 보겠다는 의지로 그 자리에 올라선 것 아닌가요(아니라면 국회의원 당장 때려 치고 사채업이나 하시길. 돈 보고 국회의원 하는 사람만큼 더러운 사람이 어딨습니까)?

<내용추가>
인터넷의 자정 능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것이 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이 주된 의견으로 보입니다. 물론 제 입장은 온라인을 완전한 익명성 공간으로 만들고 윤리교육을 강화시켜야 한다이지만요.


4. 칠링 효과, 그리고 학습된 무기력

칠링 효과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자기검열로 이어져 자유발언이 위축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기 글을 지우고 있다고 합니다. 뭐 저야 잃을 것이 시간과 젊음밖에 없는지라(약간의 불효와) 마음껏 떠들어대고 있지만 말이지요.

미네르바 구속효과…고수 논객들 잠적 잇달아 (한겨레)
“무서워…” 아고라 논객들 피난 행렬 (미디어오늘)

제가 예전에 도아 님의 블로그에서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아는게 힘이라고 하는데, 이런건 알지 않는게 힘인 것 같네요 -_-

전 이런 것에 전혀 학습받지 않고 가던 길 계속 가렵니다 -_- 에혀

제가 여기서 말한 '학습하지 말아야 할 것'은 패배입니다. 패배의 원인은 기억해야 하지만, 패배 자체는 기억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패배가 하나 둘 기억 속에 쌓이기 시작하면 학습된 무기력의 상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 빠지게 되면 병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어도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벼룩의 신세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책없는 낙관론은 좋지 않습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s paradox)를 기억해야겠지요. 하지만 정말 생각해 보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때때로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패배주의에 찌드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며 쓸개를 빠는 것입니다.


5. 경제, 모로 가도 살리면 된다?

김우재 님께서 지적하신 부분입니다. 뭐 이미 이 효과는 저번 대선에서도 보았긴 하지만...

명박이 두려운 이유

사실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만약 미네르바의 글이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글이 아니라 대운하에 대해 비판하는 글이었다면 이렇게 커다란 이슈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경제라는 주제가 파급 효과가 큰 것은 지금의 대통령이 경제를 주요 공약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 돈인가요? 아니면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요? 분명히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충분한 돈이 있다면 그것을 잘 분배해서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요?[각주:6] 경제논리에 치여서 순수학문 한번 해보고 싶다는 꿈을 반쯤 접었던 신세한탄이 기억납니다.



마지막 덧붙임

1. 오늘 백분토론에서는 미네르바 구속을 두고 논쟁을 벌일 예정이라고 합니다. 한나라당이 없는 것이 조금은 아쉽군요.

2. 글 쓰는데 참 힘드네요. 거의 반나절은 잡은 것 같습니다 -_-;; 근성없는...-_- 그렇다고 링크가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_ㅠ

3. 쓰고 보니 그리 짧지는 않군요 OTL


  1. 전 사실 글을 하나도 읽어보지 않아서 얼마나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들리는 풍문도 그렇고 기사도 그렇고 보면 다 상당히 정확한 예측을 했다고 하더군요. 전 일단 이를 공인된 사실로 인정하겠습니다. [본문으로]
  2. 미네르바 다수설에 따르면 '사람들'이 되어야겠지요. [본문으로]
  3. 글을 쓰면서 구속수사가 적법한지의 여부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결국 적법으로 판결이 나더군요. [본문으로]
  4. 아까 본 민노씨 님의 글에서 위헌과 관련된 사항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본문으로]
  5. 경제와 대통령 사이에 망치는이 들어가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 혼자인가요? [본문으로]
  6. 제가 지금의 대한민국은 분배 위주의 정책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을 정도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지 않았나요?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이전에 정치와 관련된 사항에는 무관심한 친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에겐 알게 모르게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이 쿨한 것으로 비추어지는 것 같더군요. (전 비록 10대 끝자락이지만) 많은 20대의 생각이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이런 기사도 있었잖아요. 20대 투표율이 그야말로 바닥이라고. 지금 찾아보니 이런 기사도 있네요.

민주당 “대학생, 세상과 소통하다”  (이지폴뉴스)

위 기사 중 '투표율 20%대를 밑도는 20대 대학생'이란 부분이 있습니다.(8번째 문단) 확실한 것은, 우리 세대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글의 학생이 여러분은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대학생 ㄱ군은 집안이 가난합니다. 너무나도 가난해서 학자금대출 이자도 갚기 벅찬 상황이지요. 그런데 ㄱ군은 장학금을 알아보지 않습니다. 대학 등록금은 자기가 번 돈으로 내는 것이 쿨한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단과대학에서 1, 2등을 다투는 학점을 갖고 있지만, 오늘도 ㄱ군은 과외를 찾으러 아파트 단지를 배회합니다.

전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분들이 위의 ㄱ군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집니다. 한정된 의미의 정치라도[각주:1] 자신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는 굳이 명시하지 않더라도 느끼고 계시지 않은가요?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은 쿨한게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위의 ㄱ군처럼 무언가 부족하다는 듯 한 느낌도 들구요. 쿨하다는 착각, 버려 주세요. 착각은 자유라지만 이건 그래도 좀 심한 것 같네요.
  1. 전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를 주로 사용합니다만, 그건 '하나의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을 일컫는 말이어서 여기서 사용하려는 정치의 의미와는 좀 괴리된 감이 있네요.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바쁜 하루가 지나고 나서 너무나도 심심해서(...) 정치적 성향 테스트도 좀 해보고 그러면서 아나키즘 검색도 좀 해보고 하다가 보니 자연스럽게 놈 촘스키로 흘러들어가게 되었습니다.(촘스키 교수는 잘 알려진 아나키스트중 하나입니다 ^^;) 그중에 이런 글이 외부 링크로 걸려있더군요.

촘스키가 비싸게 팔리는 한국 (동아)

그냥 읽고서 누군가가 싸지른 말이겠거니 싶어 넘어가려고 하는데, 잠자리에 들어서도 계속 생각이 나길레 그냥 끄적거리고 갑니다.

첫 째, 네 번째 문단에서 언급한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의 공산화 과정에서 있었던 대학살을 사회혁명이라고 칭찬하고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허구라고 주장한 촘스키"라는 부분에 대해서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네요.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에서 놈 촘스키는 분명히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을 뿐이라고[각주:1]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주장이 무엇이든지간에 자신의 주장을 표현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각주:2] 이를 근거로 판단해 보건대 위의 글은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는 것을 근거로 그 주장을 지지한다고 판단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듭니다.

둘 째, 다섯 번째 문단에서는 촘스키의 사상을 그의 행동을 근거로 비판하는 듯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장자의 행동은 주장자를 공격하는 논리가 될 수는 있지만 주장 자체의 허구성을 나타내지는 못한다 입니다. 앨 고어는 환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앨 고어가 말로만 환경운동을 외쳤던 사람이라는 비판이 많은 것은 아시나요? 네, 그런데 이렇게 앨 고어가 말로만 환경을 보존해야 한다고 외쳤다고 하더라도, 환경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허구라는 증거는 되어주지 않습니다. 주장자의 설득력을 떨어뜨릴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근본적으로 주장자의 행동은 주장자만 공격할 수 있을 뿐 주장 자체는 공격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촘스키 교수가 이처럼 위선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촘스키 교수의 주장을 공격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셋 째, 여섯 번째 문단이 참 거슬리는군요. 분단 국가이기 때문에, 전쟁중이기 때문에 사상의 자유는 침해될 수 있는 건가요? 전 이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아무래도 국가의 정의가 차이나서 그런가 봅니다.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태초에 개인이 있었다. 개인들은 모여 국가를 만들었다.

루소사회계약론과 어딘가 비슷하게 보이는군요. 그런데 이 글을 쓴 허문명 논설위원은 이게 아닌가 봅니다. 오히려 이쪽에 가까워 보이는군요.

태초에 국가가 있었다. 국가는 지배할 개인을 만들었다.

음... 뭐 사상적 기반이 그렇다면 전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상당히 이상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취향은 존중해 드리기로 하겠습니다만, 전 이후 제 논리로 이 주장을 까보겠습니다. 님도 제 취향을 존중해 주셔야지요.

대한민국은 분단 국가이고, 전쟁중(비록 휴전이기는 하지만)입니다. 당연히 이런 상태에서는 적을 이길 수 있도록 적절한 통제가 이루어 지기는 해야 하지요. 그런데 그 통제가 사상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이라면 곤란합니다. 자유는 어떤 경우에도 보장되어야 합니다. 왜냐고요? 개인들이 국가를 만들었기 때문에, 국가는 언제까지나 개인을 위한 종으로 역할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국가가 우선이 아니라 개인이 우선이니까요.

그러면 있는 적을 이겨야 하는데 어쩔꺼냐? 사상의 자유는 보장하되, 그 주장에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통제하는 것이라면 저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J. S. 밀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직접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므로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각주:3] 말이지요. 그 주장이 국가에 대해 피해를 끼치지만 않도록 힘을 빼앗기만 하면 되는겁니다. 국가는 자유 자체에 대해서는 제한할 권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한국에서 사상의 자유가 의미하는 바는 미국이든 아마존 밀림 속 오지이든 어디이든간에 거기에서 사상의 자유가 의미하는 바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아나키스트 성향을 가지고 있고,[각주:4] 촘스키 교수의 글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제 글에 대한 반박의 근거가 되나요? 어디 한번 답변을 들어보고 싶네요, 논설위원님. 논설지도 하셨을테니 이정도 글에 대한 반박은 쉽게 기대해도 좋겠지요? 더군다나 요즘 '표현의 자유 침해'로 방송통신법 개정안이 욕 많이 먹고 있는데, 이 쯤의 주장에 대한 반론의 근거는 충분히 준비해 두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닌가요?

  1. 놈 촘스키 저 강주헌 역,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시대의 창, 2008, p 41 [본문으로]
  2. 전 사실 조중동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금 일명 보수언론이라는 언론사들이 너무나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을 뿐이지요. [본문으로]
  3. John Stuart Mill, 'On Liberty' ed. Gertrude Himmelfarb, Penguin Books Ltd. , 1985, p 71 [본문으로]
  4. 사실 검사 결과는 사민주의와 아나키즘의 경계면에 걸리더군요. 그리고 생각보다 사회주의적인 면이 강하고 자유주의적인 면이 약하게 나타나더군요. 제 생각엔 이것이 제가 어느 정도 보수적인 면(일례로 '자유의 방어를 위해서라면 극단적인 경우(조커와 같은 -_-)에 사형을 실행할 수 있다'라거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라면 전통은 존중해야 한다(고리타분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래봬도 저, 혼전순결주의자입니다 -_-)'와 같은 부분) 때문에 그렇게 나온 것 같아요.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시험은 월요일인데 공부는 안되고 해서 새로 RSS 구독을 신청했다. 그래서 지금 구독하고 있는 블로그 수는 27개이다.(나머지 하나는 블로그인지 아닌지 조금은 애매해서 제외). 구독 신청한 블로그는 김우재 님의 블로그이다. 예전에 내 입맛에 맛는 45도 뒤틀린 시각이 잘 드러난 포스트를 보았던 기억이 잇는데, 추천 RSS를 뒤적거리다가 발견해서 구독을 신청했다.

신청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RSS를 구독하게 되면 몇 개의 글이 읽지 않은 상태로 올라온다. 일단 이 글들은 상큼히(-_-) 무시해 주고 아래로 쭈욱 내려보았다. 어쩌다가 보니 이런 글이 눈에 들어왔다.

대학교의 의미와 학풍이라는 것

한홍구 교수님의 『대한민국사』 라는 책을 보면(1권인지 4권인지 헷깔리는데 아무래도 1권인 듯 하다.) 대학교의 역사에 관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군부시절에 대학생에게 병역특례를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때 갑자기 대학교가 늘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렇게 기형적으로 자라난 '대학'이라는 제도가 위의 글 본문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올바른 대학의 의미가 증발해 버리는 결과를 나았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떻게 되었건, 지금의 대학교는 [고등학교 이후의 기초교육과정]처럼 변해 버린 면이 분명히 존재하고[각주:1], 이런 기초교육과정에 왜 자신의 돈을 써 가면서까지 공부해야 하냐는 일부 운동권(이 부분은 사실 잘 모르겠다.)의 주장을 본 기억도 있다. 기초교육과정인 만큼 정부나 기업에서 그 부담을 져야 한다는 논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보기에는 학부과정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사회 전체적으로 볼 경우 대학이 줄어드는 것이 이득이지만, 수요자라 할 수 있는 학생 개개인의 입장과 기업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정부에서 '대학을 강제로 통폐합하고 대학생 수를 줄인다'는 정책으로 나설 경우 폭동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이미 '대학은 나와야지'라고 말하는 학부모가 많은 상황에서 대학 수가 급감하고 대학생 되기가 특목고 들어가기보다 힘들어진다면 결과야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또, 일부에서는 '대학을 나온 자'와 '대학을 나오지 못한 자' 사이의 계급이 형성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하는 듯 하다. 물론 이 지적은 그리 타당해 보이지는 않지만(이미 수많은 계급이 형성되어 있는 사회에 이미 있는 계급차이가 심화된다고 해서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대학으로 나뉘는 계급은 그 전에 다른 것으로 계급이 나뉘지 않았을까?) 말이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누군가는 피를 보아야 한다. 그것도 한 세대가 일생에 거쳐서.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위의 글이 지적한 '학풍의 부재'이다. 나야 뭐 그런 것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는 갓 대학에 입학한 08이지만(1년은 사실 그리 긴 기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분명해 보이는 것은 대학이 '학문의 중심지'가 아닌 '취업준비의 중심지'로 변했다는 것이다. 고등학생들 누구나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라는 말을 듣는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취업준비의 중심지'라고 하더라도 학풍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다. 위의 글에서 말하는 학풍이 '학문에 대한 토론의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미 70년대부터 쭈욱 '운동권'이라는 '사회 제도에 대한 토론의 분위기'를 가진 집단을 보아오지 않았던가? 문제는 대학이 어떤 곳으로 변질되었는가가 아니라 '왜 대학에는 이런 토론의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는가'이다.

필자는 이 문제의 답이 '순수학문은 바보들의 학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순수학문으로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가 도박이다. 맨날 '왜 대한민국에는 학문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가' 라고 한탄만 하지,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한 사람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길 바란다. 박사학위를 수료한 사람이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들먹이지 않아도(루머에 불과할 수 있다) 이미 본인부터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필자는 대학에 원서를 쓸 때 물리천문학부와 기계항공공학부 사이에서 갈등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원서를 넣기 직전까지만 해도 물리학부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6:4정도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기계항공공학부에 들어와 있다. 부모님의 말을 듣기로 한 것이다.(물론 대학원은 의지대로 물리, 그것도 이론 쪽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 왜 이런 현실이 나타나게 되었을까?

사실 먹고 살 수만 있으면 학문을 할 사람은 널렸다. 물론 내 주위가 대체적으로 학구열이 높은 편인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순수학문이 바보만 하는 학문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이유는 '생존을 걸고 하는 도박'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승률도 매우 낮다. 항상 불거지는 시간강사의 처우 개선 문제만 하더라도(예전에 서울대학교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이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존재 자체가 위협이 받는 도박을 할 사람이 있을까? 난 거의 없다고 본다. 결국 학문이 더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직도 명맥이 끊기지는 않는 운동권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사회 문제는 어찌 되었든 구성원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런 관심 속에서 비판이 싹트고, 비판은 토론을 가져온다. 순수학문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을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토론의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을까? 차라리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가 더 쉬우리라고 본다.

예전에 술자리에서 물리학부에 진학한 정말 절친한 친구가 너무나도 자기 과에 대한 자랑을 해 대자 이런 농담을 던진 적이 있었다. '부럽긴 부럽지. 그런데 사회에 나가면 배고플 것 같아.' 언제까지 술자리에서 이런 자조섞인 한탄을 해야 한단 말인가.

글이 홧김에 써서 그런가 조금은 두서없게 쓰였다. 독자는 이 점 양해해주길 바란다.
  1. 고등학생의 평균 대학교 진학률은 80%에 이른다고 한다. 자료에 따라 조금씩 숫자가 다르긴 하나 80%를 넘는다는 것은 조금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오늘 대학국어 시험을 치르고(1200자로 글을 써내라는데 죽겠더군요 -_- 결국 다 쓰긴 했는데 외각주를 셋 이상 달라는 부분은 시간부족으로 못했습니다 ㅠ) 잠깐 블로그질을 하러 들렀더니 이런 일이 있더군요. 전 TNC랑 무슨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지나갔던 논쟁이라 넘어가지만, 댓글에서 꿈틀꿈틀 님하고 도아 님하고 한판 붙었(?)길레 끄적여 봅니다.

태터앤미디어는 쓰레기인가? - 블로그 마케팅의 허와 실 4

댓글에 링크거는 방법은 모르겠네요 -_-;; 첫 댓글이니까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 논쟁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정치성'이라는 가치가 과연 제품의 품질에 포함되느냐는 문제입니다. 예전에 촛불때도 이 논쟁으로 롯데나 농심에 타격이 갔었지요.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정치성은 품질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 가중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써놓고 보니 교과서적인 발언이네요. -_-;; 사실 모든 것이 가치를 갖습니다. 이름도 그렇고 공기도 그렇고 기술도 그렇고 전부 다 어느정도 고유한 성질을 갖고, 그 성질은 가치로 취급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가치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다가섭니다. 가장 쉬운 예로는 스타벅스 커피가 있겠네요. 사실 커피 원가는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하긴 농장에서 얼마나 혹사시키는데...) 그런데 커피 가격은 뻥튀기가 좀 심하게 되었지요. 예전에 댓글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특히 한국은 이런게 심해서 미국에서도 가장 비싼 스타벅스 커피가 3500원 정도인데 반해 한국에서는 제일 싼 스타벅스 커피가 3500원이라고 하더군요(전 커피는 학교 카페테리아에서만 먹어 이런건 모르니 누가 좀 알아봐 주시길...;;). 이건 다 '스타벅스'라는 이름의 가치가 커피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맛과 향이 같은 커피를 같은 가격에 판다고 해도 수요가 있을까요? 글쎄요..?

이건 앞서 댓글에서 논란이 되었던 삼성 제품이나 조선일보 기사(문화 관련)의 품질에 적용해 볼 수 있겠지요. 삼성 제품은 솔직히 이름만 떼고 보았을 때에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 LG를 더 선호하긴 하지만 그건 별개로 치자고요. 조선일보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쪽(굳이 문화가 아니더라도 정치면을 제외한) 기사들은 도아 님 말씀대로 상당히 양질을 자랑합니다.(물론 문화면에까지도(예를 들면 추천 책 선정) 조선일보의 정치적인 입장이 드러난다는 말은 있지만, 전 그 부분까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하지만 정치성이라는 가치가 고려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둘 다 '정치성'에서는 낙점입니다. 적어도 저에겐 말이지요. '삼성공화국'이라는 비아냥이 왜 있고, '좃선일보'라는 거센 비판이 왜 있겠습니까.

댓글로 봐서는 도아 님은 이런 '정치성'이라는 가치에 상당히 낮은 가중치를 두시는 듯 합니다. 물론 이게 아주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삼성이 아무리 낙제점인 정치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반도체 하나 잘 만드는 것은 사실이거든요. 정치성만 갖고 제품을 평가한다면(물론 이건 매우 극단적인 경우입니다) 다른 부분에서(예컨대 기술같은 부분 말이지요) 품질 개선이 이루어 질 수 있을까요? 그렇긴 하지만 너무 낮은 가중치를 두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지도 모르겠네요.

반면 꿈틀꿈틀 님의 경우 이 정치성에 상당히 높은 가중치를 두시는 것 같습니다. MS를 극도로 싫어하시는 걸 볼 수 있는데, 이건 다 MS의 '반(半)독점기업'이라는 정치성 때문이겠지요. 전 파이어폭스를 단지 IE보다 빠르다는 이유로 사용하지만, 꿈틀꿈틀 님의 경우는 조금 다른 것 같더라구요. 정치성에 높은 가중치를 두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긴 하지만, 정치성에만 너무 집중해서 다른 가치를 놓치고 계시지는 않은가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휘리릭 글을 수습해 보자면, '정치성이라는 하나의 가치에 적당한 가중치를 부여해야 한다'가 되겠네요. 물론 이 가중치라는 것이 숫자로 딱 떨어지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이과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슬픈 일이지요 -_-) 적어도 어느 선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엔 한국을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 이 가중치가 너무 낮은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어이구, 쓰고 보니 이거 제 블로그가 전쟁터가 되는 것은 아닌가 두렵네요 ^-^;;;


추가(14일 17:20)
본문의 '정치성' 이라는 단어를 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위의 정치는 투표와 국회에서 치고박고 싸우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를 사회에 반영하는 것' 이란 넓은 의미의 정치로 쓰였습니다. 예컨데 'A 가게보다 B 가게가 더 친절하니 B 가게에서 사야겠다(가게에 친절함을 요구하는 것에서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는 것까지도 정치적인 판단이 들어간다고 보는 것입니다.
Posted by 덱스터
저작권 떡밥. 참 오래되었네요. 이번에 티스토리에 공지로 올라온 것이 있어서 생각나는대로 끄적여 봅니다.

저작권(음악,영상,사진,글 등)을 보호해주세요!

먼저 저작권이 어떻게 만들어졌나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요. 제가 보기엔 저작권은 일종의 특허입니다. 아니, 특허가 저작권의 일종인건가요? 어찌 되었든 동류라고 봅니다. '만든 사람의 이권을 보장해 주어서 생산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켜 더욱 생산적으로 만들자'는 취지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취지에서 벗어나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악법으로 변합니다. 일단 악법은 지켜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기지만(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이건 군부시절에 만들어낸 개소리라는 소문도 있더군요), 어떻게 하면 합리적인 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뭐 어찌되었든 예전에 좀 인상깊게 보았던 TED 동영상 하나 링크 걸어 둡니다. 이거 중간중간에 딴짓하느라 전부 못 들었는데, 언제야 다시 들을지 모르겠네요. 보면 좋을 것 같은 동영상 리스트에 30개 넘게 모아놨는데 -_-



영어에 진절머리가 나신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새 시대에는 새로운 법이 필요하다'는 결론입니다. 새 술은 새 포대에 담으라는 말과 어딘가 묘하게 겹치긴 하네요.

확실히 지금의 저작권법은 생산성(또는 창조력)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특허 기간을 늘린다고 하던데 그러면 이 발목에 걸린 족쇄는 더욱 강해지기만 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전 이게 제일 큰 문제라고 봅니다. 이건 저 혼자서 답할 수 있는 종류의 문제는 당연히 아니지요. 사회 전반에 걸친 동의가 필요한 사한이니까 말이죠.

글쎄.. 일단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특히나 음악에 관해서는 말이지요. UCC 같은 것을 만드는 데 음악을 사용하는 건 제한하지 말되, 이런 곳에 사용된 음악을 2차로 녹음하는 것은 금지하자? 뭐 이런 쪽이 되겠습니다. 쓰고 보니 뜬구름 잡는 소리네요 -_-

뭐 아무쪼록 누군가 괜찮은 답을 생각해 내기를 바랄 뿐입니다.
Posted by 덱스터
원래 블로그 자체 내장되어 있는 방문자 수 추적기가 거품이 좀 많이 끼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_-;;

구글 analytics를 같이 사용하고 있는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방문자수가 아날라이틱스보다 많이 나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최소한 둘은 비례관계를 가져야 하지 않나요?

티스토리 제공 방문자 그래프

티스토리에서 제공한 방문자 그래프입니다. 5-6일 사이에 방문자 수가 증가한 것을 보실 수 있지요. 7일은 오늘이라 그런지 아직은 수가 많이 저조한 편입니다.

구글 Analytics 제공 방문자 그래프

구글 아날라이틱스가 분석한 방문자수입니다. 1일부터 3일까지는 꾸준히 증가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는데 이건 티스토리 방문자그래프도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니 별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3-4일 부분과 5-6일 부분입니다. 티스토리에서는 3-4일 부분에서 방문자 수가 감소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선 오히려 증가했다고 하는군요.(비록 3명 차이일 뿐이지만) 그래도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건 5-6일 부분입니다. 분명히 티스토리의 그래프를 보면 엄청난 증가를 보였다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아날라이틱스 그래프의 맨 뒤 둘이 5, 6일을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물론 구글이 잘못 세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같은 경우 스킨 html의 맨 끝에다가 tracking code를 달았는데, 제 사이트 로딩이 좀 많이 늦은 편이지요 -_-v(좋아할 일이 아니야 이사람아) 체류시간을 보면 평균이 22초입니다. 사실 5초만에 나가는 사람도 무지 많을텐데, 그런 점까지 고려한다면 tracking code가 작동하기도 전에 사이트를 나가버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구글 Analytics 제공 평균 체류시간 그래프. 5일은 20초, 6일은 22초

하지만 아무리 그런 부분을 고려한다고는 해도 이 두 그래프 사이에 경향의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저만 티스토리가 세는 방문자 수가 뻥튀기(?)되어있는 것은 아닌 듯 한데 티스토리 운영자분들, 이 차이가 알고리즘의 차이인가요?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아날라이틱스 Tracking code를 html 앞으로 빼 두어야겠습니다 -_-;; 이렇게까지 차이나는건 좀 아니다 싶어서 이걸 앞쪽으로 옮기면 차이가 줄어들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해 봅니다.
Posted by 덱스터
미치겠다.

진짜 왜 법조인들은 개념이 없을까? 법대 나와서 경제부장관이라는 인간이 입은 싸가지고 말 뒤엎기를 숨쉬듯이 하는 것도 그렇고, 주어가 없다면서 말의 뜻을 바꾸어 버리는 언어의 연금술사 나으리도 그렇고, 도대체 법을 하는 사람들 중에 개념이 제대로 박힌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어 죽겠다. 원래 이런 공격적인 글은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기사(정확히는 이와 같은 내용의 다른 기사이지만 그냥 보이는 대로 긁어왔다)를 보고서는 눈알이 뒤집혀졌다.

檢, 노건평 `30억 공범' 입증에 주력(종합)
검찰 “노건평씨 포괄적 공범”

사실 이 기사만 보고 글을 쓰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다. 다음 글이 휘발유를 끼얹은 다이너마이트에 불씨를 당겨주었다.

우리말 오들희 236회 - '포괄적' 의 올바른 사용법

(냉면개시 님, 존경합니다 -_-乃)
애써 잊어 두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이처럼 어의없는 개소리는 그냥 넘어가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법조인에 대해 이미지가 무지 나쁜 상태인데(물론 법조인 중에서는 개념차고 존경해야 할 분들이 계신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으나, 괜히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내를 흐린다고 하는게 아니라는 걸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법치의 최정점에 계신다는 분들이 이런 헛소리만 해 댄다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 검찰을 괜히 떡검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기초교육, 그것도 중학교에서 가르치는 법을 적용할 때의 원칙이 있다. 첫째, 법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여야 한다. 이것은 두말하면 입 아픈 원리이다. 법을 처음에 만든 이유가 무엇이던가? 사회에 정의를 구현하자는 목적에서 정의에 어긋나는 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인류가 도입한 것이 법이었다. 이 원칙은 법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그리고 둘째, 법은 누구에게나 일관성 있게 적용되어야 한다. 많은 정의의 여신상의 눈이 가려진 이유가 그것이다. 눈으로 편견이 개입할 여지를 막자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다시 눈을 뜬 정의의 여신상을 만들자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는 하지만(여신의 눈은 인간의 것과는 달리 정의를 꿰뚤어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 왜 여신의 눈을 가리느냐 마느냐가 상당한 논쟁을 일으키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관련된 글에 링크를 하나 걸어 둘 테니 참고하길 바란다.

자, 그러면 왜 이 '포괄적 공범'이라는 부분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간단하다. 첫째, '포괄적 공범'이란 개념이 법전에 있기나 하냐? 예전에 어쩌다가 친구들에게 끌려가 보게 된 '눈에는 눈 이에은 이'라는 영화에는 이런 인상깊은 장면이 있다. 복수를 위해 범죄를 벌이고 있다는 보고를 하면서 공감하고 있는 후임을 향해 형사가 '법전에 복수란 항목이 있냐'라고 호통을 치면서 법전을 던지는 장면이다. '복수'라는 항목이 법전에 없는 것처럼, '포괄적 공범'이라는 개념도 법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법률에 근거하여서만 처벌하는 방식에는 사회 정의 구현이라는 목적이 아닌 법률이라는 수단에 매몰되어 버리는 위험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법을 제한적으로 정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지금처럼 미쳐 날뛰는 공권력에게서 개개인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법대로 처벌하려면 말 그대로 '법이 제한하는 대로만' 처벌해야 한다. 이게 대통령에게 KBS 사장의 '임명권'만 주고 '임면권'은 명시하지 않은 이유이다. 뭐 이런 소리 해 보았자 청와대와 국회의 가죽만 인간인 종자들은 듣지도 않을 테지만.

두번째 문제. 물증이 없는데 구속하겠단다. 살인미수라도 물증이 없으면 구속하지 않는게 원칙이다. 다들 사시치면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배우지 않았던가? 노건평씨 구속 이유를 들어보면 다 추정추정추정... 정확히 찝어낸 물증은 하나도 없다. 나중에 실제로 노건평씨가 뇌물을 받아 먹었다고 하더라도, 검찰은 이 무죄추정의 원칙을 배반한 것으로 두고 두고 욕을 먹어야 한다.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시켜준다고? 그건 개인이나 할 수 있는 말이지(더군다나 옳지도 않은 말이다) 공권력이 할 말은 아니다. 과학이 그 권위을 과학적 원리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획득하는 것처럼, 공권력도 법의 엄격한 적용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그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이것을 어기게 된다면 공권력은 전제군주의 폭정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 내용은 다음 기사가 잘 다루고 있으니 링크 걸어두겠다.

검찰 “노건평씨 직접 돈 안받았어도 포괄적 공범”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문제. 난 앞서 두 가지 법의 원칙을 말했는데, 여기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위 문제가 노건평씨가 아니라 이상득씨였어도 이렇게 날림으로 구속영장을 날렸을까? BBK를 일주일만에 날림으로 처리한 검찰의 '화끈한' 성격에 비추어 볼 때, 김옥균 여사(개인적으로는 이 단어를 붙이는 것이 뭣하다고 느끼고 있다)의 사촌언니 사건이 소리소문없이 흐지부지되어 사라져 버린 검찰의 '너무나도 화끈한' 성격에 비추어 볼 때 난 전혀 아니었을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검찰이 법을 '커다란 독나방은 이리저리 빠져나가기 쉽게 허술하게 짜였지만 작은 나비는 어떻게 날더라도 잡힐 수 밖에 없도록 타이트하게 짜인 독거미줄'로 쓰고 있다고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검찰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신 검사님들, 중학교 교과서부터 보셔야겠다.(물론 그 이전에 개념탑재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위의 '법에서 명시하는 대로만 처벌할 것', '무죄추정의 원칙', '일관성 있는 법의 적용'은 상식이다. 상식이 아니라고 치더라도, 최소한 사시를 공부했다는 사람들에게 위 세가지 개념들은 상식이어야 한다. 물론 법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이지만,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앞에 제시한 세가지 조건들이 만족되어야만 한다. 목적은 절대 수단을 정당화시켜주지 못한다. 특히 그것이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경우라면 이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리는 것일까? 내 짧디 짧은 생각에는 이것은 다 사법연수원에서 개념을 심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사법연수원에서 실제로 개념있는 강의를 하는지 개념의 개자조차 다루지 않는지는 헌법 공부조차 안해 본 입장에서 알 수는 없으나, 사시를 통과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저렇게 개념이 없다는 것은 분명히 사법연수원에서 사시합격자들의 머리에 빨대를 꽃고 개념을 뽑아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밖에 못 내리겠다. 사법연수원은 '상식과 개념'이라는 과목을 신설하라. 그대가 키워내길 원하는 훌륭한 법조인들은 최소한 개념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덧. 대법원 앞의 정의의 여신상은 서양의 것과는 달리 칼 대신 법전을 손에 들고 있다. 이런 다툼보다는 평화를 중시하는 태도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처럼 칼이 없다는 것은 대법원이 정의를 해친 자들을 처벌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처럼 해석되기도 한다. 대법원은 정의를 구현할 강력한 의사가 있음을 어떻게든 표시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법원이 정의 구현을 위해 뼈가 가루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의지가 강력하다면 그것을 표출해야 하지 않을까?
Posted by 덱스터
요즘 한국에서는 비정규직 문제로 말이 많다고 하지요(전 아직 취업반이 아니라 신입생(곧 올드보이가 되겠지만..ㅠ)인 관계로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실제로도 인터넷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고 학교를 돌아다니다 보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글을 많이 볼 수 있더라구요. 특히 기륭전자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오늘은 이 주제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요. 일단 비정규직 문제가 제 문제가 될 가능성은 많이 낮아보이지만, 오지랖 넓게 이런 문제에 관여하려고 하느냐 하면 평소 제가 사회를 보는 눈과 관련이 있어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요? 하여튼 글을 시작해 볼께요.

먼저 기업이 제일 우선시하는 것은 이윤이라고 알려져 있지요. 이윤추구가 제 1순위가 아닌 일명 '사회적 기업'들도 있기는 하지만, 기업은 기업인만큼 이윤 추구라는 가치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런 기업들도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을 1순위로 하고 그 다음 순위로는 이윤 추구가 있는 경우가 태반이지요. 이런 점에서 볼 때 기업이 비정규직을 늘리는 것은 필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윤을 극대화하는 전략의 하나일 테니까요. 실제 비정규직 이야기는 당사자가 아닌 저로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비정규직으로 돌리고 보자는 식의 대처에 대해서 뭐라 말 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지요.

그런데, 기업이 제일 우선시하는 것이 이윤 추구라는 주장에는 보이지 않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바로 '사람을 위한다'는 전제이지요. 사람을 위하지 않고서 이윤만 추구한다면 그 기업이 강도와 다를 바가 무엇이며, 도둑놈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요?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없는 기업은 노예 상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노예 상인이 어때서?'라고 물으시면, 이 부분은 나중에 다른 포스트에서 까 드릴 테니(지금은 시간이 없네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고요. 그래서 기업이 정말 기업다운 기업이 되려면 인본주의가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만 한다고 얘기하시는 분도 있겠지요. 하지만, 배움의 목적이 이상의 확립과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상의 붕괴에 있다면 얼마나 팍팍한 세상이 되겠습니까. 잠시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다시 이어가 보지요.

제가 기륭전자 이야기에 대해 뭐라 쉽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제가 그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의견 정도는 가질 수 있겠지요.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이대로라면 기륭전자는 기업이 아닌 노예상인일 뿐이다.' 예전에 한윤형님의 블로그에서 몇개의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중 좀 인상적이었던(충격이었던이라고 하는게 옳으려나요) 부분은 '야근 없이는 월급이 70만원이 채 못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돈으로 사람이 사는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는데(제 용돈이 40만원정도 되고 기숙사비는 한달에 12만정도 되니까 52만원정도로 한달을 살아가는 셈인데, 기숙사비가 실제 주거비용보다 매우 싸다는 것과 교내식당 가격이 정말 싸다는 걸 생각해 보면 실제 생활시에는 최소 80만원은 필요할 것 같은데 말이죠), 그 말 많은 88만원 세대의 88만원보다 20만원가량 적게 버는 것아닌가요? 뭐 이것은 둘째 친다고 하더라도, 제가 정말 이 견해를 철회할 수 없는 이유는 두번째 이유에 있습니다.

사람을 깡패를 동원해서 패나요? 깡패들이야 뭐 인본주의따위 개나 줘버려 해도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최소한 기업이라면 그렇게 접근하면 안되지요. 지금 행태가 히틀러가 '난 유대인을 사랑합니다' 하는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겁니까. 아니,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윤리강령같은 것은 눈을 씼고 찾아봐도 못 찾겠네요.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것 같네요. 적어도 지키지 못할 말을 하는 지금 푸른지붕집 아래 사는 누구와는 달리 말이죠.

정말 진지하게 말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거면 기업이라는 명칭을 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지금은 기륭전자 하나만 깐 상태이지만, 이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다른 모든 기업들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이 너무 길어진 것 같으니 여기쯤에서 끊겠습니다.
Posted by 덱스터
제대로 된 블로그(네이버는 일단 제쳐두고 -ㅇ-;;)를 한 지 약 7개월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아침에 샤워를 하다가(샤워 시간이 좀 긴 편이라 그런가 잡생각을 많이 하죠;;) 블로그스피어에 대해서 한번 써 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됬습니다.

음... 어젯 밤 에냑님의 블로그(이분이 경제만화보기 좋은날의 원조이십니다 -_-乃)에서 본 좌글루스(...)라는 단어가 기억에 남았는지도...
(생각해 보니까 블로그를 하던 친구가 나랑 장단을 잘 맞춘 것은 이런 이유도 있을듯...)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일단 블로그스피어는 대부분 좌편향(?) 되어 있다는 것. 아 물론 (미쳤는)갑제씨의 블로그(?)는 예외긴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트래픽을 발생시키는 블로그의 경우 일단 이 정부는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보면 좀 마이너한 블로그(여기서부터) 메이저 블로그(MP4/13님이 좀 짱이시죠 책까지 내고 ㄷㄷ)까지 웬만한 블로그에서는 다 까니까요. 하긴, 사람이 백번 착한일을 해도 한번 나쁜일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 한번의 나쁜일에 집중하는 것도 한 몫 하긴 했겠지만, 지금 이 정부가 커다란 삽질을 하고 있는 것(대운하부터?)에는 대부분 동감하고 있다는 증거도 일지도. 아니면 단순히 내가 그런 사이트만 돌아다니는 것인가.....

재미있는 것은 이 체감적 통계가 실제 통계와도 어느정도 연결된다는 겁니다. 지금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 세대 중 20-30대가 제일 정부에 비판적이라는 통계를 보면 현재 인터넷에 제일 익숙한 사람들이 제일 비판적이라는 말이 되는데, 이러면 내 경험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 그리고 두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네이버에 대한 증오(..)수준의 배타성(?) 입니다. 저야 네이버 블로그에서 티스토리로 넘어온 이유가 지긋지긋한 검색어순위 조작에 있지만('민주주의는 죽었다'였나요? 그 사건은 많이 유명했죠. 통합검색어 순위에는 없는데 다른데서는 다 1~2위...-ㅇ-) 다른 분들을 보면 그것 말고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게 많은 것 같아요. 도아님은 완전히 네이버에 원수지신(?) 분이시고, 가끔씩(?) 가는 Raylene님도 네이버랑 어느정도 원수지신 분 같고(이외에 많은 블로그에서 네이버하면 일단 몸서리부터 치고 들어가죠)... 전 이제 거기가 메일함이라(다음이 좋긴 한데 워낙 많은 메일주소를 네이버로 돌려놔서..-_-;;) 자료실(과 싸이월드?)로 쓰는 블로그랑 웹툰(...) 보러 갈 때 빼고는 쓰는 일이 거의 없긴 한데 잠정적으로 보면 저도 네이버 까네요... 줄여서 네까??(응?)

이사오기 전까지만 해도 게시물중에 불펌이 좀 있었는데(네이버에서 이사온 흔적이니 이해해주세요) 얼마 전에 블로깅 원칙을 확립(?)하면서 싹 다 지웠지요(링크스크랩 제외). 음.. 그래서 그런가 정말 예전에 쓴 글들은 말 그대로 거칠게(?) 쓴 다이어리들밖에 남은게 없네요. 이것도 다 지우고 싶긴 한데... 이거 은근히 귀찮네 -ㅇ-...(이것 다 지우면 글 200여개가 휘리릭 날아가는 기염을 토할 수 있지요 -ㅇ-) 혹시 블로그 돌다가(추천하지 않습니다) 좀 걸릴만한 것 있으면 글좀 남겨주세요 정리좀 하게 ^-^

세번째는 역시 글연습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뭐 저야 글과는 거리가 멀다는 공대에 다니는 녀석이지만, 글 쓰는 건 재미(??)있거든요. 어릴때부터 말보다는 글을 좋아했던 편이었고(생각하는 속도가 느려서 그런 것일지도...), 제가 정말 어린 꼬맹이었을때는 부모님이 이녀석은 문과다 이러셨다니 뭐 말 다했죠. 지금도 심심하면 소설 구상중이고(곧(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찾아뵙도록 하지요 -_-+), 좋아하는 물리(-_-;; 왜 물리를 좋아한다면 사람들은 말을 안 걸까요 ㅠ)에 대한 글도 좀 더 쓸 생각이고(과학이 실패한 이유가 대중과 소통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한 몫 했을 것 같네요 ㅇ-ㅇ) 그러니 결국엔 글과는 멀리 살 수 없는 거지요.

블로그스피어를 잘 보면 글빨이 대단한 사람들이 넘쳐요. 일단 기자분들이 엄청 많은게 한 원인일 수 도 있겠구요(시사인 기자이신 고재열님의 독설닷컴이 한 예가 되겠네요), 또 원래 글 좀 쓰시는 분들이 등단(?)하기 쉽도록 진입장벽이 낮은 것도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요즘은 활동이 많이 뜸해지셨지만 가끔씩 글을 보러 가는 한윤형님의 블로그가 그 한 예가 될 수 있으려나요? 오늘도 심심하면(?) 은둔고수들의 거주지를 염탐(?)하러 돌아다녀야겠습니다.

흠.. 그런데 시험이 코 앞인데 이 짓을 하고 있는 저도 참...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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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08. 10. 7. 00:15 Writer

故 최진실 씨

원래는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포스팅을 잘 안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웬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가 이제 고인이 된 최진실 씨와 한조각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예전부터 동경해 왔느냐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지만(본인은 아주 어릴때부터 연예계에 관심이 없기로 유명했다) 그녀가 두고 떠나간 사람들의 행태가 전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지적할 것은 역시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대로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다. 물론 어느 사람의 죽음은 변화를 일으키기에 좋은 건수가 된다. 근현대사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지 않은가? 419니 518이니 하는 굵직한 사건들은 전부 누군가의 죽음 혹은 죽음에 준하는 희생을 촉매로 하여 일어났다. 나는 지금 누구의 죽음을 기반으로 법을 제정하려는 행위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권이 정말로 고 최진실씨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단순히 자살이 악플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는 단순한 분석은 삼갔으면 좋겠다. 음주운전 사고가 났을 때, 그 음주운전 사고가 일어난 직접적인 이유는 역시 운전사가 술을 마셨기 때문이지만, 그건 너무나도 단편적인 분석이 아닐 수 없다. 운전사가 술을 마시게 된 데에는 좋지 못한 경제상황으로 인한 생계의 위험도 있고, 술을 마셔야 인간으로 대우해주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도 있으며, 술 이외의 다른 모범적인 화풀이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적인 특성도 있다. 또, 음주 후 직접 운전대를 잡게 된 데에는 좋지 않은 경제 분위기도 있을 수 있고,(대리기사를 부르지 말고 한푼이라도 아껴보자는 심리) 옆에서 직접 운전하라고 바람을 넣은 친구도 한몫 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사건에 영향을 준 보이지 않는 다른 사건들도 매우 많을텐데, 한 나라의 우두머리라는 사람들이 a의 원인은 b다 라는 단편적인 사고밖에 하지 못한다니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지적할 사항은 최진실씨의 죽음에 대한 반응글이다.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은 매우 슬프기는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 처럼 보이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바로 자살에 의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실제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면 할 말은 없지만(제발 여기서 악플 등의 사건들이 죽음으로 몰아갔으니 타살이라 주장하는 분은 없길 바란다.), 이런 자살에 대해 조금은 지나친 미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 물론 고인에 대해 가졌던 추억을 되새기고 싶은 자연스러운 사람의 심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추억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어느 부분 이상 미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근거는 너무나도 빈약해 보인다. 내키지 않을 수 있으나 고 최진실씨의 실수(이것은 언제까지나 나의 편견이기는 하지만)를 간단하게나마 지적해 주었으면 좋겠다.
  1. 이중처벌 불가 원칙에 대해 정리한 글의 링크를 적어둔다. http://blog.daum.net/gagamel1108/13466484?srchid=BR1http://blog.daum.net/gagamel1108/1346648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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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08. 10. 2. 21:53 Writer

고민의 밤

고민입니다.

제 작은 철학은, 명확한 사실관계에 기반한 이성적인 판단으로 세상을 살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저는 세상사는 맑은 호수와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 맑은 물속을 한번에 들여다 보면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이 호수 위를 한가로이 날고 있는 매 뿐입니다. 하지만, 이 매는 높이 떠 있기에 물속의 일에 직접 관여하기에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현실을 버린 학문이 이러한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할 이유는 현실을 바꾸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속을 거닐고 있는 물고기가 올바르다고 말하기에는 무리하지 않은가 생각하게 됩니다. 물 속을 거닐게 되면 물 속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지만, 근시안이 되어 버려 적확한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부지런한 바보만큼 이웃을 괴롭히는 자는 없다'는 말이 있는데, 무턱대고 물속에 달려들었다가 부지런하기만 한 바보가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됩니다.

왜 신은 인간에게 멀리 있는 것을 내다보는 능력을 주지 않은 것일까요. 천리안까지는 아니더라도, 호수의 전경을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늘에 호수를 살짝이라도 비추어 주었으면 이런 물 속에서 어느 정도는 멀리 내다보며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운 것밖에 허락하지 않은 대신 여행이라는 것의 즐거움을 선물한 것이라고 믿으니, 그나마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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