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말다 쓰다 말다 해서 적절한 발행 시기가 지난 것 같지만, 어쨌든 발행은 해야겠다 싶어서 마무리지어 내보낸다.



얼마 전 사형제에 대한 위헌심사청구에서 헌재는 결국 사형제는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 사형제 합헌결정 (매일경제)
'두번째 합헌결정' 숫자로 본 사형제 (조선)

반응은 다양하지만, 대체적으로 '아쉽다' 쪽으로 굳어지는 것 같다.

<사형제 합헌에 탄식한 `사형수 대모'> (연합뉴스)
[시론] 사형제 합헌 결정을 바라보며 / 공지영 (한겨레)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어떤 판단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에 따라 불편할 수 있음을 미리 전제해두고 시작하겠다.



고등학교 시절에 이 내용으로 토론을 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난 사형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는데, 지금은 바뀌었다고 해야할 것 같다. 당시 토론에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연쇄테러범과 같이 혹시라도 탈옥에 성공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회를 위험하게 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를 위해 사형은 이름뿐이더라도 남아있어야 한다'

돌이켜보면 살짝 어긋난 부분이 있다. 저런 극단적인 경우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지금 미국이 중동에서 눈에 불을 켜고 누구를 찾아 헤매는지는 모두 알지 않는가) 저 때에도 일반적인 법이 적용된다고 가정한 것이다. 저런 상황에서는 평상시에 적용하는 법이 아닌 전시에 사용되는 법이 적용된다. 사형제도가 폐지되든 말든 전시 특별법이 적용되는 상황에서는 누가 되더라도 죽기 마련이다. 그리고 전시에 적용하는 특별법을 만드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군대가 없는 세상이란 불가능하니까.



사실 '인간성'이라는 질적인 가치를 완전히 배제하고 이 문제에 접근한다면 사형제도는 필수적이고, 자연은 이미 사형제를 택하고 있다. 인간의 태아는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를 가지고 있지만, 점차 자라나면서 물갈퀴를 만들던 세포가 죽어 손가락의 모습을 갖추어 나간다. 이런 세포자살(apoptosis)이 없다면 생명체는 제대로 발생하지 못한다. 사회라는 것을 하나의 생명체로 가정한다면, 불필요하고 또한 후에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성원을 제거하는 것은 당연히 있어야만 하는 사건이다. 종신형에 처한 사람들이 사회에 돌아갈 세금을 축낸다는 것을 제외하고 사회에 도대체 어떤 영향을 준단 말인가?

물론 문제는 그처럼 간단하지 않다. 세포자살은 어떤 세포가 너무 오래 생존해서 암세포로 변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일어난다. 일종의 생명체판 고려장인 셈이다.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현대 사회에 고려장을 부활하자고 주장한다면 정신병원으로 후송되고 싶다는 것을 만천하에 광고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는다.[각주:1] 세포는 복잡하기는 하지만, 인간과는 매우 다른 역학을 가지고 움직이기에 생명체를 사회로 치환해서 동일한 논리를 적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군다나 사회와 생명체는 각자 다른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유기체 아니던가?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간은 빵만 가지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먹고 잘 곳이 있으면 옷과 TV를 요구하는 것이 인간이다. 어디에선가는 '인간성'이라는 것이 개입되어야만 한다.



사형제를 반대하는 주된 논거 중 하나는 '신이 내린 목숨을 인간이 심판할 권리가 어디 있는가'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신을 믿는 사람들만 공감할 수 있는 근거이기 때문에 다루지 않겠지만, 잘 살펴보면 무신론자들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신이 내린 목숨'을 '인권을 가진 인간'으로 바꾸면 사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논리로 변신한다.

인권이라는 것을 정의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겠지만, 지금의 논의에서는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과 같이 구체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단순히 '인간성을 유지할 선천적 권리'정도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남은 인생을 좁은 감방에 가두어 두는 것이 인간적인가, 아니면 그런 긴 고통대신 짧은 고통으로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 인간적인가.

이렇게 질문을 바꾸면 사형제도 찬반은 안락사 찬반과 맞닿는 지점이 생겨난다. 인간으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시체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논쟁 말이다. 보통 사형이 거론될 정도로 죄질이 나쁘다면 형벌을 받지 않고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하지 않고, 대체적으로는 종신형이 선고될 것이다. 더불어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이런 범죄자들이 수감될 감방은 들판처럼 넓지 못하다. 양계장의 닭과 같이 좁은 방에서 남은 일생을 지내도록 만드는 것은 과연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아무리 종신형이 비인간적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성이 회복될 여지는 남겨두지만 사형은 인간성이 회복될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행동이라는 사실 말이다. 가능성이 남아있는 것과 가능성의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위의 주장이 철학적인 기반에서 이루어졌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현실적인 근거를 다루어보자. 사형은 앞선 링크에서 공지영씨가 말한 바와 같이 '국가가 개인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이다.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사형이란 제도 자체는 근본적으로 국가에 의한 개인살해이란 말이다.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하면, 사회가 자신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구성원을 내몰고 살해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역사를 통해 몇몇 앞선 정치인들, 또는 사상가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혹자는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그런 야만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깔끔한 반례를 가지고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산화해간 유대인들은 그들이 태어났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나치 이전의 독일은 야만적인 국가였는가? 이 사건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비슷한 일은 지금 중동에서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뀐 채 일어나고 있다. 문명이라는 것은 거기에만 의존하기에는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이다.

하지만 문명의 연약함은 구조라는 경직된 보조장치로 견고하게 다질 수 있다. 사형제도를 개정하는 것으로 이런 구멍을 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사형제도를 실시하는 조건을 매우 엄격하게 제한해 놓으면 될 것 아닌가? 비록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넣고 실수했음을 자인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지 않았던가. 당장 검색창에 '재심', '무죄'라는 단어를 치고 검색해보라.



이번에는 좀 더 근본적인 지점으로 돌아가보자. 사람들은 인권이 침해되기 때문에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인권은 누가 갖는지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우리는 인육을 먹고 밤거리를 배회하며 사냥감을 찾아 헤매는 사람을 인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을 정의하는 방법은 크게 보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순수히 생물학적인 정의이고, 나머지 하나는 순수히 철학적(?)인 정의이다. 전자를 먼저 살펴보면, 외형이 인간답게 생긴 그러니까 둥그런 머리가 위에 붙어있고 사지가 몸에서 뻗어나와 있는 벌거벗은 생명체가 된다. 하지만 이 정의가 애매한 이유는 우리가 주로 만난(났다고 상상하는) 외계 생명체도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불의의 사고로 한 팔을 잃었다고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지 않은가? 좀 더 엄밀한 생물학적 정의를 따르면, 종은 '재생산할 수 있는 2세를 만들며 다른 집단과는 보통 생식하지 않는 생명체 무리'이다. 단어만 어렵지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으므로 이게 도대체 무슨소린가 싶으면 다시 읽어보길 바란다.

이 정의를 이용한다면 매우 깔끔하기는 하지만, 몇 가지 사소하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 첫 째, 생식불능[각주:2]이면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이 문제는 '정상적으로 자라는 경우'라는 단서를 다는 것으로 쉽게 피해갈 수 있으니 무시하자. 둘 째, 인간도 결국 진화라는 자연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두번째에는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시간이 충분히 흘러 사람들 사이에 생식불능인 2세가 나타나는 조합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직은 먼 세상의 이야기이니 지금은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두 번째 가능성인 '기술의 발달로 누군가 DNA를 가지고 장난쳐 그러한 생명체가 태어난 경우'를 생각해보자. 원숭이와 인간의 DNA를 여차여차 잘 조립했더니 사람과 아이를 낳으면 재생산이 가능한 생명체가 등장한 것이다. 인간복제도 높은 가능성 때문에 심각한 문제로 다루어지는데 이런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 경우 이 새로운 생명체는 인간으로 보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인간의 두 번째 정의, 철학적으로 인간을 정의하는 것을 살펴보자. 물질보다는 그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인간이 되려면 이른바 '제대로 된 이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기준을 들이댄다면 사형제도 자체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니 간단하게 해결되기는 한다. 하지만 기준의 모호함을 둘째 치더라도 '이성만 갖추면 인간이다'라는 주장은 외계인들에게도, 좀 더 나아가서 인공지능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부분에서 문제가 생긴다. 과연 기계'따위'에게 인권을 주고 싶어 할 '성인군자'가 존재하기나 할까? 기계에게도 인권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1900년대 초반의 백인우월주의보다도 더 커다란 공감을 얻을텐데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Matrix) 외전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기계들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인간의 배타성 때문이었다.

여태 순수수학처럼 현실에는 존재하지조차 않는 대상들을 다룬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대상을 너무나도 당연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물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물 밖으로 나오는 수 밖에는 없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의미없는 탁상공론이라 비판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탁상공론이 문명을 만들어오지 않았던가.



맨 처음 글에서 강조한 것처럼, 이 글에는 결론이 없다. 다만 이 긴 글을 전부 정독하셨을 일부 열혈 독자들을 위해 아무도 답하고 싶어하지 않던 수수께끼를 하나 남겨놓겠다. 어쩌면 위 글 전부를 필요없었던 말장난으로 만들어버릴수도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뭔데 인간만 인권을 갖냐?'
  1. 물론 고려장과 같은 제도는 구성원의 불안감을 조장하기 때문에 비효율을 증가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효와 같은 개념이 일종의 사회적 보험처럼 발전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본문으로]
  2. 속된 말로, '고. 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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