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게이 차별법안 초안이 통과되었다고. 법안 옹호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게이는 "일하지 않고, 게으르며, 수상한 예술 공연으로 수입을 얻"고 소아성애자로 취급하는 정치인들도 있다고 한다. 전통적인 가정을 무너뜨린다가 주된 반대 논거인듯 싶다.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이 떠오른다. 당시 핫한(?) 유언비어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푼다" 였다지? 사회가 혼란스러우면 책임을 물 대상을 물색하는 건 보편적인 현상이긴 하다. 가장 잘 알려진 예가 1933년 나치 독일과 아우슈비츠이고, 먼 과거의 왕(제사장도 겸하던 시절-단군왕검이라는 이름이 그 시절을 반영한다.)이라는 존재도 그런 역할을 했다는 견해도 있다. 큰 가뭄이 내리거나 큰 홍수에 많은 재산이 떠내려가면 하늘의 뜻을 거스른 책임을 제사장에게 물어 그의 피를 바쳤다고.
한편으로는 그 적대할 대상에 이상한 죄목까지 덧붙여지는 것을 보면 악마의 준전지전능함이 연상된다. 괴테의 역작 『파우스트』(그런데 난 청소년을 위한 문학전집으로 심각하게 압축된 판본으로만 읽어본 것 같다)에 등장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능력은 신에 한없이 다다르지 않던가. 물론 신과 대적해야 하는 악마가 신에 비해 너무 비실비실하면 그 약한 악마가 가장 큰 적인 신의 위엄이 살지 않는 것도 이유겠지만 그 한 대상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고 자기의 책임은 회피하려는 동기도 분명 존재한다. 내 실수와 실패는 저 전지전능에 한없이 가까운 악마의 계략이라는 것. 음모론의 느낌이 들지만 중세의 마녀사냥과(진짜 별의 별 죄목이 다 나온다) 은나라의 주왕을 보면 (『논어』에도 은나라의 주왕의 죄목이 말이 안될 정도로 심하다는 구절이 있다)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있었던 현상인 셈이다.
그리고 여태 들어온 예시들을 잘 보면 모두 사회가 혼란하고 불확실성이 가득했던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어떤 사이트의 이상하리만큼 심한 적대감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겠지.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하나의 적을 만들어놓고 나면 사람들이 뭉치게 되며 (그것이 옳은 처방이든 그른 처방이든간에) 위기의 타개책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 "외부의 큰 불길이 꺼지면 내부의 작은 불길이 드러난다"와 비슷한 말이 나오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걸 뒤집으면 내부의 작은 불길을 가리려면 외부에 큰 불길을 내면 된다는 뜻. 영화 <왓치맨Watchmen>은 외계인의 침공을 구심점으로 삼아 인류평화를 이룬다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데(난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고있는거지?) 정확히 들어맞는 예시 아닌가. 참고로 우리의 반일감정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 이명박 전 대통령('전'을 붙이니 무언가 생소하다...-.-;;)이 독도에 방문하며 일본에 대놓고 디스를 걸었을 때 지지율이 폭등했지 않던가.(군부독재 시절의 학생운동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다양한 정치관으로 갈라선 사람들이 그 방증이다. 대표적으로 보수로 여겨지는 조갑제씨는 원래 좌빨 기자였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무언가라도 해서 위기의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특성 때문에 모든 문명이 버릴 수 없는 성질(광기라고 하기엔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서 성질이라고 썼다. 하지만 미친 사람은 자기가 미쳤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하니 광기라고 표현해야 하나?)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돌이켜보면 르 봉이 그렇게 군중심리를 깐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치던, 파쇼던, 매카시즘이던, 근본주의던 다 넓게 보면 군중심리로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역으로 말하면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때 집단지성이 발휘된다는 뜻이겠지. 찾아보면 『대중의 지혜』라는 책에서 제임스 서로위키는 구성원 사이의 독립성을 집단지성의 조건으로 들고 있다.
1, 2권 나뉘어서 출판되었습니다. 좀 길어요. 나중에 서평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이 책은 읽은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제대로 된 서평을 쓸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사실 하는 말은 단 한가지, '세상을 비틀어 봐라 그리하면 천재가 될 것이다' 이거지만 어디 비틀어 보기가 쉽습니까. 뭐 전 오늘도 어떻게 하면 세상을 비틀어 볼 수 있을까 궁리만 합니다.
단테의 신곡은 어디서 삘이 꽃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많이 읽고 싶었던 책 중 하나입니다.(그 지옥 관련된 내용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많이 듣기도 했구요. 물론 기독교문학이기는 하지만 그건 모태신앙인 저에게 문제될 만한 내용은 아니지요.(읽으시려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이 책은 사실 신곡의 해설서에 가깝습니다. 자습서처럼 느껴진달까요? 그래도 정말 읽기 쉽고, 여러가지 측면에서 신곡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총 15 강의를 모아 놓은 것인데, 강의를 읽다 보면 잠깐 덮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잠깐 덮고 자러 가기도 하지요 ^^;;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해 주는 책입니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마지막 강의가 남아있군요) 베스트 선정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 되겠습니다. 촛불 이후에 읽어서 그런지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같네요. 백여 년이 지난 책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정확하더군요. 역시 고전은 고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사회심리학이 시작되게 된 기반을 마련한 책이라고들 하더군요. 예전에 서평을 써 둔 것이 있으니 연결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귀스타브 르 봉, 군중심리
전 사실 이 책을 국방부가 추천해주기 전에 읽어서...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좀 자세히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이 들어서 구입했던 책이라고 기억합니다. 아니면 그냥 단순히 책 표지들을 스윽 훑다가 갑자기 눈에 띄어서 발견한 것일지도...-_-;;
제일 기억나는 부분은 이것이군요.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결코 친하지 않다.' 자본주의는 지폐 한 장당 표가 주어지는 제도이고 민주주의는 사람 한 명당 표가 주어지는 제도인데 양립이 가능하냐는 그런 부분이었지요. 재미있었습니다. 나중에 집으로 귀양보낸 책을 돌려받으면 서평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실 위에 적은 것 말고도 무소유도 읽었고, 프로그래밍 유니버스도 있을 테구요(사실 이 책은 작년이랑 올해 겹치는 기간 동안에 읽었던 거라 제외했습...-_-;;), 또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책들이 있을 겁니다(아마도;;). 아, 끌림이랑 대한민국사 4권을 빼먹었군요;; 뭐 어찌되었든간에 제 도서성향을 보면 문학, 특히 소설쪽은 매우 취약하네요. 이런 이런, 그렇지 않아도 감성이 상당히 메말라 있다고 (자체적으로) 진단받았는데 문제가 있겠군요. 내년엔 좀 나아지려나 모르겠네요 ^^;;
요즘 buckshot님이 Read&Lead에서 알고리즘 포스팅을 하시고 계십니다. 전 물론 이보다는 좀 더 나아가서 인간 자체가 '특정 알고리즘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는 기계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자세한 것은 다음에 다루어 보아야겠네요.
이런 제 관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을 보면 참 다양한 법칙이 있습니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이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가끔 발견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처럼 놀라는 경우도 없지요. 이 책도 그런 부분에서 놀라게 되더군요.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 입니다. 예전에 대학국어 서평과제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쓴 적이 있는데, 잠깐 공개해 볼까요?(사실 그리 잘 쓴 서평은 아닙니다만...-_-) 상당히 기니까 열기 전에 잠깐 생각해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합리적이었던 개인은 왜 집단에서 합리성을 잃어버리는가?
방대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은 자연 현상을 예측하고 대비하기 원했다. 곡물을 심어야 할 시기나 비가 오는 시기, 강이 범람하는 시기 등 많은 자연 현상들은 잘못 예측하였다가는 당장의 생계가 위협받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과 별들을 연구하여 달력을 개발하였고, 비가 오거나 강이 범람하리라는 사실을 예측하게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문명을 세웠다. 이후 세월이 지날수록 문명은 더욱 발전하였고, 인류가 예측하는 현상의 정확도와 범위는 점차 넓어져 지금은 영원이라고 느껴질 만큼 먼 미래 - 태양이 약 60억 년 뒤에는 붕괴할 것이다 따위 - 까지도 어느 정도 합리적인 예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예측을 좀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 발달시킨 것들을 학문이라 부른다. 학문은 그 범주가 매우 넓어 인문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 다양한 종류로 분류한다. 이런 다양한 학문의 수만큼 학문에서 사실에 접근하는 방법의 수는 다양하나, 대부분의 경우 그 과정은 서로 유사성을 보인다. 대표적인 유사성은 그 학문에서 예측하고자 하는 대상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에서의 행동을 예측하는데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에서는 생명체를 연구할 때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세포를 연구하며, 물리학에서는 미립자들의 행위를 연구한다. 또,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심리를 다단계로 나누어 가장 기본이 되는 단계를 연구하기도 하며, 경제학에서는 경제적인 개인의 행동을 연구한다. 이런 접근 방법을 취하는 이유는, 자연 현상은 단순화하지 않으면 너무나도 복잡하여 이해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화의 힘은 매우 강력해서, 이런 접근 방식으로 얻어진 많은 지식들은 매우 정확한 예측을 보장한다. 물론,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가장 작은 단위에서 얻어진 지식들은 가끔 전체적인 흐름을 전혀 예측치 못하기도 한다. 이러한 예는 매우 다양하다. 일례로 뇌와 지능을 떠올려 보자. 뇌는 뉴런(신경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이런 뉴런들은 간단한 장난감처럼 간단한 신호밖에 처리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간단한 신호만 전달할 수 있는 하나하나의 세포가 모이게 되면 세포 하나하나의 특성에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현상인 지성을 만들어낸다. 또, 미국의 대공황도 좋은 예이다. 당시 각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은 경제학이 예측하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었지만, 경제는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전체적인 불경기의 경우 미시적인 입장에서의 경제가 아닌, 전체적인 관점에서 경제를 바라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들에서 집단으로 모인 개개인은 원래 가졌던 특성과는 다른 새로운 특성이 발현된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귀스타브 르 봉(군중의 심리학적 특성에 관한 연구로 널리 알려진 사회심리학자이다.)의 저서 『군중심리』(원작 La psychologie des foules)는 이런 부분을 잘 잡아낸 책이다. 개개인의 심리 상태가 개개인이 모인 상태인 군중의 심리상태와 같을 수 있을까?
르 봉의 대표작 『군중심리』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1부에서는 군중으로 모인 개개인들이 갖는 심리상태와 정신적 능력을 서술하고 있으며, 2부에서는 1부에서 알아본 심리상태와 정신적 능력이 군중의 신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와 이 신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여러 외부요인들을 살펴보았다. 마지막 3부에서 저자는 다양한 군중들을 분류하고, 그렇게 분류한 군중들이 각기 다른 부류들과 대조되는 특징들을 알아보았다. 제 3부의 내용은 그 내용의 특성상 『군중심리』의 부록이라 볼 수 있으며, 중요한 내용들은 거의 1부와 2부에 집적되어 있으므로 이 서평에서는 보다 큰 중요도를 갖는 1부와 2부의 내용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르 봉은 먼저 군중의 하향 평준화되는 지적 능력을 지적한다. 이러한 특성이 군중의 행동에 의식적인 요소보다는 무의식적인 요소가 더 강하게 작용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설명하며, 따라서 군중은 이성보다는 감성적인 요소에 더 끌린다고 르 봉은 결론내리고 있다. 또한 이런 감정적인 요소가 고립된 개인은 시도할 수 없는 많은 행동들을 가능하게 하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군중으로 모인 개인들은 항상 범죄적 성향만 갖지는 않는다고 서술한다. 이어서 그는 군중의 의견과 믿음에 대해 서술한다. 여기서 그는 앞에서 서술한 군중의 퇴보된 사고 능력 때문에 군중은 단순화된 이념만 수용한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이렇게 군중은 우매하다는 특징에 입각하여 민주주의의 많은 주장에 대해 비판 - 기초교육은 사회적 낭비일 뿐이다 나 군중은 독재자를 원한다 등 - 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필자는 민주주의가 사회의 기반적인 사상적 배경이 되는 사회에서 자란 탓에 이러한 민주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을 놓지는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은 너무나도 정확하게 현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날카로운 현상에 대한 서술은 그가 서론에서 말한 듯이 ‘일종의 관찰기록과 비슷한 가치를 지닌 책으로 읽히기 기대’하고 저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서술들을 읽으면서 필자는 부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을 때 느꼈을 법한 두려움을 느꼈다. 필자는 군중에 가담한 기억이 있는데, 이후 이 책을 읽고서 르 봉이 서술한 일반적인 군중의 특징이 군중에 있었을 때의 나를 되돌아보았을 때와 너무나도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배타적인 무한한 증오와 자신의 주장의 근거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같은 많은 특성들은 당시의 나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단어들이었다. 군데군데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그의 날카로운 분석들은 이미 출판된 지 1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책을 읽으며 누군가 몸 속 구석구석을 관찰하는 듯한 불편한 기분을 느꼈던 원인은 그의 냉철한 직시에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에서 제시하는 군중을 지배하기 위한 조언들은 실제 역사 속에서도 쓰였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자서전 『나의 투쟁』(원작 Mein Kampf)에서 르 봉이 제시한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라디오를 활용한 반복적인 암시로 80%를 가뿐히 넘는 엄청난 지지율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미국 루즈벨트 정부의 노변담화를 벤치마킹했다는 이명박 정부의 라디오 연설을 괴벨스의 라디오 활용 방법과 비교하면서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 무엇보다 언론의 독립성이 민주주의가 가장 필요로 하는 기반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것 등은, 아직까지도 그의 주장이 유효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편, 책을 읽다 보면 저자는 결국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저자는 군중이 결코 지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매우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하지만, 저자 역시 책에서 대중은 전문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현상이 있음을 서술하고 있으며, 이는 대중에 의한 지배체제가 이전의 군주정치나 귀족정치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아니함을 강하게 증명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예측에 있어서 전문가보다는 다수의 대중이 내놓은 의견을 통계적으로 잘 처리한 답안이 보다 높은 적중률을 자랑한다는 통계자료를 생각한다면 군중이 우매하기만 하다는 그의 인식은 분명히 편향되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또한, 르 봉은 그의 저서에서 여성과 어린아이 등 소위 말하는 약자 계층에 대해 이성적인 면 보다는 감정적인 면이 강하여 열등하다는 의견을 드러낸다. 이런 사회적인 편견은 태어날 때부터 남녀에게 지속적으로 걸리는 암시의 영향을 제거해야만 비교할 수 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하나, 이것을 차치하고서도 감성적인 것이 열등하다는 것은 고양이보다는 강아지가 우월하다는 견해와 같은 종류의 편견일 뿐이다. 물론 20세기 초까지 여성의 참정권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이러한 의견이 당시에는 어느 정도 일반적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지만, 지금의 시대에는 너무나도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또 다른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러한 현상들의 원인에 대한 답을 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상이 있으면 그 현상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뒤따라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법인데 이 책에서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피하고 있다. 저자가 말했듯이 이 책은 사실들에서 일반적인 경향을 유추해내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기에, 이런 현상들이 왜 생겨나는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들에 대한 설명만 있고 왜 그러한가에 대한 설명은 없었던 점은 분명히 아쉬운 부분이다. 필자는 현대에 와서 두드러지게 발전하고 있는 진화심리학과 같은 기타 관련 분야에서 이러한 부분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논의를 해 주리라고 희망한다.
저자는 책 전반을 통해 군중은 결코 똑똑할 수 없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을 민주주의는 잘못된 것이라고 확대 해석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개개인보다는 하나의 집단으로 모인 개인들의 판단이 더욱 합리적인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이는 The New Yorker의 편집장인 제임스 수로위키(James Surowiecki)의 책 『대중의 지혜』(원작 The Wisdom of Crowds)에 잘 나와 있다.) 오히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대중의 우매함’은 귀족정(Aristocracy)을 옹호하는 증거로 쓰이기보다는 민주주의가 놓칠 수 있는 사각지대를 비추는 한줄기 섬광으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된다. 분명히 군중으로 모인 대중조차도 신이 아닌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놓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제가 직접 제 서평에 대해 평가를 하자면, '용두사미'같은 느낌이 든다고 할 수 있겠네요. 시작은 인류의 역사를 들먹여대면서 가는 거창하고 오만함의 극치이지만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책 한권...-_-
사실 이 책을 읽다보면 좀 울화통이 터지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볍신같이 책을 쓸 수 있는거지?' 위의 서평에서도 조금 언급했지만, 이분 민주주의를 엄청 싫어하십니다. 근데 그것도 결국은 자기가 말한 '어떤 지식인이라도 시대적인 군중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싶네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민주주의는 아니다' 라는 인식이 팽배했다고 하는군요. 주성영 의원님이 좋아하시는 '천민민주주의'적 관점이 대세였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상당히 정확합니다. 저도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더군요. 지난 촛불 때,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게 다 이 책 덕분인 듯 합니다. 역시 이 책의 의의는 '민주주의 때려치자'가 아닌 '민주주의가 놓칠 수 있는 사각지대를 바라보자'가 되겠군요. 권력자에게 휘둘리기 싫으시면 한번 쯤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물론 읽다 보면 조금은 인간에 대한 회의가 느껴질 수 있어요. 그런 반응에 대해 전 이렇게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러시아의 단편 작가이자 극작가인 안톤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하는군요(물론 전 TED에서 보았지만, 인터넷에는 전혀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은 그가 어떠한지 알게 되면 진보한다.
(Man will become better when you show him what he is like)
두 기사는 같은 사건을 말하는 듯 한데, 저에겐 하나의 사건이 떠오릅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긴 하지만, 너무나도 비슷한 사건이니까요. 1964년 3월 13일 새벽 3시경에 일어난 살인사건입니다. 심리학 쪽으로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라면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이라고 불리는 현상입니다.
(제노비스 사건의 주 내용은 위키피디아의 Kitty Genovese 항목을 번역했음을 미리 공지합니다.)
1964년 3월 13일 오전 3시 15분 경, 캐서린 수잔 제노비스(Catherine Susan Genovese, 일반적으로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e)라고 알려져 있음)는 그녀가 살던 아파트의 문에서 30미터 즈음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습니다. 이때 한 남자가 다가와 그녀의 등을 두번 찌릅니다. 비명이 차가운 공기중으로 퍼져나가고, 아파트의 불들이 들어옵니다. "그녀를 내버려 둬!(Leave that girl alone)" 한 이웃이 소리질렀고, 남자는 도망갔습니다. 이웃집의 불들이 다시 나가고, 제노비스는 다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약 10분 뒤,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자, 남자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건물의 뒷쪽에 쓰러저 있는 그녀를 발견한 남자는, 그녀를 다시 공격했습니다. 약 30분 간 총 3번의 공격이 있었으며, 제노비스는 병원으로 실려가는 도중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이 주목받았던 이유는(이 사건은 나중에 타임지에서 '도시가 가져온 비인간화'라는 주제로 크게 다루어졌다고 합니다.) 당시 사건을 보고 있었던 목격자가 38명에나 이르기 때문입니다.(실제 목격자는 그에는 못 미치는 10여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만, 확실히 많은 숫자의 목격자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왜 목격자들은 신고를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심리학자들은 두가지 이유를 들어서 설명하였습니다. '책임의 분산'과 '방관자 효과'가 그것인데, 책임의 분산이란 '여러 명의 사람이 모여 하나의 사건에 대해 개인이 지는 책임이 군중에 분산되어 버리는 것'을 말하고, 방관자 효과란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이 현상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는 주변의 사람들이 별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으므로 문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자신도 행동하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둘을 종합해 보면, 위의 제노비스 사건에서 목격자들이 신고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그녀의 안전을 직접적으로 책임지고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따로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지금 상황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행동하는데 책임감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까요? 예전에 해변에서 있었던 심리실험 하나가 생각나는군요. 한 사람이 돗자리를 깔고 누워 카세트테잎으로 음악을 듣다가, 카세트를 돗자리 위에 놓고 바다에 해수욕하러 사라지면, 다른 사람이 나타나 카세트를 들고 사라지는 것이 실험의 기본이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변수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부여하기'입니다. 한 세트의 실험에서는 위의 실험이 그대로 행해졌고, 다른 세트의 실험에서는 해수욕을 하기 위해 사라지기 전 가까운 사람에게 '제 물건 좀 봐주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고 가는 형식이었습니다. 물론 질문이 가져올 짐에 대한 집중이 고려되지 않기는 했지만(무언가에 대해 질문하면 그쪽으로 당연히 집중하게 되지요), 상당히 흥미로운 실험 아닌가요? 결과는 첫 세트에서는 별 제지가 없었던 반면, 둘 째 세트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 (20명 중 19명)이 자발적으로 경찰관이 되겠다고 나서서 제지했다고 합니다.(모리아티 교수와 뉴욕 해변에 대해 찾아보시면 될 듯 합니다.) 이 결과만 놓고 보더라도, 책임감이 행동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 지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이제 방관자 효과에 대해 다루어 보겠습니다. 방관자 효과가 영향을 미치는 사례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저도 이 효과에 한번 당했던 기억이 나네요. 배를 타고 가는데 바다위에 둥그런 물체가 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은 파도도 심한 편이었구요. 사람 머리가 아닌가 잠시 고민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 반응도 없고... 순식간에 지나가서 주변 사람들에게 저게 무엇이냐고 못 물어봐 결국 부표이거나 내가 잘못 봤겠지라고 결론내렸던 일인데,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제발 그때 봤던 그 검은 둥그런 물체가 부표였으면 좋겠네요. 잡설은 여기서 그만두고, 방관자 효과와 관련된 실험 하나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방관자 효과로 연결되어 있는 링크를 타고 나가면 나오는 로빈과 라테인의 실험입니다.
방에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 사람의 수는 한명일 수도 있고 여러명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 방에 연기가 새어 들어옵니다. 어떻게 될까요? 링크를 타고 나가서 원 글을 읽으신 분이라면, 혼자 있었을 때에는 피실험자의 75%나 2분 이내에 나갔던 반면에, 단체로 있었을 때에는 고작 13%가 6분 이내에 보고했을 뿐입니다. 이와 비슷한 실험을 우리나라에서도 방영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피실험자가 같은 조건에서 혼자 있었을 경우에 단 10초만에 방을 나왔던 사례도 있는 반면, 6명이 방에 들어가 있고 5명이 이미 입을 맞춘 조교일 때 피실험자는 10분이 지나도록 방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총 여섯번 정도 실험을 했는데 후자의 경우 한번도 10분 이내로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실험과 비슷한 실제 사건으로는 대구 지하철 참사가 있습니다. 이때 폐쇄회로에 잡힌 영상에서 사망자들은 놀랍게도 침착하게 있었다고 합니다. 사방에서 연기가 스멀스멀 스며들어 오는데도 말입니다. 물론 당시 '아무 이상 없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을 하고(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행동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기관사는 혼자 탈출했다는 말도 있던데, 이건 제발 사실이 아니길 빕니다.
위 사건은 책임의 분산과 방관자 효과가 가져온 또 다른 비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같이 채팅하는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으로 보아 그냥 단순히 연기하는 것 같고, 어차피 진짜라고 해도 내 책임은 아니니 신경쓰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요즘 저렇게 인터넷에 공개적으로 자살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일단 신고하는 건 어떨까요? (하지만 경찰이 장난인줄 알고 전혀 신경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참 슬픕니다. 경찰에 대한 불신이 왜 이리도 만연한 것일까요?)
여러 사고와 그 배경이 되는 심리현상에 대해 알아갈수록, 사람은 이렇게 무기력한 존재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이런 무의식적인 행동들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 좀 더 나은 행동을 하게 될까요?
그렇지 않아도 값싼 밥만 먹고 다니는 제가 허리띠를 졸라메면서 책을 세권이나 또 질렀습니다.
서점... 저에겐 지름신이 꽈리를 틀고 면벽수련하는 곳이군요. -_-;;
아 님하 이번만은 봐주셈 저 벌써 식비외로 20만을 날렸단...쿨럭(과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딱 세권만 질렀습니다. 마일리지로 조금 써버리고 나니, 실제 쓴 금액은 5만 7천 130원정도밖에(?) 안되는군요. 외서 두권이나 지른 것을 생각해 보면 싼겁니다 -_-;;(아, 전공책이 미친듯이 비싼건가...;; - 저번에 세트(Feynman Lectures on Physics) 하나 질렀는데 10만원 가까이 깨졌다지요 당시 환율은 900...)
다음 책, 사랑합니다
첫 외서는 Blank Slate 입니다. TED까지 나와서 광고를 하셨던 Stiven Pinker씨가 쓰신 책이지요. 책까지 사 가며 이 분의 주장을 깊게 파들어가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지금 듣는 강좌의 소논문에 쓸 가장 필요한 참고 자료가 될 것 같아 주문했습니다. 다행히도 국내재고가 있어서 해외배송이 아니더군요.
책의 주요 내용은, '인간의 본성은 날 때 부터 타고난다' 입니다. 정치적인 부담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학설이지만(귀족정(Aristocracy)을 옹호하는 근거로 쓰일 수 있으니까요 - 당연히 뛰어난 놈들이 정치를 하면 정치가 나아질 것이다는 게 상식적인 생각이지요), 과학적으로는 환경보다는 유전이 인간의 성장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평등과 자유의 법칙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주장은 하시지만(TED에서도 그 말을 하셨죠), 일단 그건 읽어봐야 알겠군요.
한글 번역본은 『빈 서판: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입니다. 제가 왜 굳이 원서를 골랐냐고요? 원서가 더 쌌거든요..-_-;; 약 만 오천원 정도.. 사족으로, 빈 서판은 우리가 성선설 성악설 배울 때 배웠던 '백지'와 개념이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편의상 번역본만...;; 다음 책, 사랑합니다
두번째 외서는 The wisdom of crowds입니다. 저번에 포스트한 제임스 수로위키(왜 한글 서적에서는 다 서로위키라고 적을까요? 분명히 pronounciation을 찾아보면 수로위키인데..)TED와 관련있는 책이지요. 개인적인 목적으로는 전에 인상깊게 읽었던 르 봉의 『군중심리』에 대한 비평서로 쓰려고 합니다.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르 봉은 군중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입니다. 똑똑한 개인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면 그 순간부터 바보가 된다고 혹평을 하니, 결코 우호적이라고는 하지 못하겠지요. 그래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그 안에 어느 정도의 사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지요. 몇몇 부분은 책을 읽고 나서 생각해보면 정말 오싹하더만요.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책이 지금의 나도 관통하고 있다니...' 이런 느낌입니다. 뭐 예전에 노자의 『도덕경』을 읽으면서(군주 관련 부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_- MB) 2008년을 느낀다는 분도 있었는데, 이건 아무것도 아니려나요?
한글 번역본은 『대중의 지혜』입니다. 이건 중앙도서관에서 30분만에 Introduction 챕터를 다 읽고나서 지름신이 바로 강림해 버렸습니다. -_-;; 어쩔 수 없이 지르게 하더만요.(개인적으로 번역본은 저자의 뜻이 한번 필터링을 거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읽을 수 있으면 원서로 읽으려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J.S. 밀의 『자유론』의 원서인 『On Liberty』 읽느라 피똥싸고 있지요 -_- 이건 뭐 네다섯문장마다 모르는 단어가 두세개씩 튀어나오니 원... 단어공부 좀 더 해야겠습니다.)
TED 강연을 포스트할 때 말했듯이 이 책은 '집단지성'에 관심을 갖는 분이라면 정말 한번쯤은 읽어 볼 만 할 것 같다고 자신없게(?) 말합니다. 자유론과는 달리 단어는 쉽게 쉽게 사용한 것 같아(하긴 신문 편집장이 괜히 철학가인 척 할 필요는 없겠지요?) 비교적 쉽게 읽힙니다. 아 근데 빈 서판은 교수가 썼으니 어려우려나...ㅠㅠ
다음 책,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지른 책은 한홍구 교수님의 대한민국사입니다. 예전에 고등학교 입학시 필독서여서 1권을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 보니 4권까지 나왔더군요. 질렀습니다. 2권, 3권도 아직 못 봤지만 일단 4권이 제일 끌리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아서요.
사실 지르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2만원 이상을 질러야 배송비가 무료인데(...-_-;;;), 마땅히 시킬 다른 책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간만에 국방부 추천 불온서적 23선을 찾아보았습니다. 아 이런, 대한민국사를 잊고 있었다니. 이런 수순입니다. 아아, 미필인데 군대 들어갔다가 실종당하는거 아닌가요 ㅠㅠ 그나저나 저 책을 읽을 때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막장이었나 느끼게 되면서 마음 한 구석이 아련히 쓰려오더만요.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이미 이렇게 된 거, 상처를 지고 살아가야죠.
어떻게 보면 이렇게 고통을 느끼는 것이 더 좋은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쩌다가 물 끓는 주전자에 손을 가져다 댔는데 뜨거움의 타오르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손가락 끝의 물집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아예 익어버리잖아요? 그런 종류의 고통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지요. 스티븐 핑커씨가 TED 강연에서 끌어온 체호프의 명언이 기억에 메아리칩니다.
인간은 그가 어떠한지 알게 되면 진보한다.
(Man will become better when you show him what he is like)
요즘 '군중심리'(귀스타브 르 봉 저)라는 책을 읽고 있다. 책의 서평중에 히틀러가 이 책에서 사용되는 정치적 선동기술을 상당히 응용하고 있다는 글귀가 있는데, 이제서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군중을 지배하려면 제일 먼저 신념을 주입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런 세뇌에 가장 유용한 방법은 바로 반복적인 암시라고 한다. TV방송과 라디오를 이용한 선전만큼 쉬운 반복적인 암시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이 바로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의 편향성이 욕을 얻어먹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모른다. 말한 것처럼 반복적인 암시야말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긴장은 계속되어야 한다.
공통의 분노 대상. 군중을 움직이는 데에는 논리적인 이성보다는 감성과 본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용한 유태인 학살. 반미를 빨갱이로 몰아가면서 논리적인 이유따위는 없는 매카시즘. 어찌 보면 대한민국도 그리 커다란 차이는 없는 것 같다. 시위하는 놈들은 다 빨갱이야라는 공허한 메아리가 아직도 울려퍼지고 있는 것을 보면, 군중의 신념은 부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르 봉의 주장이 아직도 가슴에 남는다.
반복적인 암시를 통한 독재자의 넘볼 수 없는 위엄. 이 위엄을 이용한 통치. 박정희, 전두환 등 군사정권의 대통령들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에 가득 찬 보수세력. 한국현대사는 위엄은 그 위엄이 의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부터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아직 그 위엄에 대항할 생각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서는 찬양과 맹종의 대상이다. 경외감도 경계해야 할 감정 중 하나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참 단순한 기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긴,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서 정말 자유의지로 행하는 것은 얼마나 될까? 기껏해야 10%도 안될 자유의지. 무의식의 영역과 의식의 영역 중에서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면, 의식의 영역이 잠식당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이리라.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이런 보이지 않는 잠식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