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시간은 미래로부터 흘러와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고 한다.

1.
오랜만에 고등학교에 친구들과 함께 갔다. 건물이 새로 들어서고, 실험실은 바뀌었고, 운동장엔 잔디가 깔려있었다. 졸업한지 3년은 넘어서 그런지 날 가르치셨던 선생님들은 반만 남아 계셨다. 이제 내가 이 학교에 올 일은 2년 내로 사라지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걸어온 과거를 확인하는 건, 과거는 이미 죽었다고 확인하기 위해 그 관을 뜯어보고 과거의 시신이 남겨져 있음을 확인한 뒤 안도감 속에 관에 다시 못을 박는 작업인 것일까. 한편으로는 좋은 감정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운 감정이 남았다. 장인이 자신의 걸작을 떠나보낼 때 이런 기분이 들겠지.

선생님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다른 고등학교 친구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누구는 인턴을 한다더라, 누구는 교환학생을 간다더라, 누구는 대학원에 진학했다더라, 누구는, 누구는, 누구는.... 내 생활신조는 후회될 일은 하지 마라였건만 이럴 때마다 조금씩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들 앞으로 열심히 나아가고 있는데 난 여기 서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성은 나도 충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외치지만 감정은 이성을 압도한다. 감정은 소나기로 얼룩진 여름날의 대기와 같아서 무덥다가도 시원해지기를 손바닥 뒤집듯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건 그 날씨에 익숙해지는 것 뿐이다.

대화를 하다 보니 학교도 도마에 올랐다. 고등학교가 이름을 바꾼다고 난리인데 동문에서는 반대하고 있단다. 솔직히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무언가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이름을 바꾼다면 얻을만한 건 정부 지원이려나? 간단하게 말한다면 밥그릇 싸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번 더 바뀐 학교를 돌아보고, 교문 밖을 나섰다.

2.
서울에 갔다. 다른 친구들도 한번 볼까 해서 학교를 가 보았다. 대학도 많이 변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휴학할 때까지만 해도 짓고 있었던 건물은 어느새 완공되어 있었고, 못 보던 건물도 들어서 있었고, 잘만 있던 건물은 나 공사중이오 광고하듯 철골과 천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중앙도서관만 그 조용한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친구와 같이 밥을 먹고 무언가 마시자며 처음 보는 건물로 들어섰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생각해보면 미안한 기분도 든다. 그렇지 않아도 한창 바쁠 때인데 친구라는 놈이 보고싶다고 연락해서 어렵게 시간내게나 하고. 미안한 감정 때문인지 잠깐 잠깐씩 흐르는 침묵이 나 돌아가고 싶다는 묵언시위처럼만 느껴진다. 친구가 침묵을 부수는 일이 더 많으니 시위하는 것은 아닐 텐데. 얼음이 떠 있는 아메리카노가 밑바닥을 보이자 자리를 정리하고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가 헤어졌다.

도서관 열람실 입구에서 멀어져 가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걸음의 관성 때문에 몇 발자국 더 나아가 뒤돌아보았다. 고등학교 친구가 멍하니 담배를 물고 앉아 있었다. 다니던 학교 때려 치고 여기로 왔다더니 사실이었네. 잠깐 앉아 몇 마디 나누었다. 3학년이나 다녀 놓고 다시 새로 입학했으니 삼수한 건가. 얘도 열심히 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담배 한 가치가 재로 사라지자 대화는 끝났고, 나는 다시 길을 나섰다.

전화가 걸려온 것은 2분 정도 걷고 난 뒤였다. 나중에 만나기로 했던 녀석이었는데 학교라고 하니 본부 한번 가보랜다. 얼마 전부터 꽤 큰 사건이 터졌으니 한번 가 볼까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그 전화가 오기 전에는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 친구의 조언을 따라 학교 본부로 발걸음을 돌렸다.

기묘함. 학교 본부에 가까워지면서, 본부 건물 주변을 걸으면서, 그리고 건물 벽에 붙은 포스터들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더욱 진해져만 가는 감정이었다. 한 쪽에는 과격한 표어들이 내 적개심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흩어져 시위하고, 다른 쪽에는 인터넷의 온갖 개그들이 패러디되어 장난스런 실프에 흔들렸다. 전쟁터의 표어들과 축제의 즐거움이 부조화스럽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난 즐거움을 느꼈다. 본부 건물 안까지 들어갔더라면 더 즐거웠을 텐데, 아쉽게도 학생증을 놓고 와서 기묘한 즐거움은 거기에서 끝을 맺기로 했다. 학교도 변했구나. 건물만 변한 것이 아니라 안에 사는 사람들도.

3.
중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다들 식사는 한 상태였기 때문에, 맥주나 마시러 갔다. 집 근처에 셀프로 운영되는 맥주 바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로 갔다. 내가 일단 소주를 못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헤어지려니 무언가 아쉬워서 과자 조금이랑 캔맥주를 들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니 시간은 자정을 넘겨 한시가 되었다. 새벽은 이야기거리가 떨어지는 시간이다. 그래서 서로 더 깊은 곳의 이야기를 꺼내오게 되었다.

깊은 곳일수록 어둡기 마련이다.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데로 시작해 놓고서는 말하면서 눈물이 살짝 고이는 이야기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 충격이었던 이야기 하나는, 내 목표는 너였다는 친구의 고백이었다. 내가 그런 놈이었나. 나는 따라갈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를 따라오는 사람도 있었구나. 남들 따라가기에도 벅차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나를 따라가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도 있었구나.

4.
두 발이 땅을 딛지 못하고 있더라도, 무릎이 발바닥과 함께 땅에 기대 있더라도 멈추어 있다고 단언하지는 못할 것 같다. 꿈틀거리는 한은 앞으로든 뒤로든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멈추어 있다고 포기하지 않는 이상 꿈틀거리기라도 할 테니까.

잠깐 앉아 신발끈을 고쳐 매어야 할 시간인가 보다.

0'.
시간은 미래로부터 흘러와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은 내가 과거로부터 흘러와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간다고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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