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9. 1. 20:47 Daily lives
비오는 날
7월부터 시작되었던 방학이 매미들의 합창단 공연계획으로 북적이던 8월을 지나 9월의 시작인 오늘 개강으로 끝을 맺었다.
요즘 잠자리에서 자주 뒤척이게 되는데, 뒤척이다가 빗소리를 듣고 눈을 뜬 것은 6시 반쯤이었다. 대학이 으레 그렇듯이 1교시는 9시에 시작이다. 기숙사라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터라 7시 반쯤에 일어나도 강의는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어젯밤에 좀 늦게 잔 탓도 있어서 그런지 피곤하던 터라 다시 무거운 눈을 감았다.
다음 깬 시간은 7시 직전이었다. 룸메이트의 폰이 계속 쏘아대는데 안 깰 수가 없었다. 다행히 룸메이트가 금방 깨서 시끄럽지는 않았지만, 이미 푹 자기란 글렀다. 결국 7시 반에 맞춰놓은 내 알람이 울릴 때까지 침대에서 편히 뒤척이기로 결정했다.
7시 반에 평소처럼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고 나니 8시가 되었다. 오늘은 아침이 그다지 끌리지 않아서 씨리얼바 하나와 우유 한팩으로 끝낼 생각을 가졌던 터라,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판단하고 컴퓨터를 키기로 결정했다. 시간을 때우려고 그러기는 했지만, 사실은 어제 나간 스탠드의 등을 어디서 살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이유가 더 컸다. 아직까지는 자립한지 반년이 조금 넘는 초보자라 그런지 등을 사는 곳과 같은 기초적인 것도 모른다. 결국 검색에 실패해서 20분쯤 나왔다.
씨리얼바는 여태 선택해왔던 푸른놈과는 달리 빨간놈을 선택해 보았다. 뭐랄까, 먹으면서 드는 느낌은 이놈은 무언가 빵과 닮았다는 것이다. 좀 질퍽한 감촉이 딱 내가 싫어하는 건포도가 들어가 있는 파이였다. 녹색은 그래도 아침에 우유에 말아먹는 씨리얼 느낌이 나 좋았는데 이건 차라리 같은 가격의 빵을 사는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부터는 파란놈이나 빵을 선택해야 겠다고 다짐하였다.
오랜만에 듣는 강의. 처음부터 들어오는 교수님의 인상이 심상치가 않다. 딱 보면 불만많은 숙련된 노련한 대장장이와 같은 모습이다. 아니, 완벽을 까탈스러울 정도로 추구하는 청자빚는 장인과 같은 안면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날 첫 시간부터 한 명 한 명 호명해 가며 출석을 부르는 것이 이번 학기는 강의 빼먹기 힘들겠구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강의 첫주는 강의변경신청기간인 만큼 수업도 간단한 OT만 하는 것이 교수와 학생 사이의 암묵적 약속이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조를 짜고 나서 이제 수업은 토론식으로 나갈 것이라는 선언을 듣고 난 후, 월수금 1교시는 어김없이 잠이 깨는 시간이 되겠구나 하며 애써 불편한 마음을 위안해본다. 물론 학생된 도리로서 강의시간에 졸지 않는 것이 예의이기는 하나 어찌 그것이 마음먹은대로만 되리오. 사람이라는 것이 가끔은 실수도 하고 그런 것이니만큼 항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강의실에 앉아있어야 한다고 강요받는 것은 상당한 압력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그나저나 강의 자체가 심심하지는 않으리라고 애써 위안을 삼아본다.
다음 강의는 동기들과 같이 듣는 수업이다. 방학때 귀찮아서 길가의 강아지풀처럼 길게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던 머리카락을 두발단속이 심했던 중학교적 머리로 밀어버렸다는 것을 떠올렸다. 한동안 바뀐 머리 모양새로 동기들과 티격태격하다가 수업을 들었다. 교과서를 아직 사지 않았던 터라 오지 못한 교수를 대신해 나온 조교가 진도를 빼자 많이 불편하였다. 다행히도 조교조차 개강 첫날부터 힘을 빼고 싶지는 않았던지 1시간짜리 강의를 반시간만에 끝내버리고 말았다.
잠깐 강의가 없어 일단 교과서를 사러 교내서점에 갔다. 교재를 사고 나서도 할일이 없어 점심을 일찍 먹자 하고 샌드위치 하나를 들었다. 그냥 샌드위치만 먹고 있자니 좀 불편한 구석도 있고 하여 오늘 나갔던 수업을 교재에 재정리하였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놓고서도 다음 강의까지는 한시간 반 가까이 남고 말았다. 교재를 가방에 넣은 후 먹고 남은 샌드위치 포장을 탁자에서 집어다 휴지통에 버리며 나왔다. 결국 할일이 없어 중앙도서관으로 가기로 했다.
중앙도서관에서는 오십원짜리 두개로 고생을 좀 했다. 사물함을 잠그기 위해서는 백원짜리 동전이 필요한데 이놈의 지갑에는 얄미운 오십원짜리 동전 두놈과 오백원 동전의 학이 눈웃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천원짜리 지폐를 백원짜리 동전 열개로 바꾸어주는 기계는 오랜만에 찾아온 나에게 심술을 부리는지 작동을 하지 않았고, 결국 짜증이 날대로 난 나는 도서관에 가는건 포기하기로 하였다. 내려와 보니 운이 좋게도 자판기가 눈에 띄었다. 천원짜리 지폐로 음료수 하나를 사먹고 백원짜리 동전을 얻을까 생각도 해 보았으나, 보니 이 자판기를 잘 이용하면 오십원 동전 두놈을 백원짜리로 합칠 수 있을 것 같아 동전 두개를 넣고 반환레버를 돌려보았다. 시도는 두번만에 성공하였다. 그길로 다시 올라가 가두지 못했던 가방과 우산을 사물함에 고이 모시었다.
중앙도서관에서는 별볼일 없이 심리학 교재로 보이는 두꺼운 책을 하나 집어들어 첫 장만 읽어보았다. 심리학이 일명 메타과학이라 불리는 미신들과 구분되기 위해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들여왔는지 설명하는 장이었다. 역시나 다른 과학적인 검증 방법처럼 가설이라는 놈을 세우고 그놈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을 설계하고 실행하여 그 결과를 정리하고 발표한 다음 가설을 모아 이론으로 만든다는 단순한 내용이었다. 물론 이런 일들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과학이라는 학문이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갖는 이유는 그러한 형식이라는 단단한 기반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워낙 이 방면에 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터라 식상하였다. 다음으로는 눈에 집히는 대로 잡지를 하나 잡아들고 시간을 보내었다. 어느새 수업이 반시간 앞으로 다가와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다음 강의는 그 악명높은 대학국어라는 놈이었다. 그래도 수업이 일찍 끝나게 되어 불만은 없었으나, 중학교 시절에 머리에 쥐가 나도록 외우고 외웠던 한자를 다 까먹은 이 시점에서 다시 한자를 외워야 한다는 것은 강사의 매우 짧은 혀와 같이 상당한 불만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수업이 끝난 후 친구놈과 옆 강의실에서 강의를 듣는 동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그냥 기숙사로 와 버리고 말았다.
기숙사에서는 마땅이 할 일이 없어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휘젓다가 이것마저도 질리고 말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만들어내는 알 수 없는 슬픔의 분위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오랜만에 하모니카를 불고 싶어졌다. 허나 기숙사 내에서는 부는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그만두고 말았다. 결국 이도저도 안되어 정말 오랜만에 예습이라는 놈을 하였다. 이것도 하다가 질려 결국엔 굶주렸던 배를 이끌고 저녁을 먹으러 가 보았다. 저녁이라는 놈도 참 맛이 없는 놈들만 가득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도 밖에 내리는 비는 계속 연약한 감성을 자극하였다. 이 글을 쓰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으리라. 오늘은 개강일이라 그런가 참 많은 일이 있었던 날이었으나, 정말 허무한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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