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별로 땡기지는 않았던 책이지만 알라딘 2013 양장노트에 눈이 멀어(...) 질러버린 책.[각주:1] 그나마 있던 책들 중 가장 관심사가 일치해 보이는 것으로 골랐는데 웬걸, 생각보다 괜찮다. 그리고 나는 공부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수님들께 인생은 마라톤이니 롱런하려면 스프린트 하듯 뛰어나가지 말라는 조언을 듣기는 했지만, 급할 때는 뛰어야지 뭐 별 수 있겠는가.[각주:2]
part1에서는 각국의 공부에 열정을 쏟는 사람들을, part2에서는 동양과 서양에서 공부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잘하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동양에서는 못하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언급이 상당히 재미있다. 『생각의 지도』이래로[각주:3] 동서양의 사고방식에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그리 낯설지는 않지만 그 근거들은 흥미롭다. 서양에서는 처음부터 잘할 수 있는 것과 못하는 것이 나뉘어 있다고 보는 반면, 동양에서는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
또한 동양에서 도입된 과거제도라는 혁신적인 관리선출방식이 공부의 목표를 출세로 바꾸었고, 따라서 지식의 확장이라는 희열에서 싹튼 자연과학이 발전할 수 없었다는 지적은[각주:4] 예상하기는 했지만 무심코 넘어갈 수만은 없는 부분. 결국 공부의 목표는 직접적으로 사회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실용주의적 가치관이다. 때문에 자연과학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언제까지나 자연과학은 인간에서 한 발 떨어진 대상을 다루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나라의 국가 권력상에서 사회과학의 지위를 넘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한다. 이번 계절학기때 김월회 선생님께서 지적하셨던, 문과 출신 총리는 많지만 이과에서 가장 높은 자리는 과기부 장관뿐이라는 사실도 생각나고. 결론: 대한민국에서 과학자로 성공하려면 인문학자와 인문학으로 배틀떠도 이길 정도로 내공을 갖추어야 합니다.뭐라고요?
그리고 다시 서양과 동양에서 노력에 대한 관념의 차이로 돌아와 보면 이 차이가 어떻게 보면 조금은 모순적으로 보이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의 직업관은 영단어 vocation에 잘 드러난다. voca로 시작하는 수많은 단어책들을 보셨을 여러분들이라면 눈치채셨겠지만, vocation이란 '신의 부름'을 의미한다.[각주:5] 따라서 개개인마다 신께서 마련해 주신 직업이 존재하므로 나에게 맞는 길이 따로 있는 것이며, 이 직업을 찾아 나서는 것이 사람이 할 일이 된다. 노력해야 할 것이 따로 있으니 아닌 것 같으면 바로 패를 접으라는 것. 포커든 고스톱이든 돈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전략 '딸때 많이 따고 잃을때 적게 잃자'를 인생에 적용한 것이다.[각주:6]
한편 동양에서는 과거라는 제도가 분명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노력하면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다 + 주변에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다. 그러면 결론은 노력하면 된다는 것.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정서에는 그릇에 물을 채워 달을 담고 '비나이다 비나이다'를 되읊으며 초월적 존재에 기원하는 이야기들이 서양에는 없다시피 하다는 사실도 눈에 들어온다.[각주:7] 더군다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지른 한 마디 탄식, '신이시여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맞나?)는 일단 신께서 힘을 실어 주신 다음에 그 힘을 거두어 갈 때나 할 수 있는 말 아니던가. 아르크 지방의 잔 이야기도 사실은 비슷한 구성을 가지고 있고.[각주:8]
물론 여기까지는 책의 내용을 조금 더 넓혀 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은 이 흔적이 종교관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정해져 있으니 안 되면 다른 것을 찾아 떠나라는 말은 결국 '사람은 모두 맞는 무언가가 따로 있다'는 초월적 존재의 흔적이 지워진 믿음으로 남은 모양인데, 이를 종교관에 적용해보면 '신께서 날 만나주지 않는다면 결국 난 신과 만날 운명이 아닌 것이다' 또는 '신께서 날 만나주시지 않으니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각주:9] 유럽에서 바닥을 기는 종교인 비율을 이 영향으로 설명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한편 '노력하면 된다'라는 믿음의 우리나라에서 절대자를 접하지 못한 사람들의 반응은 '내가 신을 만나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야'라는 자책으로 이어지게 되고, 결과물이 길거리의 넘쳐나는 피켓으로 구현된다는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흥미롭지 않은가? 절대자가 있었던 세계관은 결국 그 세계관 때문에 절대자를 버리게 되었고, 절대자가 없었던 세계관은 그 세계관으로 절대자를 맹목적으로 쫓게 되었다는 것이. 호프스테더가 『괴델, 에셔, 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에서 지성의 근원으로 지목한 그 이상한 고리(strange loop)의 발현이 되겠다.
다만 문제는 이 가설을 검증해볼 방법이 있냐는 것. 아무래도 과학에 좀 깊이 발 담근 사람이다 보니 이 문제가 가장 먼저 들어온다.난 어차피 검증할 방법이 전무하다시피 한 이론물리 분야로 흘러들어갈 것 같으니 미리부터 검증불가능한 이론에 익숙해지는 셈 치고 막 던져볼까?
주기도문이나 사도행전처럼 초월적 존재에게 기대려는 시도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설화의 범주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서양 희곡이든 설화든 누군가가 운명에게 힘을 받아 그것만 믿고 설치다가 운명이 그 힘을 다시 가져가며 몰락하는 이야기를 제외하면 떠오르지가 않는다. 아, 기사도 문학은 약간 다른 구성이긴 한데, 걔네들은 어차피 '용맹스러움을 과시하며 절대자에게 영광을 돌리세' 이런 부류가 대부분 아니던가. [본문으로]
내가 교회를 안 다니지는 않지만 불가지론자에 속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께서 절 버리셨군요'라는 일종의 트라우마인 셈. 한동안 바뀔 일은 없을 듯 싶다. [본문으로]
교수: 그렇다네. 그러면 말해보게, 세상에 악이 있는가?
학생: 네.
교수: 악은 어디에나 있지, 그렇지 아니한가? 그리고 신은 모든것을 만들었지. 맞는가?
학생: 네.
교수: 그렇다면 악은 누가 만들었는가?
(학생은 대답하지 않는다.)
교수: 세상에는 아픔, 부도덕, 추함 등의 추악한 것들이 존재하지, 그렇지?
학생: 그렇습니다, 교수님.
교수: 그렇다면 누가 그것들을 만들었나?
(학생은 대답하지 않는다.)
교수: 과학은 사람이 세상은 인지하는데 5가지 감각을 사용한다고 하지. 그렇다면 대답해보게 젊은이, 신을 본적이 있는가?
학생: 못 봤습니다, 교수님.
교수: 그렇다면 신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학생: 아니오, 교수님.
교수: 그렇다면 신을 느끼거나, 맛보거나, 냄새 맡은 적도 없는가? 신을 어떠한 감각으로도 인지한 적이 있는가?
학생: 아니오, 없습니다. 교수님.
교수: 그런데도 아직 신을 믿나?
학생: 네.
교수: 과학은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논증으로 신이 없다고 말하네. 자네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학생: 저는 단지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교수: 그래, 믿음. 그게 과학이 가지지 못 한 것이지.
학생: 교수님, 세상에 열이란 것이 있습니까?
교수: 물론이지.
학생: 그러면 차가움이란 것도 있겠지요?
교수: 그렇다네.
학생: 아닙니다, 교수님. 그런 것은 없지요.
(강의실은 이 반전에 순간 적막이 흘렀다)
학
생: 교수님, 많은 열, 더 많은 열, 초열, 백열, 아니면 아주 적은 열이나 열의 부재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가움이란
것은 없지요. 영하 273도의 열의 부재 상태로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이하로 만들 수는 없지요. 차가움이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차가움이란 단어는 단지 열의 부재를 나타낼 뿐이지 그것을 계량할 수는 없지요. 열은 에너지이지만, 차가움은 열의
반대가 아닙니다. 교수님. 그저 열의 부재일뿐이지요.
(강의실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학생: 그렇다면 어둠은 어떻습니까, 교수님? 어둠이란 것이 존재하나요?
교수: 그렇지. 어둠이 없다면 밤이 도대체 왜 오는가?
학
생: 그렇지 않습니다, 교수님. 어둠 역시 무엇인가 부재하기 때문에 생기지요. 아주 적은 빛, 보통 빛, 밝은 빛, 눈부신 빛이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아무 빛도 존재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이라 부르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실제로
어둠이란 것은 없지요. 만약 있다면 어둠을 더 어둡게 만들 수 있겠지요, 그럴 수 있나요?
교수: 그래, 요점이 뭔가, 젊은이?
학생: 교수님, 제 요점은 교수님이 잘못된 전제를 내리시고 있다는 겁니다.
교수: 잘못되었다고? 설명해 줄 수 있겠나?
학생: 교수님, 교수님은 이분법적인 오류를 범하고 계십니다. 생명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선한 신이 있으면 악한 신이 있다는 논지이지요. 교수님은 하나님을 유한한, 우리가 측정 가능한 분이라 보고 계십니다.
교수님, 과학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는 점조차 설명을 못합니다. 전기와 자기를 말하지만, 볼 수는 없지요.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건 물론이구요. 죽음을 생명의 반대로 보는 건 죽음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무지해서 그런 겁니다. 죽음은
생명의 반대가 아니라 단지 생명의 부재일뿐이지요. 교수님은 사람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고 가르치십니까?
교수: 자연 진화 과정을 말하는 거라면 그렇다네.
학생: 그렇다면, 진화의 과정을 눈으로 목격한 적이 있습니까, 교수님?
(교수는 논리가 성립되어감을 보고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학생: 아무도 진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목격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을 증명하지도 못했으니 교수님은 개인의 의견을 가르치시는 거 겠군요, 교수님. 마치 과학자가 아닌 연설가 처럼요.
(강의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학생: 이 강의실에 교수님의 뇌를 본 사람이 있나요?
(강의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학
생: 여기에 교수님의 뇌를 듣거나, 느끼거나, 맛보거나, 냄새 맡은 적이 있는 분에 계십니까? … 아무도 그런 적이 없는 것
같군요. 그러면 과학은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논증으로 교수님의 뇌가 없다고 말하는군요. 그렇다면 교수님의 강의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습니까?
(강의실은 고요했다. 교수는 심오한 표정으로 학생을 응시했다.)
교수: 사실을 믿는 수밖에 없겠군, 젊은이.
학생: 바로 그겁니다, 교수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믿음" 입니다. 그게 바로 모든 것을 움직이고 생명 있게 만드는 것이지요.
(교수는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학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교수의 시선에 따라 학생들의 시선이 옮겨졌다. 교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그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교수: 무슨 일인가?
사티레브: 저는 사티레브(Satirev)입니다. 이 대학의 졸업생이죠.
교수: 그래, 왜 손을 들었는가?
사티레브: 저 돌아버린 학생과 그 학생을 인정하는 어떤 멍청한 남자 때문에 이 강의실을 나갈까 해서 말입니다.
(사티레브의 말에 교수와 학생은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자신을 향해 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교수: 누구에 대한 불만인가. 나인가, 아니면 저 젊은이인가?
사티레브: 저 젋은이가 돌아버린 자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만, 교수님께서 이렇게 버벅 거릴 줄은 몰랐습니다.
학생: 제가 말한 것에 문제가 있습니까?
사티레브: 문제가 없는 게 뭐냐고 묻는 게 더 빠를 듯하군.
(사티레브는 강의실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학생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그를 보며 조용히 숨을 쉬었다. 학생과 사티레브는 서로 마주보고 서있었다.)
사
티레브: 자네는 전자기파에 대해서 언급했었지. 그럼 묻겠네, 자네는 분명 어떠한 감각기관으로도 신을 느끼지 못했다고 진술했지.
그리고 자네는 전자기와 신 모두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어. 그럼 자네는 어떻게 예시로 든 전자기파라는 것을 알고 논하는가?
전자기파도 믿는가? 퀄컴은 자네가 믿는 두 번째 신인가?
(사티레브의 말에 일각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학생: 오감으로 인지할 수 없는, 그러나 실재하는 것이 있음을 말하려 한 것입니다.
사
티레브: 말장난이네. 우리의 오감은 분명 한계를 가지고 있지. 그리고 우리는 오감으로 느끼지 못하는 걸 지각할 수 없다네.
고래의 초저주파, 박쥐의 초음파 등이 그러하지. 그러면 우리가 지금 논하는 초저주파, 초음파는 모두 믿음의 결과물이겠네, 안
그런가?
(학생은 말이 없었다.)
사티레브: 우린 지각할 수 없는 대상을 지각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기술을 개발시켜오고 있지. 들리지 않는 라디오 전파는 라디오 회로를 거쳐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바뀐다네. 아, 자네는 라디오
전파도 믿는가? 어느 채널을 믿는가?
(강의실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티레브: 우린 자네가 지각 불가능하다고 내민 예시를 이미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지각하고 있지. 그래프로든 소리로든 간에.
(학생은 긴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티레브: 신이 지각 불가능한 대상이라는 건 괜찮은 접근이라네. 불가지론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과학으로도 관측되지 않는, 바로 그 절대자 말일세. 하지만 말이야, 과학으로 관측되지 않는 개체가 또 있다네.
학생: 천사 말입니까?
사티레브: 아니네. 바로 제우스라네.
(제우스라는 단어가 나오자 강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학생: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를 말씀하십니까?
사
티레브: 아니라네. 그리스 경전의 제우스를 말하네. 자네에겐 그것이 신화일지 모르겠지만, 유대민족들이 믿던 신화에 비하면 그리스
경전은 더욱 감성적이고 인간적이며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예수의 희생도 프로메테우스의 희생에 비할 바가 못 되지. 야훼는
태초부터 존재하여 인간 세상에 오지랖이란 오지랖을 다 떨지만 제우스는 타이탄 신들과의 싸움을 통해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낸
개척자라네. 자네가 소위 성경이라 부르는 기독경은 제우스가 세상에 내린 두 번째 판도라의 상자라네. 그걸 연 자네는 그의 함정에
빠진 거라네.
학생: 어떤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집필자가 밝혀져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이것이 판도라의 상자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사티레브: 느낄 수 없다는 게 바로 판도라의 상자라는 증거라네. 교묘한 함정은 토끼가 전혀 느낄 수 없게 짜여있다네.
학생: 기존의 상식을 깨는 주장이군요.
사티레브: 반증이 가능한가? 나는 제우스와 믿음으로 관계하고 있다네.
(학생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판 논리의 함정에 빠졌음을 안 그는 당혹감을 느꼈다.)
사티레브: 그리고 제우스는 자네 같은 크리스찬들을 전부 타르타로스에 넣을 것이라 하였네. 가짜 신을 믿는다는 이유로.
학생: 그런 구절은 그리스 신… 경전에 없을 텐데요.
사티레브: 나와 제우스는 책이 아닌 믿음으로 관계한다네. 자네들이 성령이라 부르는, 그런 것과 비슷한 개념이 나에게 진리를 속삭인다네. 다만 나에게 온 성령은 자네의 성령과는 이름이 다르다네. 그리스령이라고 하지.
교수: 성령이라는 걸 자네가 입증할 수 있나?
사티레브: 자기 머리에 뇌가 있는지도 장담 못하는 교수님이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그리스령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아마 교수님은 X레이나 MRI로 머리를 찍어본다면, 인화된 사진을 벽에 붙여놓고 하루에 5번씩 기도하겠죠?
(교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나왔으나 교수가 그쪽을 바라보자 웃음소리가 멈췄다.)
사
티레브: 장난은 그만하도록 하지. 제우스 하나에 쩔쩔매는 주제에 시바(Shiva),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등은
어떻게 상대할 건가. 자네가 펴는 그 알량한 논리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다네. 심지어 야훼를 뜯어먹는
전설의 코요테를 생각해볼 수 있겠네.
학생: 예의에 어긋나는 표현입니다.
사티레브: 자네들이 소위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들에게 대하는 태도에 비하면 아주 신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지옥이니 심판이니 하며.
학생: 좋습니다. 제 논리가 악용될 여지가 있음은 인정합니다만, 논리 자체에서는 모순점을 찾지 못하신 것 같군요.
(사티레브는 크게 웃었다.)
사티레브: 지금, 자네는 자네의 논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 좋아, 그럼 자네가 언급한 걸 이야기해보지. 자네는 진화를 부정하는 것 같던데, 아닌가?
학생: 창조를 전 믿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 누구도 진화하는 과정을 본 적 없으며, 그건 단순히 이론에 불과합니다.
사티레브: 단순히 이론? 허… 자네가 진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진화하는 과정이 관측되지 않아서겠네, 자네의 말에서 유추하자면.
학생: 그렇습니다.
사티레브: 화석이 있지 않은가?
학생: 진화의 과정을 설명하기에 화석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미싱링크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학생의 말에 사티레브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강의실 왼쪽의 학생들도 입에 웃음을 머금고 상황을 바라보았다.)
사티레브: 자네는 내가 아기에서 지금의 성인의 몸으로 성장했다고 보는가?
학생: 그렇습니다.
사티레브: 자네가 내 성장과정을 관찰했나?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랬을 수도 있지 않은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교수는 민망함을 느끼고 등을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학생: 사진이 있을 것 아닙니까?
사
티레브: 물론이라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사진이 있지. 나머지 사진들은 애석하게도 집에 화재가
일어나서 잃었다네. 하지만 나의 성장을 말하기엔 사진이 턱없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 많은 화석도 충분치 않은 자네가 5장 밖에
안 되는 내 사진으로 나의 성장을 장담할 수 있겠나. 물론 내 사진이 백 장 넘게 있다고 해도, 자네에겐 하염없이 부족하겠지.
미싱링크라는 말, 들어봤나?
학생: 사티레브 씨에게 미싱링크가 있단 말입니까?
사티레브: 그렇다네. 난 태어나자마자 제니퍼 로페즈의 몸으로 살았다네. 그러다가 헤라 여신의 시샘으로 인해 지금의 평범한 몸이 되어버렸지.
(학생은 할 말이 없었다. 사티레브의 말장난이 주는 당황스러움과 그게 자신의 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그는 땀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
티레브: 당황스러울 거네. 난 자네의 논리를 하나하나 반박해야 할 의무감마저 느끼지 못하고 있네. 자네의 논리대로라면 난
제우스를 숭배하며 번개 걱정 없이 비오는 거리를 걸을 수 있고 남들에게 제니퍼 로페즈 시절을 자랑할 수 있지. 자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망상을 실재한다고 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버렸네.
학생: …
사티레브: 진화론은 양상이라네. 태초의
생명체를 설명하는 게 진화론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네. 함수로 보자면, x값이 0일 때의 y값을 찾는 게 진화론이라는 학문이
아니네. 우린 x값에 따른 y값의 변화 양상을 진화라 명명하고 그걸 연구할 뿐이네. 화석이 부족해서 진화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네는 수천 개의 점을 구해놓고도 그래프 하나 못 그리는 순수한 중학생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라네.
(학생은 잠깐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학생: 그러면 열, 빛에 관한 제 의견도 문제가 있습니까?
사
티레브: 당연하지. 선한 신, 악한 신에 대한 것 말인가? 자네는 열과 차가움, 빛과 어둠의 예시를 통해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저 교수를 눌러보려 했지. 하지만 선과 악은 분명 따로 존재한다네. 선이 약하면 악이 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는 걸세.
학생: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티레브: 애초에 이해를 했다면 그런 멍청한 발언은 꺼내지도 않았겠지. 예를 들어봄세. 자네가 빅맥을 먹고 싶은 데 50센트가 부족하다고 해보자. 만약 내가 자네에게 50센트를 준다면, 나는 선한가?
학생: 선합니다.
사티레브: 그럼 내가 자네에게 1센트를 준다면?
학생: 마찬가지로 선합니다.
사티레브: 내가 한 푼도 주지 않는다면?
(학생은 망설였다.)
사
티레브: 선하지 않지. 그러나 이게 악한 건 아니라네. 내가 자네의 1센트를 뺏는다면, 그건 악한 행동이겠지. 열의 부재가
차가움이라고 했지만, 선의 부재는 악이 아니라네. 선도 악도 아닌 그 중간적인 것이 자네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세상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자네에게 50센트를 주지도, 빼앗지도 않는 자들이 지천에 널려있다네. 이런데도 선의 부재를 악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있는가?
(학생들은 사티레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탄성을 질렀다. 교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
티레브: 정리하지. 자네는 선과 악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하여 다시는 나와 볼 일 없을 저 교수를 함정에 빠뜨렸고 진화론에 대한
자신의 이해 부족을 관측의 부족으로 보는 오만한 발언을 했다네. 신이 오감으로 지각되지 않는 대상이라며 이미 상식으로 인지하고
있는 전자기파를 예시로 들고 나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말이야,
(사티레브는 학생 앞으로 걸어갔다. 학생은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
티레브: 거증책임은 자네에게 있다네. 신이 있냐고 질문한 건 교수라네. 그럼 자네는 교수가 무엇을 얼마나 아느냐에 상관없이 신이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어야 하네. 결국 자네가 말한 것들 중 신이 있다는 증거 또는 논리를 내포한 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자네는
고작 교수의 말에 말도 안 되는 답을 해놓고서 결국엔 믿음이라는 결론을 내렸지. 자네는 신이 있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믿은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함을 밝힌 꼴이 되었지.
(학생은 답을 하지 못했다.)
사티레
브: 천하의 교수가 저 정도인데, 갓 유치원에 입학한, 또는 갓 중-고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얼마나 자네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겠는가. 허나 언제나 그러하듯 자네들의 말은 신이 존재한다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네. 자, 이제 신이 존재한다는 근거를
어디서 끌어올 건가?
학생: 성경이 있습니다.
사티레브: 자네, 아까 그리스 경전의 그리스령이 한 말을 잊었나? 판도라의 상자라니까. 반증할 수 있는가?
(사티레브는 웃으며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학생들도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교수와 학생을 힐끗 쳐다보며 밖으로 나갔다. 강의실에는 교수와 학생만이 남았다.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재미있는 글이라서 퍼왔습니다 -_-;;
흠... 원래 과학에서 말하는 신은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쪽에 가깝죠.(물론 여기서 신은 만물에 대해 중립적인 신을 의미) 그리고 존재와 존재하지 않음에 차이가 없다면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논리선별법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합당하다는 쪽이고요.
종교적인 의미의 신은 과학적인 증명을 때려 치는게 옳다고 보기는 합니다. 언제까지나 '무엇이 과학인가'의 문제인데, 믿음은 과학과는 좀 거리가 있어서요. 그런데 과학적으로 논증할 때 기준을 누구의 것으로 삼느냐가 문제네요. 포퍼의 논의가 어느 정도 우수하기는 하지만 역시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각주:1] 쿤은 '정상과학'이라는 지속적인 체계가 존재한다고 한 것에서만 의의를 찾을 수 있어서요. 그래도 포퍼의 기준을 들이대면 '가설에 반증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는가?'가 과학적인 명제의 기준입니다. 종교에서 그런 부분을 찾기는 힘들죠. 사람이 살아도 신의 뜻, 죽어도 신의 뜻, 이런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렇다고 무신론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인간이란게 세계를 인식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논리에 부분 부분 구멍이 있을 수 밖에 없고 이런게 비이성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거든요. 사실 비이성의 바다 위에 이성이라는 쪽배 하나 떠 있는 것이 인간의 심리일테고요. 글 자체는 유신론자의 논리가 비과학적이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포퍼대로라면 반증 하나에도 이론이 뒤집혀야 하는데 실제로는 실험을 의심하는 사람이 더 많죠. [본문으로]
한국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종교 중 하나는 기독교입니다. 개신교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용어 통일을 위해 이 글에서는 기독교라는 단어를 사용하겠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왜 욕을 먹는지 모릅니다(전 좀 특이한 케이스...)[각주:1]. 욕을 먹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몇 가지를 나열해 보면 다음으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1. 공격적을 넘어 배타적인 전도
2. 세속화
세속화는 이 땅의 많은 종교들에게서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불교도 아예 없다고는 말 할 수 없고, 천주교도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각주:2] 그러면 유난히 기독교가 많이 까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 첫 번째 이유가 주된 근거라고 봅니다. 한번 밉보이면 착한 일을 하더라도 의심하게 되고, 나쁜 일을 하면 밉보이던 것만 강화됩니다. MB가 월급 전액을 기부했다고 했을 때 잘한 일이긴 하지만 꿍꿍이가 있을 것만 같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많았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입니다. 물론 사회 약자를 보호하겠다면서 복지 예산을 줄여나간 것은 잘못한 점이긴 하지만요.
전 이런 부분이 기독교인들이 근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믿음'이 무엇인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입니다.[각주: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조금은 애매하다 싶으니 쉬운성경을 보겠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자청하시는 분들에게 한가지 묻겠습니다. 당신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당신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믿는다고 할 때, 저 위에서 말하는 '바라는 것들'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대들이 그렇게 외쳐대는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전 그 나라가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란, 어떤 사람이라도 열심히 일한다면 굶어 죽을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며, 자기가 노력한다면 자기가 가진 모든 올곧은 뜻을 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제가 정의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를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대표되는 현재 대한민국의 전도 행태에 반대합니다. 예수님이 있음을 아는 것, 그리고 그분이 원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