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은 언제까지나 인스턴트 정보이며, 인스턴트 정보로 얻을 수 있는 진실은 통조림 음식 수준밖에 안 됩니다.
- 그나마 인스턴트 치고는 괜찮을 수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건 토론 프로그램.
한 쪽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토론은 알맹이가 없고, 양 쪽이 치열하게 치고박고 싸우는 토론일수록 정보량이 많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괜찮은 토론 프로그램이 있나 모르겠네.
- 한 사안에 대해 판단을 할 때, '각 진영'에서 제공하는 최대한 양질의 '글'을 최소 5개씩은 읽고 다음 과정을 거칠 것.
1. 양질의 글이란 최소한 세 가지의 논거를 기반으로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한 것을 말합니다. 10-20줄짜리 글은 일단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비슷한 논거를 기반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글은 되도록 빼세요.
2. A4 한 장을 반으로 나누어 각 글에서 들고 있는 논거를 정리할 것. 통계 수치나 과거 사례 위주로.
3. 많은 경우 이렇게 하면 양 진영에서 같이 들고 있는 과거 사례가 있거나 서로 충돌하는 통계 수치가 있을겁니다. 이 경우엔 과거 사례를 해석하는데 취한 입장도 같이 정리하고 양쪽의 통계 수치의 신뢰성을 확인.
4. 여기까지 하는데 짧으면 2-3시간, 길어야 5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이 정도 시간도 투자 안 하고 진실을 얻겠다고 하신다면 통조림 수준의 진실밖에는 구할 수 없다는 말씀 드리기로 하죠.
5. 마지막으로, 혼자서 백분 토론을 거칠 것. 한 쪽에 최대한 빙의해서 다른 쪽을 공격하고 이 쪽을 방어하는 훈련을 해 봅니다. 이 일을 양 진영에 대해 다 해볼 것.
0.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 20~30쪽은 되어보이는 글은 도저히 못 읽겠다고 질 나쁜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건너뛰는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단문이 대세인 인터넷 시대에 긴 글은 길어봤자 A4 5쪽 이내예요(논문이나 보고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5번을 할 때 한쪽 진영에 대해 별로 호감이 안 간다고 불성실하게 빙의하지 마시고요.
- 신문 읽는 법. 전 신문을 안 읽습니다만, 도움이 될 사람이 많을 거라 생각해서.
1. 신문 기사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확인. 단어마다 고유한 분위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신문 기사에서 그 대상에 대해 어떤 인상을 심으려 하는지 볼 것.
2. 신문 기사에서 말하지 않는 논리적 기반을 확인. 쉽게 말해 신문 기사가 무엇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지 확인하라는 의미입니다.
3. 신문 기사간 관계를 확인. 온라인상으로 읽을 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지면으로 읽을 땐 신문 기사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지면에 '경제 상황이 나빠 꿈을 잃는 대학생들'이라는 식의 기사와 '경제가 안 좋은데 파업이라니' 이런 식의 기사가 같이 있다면 그 신문은 대학생과 파업을 대립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겠죠. 가장 많은 훈련이 필요한 항목.
0. 정리한다면, '신문 기사를 많이 읽어라'가 아니라 '신문 기사를 깊게 읽어라'가 되겠네요. 많이 읽는건 양질의 선택을 하는데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 주장하는 사람의 순수함과 주장하는 내용의 합리성은 완벽한 독립변수.
순수한 의도로 악을 행할 수 있고,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게 된 아돌프 아이히만이 전자의 한 사례고[각주:1], 자신이 이득을 얻겠다고 거래를 제안해오는 사람이 모두 내게 불리한 제안만 하는 것은 아니죠.
-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자신도 믿지 말 것.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항목. '나도 틀릴 수 있다'란 생각을 항상 하시길.
사실 첫 번째 항목이랑 마지막 항목이 제일 중요해요. 그것만 되어도 판단의 질이 150% 개선됩니다.
중요하니까 다시 한번 말하도록 하죠. 근본없는 짤방 같은 인스턴트 진실은 그만 드시고, 자신에 대한 과신은 제발 좀 버리세요. 순수함에 대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아무래도 앞의 둘보다는 중요도가 떨어져서.참고로 순수는 편의점에서 500원에(코카콜라에 가는 로열티 포함) 200ml짜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내용은 대체로 캡콜(capcold.net/blog/)님이나 민노씨(http://minoci.net/)님의 가이드라인을 기억 속에서 대충 짜깁기한 것. 저도 인간인지라(쿨럭) 가운데 둘의 매우 긴 녀석들은 못 하고 있지만 나머지 넷 정도는 대충 탑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항목 때문에 교수님들한테 자신감이 없다고 까였던건가...
소련이 가졌던 기술적 한계를 사형당한 광산학 전문가 페테르 팔친스키(Peter Palchinsky)의 삶을 통해 들여다본 책이다. 번역본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학기에 들었던 공학윤리와 리더쉽 과목에서 과제로 쓴 서평을 공유해본다. 확실히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니 원문이 한글일 때와는 다소 다른 느낌을 갖는 것이 느껴진다.[각주:1]
Sir Karl Raimund Popper has asserted in his famous book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that scientific progress when nurtured by open society develops at its full potential. Putting aside his main thesis-strong conviction for the evilness of totalitarian government-, his argument of progress in science is compelling. But is it true? Considering rapid development of USSR during the cold war era, the statement seems to raise doubts. Though some distinguished scientists such as Lev Davidovich Landau provide counterexamples, his assertion does seem valid after reading the book by Loren R. Graham, The Ghost of the Executed Engineer.
The book plots the life of an ill-fated Russian engineer Peter Palchinsky. The engineer was accused of conspiracy to overthrow the Soviet government under Stalin’s rule and was executed in secrecy. Why was he accused? It was in part due to Stalin’s mistrust in engineers educated before the Soviet Revolution and in part his strong criticism against the governmental plans to build large industrial complexes, the author insists. Then the author describes how technologies were viewed and how engineers were educated in Soviet Union in tandem to the bad fortune of the executed expert.
Peter Palchinsky was a mining engineer trained in tsarist Russia. In 1901 he was sent to study the decline of coal production in Ukraine’s Don Basin as a member of investigative commission, and given the task of scrutinising the workers. He aggregated some statistics on workers’ living conditions and concluded that the poor living conditions of the workers discouraged them, which caused uproar of his superiors and his exile. The author claims this experience has made the mining engineer to believe sole consideration of technology is not enough for efficiency and radicalised his political perspectives. In other words, he started to consider technology to be deeply intertwined to the society which implements it. Not only the technology shapes the social conditions, but also there are certain social requirements which are necessary to successfully embrace technology.
It is interesting to note the radically differing views on technology of Palchinsky and Stalin, where the former thinks of industrial development as inseparable to “political, social, legal and educational” issues and humanitarian approach is indispensable while the latter considers technology as panacea to all problems. On behalf of this conviction, the engineer with tsarist education thought that engineers should be educated on various subjects. However the latter view prevailed, caused much inefficiency and harsh maltreatment of workers, and grew severe as the engineers taught in the Union were given absurdly limited education and became new leaders. The engineer whom the author had met who had an engineering degree in “ball-bearings for paper mills” exemplifies such ludicrous narrowness of Soviet education. Ironically, Palchinsky’s opinion that engineers should take the greatest decision power seems to have materialised in capitalism countries-Google is an excellent example- which he thought the greed of capitalists would make it impossible.
Lamenting it is to read the last days of this foresightful engineer. Albeit his good intentions to provide insights to maximise utility of industrial installations for his homeland, the head of the country considered him as a sabotage and decided to liquidate the caring professional. Judging by the book, it is likely that the expert already knew about risks of death for public criticism as he had been imprisoned for same reasons, though may have overlooked it because he was always liberated in the end. Would I have served the professional responsibility of engineers if I were in his shoes? Since the same dilemma, although not as life-threatening as the one experienced by Palchinsky, still exists today with economic status at stake, the answer to this question is of paramount importance. I will speak up, but to be honest I am never sure I would.
While traces of the cold war era still seem to reside as the book harshly criticises Stalin to be ignorant on social and psychological aspects of technological implementations, I favoured the style of the author as he chose not to idolise Palchinsky as an unfortunate prophet who became a martyr. Nevertheless the prominence of the executed engineer was so great that author’s attempt to drive out the mythical atmosphere of his prescience seems to fail. The view on education as the utmost importance in industrialisation precedes the concepts of human capital which emerged almost 40 years later, and his beliefs that efficiency requires satisfied workers seems too futuristic of his time. His attitude towards large complexes that sometimes smaller units of production can be far more efficient compels us to review our myths on efficiency of grandiose entrepreneurs, and his credo of wide education of engineers urges us to revise our educational system.
Coming back to the question at the beginning of this review, this book shows that even if progress in academia might be possible the industrial and technological developments in a society devoid of objections are doomed to yield inefficiency. Popper’s conclusion of superiority of open society over totalitarian regime seems to prevail over rebuttals. On the other hand, I believe that we should ask whether we are in an open society for professions in engineering and natural sciences. Whereas it is natural for professionals in 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 to speak out their political opinions, the political criticism raised from engineering and natural science backgrounds seems rather unnatural to our standards. Yes, it is objectionable that people engaged in engineering and natural sciences are not interested in political and social issues, but even this raises another concern: Are we educating our future engineers enough on those issues?
칼 레이문드 포퍼경은 그의 유명한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과학에서의 진보는 열린 사회에서 양육될 때에만 가장 크게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요 주장-전체주의적 정부의 악함에 대한 강한 신념-은 잠시 옆으로 치워두기로 하면, 과학의 진보에 대한 그의 논거는 매우 설득적이다. 하지만 과연 사실일까? 냉전 기간의 소비에트 연방의 급격한 발전을 고려하면 이 주장에 의문을 갖게 된다. L. D. 란다우와 같이 특출난 과학자들이 반례를 제공하지만, 로렌 R. 그래함의 『사형된 엔지니어의 유령The Ghost of the Executed Engineer』을 읽고 나면 포퍼의 선언은 합당해 보인다.
이 책은 불우한 러시아 엔지니어 페테르 팔친스키의 삶을 그린다. 팔친스키는 스탈린 치하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반역모의로 비밀리에 사형되었다. 그는 왜 혐의를 받았을까? 저자는 이 이유를 스탈린이 소비에트 혁명 이전에 교육받은 엔지니어들에 대해 가졌던 불신과 거대 산업 복합체를 지으려는 정부 계획에 대한 팔친스키의 강한 비판에서 찾는다. 이후 저자는 소련의 기술에 대한 관점과 엔지니어들이 받은 교육을 사형당한 전문가의 불운에 맞추어 설명한다.
페테르 팔친스키는 짜르 시대에 훈련받은 광산학 전문가였다. 그는 1901년 석탄 채굴량 감소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의 일원으로 우크라이나의 돈 분지(Don Basin)에 파견되었고, 노동자들을 조사하는 임무를 받았다. 노동자들의 생활환경에 관한 통계를 모은 팔친스키는 열악한 생활환경이 그들의 의욕을 꺾었다고 결론지었고, 이는 상부의 분노와 유배의 원인이 되었다. 저자는 이 경험으로 팔친스키의[각주:2] 기술만 고려해서는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믿음과 급진적인 정치관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팔친스키는 기술이 그 기술을 도입하는 사회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술이 사회적인 조건을 만들 뿐만 아니라 특정 사회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기술을 성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팔친스키와 스탈린의 기술에 대한 극단적인 견해차는 흥미롭다. 전자가 산업의 진보를 정치적, 사회적, 법적, 교육적 사안들과 분리할 수 없으며 인본주의적인 접근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한 반면 후자는 기술을 모든 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취급했다. 팔친스키는 이러한 믿음 위에서 엔지니어들이 다양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가 우세하였고 많은 비효율과 노동자의 혹사를 야기했으며, 연방에서의 교육을 받은 엔지니어들이 터무니없이 제한된 교육을 받고 새로운 지도자들이 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저자가 만난 '종이 제작기에 들어가는 볼 베어링'에 대한 공학 학위를 받은 엔지니어는 터무니없이 좁은 소련의 교육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엔지니어가 가장 큰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팔친스키의 생각은-구글은 완벽한 사례이다- 자본가들의 탐욕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자본주의 국가에서 현실화된 것으로 보인다.
슬퍼라, 선견지명이 있었던 공학자의 말년을 읽으니.[각주:3] 팔친스키는 선의에서 조국을 위해 산업체의 효용을 최대화하는 통찰을 제공해려 했으나 나라의 지도자는 사보타주로 간주하고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책으로부터 판단할 때 팔친스키는 이미 같은 이유로 투옥된 적이 있기에 공개적인 비판이 가져올 목숨의 위협을 알고 있었다고 보여지나, 결과적으로 항상 석방되었기 때문에 간과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전문가의 의무를 이행했을까? 팔친스키의 경우처럼 생사가 걸리지는 않았으나 지금도 동일한 딜레마가 경제적인 지위를 볼모로 남아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거리낌 없이 의견을 내겠지만, 솔직하게 말한다면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스탈린을 기술 도입의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측면에 대해 무지한 것으로 혹평하는 것에서 냉전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느껴지지만 팔친스키를 순교자가 된 불우한 예언가로 우상화하려 하지 않았던 저자의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의 선견지명에서 신화적인 분위기를 제거하려 노력한 저자의 노력은 사형당한 엔지니어의 걸출한 탁월로 실패해 보인다. 산업화에서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는 관점은 인적 자본 개념을 40년 가까이 앞지르며, 효율적이려면 행복한 노동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그가 살던 시대를 너무 앞질러 보인다. 가끔은 더 작은 산업체가 거대 복합체보다 효율적이다는 그의 입장에서 대기업들의 효율에 대한 미신을 반성하게 되며, 그의 신조인 엔지니어의 폭넓은 교육에서 우리의 교육정책을 재고하게 된다.
이 서평의 서두에서 한 질문으로 돌아오면, 이 책은 학문에서의 진보가 가능하더라도 이의가 없는 사회에서의 산업과 기술에서의 발전은 비효율을 낳도록 예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포퍼경의 전체주의보다 열린 사회가 우월하다는 결론은 반박을 압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나는 우리가 공학과 자연과학의 전문가들에게 열린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의 전문가들이 정치적인 견해를 발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면 공학과 자연과학 출신의 정치적 비판은 우리의 규범에서는 자연스럽지 않은 편이다. 물론 공학과 자연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정치나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반론이 가능하나, 이 또한 다른 우려를 낳는다: 우리는 미래의 공학자들에게 이 사안들을 충분히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서평을 번역해놓고 보니 제목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추가한다. 저자는 폭넓은 식견을 가졌던 팔친스키를 사형한 소련은 그의 원한에 홀렸다고 표현하였다. 책의 제목은 거시적으로 볼 수 있는 전문가의 필요성을 사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에 투영한 결과물인 것이다.
사실 대단히 '일반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야 따로 놀고 있지만, 20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기술-과학-인문학 이 셋은 서로 주고 받으면서 진화하는 관계였거든요.[각주:1] 가장 쉬운 예시라면 인문학에서 사람과 우주의 본성에 대해 서술할 때 그것을 당시의 기술로 묘사했다는 것이 있겠구요.(기계적인 운명론이라면 항상 정교하게 만들어진 시계가 세계에 대한 묘사로 등장했었지요)
굳이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개천에서 용 솟을 구멍이 작아진다는 것은 기술에 대한 접근도의 편차가 매우 커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당장 보아도 시골과 도시의 인터넷 연결 속도 사이에는 넘을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기술의 차이가 커 보았자 어느 정도 인간의 능력으로 그 틈을 메꾸는 것이 가능했던 고대사회나 중세사회와는 달리, 현대사회에서는 기술의 차이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격차를 만들어주고 있으니까요. 칼을 든 사람과 주먹밖에 없는 사람의 싸움에서는 주먹만 가진 사람이 높은 수준으로 무술을 연마하면 칼 정도는 쉽게 피하고 제압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제 아무리 암산 트레이닝을 받은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계산기 하나 든 사람의 계산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의료보험제도가 열악한 편인 미국에서 자금의 유무가 의료기술과 접촉할 권리로 치환되는 것이 한 좋은 예이겠지요.
기술은 보통 '상상을 현실로'라는 모토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지요. 순식간에 수많은 계산을 해내는 컴퓨터도 따지고 보자면 '순식간에 탄도의 궤적을 계산해주는 기계는 없을까'라는 상상에서 나타난 것이고, 로켓은 당연히 '저 별들 사이를 날아다닐 수 없을까'라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휴머노이드 로봇의 '인간이 아닌 인간'에 대한 상상처럼 현존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생각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기술은 끝없이 진보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모든 이들의 상상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기술이 나아갈테고, 누군가 조금이라도 위험한 상상을 하면 그 상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컨데 누군가가 자기의 짝사랑의 생각을 알고 싶어 사람의 감정을 읽는 기계라도 개발된다면, 꼭 누군가는 그 기계를 이용해서 사람을 통제할 수는 없는가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기에 기술이 개발되면 그 기술은 무슨 내용을 골자로 하고, 어떤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 전반적인 논의가 꼭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냥 미친듯이 기술을 개발해 놓고, 그 기술을 어떻게 쓸 것인가 소수의 사람들이 결정한다면 민주주의는 왜 채택한 건데요.
뭐, 그나저나 상품이 오면 펜이 하나 늘어나는군요 -_-+
지금도 기술-과학의 연결은 상당히 강력하지만, 기술-인문학이나 과학-인문학의 연결은 상당히 느슨해져 있습니다. 당장 문이과 나누어 가르치는 것부터 보세요.(그런데 생각해보면 자연과학은 공학보다는 문리쪽에 가까운데 말이죠. 대상만 같을 뿐, 접근하는 이유와 방법은 문과와 같다고 보아도 좋으니까요.)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