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18. 09:29 Daily lives
제네바 생활 5주차의 근황
0.
몇 개월 전 꽤나 공들여 썼던 포스트의1 레퍼런스 표기를 편집한다고2 건드렸다가 각주 내용을 전부 날려버린 덕분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대부분은 있으나 없느나 상관없는 사족이라 각주로 남겨둔 것이지만 중요한 각주도 두어개 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되살릴 방법이 없으니 그냥 일괄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필요 이상으로 각주를 많이 다는 버릇이 있다는 자각도 있으니 다소 비싼 교육비를 치렀다고 생각하자...3
1.
새로운 국가로 이사하게 되면 항상 겪는 죽음(...)의 사이클이 있다. 대표적으로 은행 계좌를 열려면 집 주소가 필요한데 집 계약을 하려면 은행 계좌가 필요한 경우가 있겠다. 여기에 전화 회선을 개통하는데 은행 계좌가 필요하다던가 월급을 받아야 하는데 은행 계좌는 아직도 안 열리는 등의 문제가 더해지면4 꽤나 즐거운 상황이 벌어진다.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 아니겠는가. 리얼리티 쇼로 시트콤을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하다급발진.
이번에는 집을 엄청나게 빨리 구해서 이사가 매끄럽게 진행되는가 싶었는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집 전기 계약을 내가 열어야 하는데, 전기 계약을 열려면 (프랑스) 은행 계좌와 휴대전화 번호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스위스) 은행 계좌를 열러 은행에 갔더니 (아직 연구소 계약이 시작되지 않아) 은행 서류를 받을 주소가 없다고 다음에 오라는 말을 들었고, 아직 독일 번호를 쓰고 있던 시점에 프랑스 번호를 개통하려고 하니 선결제 심으로는 휴대번호의 장기 개통이 안되니 은행 계좌가 필요하다고 하고, 이사는 연구소 계약 시작 전인데 이러다가는 첫 일주일을 전기 끊긴 집에서 살게 생겼고.5
결국 영국에서 이 죽음의 사이클을 해결한 방법을 그대로 써서 이사 직전에 모든 문제를 정리하는데 성공했다. 가장 약한(?) 고리인 은행계좌를 공략하는 것. 월드와이드웹의 꽤 먼 후손으로 인터넷 은행 혹은 핀테크(fintech)라는 것이 있는데, 인터넷 은행에서는 계좌를 열 때 필요한 서류 등이 훨씬 간략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은행 계좌를 열 수 있다.6 은행 계좌가 있으니 프랑스 번호도 개통하고 전기도 계약하고7 이사는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새 집은 빨래가 좀 불편하긴 한데8 뭐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다.
1.1.
이로서 다섯 개 나라에 은행 계좌를 갖게 되었다. 하필 그 중 하나가 스위스라 뭔가 어둠의 세계의 거물이 된 듯한 느낌이 없지는 않은데, 블랙홀만큼 까만 것도 없으니 뭐 대충 비슷?하다고 하자.
1.1.1.
그와는 별개로 스위스 은행 계좌를 열 때 다른 나라에 얼마나 자산을 갖고 있는지 물어봐서 당황했다. 이제는 '스위스 은행'의 평판을 신경쓰는구나...
2.
새 연구소에는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다. 연구 주제 자체가 고에너지물리 세부주제로 놓고 볼 때 학제간(?)의 성격이 있어서 어느 연구 그룹에 발을 붙여야 하는가가 다소 미묘하긴 했는데,9 일단은 양자장론의 형식적인 부분(formal theory)에 가까운 편이니 끈이론 그룹에 정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번 학기 첫 그룹 미팅을 가 봤는데, 포츠담에 있던 3년간 고전 중력만 다루다가 양자 중력을 다시 하려니 좀 적응 기간이 필요하단 느낌이 들고 있다.
2.1.
드디어(?) 물어볼만한 사람들과 같은 연구 그룹이 되어 대학원생 시절부터 갖고 있었던 의문을 해소해볼만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mathcal{N} = 8$ SUGRA는 $E_{7(7)}$ (정확한 대칭군이 중요하진 않다) global symmetry를 갖고 있는데, 왜 no global symmetry conjecture에 위배되지 않죠?10
이 질문에 대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11 대답을 벨기에에서 열렸던 Strings 2019의 학회 디너 자리에서12 들은 기억이 있고, 최근에는 포츠담에서 colloquium을 담당할 때 Timo Weigand가 swampland 관련 톡을 하러 와서 이 질문을 던지고 당황시킨 기억이 있다.13 여기 와서는 마찬가지로 swampland쪽 일을 한 적이 있는 Wolfgang Lerche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고 good question이란14 코멘트를 받았는데, 오늘 점심때 Irene Valenzuela까지 모여서 간략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는 이 질문의 답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이 잡힌 느낌이다. 새로운 결과라 할 만한 것은 없으니 답을 정리한다고 해서 논문 거리는 안 될 것 같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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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념원리 양자중력 [본문으로]
- 인명을 연결할 때 부분적으로 사용한 em-dash(---)를 hypen(-)을 쓴 경우까지 포함해서 전부 en-dash(--)로 바꾸는 진짜 아무래도 좋을 편집. [본문으로]
- 그 와중에 여기에도 각주를 과다하게 다는 시점에서 교훈을 제대로 배운 것이 맞기는 한지 약간의 의심이 들지만 일단은 넘어가자. [본문으로]
- 실제로 영국에서 포닥할 때 첫 세 월급이 밀린 경우도 있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본문으로]
- 전기 계약하면서 온수도 전기라서 만약 전기 계약을 못 했다면 씻는 것 조차 못 했을 것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잘 풀리긴 했지만... [본문으로]
- 영국에 있을 땐 Monzo와 Revolut를 썼는데, Revolut는 국가 이동이 안 되어서 (그래서 독일로 이사할 때 그냥 영국 계좌를 그대로 두었다) 프랑스 계좌로 새로 열려면 기존 계좌를 닫아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N26을 프랑스 계좌로 열어서 해결. [본문으로]
- 다만 전기 계약 상담원과 연결되느라 엄청 고생했다. 내가 얻은 교훈은 이것이다: 고객 상담센터가 오후 8시까지라고 되어있긴 한데 저녁시간이 다가오면 다들 퇴근하느라 일 안 하는 것 같으니 그냥 다음날 아침 10시-11시쯤 전화해라. [본문으로]
- 세탁조와 탈수조가 나눠진 말 그대로 손으로 빨래 때를 빼는 과정만 자동화해주는 세탁기만 설치되어 있다. [본문으로]
- EFT를 많이 쓰긴 하지만 BSM이라 하기는 그렇고, amplitude로 분류되긴 하지만 QCD라 하기는 그렇고, string이라 하려고 보니 정작 끈이론 논문은 없고... [본문으로]
- 놀랍게도 양자 중력을 한다면 누구나 생각해봤을만한 이 질문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논문은 (내 검색 능력의 한계 안에서는) Tom Banks의 논문 하나 뿐이었고, 모든 각주가 날아간 포스트의 각주 중 하나가 바로 이 질문과 관련된 문헌에 대한 정보를 다루고 있었다. 이런... [본문으로]
- 즉, 이해하지 못한 [본문으로]
- 다만 내 옆 자리에 있던 누구에게 이 질문을 했었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본문으로]
- 점심 자리에서 Hermann Nicolai 선생은 '우리는 아직 중력에 대해 잘 모른다'란 외교적 수사를 답변으로 주셨고, 이후 학생들이 들은 답을 전해 들었는데 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만족스러운 답변이 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 학계의 불문률 중 하나로 '당장 답을 모르겠으면 "good/interesting question"이라 답하는 것으로 시간을 번다'가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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