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2.11.18 우울할 자유를 박탈당한 사회를 위한 진혼곡
  2. 2010.04.15 그 날의 기억
  3. 2008.05.18 비가 온다 4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피로사회 - 8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이주일인가 전 쯤 강연으로 조한혜정 교수님을 만났다. 거기에서 추천해 준 책이 이 『피로사회』였다. 평소에 학교를 돌아다니다가 집히는 읽을거리가 있으면 일단 잡고 보는 성격인지라 이런저런 정보를 접할 기회가 많은데, 거기에서도 추천된 책이었어서 한번 읽어는 볼까 생각중이었는데 마침 이렇게도 추천을 받으니 읽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문해서 받고보니 웬걸, 매우 얇다.


책 자체는 쉬운 편은 아니다. 현대 철학의 세세한 흐름을 알고 있어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듯 싶은데, 애석하게도 난 후기근대 철학은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고 있어서 저자가 비판하는 그 수많은 철학자들의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세세한 비판을 굳이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생각도 든다. 철학자들을 위한 논문집으로서의 성격은 철학자들을 위한 것이고, 나와 같은 일반인들을 위한 에세이집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그처럼 자세하게 읽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정의하는 질병은 무엇일까? 책은 다소 엉뚱해 보이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근대 이전에는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들이 그 사회를 뒤흔들었다. 지금은? 우울증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다. OECD국가 중 자살율 1위라는 오명을 모두들 무심하게 받아들인다. 너무 오래 전부터 그랬으니까. 절규하다 우는 힘도 잃어버렸다. 그 옆에서는 이른바 『시크릿』으로 대표되는, "하면 된다!"의 눈부시도록 찬란한 구호가 귀를 어지럽힌다. 쌍팔년도도 아니고 안되면 되게하라는 이런 무책임한 말들이 언제부터 넘처흐르게 된 것일까.


전염병과 같은 질병들은 나와 다른 이물질에서 기원한다. 이것이 부정성이다. 저자는 이 부정성이 근대까지의 역사를 특징지어왔다고 서술한다. 이민족, 이단, 야만인 등 우리와 이질적인 것들은 우리가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다. 체내에 우리와 다른 것들, 예컨데 바이러스, 박테리아, 독소 따위가 들어오게 되면 면역체계는 그들에 대항하고 배척한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 이전은 면역학적이었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 우리는 다른 것들을 포용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는 긍정성으로 가득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책 안에서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책이 묘사하는 현대 사회의 특징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이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특징을 폭력의 주체가 부정성에서 긍정성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근대 이전의 사회는 해야 한다(Sollen)의 시대였다. 현대 사회는 할 수 있다(Koennen)의 시대이다.[각주:1] 과거가 제한, 금지, 검열과 같은 방식으로 당신을 억눌렀다면, 현재는 가능성, 비전, 독려를 통해 그대를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를 비틀어 말하면, "칭찬으로 고래를 춤추게 한다"가 된다.


여기에서 우울증이 찾아온다. 우울증이란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Nicht-Mehr-Koennen-Koennen)'의 상태로, '아무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외치는 사회에서나 병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어떤 사회는 몽정을 생기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간주해 중대한 질병으로 보았다. 그들의 무지함이 우스워 보이는가? 그들에게는 조금 드물기는 해도 '태생적으로 우울한 성격인 사람'이 환자가 되는 현대가 희극일 것이다. 실제로 우울증이 정신질환으로 인정된 것은 현대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도록 만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를 들추어내었다고 즐거워하는 듯 하다. 하긴, 이런 책을 읽을 사람이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 혹은 저쪽의 말을 빌리자면 종북 좌빨들 말고 누가 있겠는가. 지금 사회가 얼마나 불합리한지 찾아내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에게 이런 글은 좋은 자기합리화가 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현대 사회의 억압은 자기검열으로 이루어진다는 류의 해석은 그다지 적절한 독해가 아니다. 그것은 현상을 관찰한 것 뿐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부정성이 긍정성으로 바뀌어 사회를 휩쓸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망해야 한다!"식의 해석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긍정-"우리의 희망찬 미래!"-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유토피아는 지금의 디스토피아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참고로 내가 군대에 있을 척 처음 자대에 배치받았던 그 우울했던 시절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울고싶으면 울어도 괜찮아"였다. 그래, 방 구석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눈물을 훔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울고 싶으면 울어도 괜찮다. 당신은 당신으로서 빛난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건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버거운 긍정성을 자신있게 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니까.


우리는, 그저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까짓 거, 내가 쓸모없는게 어때서?


피로사회 - 8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1. Sollen은 영어의 should, Koennen은 영어의 could와 같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2010. 4. 15. 01:38 Writer/Short

그 날의 기억

나는 그날, 그렇게, 봄날의 화사한 흑빛이 가득한 가로수 길 위에 서 있었다. 뚜껑을 닫다 만 향수병의 진한 향기처럼 우울은 주변을 물들여갔고, 우주는 내 피부를 경계로 서로 독립된 삶을 사는 것만 같았다. 길가의 작은 관목에서는 짙은 녹색이 녹색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겠다는 기세로 돋아나 있었고, 길 옆 풀밭 위에서는 들꽃들이 화려함을 겨루는 대회를 여는데다가,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자신의 가벼운 운명을 맡긴 채 산산히 흩어지는 벚꽃으로 푸른 하늘이 넘실거렸지만, 그토록 색채에 인색한 풍경은 경험해 보았던 사람조차 함부로 입에 올리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작년만큼은 아니지만 살짝 우울하네요. 해석이 불가능한 실험 결과물이 문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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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08. 5. 18. 14:51 Daily lives

비가 온다

어제는 일찍 자겠다고 크게 다짐을 먹고 오전 3시까지 버티다가 잠이 들었다.

결국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침은 먹기 힘든 2시에 일어났고, 아침을 오후 5시 반에 먹게 되겠지.

아직 어두운데 시간이 어느정도 ?瑛막졌 궁금해서 커튼을 열어본 창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고

조용함에 익숙해져 있었던 나는 창문을 연다.

'얼마만에 듣는 비 소리일까..'

빗방울이 아스팔트 바닥을 치는 상쾌한 소리에 따라

하모니카를 잡고 느릿느릿한 곡조 하나를 뽑는다.

'룸메는 교회에 갔겠지. 나도 가야 하는데 난 매번 뭐 하는 짓이람...'

살짝 자책하며, 느린 선율을 따라 바람을 분다.

느린 선율에 지칠 때이면 빠른 곡조도 한번 뽑아 보고

정 힘들면 가만히 아스팔트 드럼의 소리를 들어보기도 한다.

우르릉거리는 불만을 들어주면서 뭐가 문제일까 하고 속으로 물어보기도 하고

규칙적인 박자에 맞춰 몸을 조금씩 흔들어 보기도 한다.

아날로그로 살기로 약속했던 어젯밤의 약속은 잊어버리고

결국엔 키보드를 친다. 짧은 스타카토의 울림.

주위를 둘러보면 어젯 밤 월광소나타를 떠올린 베토벤처럼 마구 휘갈긴 포스트잇이 붙어있고

공부 좀 해 보겠다고 산 파인만씨의 빨간 강의록이 놓여있고

은빛으로 사길 원했지만 검정으로 신청된 노트북 쿨러와

그 위에 가부좌 자세로 놓여있는 나의 14인치 와이드 노트북

그리고 노트북을 보좌하기 위한 푸른 무선 마우스와

책상 위에 널부러져 있는 새하얀 이어폰

그 앞에는 숙제를 하겠다고 펴 놓은 책이 있고

그 옆에는 숙제를 하려던 것처럼 놓여있는 A4용지가 있다.

물론 숙제를 하나도 안한 것은 아니지만, 넣은 시간에 비해 한 양이 너무 많아서 말이지.

숙제를 하던 종이 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3색펜이 도도한 검정색 펜을 드러내고 있고

뚱뚱한 샤프와 옷을 안 빨아서 더러워진 계산기가 놓여있다.

계산기 옆에는 너무 많은 펜던트를 들고 다니다가 외피가 찢어질 듯 말듯 한 필통이 있고

그 반대쪽 숙제를 하려던 책 옆에는 영어 자료와 레포트 용지, 그리고 나의 매니저인 학생수첩이 놓여있다.

물론 그 옆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감정을 불어넣던 하모니카와 하모니카 케이스가 놓여있고 말이다.

밖에서는 슬슬 빗방울들이 밀려들어오고

그 울림은 점차 강해진다.

예전 02년도에 광장으로 하나 둘 몰려오는 붉은 물결처럼

갈수록 점차 세지는 느낌이다.

일기는 여기쯤에서 끝내고, 이제는 숙제를 다시 해야지.

번개의 호통 소리가 빨리 마음을 잡으라는 것처럼 들린다.

Posted by 덱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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