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퀄을 보면 영화의 각종 설정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듯 싶다. 영화의 기반이 되는 '남의 꿈에 들어간다'에 대한 내용과 팽이는 무엇인가, 꿈 속에서 죽으면 빠져나온다는 것, 이질적인 존재가 꿈에 개입했다는 것을 인지하면 꿈의 모든 신경이 집중된다는 것(사람들이 그쪽을 쳐다보다가 공격하기 시작한다) 등. 중요하기는 하지만 내용과는 상관없는 기타 설정중에는 '킥'이라는 것이 있고(중력에 대한 느낌은 꿈 속에서도 유지된다는 것을 이용해 잠을 깨우기 위해 중력 상태에서 갑자기 자유낙하를 경험하게 하는 것-물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듯) 림보(limbo-연옥. 그런데 그냥 림보라고 부른다)라고 꿈 속에서 잘못 죽으면 가장 깊은 무의식의 바다로 떨어지는 것도 있다. 하지만 이정도 이해하고 들어가면 나머지 사소한 설정들에 대해서는 영화를 보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단 내용에 대한 정리는 여기에서 확인, 영문으로 좀 더 단순하게(?) 정리된 페이지는 여기, 직접 연기했던 배우의 생각은 여기에서 확인하세요.
첫 링크에서는 토템에 대한 설명이 잘못되었는데, 주사위도 토템으로(아서) 나왔다. 아리아드네가 자신의 토템인 체스 말(퀸인것 같다)을 만들도록 설명하는 도중에 잠깐 나왔다.
호텔에서 설산요새로 들어갈 때에는 피셔의 꿈이라고 생각했는데(들어간 것은 브라우닝의 꿈이었지만 피셔가 만들어낸 가상적 존재였으니까), 그러면 피셔가 일시적으로 죽었을 때 꿈이 무너저야 했으므로 피셔가 브라우닝의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용해 임스가 끼어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꿈의 꿈에서 지금 들어가는 꿈이 남의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용해 꿈을 바꿔치기 한 건가...
개인적으로는 엔딩이 f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마지막 장면은 콥의 꿈이라는 것. 항상 현실감을 유지하기 위해 토템을 버려두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므로 마지막 장면은 꿈에 대한 압박감을 털어버리고 현실로 돌아왔다는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역으로 마지막 장면은 자각하지 못하는 꿈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콥이 림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현실의 기억을 투영해 새로운 꿈에 빠져들었다는 말이다. 말 그대로 콥에게는 꿈도 희망도 없는 전개이다. 계속 꿈에 붙잡혀 살아간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물론 이 가설은 언제까지나 마지막에 토템의 회전이 멈추지 않는다는 전제가 가장 크게 따라붙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 꿈도 희망도 없는 엔딩이 된다. 사이토는 자신을 반쯤 잃어버렸고, 나머지는 비행기 안의 현실에서 킥을 줄 방법이 없으므로 며칠은 더 꿈 속에 갇혀있어야 하고. 꿈 공유장치는 타이머가 시간을 조절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반 강제적으로 10시간을 계속 자야한다. 중간에 피셔의 방어기제에 걸려 사냥당하면 그야말로 지옥. 그나마 마지막 직전에 피셔가 꿈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생각하기 때문에 안전하게 돌아다닐 것 같은게 다행이다.
위 가설의 근거로는 첫째, 사이토가 제 아무리 힘있다고 해도 범죄 기록까지 지울 능력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없는 사람을 만들어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랑 너무 똑같이 움직인다. 나이를 먹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아무리 우연이라고 해도 완벽히 동일하게 움직이는게 가능할까? 영화에서는 아이들이 정원 위의 무언가를 구경하는 모습이었는데 그 구경거리가 정원 위에 고정된 무언가가 아니라면 똑같이 움직일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고정된 무언가라고 하더라도 관심을 한번 더 끌기는 힘들테다.
그런데 캐스팅을 살펴보면 아이들이 나이별로(!) 연기하도록 되어있다. 그냥 붙여넣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콥이 아내 멀과 함께 림보로 들어가기 전 아이들의 영상이 따로 있고(그래서 림보 안에서 아이들을 찾으러 다시 나와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이고) 림보에서 나온 후 멀이 자살한 뒤에 집을 떠나기 전 아이들을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또 따로 찍은 것이거나. 물론 가장 간단한 가설은 마지막에 나오는 아이들이 현실의 아이들이기 때문에 마지막에 현실로 돌아왔다는 것이지만.
하지만 가장 궁금한 것은 첫 장면과 마지막 직전의 장면 사이에 있는 내용 전체에 대한 것이다. 노인이 된 사이토와 콥이 만나 서로를 찾고 기다리는 것을 확인하는 장면인데 나중에 나오는 장면은 중간의 영상과 이어지지만 첫 장면에서 그 다음 장면(젊은 사이토에게 콥이 아이디어를 방어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면서 접근하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다. 중간 내용 전체는 림보에서 이루어진 콥의 회상이었을까?
영화는 액션신이 대박이다. 중간에 무중력에서 싸우는 신이 나오는데 그게 CG가 아닌 와이어액션이랜다. 옷에까지 와이어를 달아가며 찍었다는데 그야말로 대단하다고밖에. 현실적이면서도 거기에 무언가를 비틀어 넣어 환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는 감독의 실력에 감탄만 나온다. 도시가 접히는 장면과 에셔의 무한히 상승하는 계단(링크 참조)이 구현되는 장면만으로도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당신의 마음이 사건의 현장입니다. Your mind is the scene of the crime. - Inception
스플라이스란 유전공학의 DNA Splicing이라는 기법에서 유래한 제목일 것이다. 말 그대로 유전자를 잘라서 이어붙이는 것을 말하는데, 유전공학에서 사용되는 기초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내가 본 것은 조금 다르지만 아무래도 감독이 원했던 것은 윤리와 도덕 없이 폭주하는 기술이 가진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중간에 칠성사이다를 너무 많이 마셔서 세수하러 가느라 화제(?)가 된 남자주인공과 생명체가 교감을 나누는 부분을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리뷰를 진행하는데는 별 문제 없어 보인다.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상 리뷰 자체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접어놓는다. 리뷰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종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난 기술보다는 인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따라서 이 리뷰는 영화에 대한 일반적인 리뷰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진행될 것이다. 기술에 대한 경각심은 다른 글에서 찾으시길.
먼저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 여주인공 엘사는 트라우마의 화신(化身)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영화 내내 트라우마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보물상자라 할 수 있는 작은 나무가방에는 어머니와 함께 찍은 자신의 사진과 어릴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들어있다. 그녀의 어머니가 어릴 때 쓰던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그녀의 방을 보면 황폐하다. 마치 「에반게리온」시리즈에서 나오는 레이의 방처럼 말이다. 침대도 없이 매트리스만 남겨져 있는 그 흔한 책장조차 없는 방. 영화 방영분에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 매우 엄격하게(다른 쉬운 말로는 학대받으며) 자라왔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보물상자의 장난감들은 그 어린시절에 대한 보상심리겠지. 결국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는 깊숙히 각인되어 일반적이지 않은, 그러니까 완벽한 아이를 원하게 만들었고 결국 금단의 실험을 실행하기에 이른다. 남주인공 클라이브가 지적하지 않던가. 넌 어머니를 따라 미친 것 뿐이라고. 영화 마지막에서도 그녀는 트라우마를 내보인다. "What's the worst that could happen?" 영화 속에서 여러 번 나온 대사인데 자막에서는 문맥에 맞는 다른 말로 바뀌어 제시되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두 장면을 꼽으라면 중반에 클라이브와 엘사가 쇼파 위에서 콘돔 없이 사랑을 나눌 때, 그리고 누구나 다 아는 마지막 장면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괜찮느냐는 사장의 질문에 대답할 때. 번역은 "임신밖에 더 하겠어"와 "갈 때까지 갔으니까요"라는 다른 대사로 처리되었지만, 원래 둘은 같은 대사이다. 오버일지도 모르겠지만, 클라이브에 대한 미안함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은 아닐까? 영화 중반부에서 이사갈 새로운 집을 볼 때 클라이브는 분명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했고, 엘사는 거절했다.
생명체 드렌에서는 홉스적 자연상태의 인간이 보였다. 영화 중반에 핸드폰으로 한 메모가 '자연상태의 인간이 어떤 심리상태를 갖는지에 대한 탐구영화 스플라이스'였는데, 확실히 이 테마가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나보다. 드렌을 인격체로 본다면 문명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자연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연인은 토끼를 사냥하여 날로 뜯어먹었고, 강제로 원하는 성관계를 밀어붙이지 않았던가. 이런 점에서 드렌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생명체와는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그 생명체는(후에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는 했지만) 소설 안에서 가장 인간다웠다고 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러고보니 이런 인공생명체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기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맞물려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지금은 제 2차대전 이후 기술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지만, 메리 셸리가 그 유명한 소설을 쓸 때까지만 해도(1818년) 기술은 인류를 구원할 마지막 방주라고 여겨졌으니 말이다.
남주인공 클라이브에서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과학자를 보았다. 매번 그는 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엘사의 결정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학에는 개인적 감정이라는 요소는 통계를 교란시키는 치우침(bias)만 유발하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과학에 감정이 개입하여 만들어진 나치의 세기의 악행을 알고 있다. 우생학은 분명히 사실만을 말하는 과학에 감정이 개입해서[각주:1] 판단을 내린 것이고, 그 결과는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의 트라우마를 남겼다. 하지만 과학에 감정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1945년의 히로시마가 되지 않을까? 정답은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한다겠지만, 이론적인 대답을 실현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재미없게 보려면 nerdy하게 보면 된다. 드렌(Dren)을 거꾸로 한 nerd.[각주:2] 실제로 가능한지 자를 대어보자는 이야기이다. 물론 영화는 현실과 다르지만(그리고 달라야만 하지만) 이건 이것 나름대로 괜찮은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까?
먼저 DNA 합성 장면. 영화에서 구현된 합성장면은 그야말로 신기술이다. 염색체가 보이는 실험장비의 화면은 전자현미경으로 찍은 모습처럼 보이는데, 전자현미경을 사용하려면 시료에 금 도금을 해서 진공에 노출시켜야 한다. 광학현미경이라고 하더라도, 원래 염색체는 광학현미경에 보이지 않는다. 염색체가 염색체인 이유는 '염색이 되기 때문'이다. 염색체를 염색해서 관찰하려면 색소를 사용해야 하는데, 색소를 사용하면 일반적으로 염색체는 그 기능을 잃어버린다. 색소 중에는 발암물질도 있는데 그런 것들에 폭격당한 염색체가 제구실을 한다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합성된 생명체가 진짜 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클라이브가 드렌과 춤을 추는 장면을 보면 드렌도 성인 여성 정도의 무게를 가졌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드렌이 가볍다면 그렇게 춤을 자연스럽게 출 수 있었을까? 일단 무게가 일반 성인 여성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그 허약한 날개로 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드렌의 날개의 모티브로 보이는 박쥐의 날개는 몸 크기의 다섯배는 가뿐히 뛰어넘는다. 가장 큰 박쥐라는 Giant golden-crowned flying-fox박쥐와 인간 사이에는 최소한 40배의 무게차이가 있는데, 이 상태에서 날려면 날개의 넓이가 40배 즉 가로세로 길이가 약 6배는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그 박쥐의 날개 너비는 1.5m이다. 비행기 어디 없나?[각주:3]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리 드렌이 인간 유전자를 가졌다고 해도 임신이 된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염색체가 정확히 23쌍을 이루어야 하고, 정확히 23쌍을 이루었다고 해도 수정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이 없으며(워낙 많은 유전자를 조합해서 어떤 생명체의 생식방식을 채택할지 모른다), 또한 수정되었다고 해도 그게 배아로 자라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이다. 실제로 난자가 그냥 분할해서 수정체가 되는 처녀생식의 경우에 그 수정체는 중간에 사망한다. 남성과 여성에게서 오는 유전자가 다른 역할을 하기 때문인데(같은 염색체에 이상이 있더라도 부계인지 모계인지에 따라 다른 유전병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수정에 성공했다면 엄청난 일일수밖에.
13:30 추가. 드렌의 성별이 바뀌는 특성은 어류에서 따온 것 같다. 실제 어류중에는 경우에 따라 성별을 바꾸는 종이 존재한다. 무리에 우두머리 수컷이 있으면 암컷으로 지내다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면 점차 성이 수컷으로 변하는 종인데 이름을 까먹었다(-_-). 마지막에 성별이 바뀌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가족(?) 안에서 권력구조가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지루하지만(영화 자체도 살짝 늘어지는 감이 있었다) 감독이 보라는 것은 안 보고 다른것을 보고 있으면 재미있는 부분을 찝어낼 수 있는 영화이다.
제목이 전부입니다. 진짜 그래픽 말고는 건질 것 하나도 없는 영화. 덕분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첫 장면뿐이네요. 얼굴 앞에서 물방울이 떠다니는 장면이죠. 3D 안경을 쓰면 화면 위에 물방울이 떠다니고, 안경을 벗으면 얼굴이 보이고 물방울은 나뉘어 보이고.(아니면 딱 두 장면이 전환될 때 안경을 쓴 것이거나)
그래픽은 일단 넘어가고, 내용은 조금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더군요. 스포일러 위험.
내용은 이전에 비슷한 영화도 많다고 하더군요. 정신적 교감이니 뭐니 하는것은 아메리카 원주민 판타지에서 심심하면 등장하는 것이니까 그렇다 치고, 백수(百獸)를 연결하는 정신 케이블(?)이 진화로 생겨날 수 있는지는 판타지니까 넘어간다 치더라도, 결말을 보면서 조금 웃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악마'로 묘사되었던 물질을 위해 다른 모두를 파괴하던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거죠.(특히나 미국인들 -_-) 더불어 지금 그런 사람들이 없으면 현대인의 생활은 그대로 무너진다는 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는 기분도 들고요.
더군다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얘네들 철학을 제대로 이해한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날아다니는 생명체를 길들일 때 '넌 내꺼야' 이러고 있는 것을 보니까 그냥 이해한 척 하고 있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더군요. 뭐 마지막 부분은 별로 상관없기는 하지만 -_-
제가 기분 나빠서 이런 평가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연말에 이리저리 치여사는게 짜증나긴 하지만...
영화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뉘어진다. 눈을 아프게 하는 영화와, 머리를 아프게 하는 영화. 본인은 단순해서 눈이 아플 정도로 불꽃이 화려하게 튀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머리를 일부러 아프게 하는 악취미도 있어서 오랜만에 머리를 굴려 보려고 한다.
필자는 트랜스포머 1편을 못 보았다.[각주:1] 영화관은 부르주아의 사치정도로 취급하는 것도 있지만(필자의 지갑은 신분증으로 두껍다) 굳이 영화관까지 가서 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줄여서 그냥 '귀찮다'. 그래서 본인에게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눈을 아프게 하는 것이 목적인 영화를 두고 머리를 아프게 하려는 것은 아마 드문 경험에 대해 마땅히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 엉뚱한 방법으로 그 불쾌함을 분출하려는 것일까? 알 수는 없지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으면 전투(?)는 끝을 맺어야 하므로 눈과 더불어 머리까지 아프도록 노력해 보자.
참, 스포일러 우려가 있으니 아래는 영화를 본 이후에 보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스포일러 따위가 불가능한 단순한 영화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0. 패자의 역습
원제는 Transformers : Revenge of the Fallen이다. 영화에서 Fallen은 로봇의 이름이다. 그리고
fall이라는 중학생 급 단어에는[각주:2] 무너지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the Fallen은 영어의 특징으로 볼 때 '무너진 자' 즉
'패자(敗者)'를 의미한다. 부제인 '패자의 역습'은 영화 속의 로봇 폴른의 복수를 주된 이야깃거리로 삼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이름은 매우 많은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다. 무너진 자 혹은 몰락한 자. 무엇이 무너지고 무엇이 몰락했단 말인가? 영화 속에서 로봇들의 지도자들이라 할 수 있는 프라임들은 '태양을 파괴하여 에너지를 얻는 기계'들을 사용할 때, 주변 행성에 생명체가 살고 있는 경우 그 기계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폴른은 그 원칙을 무시하고 기계를 사용하려 했으며, 그것이 다른 프라임들이 폴른을 가두도록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fallen은 무너진 원칙과 몰락한 도덕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영화 초반부에서 '옵티무스 프라임'은 죽는다. 싸움에서 패배하고 만 것이다. 패자(敗者)는 옵티무스 프라임인 셈이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서 옵티무스 프라임은 다시 일어서고, 부도덕한 폴른을 응징한다. 더 적당한 '패자의 역습'은 없다. 물론 옵티무스 프라임의 역습에 복수(revenge)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번역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중의성이 번역자들의 노림수였는지 아니면 단순히 복수보다는 역습이 멋져 보여서 선택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본인에게 그 문제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명쾌한 사실이다.
1. 정의는 우리가 지킨다(?)
대개 눈이 아픈 영화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정의는 승리한다.'블록버스터급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은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한데,[각주:3] 이 영화 또한 그 불변의 법칙을 피해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의와 불의는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으로 깔끔하게 구분되어 있다. 폴른을 따라가는 디셉티콘 군단과 그에 맞서 싸우는 옵티무스 프라임의 오토봇 진영.
이것이 전부였다면 이런 이야기를 꺼낼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오토봇과 함께 디셉티콘 군단에 맞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다. 미국인.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동양인은 없다.(뭐, 일단 놀고 있는 곳이 놀고 있는 곳이니만큼 동양 사람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놀이터라는 것 정도로 이해하자.)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중동의 사람들(아랍인으로 통칭되는 것 같지만)이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들은 엑스트라이다. 잉여 역할을 맡는 것이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의 역할이다. 중간에 등장했던 중동 어느 국가(미안. 까먹었다.)의 군대(기껏해야 헬기 두대 -.-;;)는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산산조각나고, 그렇게 무너진 군인들은 미국인 학생에 의해 구조된다.
현실은 신발의거
뭐, 미국이 힘이 세긴 하지만(그래서 못미더워도 미사일로 쿡쿡 찌르기 전에 몸음 움츠려주어야 하지만) 미국이 정의 그 자체인 양 휩쓸고 다니는 모습은 그다지 아름다운 풍경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할리우드와 함께 전파되고 있는 '우왕ㅋ굳ㅋ 미국은 정ㅋ의ㅋ'라는 선전활동에 이 영화는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다.
2. 정의를 지키는 은둔자들
눈여겨볼 두번째 항목은 오토봇과 함께 디셉티콘을 싸우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이 사람들은 숨어서 활동한다. 왜 정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죄다 숨어서 활동해야 하는 것일까? 암행어사 역할이 그렇게 매력적이던가? 영화 맨 인 블랙(Men in Black)에서도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검은옷의 사나이'들은 항상 뒷수습을 하며 사람들의 기억을 지운다. 많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정의의 사나이들은 배트맨처럼 어둠 속에서 그림자를 벗으로 하여 검은 비수로 흑색 밤하늘보다 어두운 악을 처단하고는 암흑 속으로 사라진다. 또, 얼굴을 대놓고 드러내는 슈퍼맨과 같은 정의의 사나이들조차 현실세계에서는 자신의 연인 말고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도록 비밀을 지키는 데 집중한다. 뭐, 자신의 연인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정의와는 거리가 멀지만,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Mr. and Mrs. Smith)의 경우에도 자신의 배우자가 하는 일을 생각조차 못 했던 것처럼.
현실 세계로 돌아와 보자. 현실 세계에서 정의의 가장 가까운 벗은 경찰이다.(물론, 지금의 경찰이 그런지는 매우 의심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모든 정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있다. 정의의 기준이라고 할 법은 폐쇄되어있지 않다. 오히려 만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법을 쉬운 말로 바꾸는 작업마저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정의는 개방적인 것이다. 은폐되어있는 정의란, 적어도 우리의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잠시 공개가 보류되어있는 정의가 존재할 뿐.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는 정의로운 친구들은 우리의 사회가 갖지 못했기 때문에 욕망하는 어떤 것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의의 실현. 정의는 얼핏 보면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기도 하다. 심심하면 들려오는 탈세와 부정부패, 그리고 섬뜩한 살인사건들은 우리가 전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친구들도 평상시에는 일반인에 불과하다
세상은 바르지 못하다. 하지만 정의는 승리한다. 그렇다면 이 상반되는 현상을 잇는 결론은 하나다. 보이는 것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부분의 영화에서 정의로운 자들이 자신의 지위를 숨기는 이유일 것이다. 내가 알지는 못하지만, 정의는 승리하고 있다는 믿음인 셈이다.
또 다른 가설로는 감정이입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영화 속 주인공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자신의 약점이 아닌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보통 즐겁다. 더군다나 그것이 자신에게 유리한 비밀이라면 즐거움은 배가 된다. 사람들이 음모론에 심취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신과 영혼은 보이지 않지만 즐거움을 준다. 보이지 않는 정의. 남들은 모르지만 나는 비밀스럽게 알고 있는 것. 여기에 '비밀스러운 결사단'에 대한 열광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3. 생명은 귀중하다(?)
프라임들이 동력을 얻는 기계는 태양을 파괴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태양이 내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생각해 볼 때 그 발전기(?)는 엄청난 에너지를 손쉽게 제공해주는 꿈의 에너지원인 셈이다. 하지만 원자력처럼 꿈의 에너지원 또한 문제젬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태양이 파괴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이 파괴되어 버리면 그 태양계의 모든 생명체는 무생물로 환원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프라임들은 매우 자비로웠던 모양이다. 생명체가 있는 태양계는 건드리지 않는다니.
그리고 폴른은 그 우둔함(?)을 타파하기 위해 자기가 직접 그 기계를 작동시키겠다고 선언한다. 물론 여섯 프라임들이 그를 제압하고 기계의 전원(?)과 함께 사라지기 전까지 그 계획은 잘 유지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 어찌되었던 프라임들은 대단한 녀석들임에 틀림없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면 다른 생명체를 어떻게든 파괴하려고 안달난 인간이라는 생명체들마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니 말이다. 그래도 그들이 하면 전종의 멸종이 아니냐는 반문에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그거랑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답문을 하기로 하고, 여기에 깔려있는 기반을 살펴보자. 생명 존중이다.
생명은 귀중하다. 존재하기 쉽지 않은 형태의 자연현상이기 때문이다. 마치 탁해져 더 이상 무지개가 뜨지 않는 서울의 대기에 홀연히 나타난 무지개처럼 말이다. 희귀성 때문에 귀중한 예는 수없이 많다. 다이아몬드, 금, 운석, 월석, 화석 등. 하지만 이들 모두가 생명과 동등한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렇게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왜?
생명의 존재는 너무나도 과평가된 현상이다
생명 그 자체는 상당히 희귀한 현상임은 분명해 보인다. 일단 우리 주변의 일곱 행성만 돌아보아도 생명은 우리 주변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주로 쏘아올린 무생물들의 도움을 받아 바라보는 우주에서 생명은 정말 찾기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희귀한 것이 가치있는 것인가? 꼭 그렇지도 않다. 우리는 정신적 돌연변이들이 길거리에 쏘아다니는 것을 절대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각주:4]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크게 세 특징을 가진다. 외부세계에 대해 반응, 에너지대사, 자기재생산. 반응은 말 그대로 외부세계가 변화하면 행동방식을 변화함을 의미하고, 에너지대사는 쉽게 말하면 무언가를 먹고 똥을 만드는 기계라는 말이고, 자기재생산은 어떤 과정을 통해 자기와 닮은 개체를 다시 세계에 내놓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체는 모두 저 조건을 만족한다(비록 바이러스와 같은 몇몇 경우 그 언저리에서 버벅대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생명의 조건을 전부 만족하는 로봇을 말이다. 지구가 멈추는 날(The Day the Earth Stood Still)의 고트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 영화에서 수많은 작은 기계들은 말 그대로 무엇이든지 먹어치우고 자기 자신을 복제해낸다. 우리는 이를 생명체라고 부를까? 아마 '유기물로 이루어져야 한다'라는 독특한 기준을 끌어들여 어떻게든 차별화하려고 할 것이다. 인류학자들이 동물과 인간의 인지능력을 구분하기 위해 이상한 기준을 계속 덧붙이는 것처럼.[각주:5]
가치는 부여된다. 원래 가치는 평가자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왜 생명이 귀중하다고 평가하고 있을까? 말 그대로 우리 자신이 생명체이기 때문에? 뭐, 자기합리화도 나쁘지는 않은 결론일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Matrix) 시리즈는 독특한 일례이다. 물론 여기서도 '정의는 승리한다'는 법칙은 깨지지 않지만, 모호하게 성립된다. 인류와 기계의 휴전은 차라리 '정의는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패배하지 않는다'에 가까워 보인다. 영웅의 서사시라는 구조 때문에 그런 것일까? [본문으로]
문제는 청와대에 하나가 기어들어간 것 같다는 것 정도. 아니, 여의도에도 상당수가 가 있구나. [본문으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동물의 지능에 대한 특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동물학자들은 인류학자들이 인간의 인지능력에 대한 정의를 계속 바꾸어서 어떻게든 동물이 그 능력을 갖지 못하도록 노력하는 것 같다고 읽었던 기억이 남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