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플라이스란 유전공학의 DNA Splicing이라는 기법에서 유래한 제목일 것이다. 말 그대로 유전자를 잘라서 이어붙이는 것을 말하는데, 유전공학에서 사용되는 기초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내가 본 것은 조금 다르지만 아무래도 감독이 원했던 것은 윤리와 도덕 없이 폭주하는 기술이 가진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중간에 칠성사이다를 너무 많이 마셔서 세수하러 가느라 화제(?)가 된 남자주인공과 생명체가 교감을 나누는 부분을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리뷰를 진행하는데는 별 문제 없어 보인다.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상 리뷰 자체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접어놓는다. 리뷰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종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난 기술보다는 인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따라서 이 리뷰는 영화에 대한 일반적인 리뷰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진행될 것이다. 기술에 대한 경각심은 다른 글에서 찾으시길.
먼저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 여주인공 엘사는 트라우마의 화신(化身)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영화 내내 트라우마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보물상자라 할 수 있는 작은 나무가방에는 어머니와 함께 찍은 자신의 사진과 어릴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들어있다. 그녀의 어머니가 어릴 때 쓰던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그녀의 방을 보면 황폐하다. 마치 「에반게리온」시리즈에서 나오는 레이의 방처럼 말이다. 침대도 없이 매트리스만 남겨져 있는 그 흔한 책장조차 없는 방. 영화 방영분에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 매우 엄격하게(다른 쉬운 말로는 학대받으며) 자라왔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보물상자의 장난감들은 그 어린시절에 대한 보상심리겠지. 결국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는 깊숙히 각인되어 일반적이지 않은, 그러니까 완벽한 아이를 원하게 만들었고 결국 금단의 실험을 실행하기에 이른다. 남주인공 클라이브가 지적하지 않던가. 넌 어머니를 따라 미친 것 뿐이라고. 영화 마지막에서도 그녀는 트라우마를 내보인다. "What's the worst that could happen?" 영화 속에서 여러 번 나온 대사인데 자막에서는 문맥에 맞는 다른 말로 바뀌어 제시되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두 장면을 꼽으라면 중반에 클라이브와 엘사가 쇼파 위에서 콘돔 없이 사랑을 나눌 때, 그리고 누구나 다 아는 마지막 장면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괜찮느냐는 사장의 질문에 대답할 때. 번역은 "임신밖에 더 하겠어"와 "갈 때까지 갔으니까요"라는 다른 대사로 처리되었지만, 원래 둘은 같은 대사이다. 오버일지도 모르겠지만, 클라이브에 대한 미안함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은 아닐까? 영화 중반부에서 이사갈 새로운 집을 볼 때 클라이브는 분명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했고, 엘사는 거절했다.
생명체 드렌에서는 홉스적 자연상태의 인간이 보였다. 영화 중반에 핸드폰으로 한 메모가 '자연상태의 인간이 어떤 심리상태를 갖는지에 대한 탐구영화 스플라이스'였는데, 확실히 이 테마가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나보다. 드렌을 인격체로 본다면 문명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자연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연인은 토끼를 사냥하여 날로 뜯어먹었고, 강제로 원하는 성관계를 밀어붙이지 않았던가. 이런 점에서 드렌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생명체와는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그 생명체는(후에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는 했지만) 소설 안에서 가장 인간다웠다고 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러고보니 이런 인공생명체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기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맞물려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지금은 제 2차대전 이후 기술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지만, 메리 셸리가 그 유명한 소설을 쓸 때까지만 해도(1818년) 기술은 인류를 구원할 마지막 방주라고 여겨졌으니 말이다.
남주인공 클라이브에서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과학자를 보았다. 매번 그는 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엘사의 결정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학에는 개인적 감정이라는 요소는 통계를 교란시키는 치우침(bias)만 유발하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과학에 감정이 개입하여 만들어진 나치의 세기의 악행을 알고 있다. 우생학은 분명히 사실만을 말하는 과학에 감정이 개입해서[각주:1] 판단을 내린 것이고, 그 결과는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의 트라우마를 남겼다. 하지만 과학에 감정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1945년의 히로시마가 되지 않을까? 정답은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한다겠지만, 이론적인 대답을 실현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재미없게 보려면 nerdy하게 보면 된다. 드렌(Dren)을 거꾸로 한 nerd.[각주:2] 실제로 가능한지 자를 대어보자는 이야기이다. 물론 영화는 현실과 다르지만(그리고 달라야만 하지만) 이건 이것 나름대로 괜찮은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까?
먼저 DNA 합성 장면. 영화에서 구현된 합성장면은 그야말로 신기술이다. 염색체가 보이는 실험장비의 화면은 전자현미경으로 찍은 모습처럼 보이는데, 전자현미경을 사용하려면 시료에 금 도금을 해서 진공에 노출시켜야 한다. 광학현미경이라고 하더라도, 원래 염색체는 광학현미경에 보이지 않는다. 염색체가 염색체인 이유는 '염색이 되기 때문'이다. 염색체를 염색해서 관찰하려면 색소를 사용해야 하는데, 색소를 사용하면 일반적으로 염색체는 그 기능을 잃어버린다. 색소 중에는 발암물질도 있는데 그런 것들에 폭격당한 염색체가 제구실을 한다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합성된 생명체가 진짜 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클라이브가 드렌과 춤을 추는 장면을 보면 드렌도 성인 여성 정도의 무게를 가졌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드렌이 가볍다면 그렇게 춤을 자연스럽게 출 수 있었을까? 일단 무게가 일반 성인 여성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그 허약한 날개로 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드렌의 날개의 모티브로 보이는 박쥐의 날개는 몸 크기의 다섯배는 가뿐히 뛰어넘는다. 가장 큰 박쥐라는 Giant golden-crowned flying-fox박쥐와 인간 사이에는 최소한 40배의 무게차이가 있는데, 이 상태에서 날려면 날개의 넓이가 40배 즉 가로세로 길이가 약 6배는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그 박쥐의 날개 너비는 1.5m이다. 비행기 어디 없나?[각주:3]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리 드렌이 인간 유전자를 가졌다고 해도 임신이 된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염색체가 정확히 23쌍을 이루어야 하고, 정확히 23쌍을 이루었다고 해도 수정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이 없으며(워낙 많은 유전자를 조합해서 어떤 생명체의 생식방식을 채택할지 모른다), 또한 수정되었다고 해도 그게 배아로 자라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이다. 실제로 난자가 그냥 분할해서 수정체가 되는 처녀생식의 경우에 그 수정체는 중간에 사망한다. 남성과 여성에게서 오는 유전자가 다른 역할을 하기 때문인데(같은 염색체에 이상이 있더라도 부계인지 모계인지에 따라 다른 유전병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수정에 성공했다면 엄청난 일일수밖에.
13:30 추가. 드렌의 성별이 바뀌는 특성은 어류에서 따온 것 같다. 실제 어류중에는 경우에 따라 성별을 바꾸는 종이 존재한다. 무리에 우두머리 수컷이 있으면 암컷으로 지내다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면 점차 성이 수컷으로 변하는 종인데 이름을 까먹었다(-_-). 마지막에 성별이 바뀌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가족(?) 안에서 권력구조가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지루하지만(영화 자체도 살짝 늘어지는 감이 있었다) 감독이 보라는 것은 안 보고 다른것을 보고 있으면 재미있는 부분을 찝어낼 수 있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