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host of the Executed Engineer (Reprint, Paperback) - 8점
Graham, Loren R./Harvard Univ Pr


소련이 가졌던 기술적 한계를 사형당한 광산학 전문가 페테르 팔친스키(Peter Palchinsky)의 삶을 통해 들여다본 책이다. 번역본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학기에 들었던 공학윤리와 리더쉽 과목에서 과제로 쓴 서평을 공유해본다. 확실히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니 원문이 한글일 때와는 다소 다른 느낌을 갖는 것이 느껴진다.[각주:1]



칼 레이문드 포퍼경은 그의 유명한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과학에서의 진보는 열린 사회에서 양육될 때에만 가장 크게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요 주장-전체주의적 정부의 악함에 대한 강한 신념-은 잠시 옆으로 치워두기로 하면, 과학의 진보에 대한 그의 논거는 매우 설득적이다. 하지만 과연 사실일까? 냉전 기간의 소비에트 연방의 급격한 발전을 고려하면 이 주장에 의문을 갖게 된다. L. D. 란다우와 같이 특출난 과학자들이 반례를 제공하지만, 로렌 R. 그래함의 『사형된 엔지니어의 유령The Ghost of the Executed Engineer』을 읽고 나면 포퍼의 선언은 합당해 보인다.


이 책은 불우한 러시아 엔지니어 페테르 팔친스키의 삶을 그린다. 팔친스키는 스탈린 치하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반역모의로 비밀리에 사형되었다. 그는 왜 혐의를 받았을까? 저자는 이 이유를 스탈린이 소비에트 혁명 이전에 교육받은 엔지니어들에 대해 가졌던 불신과 거대 산업 복합체를 지으려는 정부 계획에 대한 팔친스키의 강한 비판에서 찾는다. 이후 저자는 소련의 기술에 대한 관점과 엔지니어들이 받은 교육을 사형당한 전문가의 불운에 맞추어 설명한다.


페테르 팔친스키는 짜르 시대에 훈련받은 광산학 전문가였다. 그는 1901년 석탄 채굴량 감소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의 일원으로 우크라이나의 돈 분지(Don Basin)에 파견되었고, 노동자들을 조사하는 임무를 받았다. 노동자들의 생활환경에 관한 통계를 모은 팔친스키는 열악한 생활환경이 그들의 의욕을 꺾었다고 결론지었고, 이는 상부의 분노와 유배의 원인이 되었다. 저자는 이 경험으로 팔친스키의[각주:2] 기술만 고려해서는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믿음과 급진적인 정치관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팔친스키는 기술이 그 기술을 도입하는 사회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술이 사회적인 조건을 만들 뿐만 아니라 특정 사회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기술을 성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팔친스키와 스탈린의 기술에 대한 극단적인 견해차는 흥미롭다. 전자가 산업의 진보를 정치적, 사회적, 법적, 교육적 사안들과 분리할 수 없으며 인본주의적인 접근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한 반면 후자는 기술을 모든 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취급했다. 팔친스키는 이러한 믿음 위에서 엔지니어들이 다양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가 우세하였고 많은 비효율과 노동자의 혹사를 야기했으며, 연방에서의 교육을 받은 엔지니어들이 터무니없이 제한된 교육을 받고 새로운 지도자들이 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저자가 만난 '종이 제작기에 들어가는 볼 베어링'에 대한 공학 학위를 받은 엔지니어는 터무니없이 좁은 소련의 교육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엔지니어가 가장 큰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팔친스키의 생각은-구글은 완벽한 사례이다- 자본가들의 탐욕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자본주의 국가에서 현실화된 것으로 보인다.


슬퍼라, 선견지명이 있었던 공학자의 말년을 읽으니.[각주:3] 팔친스키는 선의에서 조국을 위해 산업체의 효용을 최대화하는 통찰을 제공해려 했으나 나라의 지도자는 사보타주로 간주하고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책으로부터 판단할 때 팔친스키는 이미 같은 이유로 투옥된 적이 있기에 공개적인 비판이 가져올 목숨의 위협을 알고 있었다고 보여지나, 결과적으로 항상 석방되었기 때문에 간과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전문가의 의무를 이행했을까? 팔친스키의 경우처럼 생사가 걸리지는 않았으나 지금도 동일한 딜레마가 경제적인 지위를 볼모로 남아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거리낌 없이 의견을 내겠지만, 솔직하게 말한다면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스탈린을 기술 도입의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측면에 대해 무지한 것으로 혹평하는 것에서 냉전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느껴지지만 팔친스키를 순교자가 된 불우한 예언가로 우상화하려 하지 않았던 저자의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의 선견지명에서 신화적인 분위기를 제거하려 노력한 저자의 노력은 사형당한 엔지니어의 걸출한 탁월로 실패해 보인다. 산업화에서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는 관점은 인적 자본 개념을 40년 가까이 앞지르며, 효율적이려면 행복한 노동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그가 살던 시대를 너무 앞질러 보인다. 가끔은 더 작은 산업체가 거대 복합체보다 효율적이다는 그의 입장에서 대기업들의 효율에 대한 미신을 반성하게 되며, 그의 신조인 엔지니어의 폭넓은 교육에서 우리의 교육정책을 재고하게 된다.


이 서평의 서두에서 한 질문으로 돌아오면, 이 책은 학문에서의 진보가 가능하더라도 이의가 없는 사회에서의 산업과 기술에서의 발전은 비효율을 낳도록 예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포퍼경의 전체주의보다 열린 사회가 우월하다는 결론은 반박을 압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나는 우리가 공학과 자연과학의 전문가들에게 열린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의 전문가들이 정치적인 견해를 발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면 공학과 자연과학 출신의 정치적 비판은 우리의 규범에서는 자연스럽지 않은 편이다. 물론 공학과 자연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정치나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반론이 가능하나, 이 또한 다른 우려를 낳는다: 우리는 미래의 공학자들에게 이 사안들을 충분히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서평을 번역해놓고 보니 제목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추가한다. 저자는 폭넓은 식견을 가졌던 팔친스키를 사형한 소련은 그의 원한에 홀렸다고 표현하였다. 책의 제목은 거시적으로 볼 수 있는 전문가의 필요성을 사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에 투영한 결과물인 것이다.


하나의 유령이 소련을 배회하고 있(었)다. 팔친스키라는 유령이.


그 유령은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는가?


The Ghost of the Executed Engineer (Reprint, Paperback) - 8점
Graham, Loren R./Harvard Univ Pr

  1. 내가 쓴 글을 내가 번역하니 무언가 기분이 이상하다. [본문으로]
  2. 영어 수사법의 특징은 동일한 말을 최대한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같은 수사법을 따를 경우 글이 깔끔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갖게 되므로 최대한 단일한 표현으로 번역하였다. [본문으로]
  3. 도치를 살리려고 살짝 무리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1. 얼마 전 과제로 "대통령 보좌관으로 빙의해 가계부채 대책을 세워와라"는 다소 답이 없는 질문을 떠넘겨받았다. 현대경제의 중요한 문제이긴 한데 나한테 뭘 바라는거야(...)


여튼 그래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그 중 문재인 후보가 내놓은 이자상한제(?)라 할 수 있는     해법이 눈에 들어왔다. 찾아본 자료와는 많이 상충되는 점이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랄까. 일단 다음은 한국은행에서 찾아본 통계들을 대충 정리한 것들이다. 한낱 과제로만 쓰기에는 좀 아까워서 여기에 올린다. 그래프는 귀찮으니 생략.


-가계신용은 2004년 이후 계속 증가 추세에 있으며 12’ 2/4분기에는 922.0조원(11’ 국민처분가능소득(개인) 대비 137%)으로 상승하였다. 가계신용 중 가계대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70%대에 머무르고 있으며 06’ 이후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한국은행, ECOS)


-2012년 8월 가계대출금액은 649.8조원, 그중 61.4%가 주택대출이다. 지역별로는 수도권이 415.2조원으로 전채 가계대출액의 63.9%를 차지, 그 중 269.0조원이 주택대출액으로 전체 가계대출금액의 41.4%에 이른다.(한국은행, 2012.10.9. 보도자료) 주택대출액은 07’ 4/4 이후 전체 가계대출금액의 61%선에서 유지되고 있다.(한국은행, ECOS)


-평균 가계대출금리는 5%에 표준편차 1.4%로-여신 중 금리 12%이상은 제외하였다.(12%이상의 비율은 2003년 2/4분기 이후 2%대 내외를 유지)- 08’-09’ 금융위기 이전의 기준금리와 보이던 차이로 수렴하고 있다.(원자료 한국은행, ECOS)


-주택담보대출의 비은행예금취급기관의 대출액은 예금은행 대출액 대비 21%(07’ 4/4)에서 27%(12’ 2/4)로 증가 추세에 있다. 주택담보대출은 총 주택대출액의 91.6%(07’ 4/4)에서 99.5%(12’ 4/4)로 주택담보대출이 주택대출의 대부분을 잠식하고 있다.(한국은행, ECOS)


-가계대출 중 비은행예금취급기관의 대출액이 2003년 이후 21%에서 29%로 증가 추세이다. 전체 가계대출은 매년 약 45조원씩 상승중이다.(한국은행, ECOS)


-주택매매가격은 08’-09’ 경제위기 이후 다시 상승하는 중이나 서울 아파트매매가격은 안정화되는 추세에 있다.(한국은행, ECOS)


-시간당명목임금상승률은 08’-09’ 경제위기 동안 감소하였다가 회복하였으나 유로존 위기와 맞물리면서 다시 하락하였다.(11’ 신분류 1.20%) 소비자물가등락률과 근원인플레이션률은 2011년 4.00%와 3.20%를 기록하였다.(한국은행, ECOS)


-현 통화금융지표 중 M2는 말잔 1,749,9조원 평잔 1,709.0조원(2011)이다. 가계대출금액의 대 M2 비율은 약 37%이며, 주택대출금액은 약 22%, 수도권의 주택대출금액은 약 15%이다.(한국은행, ECOS)


그렇다. 예상보다 평균가계대출금리는 매우 낮았다. 5%라니...[각주:1] 물론 이 값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높은 소득분위의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더 적은 금리에 빌리니 당연히 실제 중산층이나 저소득층이 견뎌야 하는 금리는 더 높을 것이다. 그런데 금리 표준편차가 1.4%라는 것은 모든 대출액의 약 90%가 7% 이내의 이자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푸아송 분포임을 감안한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을 듯 싶다. 이 대출액 90%가 전부 고소득층의 대출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건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이고. 물론 가계신용의 70%만 가계대출이고, 나머지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금리이다. 여기는 신용대출 등이 해당될 듯 싶은데 얘네들의 이자는 대출금리보다는 다소 높을 것이 뻔하고, 따라서 이자를 상한하는 정책이 소용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효용성에 의문이 가는 것은 사실.


다시 과제로 돌아와서, 가계대출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가계부채는 가계신용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멘붕하고는 하루 밤 꼬박 새 가며 통계자료 새로 찾는 수고를 했다. 의외였던 것은 시간당명목임금상승률. 평균적으로 9%를 유지하는 말도 안 되는 성장을 보여주었는데[각주:2], 이건 좀 비틀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위쪽의 임금 많이 나가는 짬찬(...) 직원들을 내보내고 신입사원의 낮은 임금을 바탕으로 높은 임금상승률을 달성했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면 통계에 잡히지 않는 무한야근(...)을 이용한 것이라던가 등 통계를 왜곡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많다. 실제 국민처분가능소득(개인)의 증감률은 6%대에 머물고 있으니 말이다. 조금 신기한 것은 국민처분가능소득(개인)의 경우 경제위기에 영향을 그리 많이 받지 않으며 성장했다는 것. 임금상승률은 경제위기동안 거의 0에 가까웠다. 경제위기동안 사장님들이 월급 대신 개인용돈을 늘이셨던 건가...


참고로 쓸모없어 보이는 M2와의 비교는 부동산 버블로 수도권 집값이 폭락한다면 대공황때처럼 은행 예금에 타격이 생길 것인가를 헤아려보려고 한 짓이다. M1은 너무 작고, M3는 은행 아닌 다른 경제 주체가 끼어드는 경우가 많아서 그나마 순수하게 은행 전체 예금의 크기라 추정해볼 수 있는 M2를 도입한 것. 15%면 작은 것은 아닌듯 싶다. 주식에서는 3%만 흔들려도 대격변이지 않던가.


다음은 대책. 대책을 세우라고 해서 세웠는데 너무 개판으로 세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다음은 분석 및 대책에 해당하는 내용.


-가계대출금리는 5%대로 소비자물가등락률과 근원인플레이션율보다 약 1% 높으며, 시간당명목임금증감률은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현재 매우 낮은 1.20%이다. 경제위기가 해소될 경우 시간당명목임금증감률이 다시 이전 수치를 회복할 것으로 보이나 가계신용이 개인 국민처분가능소득을 상당히 상회하고 있으며(137%) 상대적으로 금리가 낮은 가계대출이 전체 가계신용의 70% 정도만 차지하고 인플레이션이 4%로 상당히 높아 8%대 이상의 증가율을 회복하더라도 이 상태에서는 가계부채가 줄어들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가격상승이 거의 멈추어 버블붕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수도권의 주택대출금액이 M2 대비 약 15%이다.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이 폭락할 경우 은행 예금의 15%정도가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전도시주택매매가격등락률은 경제성장률과 큰 편차를 보이지 않아 버블 위험성은 적다고 판단된다.


-소비자물가등락률과 근원인플레이션률이 금융위기 동안 일시적으로 상승하였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를 높이는 정책은 가계대출금리를 높이는 상승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어 부적절할 것으로 예상된다.


-04’-06’년 부동산 붐이 불었을 때 가계대출이 급격히 상승하였다.(한국은행, ECOS) 가계신용중 가계대출의 비중이 이 기간에 가장 컸으며 가계부채 해법을 위해서는 버블을 키우지 않으면서 가격의 폭락을 막을 방법을 구상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많은 부동산을 가진 경제 주체에게만 구입을 억제하게 할 정책이 주문된다.


-기준금리와 가계대출금리의 차이가 아직 금융위기 이전의 값으로 완전히 수렴하지는 않아 가계대출이자 부담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금리의 표준편차가 1.4%로 분산이 커 이자가 부담되는 가계의 대출금리가 감소할지는 불확실하며 비은행예금취급기관의 가계대출이 증가 추세에 있어 금리가 금융위기 이전의 차이로 돌아가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나머지 가계신용의 30%에 해당하는 부문의 금리에 대한 자료와 소득분위별 평균가계대출금리에 대한 통계를 수집해 중산층 이하의 전체금리를 인하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경제위기 기간을 제외하면 시간당명목임금증감률은 가계대출금리를 상회하나 가계대출의 대국민처분가능소득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중산층 이하 가계소득의 증가로 가계부채가 부실화되지 않도록 하고 소득분위별 전체명목임금증감률에 대한 자료가 필요하다.


말 그대로 원론적인 대책. 쉽게 정리하자면 첫째, 부동산 버블이 터지지 않도록 받치되 커지지 못하도록 억제해야 함. 둘째, 이자로 인한 부채상승률이 임금상승률보다 크니 이자율을 최소화할 방법을 찾아야 함. 셋째, 임금상승률을 높여 가계에서 스스로 갚을 수 있을 여건을 만들어주어야 함. 누구는 저걸 해야 하는걸 모르나? 그리고 대책보다는 자료요구가 더 많다는게 함정. 현재 한국은행에서 소득분위별 대출액과 대출금리에 대한 자료는 수집하고 있지 않다. 금융감독원에게 물어보라는 것이 QNA 답변으로 달리는 상황. 기초적인 통계자료 자체가 부족하니 구체적인 대책을 세울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가 않는다. 그러고보니 '난 그러니 남들 발표하는거 엄청난 통계자료로 까 줘야지!' 생각하고서는 주 내내 잠이 부족했던지라 깔 건 안 까고 헛소리만 신나게 한 듯.




2. 페이스북이 워낙 쓰는 사람이 많다 보니까 무언가를 읽으면 페이스북으로는 공유하기 편한데 정작 블로그에는 올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내 블로그에도 바리케이트(?)가 쳐 지는 것이려나. 그냥 페이스북에 찌끄린 글 중 일부만 떼 오는 식으로 블로그 땜빵을 해야겠다. 간단하게 다섯 가지만.


느낌상으로는 geek가 덕후에, nerd는 오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타쿠라는 아직도 어느 정도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데 비해 거기서 파생된 위 두 단어는 그런 색채가 많이 빠졌지요. 특히 덕후의 경우 중립적인 의미로 쓰는 경우가 많아져서 딱히 부정적인 인상과 연관되어있다 하기 애매해졌구요. 물론 무슨 글자가 앞에 붙느냐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요(역덕-역사덕후-과 밀덕-밀리터리 덕후-의 느낌은 좀 다르죠)


이번 특집은 geek와 nerd의 어원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Dr. Seuss에서 처음 등장한 nerd라는 단어는 실제로는 털많은 작은 동물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Dr. Seuss는 Peter Rabbit처럼 엄청 유명한 동화 시리즈입니다. 대충 한국의 태권브이 수준의 인지도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전 모든 일러스트가 한 톤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책이었다는 기억밖에 없네요. 푸른 계열의 그림이었죠.


geek란 단어는 그보다 오래 된 단어인데, 닭머리를 물어뜯는 다소 그로테스크한 묘기를 하던 사람을 지칭했다고 해요. 물론 현대 기준에서야 그렇고, 그 당시 기준은 좀 다르겠죠. 당시 추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지금은 아름답게 여겨지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난 물리덕후란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리고 딱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_-;;;


"시험을 보는 것으로 먹고 사는 사람은 없는데 왜 우리는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가"

동영상 중간에 나오는 말. 시험을 위한 변명을 하자면, 어떤 능력이든 그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평가 기준이 정확해지면 그 능력을 잘 반영하다가 어느 선을 넘어서면 오히려 그 능력을 제대로 측정하지 못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중간쯤에 최고점이 있는 정규분포 곡선을 생각하면 얼추 비슷하다. 그 이유는 평가 기준이 명확할수록 편법이 증가하기 때문이라고. 영어시험 점수는 잘 받아가면서 정작 외국인 앞에서는 벙어리가 되는 사람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예전에는 수능이 고등학교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가'를 측정하는 시험이었다는 말이 기억나서 94년 수리탐구영역2 문제지를 한번 뒤적거려봤는데(2차) 수능 볼 일이 없다 보니 비교할 대상이 없어서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문제 13번-물 분자가 이산화탄소 분자처럼 직선일 경우 무엇이 변하겠는가-, 19번-주어진 순록 개체수 그래프를 해석하기-, 28번-주어진 지문을 읽고 이를 수식으로 나타내기-, 35번-경제 지표 변화 그래프로 행해진 경제 정책 추론하기(수리탐구영역이 맞다)-, 59번-칸트의 정언명령/가언명령 구분하기-이 눈에 들어오는데 확실히 내가 봤던 수능하고는 조금 다른 것 같네.


교육 이야기가 나와서 그냥 덧붙이는 말이긴 한데, 난 사실 주입식 교육이 그렇게까지 문제가 크다고 보지는 않는 편이다. 주입식 교육이 창의성을 억압한다는 주장은 사실 다른 방법으로 상상해보기 싫은 사람들의 변명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야 하려나. 사실 창의적인,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새로운' 생각은 머리에 들어가 있는 것이 더 많을 때 더 등장하기 쉽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새로운 생각이란 사실 새로운 생각의 '조합'인 경우가 많은데, 이 조합의 수는 기본적으로 조합할 것이 많아야 늘어나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머리에 지식을 우겨넣었기 때문에 새로운 조합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물론 문제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문제가 주입식 교육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배운 것이 있으면 그걸 이용해서 나름대로 세계를 재단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예전에 돌아다니던 짤방 중 칠판에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그려놓고 당시 한창 유행했던 원더걸즈의 텔미를 국어 교과서에서 고전시 분석하듯 분석해놓은 사진이 있었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진 사람들 눈에는 그거 할 시간에 문제 하나 더 푸는 것이 더욱 생산적으로 보인다. 사실은 그런 일련의 행위가 문화적 토양이 되고 사고력의 기반이 되는 것인데 말이다. 그렇게 '자신만의 생각'을 가질 기회를 박탈당하고 그것이 오래 이어지면서 버릇이 되면 흔히 개탄하는 창의성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난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특목고에 갔기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겁도 없이 마음대로 세계를 재량하는 특권(고등학생 지위를 생각해보면 이건 진짜 특권이다)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운을 다 소진한 덕분에 요즘은 깡통만 차는 것 같지만.


http://quantumfrontiers.com/2012/11/14/the-future-of-education/


참고로 위 글은 나중에 좀 더 긴 글로 정리해서 올릴 생각이다. 교육이 중요하긴 하고,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방법도 교육밖에 없기는 한데, 지금은 과잉교육이자 과소교육이 이루어지는 상당히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고등학생의 80%가 넘는 비율이 대학을 진학하여 쓰지도 않을 지식을 배우는 데 올인하는 것에서 과잉교육이고, 다양한 문화적 토양의 배경이 되어주어야 하는 기본교육이 주입식으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거름이 되기는 커녕 시험치고 나면 잊어버리는 것으로 평가절하되는 부분에서 과소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많은 지식을 우겨넣는 교육은 별로 문제가 없지만, 그 교육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오는 교육 현장의 구조에는 문제가 많다는 것이 참 애매하다. 상상력을 발휘할 숨통을 트여 주면 주입식 교육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주입식 교육을 효율적으로 하려면 생각하지 못하는 기계로 만들어주어야 하고. 적절한 균형이란게 존재하기는 하려나?


빅데이터란 말 그대로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방대한 양의 자료를 그대로 다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컴퓨터 계산능력이 발달해서 이제야 그 많은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겠다 싶은거죠. 다만 문제는 데이터들의 형식이 서로 일치하지 않아서 그걸 정리해주느라 손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통계를 낼 때 어떤 형식으로 할 것인가 표준을 정하는 것이 빅 데이터를 제대로 쓰기 위한 필요조건이 되겠지요. 이와 관련된 정책이 구상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네요.


THE SCIENCE : [기고/김성태]세상을 바꾸는 신(新)무기, 빅데이터


다음 글도 얼추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을듯 싶다. 아이추판다님의 프로젝트인: 

오픈 데이터베이스, 팁포레스트


‎"뒷동네 할아버지가 대통령이래요"

"아가야 그런 이상한 사람 말은 믿는게 아니란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말이 기억에 남는다. 지속가능한 발전이 문제가 아니라 초소비(hyperconsumption)가 문제라고. Affluenza라는 단어를 쓰며 소비에 대한 욕망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고 깐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그런데 인도의 모든 사람들이 독일 사람들처럼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 대기중에 산소가 남아나겠느냐는 말은 산소를 안 쓰는 자동차를 만들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해법이 있다. 그런 기술이 있는가와 그 기술이 도입될 수 있는가라는 난제가 남아있지만. 분명히 그런 기술이 있으면 석유회사들의 신나는 로비가 시작될거거든.


여튼, 앞으로 기술은 얼마나 깔끔하고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맞추어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 소비 자체는 줄어들기 힘드니 같은 오염을 두고 얼마나 더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집중해야겠지. 그것보다 누군가가 문명을 에너지 소비량으로 분류했었던 것 같은데(별이 생산하는 에너지를 단위로 썼다) 그게 누구였더라...??


The world's poorest president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라는 대책없는 낙관주의는 대책없는 예비 기술자인(예비 헛소리꾼일수도 있겠다만...) 나도 문제가 있다고 보긴 하는데, 기술은 계속 발전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우리는 에너지를 더 많이 쓸 것이다. 기술이란 마약과 같아서 한번 쓰면 더 강한 것을 써야만 하는 법이니까. 최악인 것은, 기술을 끊으면 그 금단증상으로 죽는다는 것. 이제서야 '자연으로 귀화하라' 이딴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은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소로우가 월든에서 자연과 함께 잘 살았다고 하더라도 도시에서 지속적인 수혈을 못 받았더라면 늑대밥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삼시세끼'라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최근에 만들어졌다는 내용입니다. 산업화 이후 오전부터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버틸만 하도록 먹기 시작한 것이 아침이고 점심은 양차대전에 배급이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거기에서 영향을 받았다네요. lunch가 nuncheon이라는 끼니 사이에 먹는 간단한 음식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말도 나오는데, 원래 점심은 마음에 점을 찍는 간단한 식사였다는 것도 생각납니다. 그리고 역시 헷깔리는 dinner의 사용법도 언급됩니다. supper라는 저녁식사를 의미하는 단어가 있어서 dinner는 점심을 의미하기도 하고, 저녁을 의미할 땐 lunch가 점심이 되죠. dinner는 만찬에 가까운 의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The myth of breakfast, lunch and dinner


BBC 앱을 주로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동일 종류의 앱은 하나만 깐다는 암묵적인 규칙으로 스마트폰을 굴리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신문사를 좀 균형있게 보려면 두세가지는 깔아야 할텐데 그건 규칙에서 벗어나니까. 왜 하필 BBC냐 하면 영국에서 살았던 경험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검색하니까 제일 먼저 튀어나와서(...)가 크다. 특집 기사 위주로 보게 되는데 만족할만한 수준의 특집을 지속적으로 공급해주기도 하고.




3. 스웨터 사고 싶다. 상의의 80%가 셔츠인데 지금 가진 모자가 스웨터에만 어울려서 겨울에 따뜻하게 다니질 못하고 있다. 원래 추위 잘 안 타긴 하지만 그래도 좀 더 따뜻하게 다니면서 스타일 살릴 수 있으면 더 좋잖아? 그런데 난 돈이 없네. 난 안될꺼야 아마 ㅠㅠ


이렇게 된 이상 모자를 산다!...는 따뜻한 모자도 비쌈 ㅠㅠ

  1. 얼마나 낮은거냐면, 인플레이션이 4%대이다. [본문으로]
  2. 경제위기 기간 동안은 예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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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발단 : 「W 이론」의 창시자 - 서울工大 李冕雨 교수의 경고
부제 - 理工系 기피 현상은 한국이 조선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 (월간조선)

2004년 글. 자주 들르는 커뮤니티에 올라왔길레 짧은 감상평.

1. 기술은 중요. 자원이 없으면 희귀한 기술이라도 가져야지.
2. 이공계 답이 없는것도 정답. 그런데 이 문제는 복합적인 거라서 이공계 input이 과도하게 많다 + 위에서 기술의 중요성을 모른다 두가지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3. 기술도 중요하긴 하지만 더 쉽게 먹고사는 법도 있다. 문화. 물론 문화를 뒷받침할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각주:1] 근본적으로는 기술이 문제라고 볼 수 있을지도.

1, 2번은 대충 넘어가고, 3번은 이런 것이다. 잘 만든 영화 한편 팔아먹으면 자동차 수십만대를 팔아도 별 볼일 없어 보이게 만드는 것이랄까? 영화는 나름대로 잘 나가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문학을 생각해보면 정말 답이 없다. 우리는 브라질의 소설을 서점에서 돈 주고 사 읽는동안(대표작가 파울로 코엘료) 브라질의 사람들은 대한민국 소설가의 소설 제목을 알기나 할까? 미국이나 서유럽은 세계경제의 틀을 짜는 문화권이니 그쪽에서 우리를 전혀 모르는 것을 그렇다 치더라도, 브라질 정도면 대한민국하고 대충 경제/문화수준은 비슷할 것 같은데.[각주:2] 옆나라 일본은 일단 경제수준의 차이가 크다고 하더라도 1Q84가[각주:3] 영문위키백과에 등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일본 문학쪽은 꽤 잘 나가고 있는 것 같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긴걸까?

사실 이런 이유는 만들어서라도 댈 수 있다. 이미 후발 주자가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선도그룹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서일수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는 패배주의자들이 말하는 국민성도 댈 수 있다.[각주:4] 하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경제적인 여유.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 출발한다. 미친듯한 입시경쟁도 결국 '대학 못 들어가면 거지 꼴을 못 면하니까' 그런 것이고, 인문학과 순수과학이 고사하다 못해 화석까지 증발해버릴 정도인 이유도 '그거 전공해서 거지 꼴을 못 면하니까' 그런거다. 어떤 의미로는 마르크스가 말한 '경제적 토대가 사회를 규정한다'(맞나?)가 정확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결론은 아직도 틀렸다고 생각하지만.[각주:5]

결국 나는 좀 더 많은 임금인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부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모두가 야근없이 일주일에 8시간씩 5일 일하고 취미 하나에 몰두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적어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제수준을 생각해 볼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닐까?

뭐, 어차피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거울 속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작년에 신입사원 연봉을 얼마나 깎았더라?
  1. 인터넷이 대표적인 예이겠지만, 산업혁명 이전이라도 기술은 문화의 형성에 매우 중요했다. 예컨데 우주를 정교한 시계에 비유하는 세계관은 기계적인 시계가 없었다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고, 세계관은 문화의 가장 큰 중심축 중 하나이다. 더불어 도시가 형성될 수 있는 각종 기술들이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삶은 현재와 매우 달랐을 것이다. [본문으로]
  2. GDP에서는 밀리지만 1인당으로 따지면 월등히 앞선다. [본문으로]
  3. 읽어보진 않았지만 광고를 찌라시 뿌리듯이 하니 모를 수가 없더라 -_- [본문으로]
  4. 사람이 달라야 얼마나 다르다고 그런 소리를 해 대는지는 모르겠다. 문화가 다르다는 것은 납득이 가기는 하지만 문화야 바꾸면 되는거 아닌가. [본문으로]
  5. 요즘 책을 읽다가 보니 내가 공산주의에 대해 오해했었던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결국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개인적인 재산과 생산에 사용되는 자본을 엄밀히 구분할 수 있을까? 미래에 기술이 발달하면 한 사람이 하나의 공장만한 생산성을 갖추게 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고, 그가 그렇게 미사여구로 극찬하던 공산주의 세계는 헌법을 뒤적거리지 않는 한 복지가 매우 강화된 자본주의 세계와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덱스터

2009. 9. 23. 20:37 Daily lives

우와아

이벤트 당첨이라니!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까요?> 이벤트 당첨자 발표

제 댓글은 상당히 비관적(?)이었는데 말이죠....

오호, 재미있을 것 같지만 문제는 수업이...-_-;;;

----------------------------------------------------

우울하게 예언하면 기술로 인해 개천에서 용 솟을 구멍이 더 작아지겠고 낙천적으로 예언하면 기술로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겠지요. 사실 둘의 모습이 중첩된 양상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높지만....

기술이 발전하는만큼 시민사회의 기술에 대한 통제력과 이해가 발달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만큼 기술과 사회를 잇는 사람들의 중요성이 부각되겠지요.

헛소리를 해야 댓글이 재미있는데 너무 재미없는 소리만 했네요 -_-;;;


사실 대단히 '일반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야 따로 놀고 있지만, 20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기술-과학-인문학 이 셋은 서로 주고 받으면서 진화하는 관계였거든요.[각주:1] 가장 쉬운 예시라면 인문학에서 사람과 우주의 본성에 대해 서술할 때 그것을 당시의 기술로 묘사했다는 것이 있겠구요.(기계적인 운명론이라면 항상 정교하게 만들어진 시계가 세계에 대한 묘사로 등장했었지요)

굳이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개천에서 용 솟을 구멍이 작아진다는 것은 기술에 대한 접근도의 편차가 매우 커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당장 보아도 시골과 도시의 인터넷 연결 속도 사이에는 넘을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기술의 차이가 커 보았자 어느 정도 인간의 능력으로 그 틈을 메꾸는 것이 가능했던 고대사회나 중세사회와는 달리, 현대사회에서는 기술의 차이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격차를 만들어주고 있으니까요. 칼을 든 사람과 주먹밖에 없는 사람의 싸움에서는 주먹만 가진 사람이 높은 수준으로 무술을 연마하면 칼 정도는 쉽게 피하고 제압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제 아무리 암산 트레이닝을 받은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계산기 하나 든 사람의 계산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의료보험제도가 열악한 편인 미국에서 자금의 유무가 의료기술과 접촉할 권리로 치환되는 것이 한 좋은 예이겠지요.

기술은 보통 '상상을 현실로'라는 모토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지요. 순식간에 수많은 계산을 해내는 컴퓨터도 따지고 보자면 '순식간에 탄도의 궤적을 계산해주는 기계는 없을까'라는 상상에서 나타난 것이고, 로켓은 당연히 '저 별들 사이를 날아다닐 수 없을까'라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휴머노이드 로봇의 '인간이 아닌 인간'에 대한 상상처럼 현존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생각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기술은 끝없이 진보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모든 이들의 상상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기술이 나아갈테고, 누군가 조금이라도 위험한 상상을 하면 그 상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컨데 누군가가 자기의 짝사랑의 생각을 알고 싶어 사람의 감정을 읽는 기계라도 개발된다면, 꼭 누군가는 그 기계를 이용해서 사람을 통제할 수는 없는가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기에 기술이 개발되면 그 기술은 무슨 내용을 골자로 하고, 어떤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 전반적인 논의가 꼭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냥 미친듯이 기술을 개발해 놓고, 그 기술을 어떻게 쓸 것인가 소수의 사람들이 결정한다면 민주주의는 왜 채택한 건데요.

뭐, 그나저나 상품이 오면 펜이 하나 늘어나는군요 -_-+
  1. 지금도 기술-과학의 연결은 상당히 강력하지만, 기술-인문학이나 과학-인문학의 연결은 상당히 느슨해져 있습니다. 당장 문이과 나누어 가르치는 것부터 보세요.(그런데 생각해보면 자연과학은 공학보다는 문리쪽에 가까운데 말이죠. 대상만 같을 뿐, 접근하는 이유와 방법은 문과와 같다고 보아도 좋으니까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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