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뉘어진다. 눈을 아프게 하는 영화와, 머리를 아프게 하는 영화. 본인은 단순해서 눈이 아플 정도로 불꽃이 화려하게 튀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머리를 일부러 아프게 하는 악취미도 있어서 오랜만에 머리를 굴려 보려고 한다.
필자는 트랜스포머 1편을 못 보았다.[각주:1] 영화관은 부르주아의 사치정도로 취급하는 것도 있지만(필자의 지갑은 신분증으로 두껍다) 굳이 영화관까지 가서 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줄여서 그냥 '귀찮다'. 그래서 본인에게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눈을 아프게 하는 것이 목적인 영화를 두고 머리를 아프게 하려는 것은 아마 드문 경험에 대해 마땅히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 엉뚱한 방법으로 그 불쾌함을 분출하려는 것일까? 알 수는 없지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으면 전투(?)는 끝을 맺어야 하므로 눈과 더불어 머리까지 아프도록 노력해 보자.
참, 스포일러 우려가 있으니 아래는 영화를 본 이후에 보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스포일러 따위가 불가능한 단순한 영화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0. 패자의 역습
원제는 Transformers : Revenge of the Fallen이다. 영화에서 Fallen은 로봇의 이름이다. 그리고
fall이라는 중학생 급 단어에는[각주:2] 무너지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the Fallen은 영어의 특징으로 볼 때 '무너진 자' 즉
'패자(敗者)'를 의미한다. 부제인 '패자의 역습'은 영화 속의 로봇 폴른의 복수를 주된 이야깃거리로 삼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이름은 매우 많은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다. 무너진 자 혹은 몰락한 자. 무엇이 무너지고 무엇이 몰락했단 말인가? 영화 속에서 로봇들의 지도자들이라 할 수 있는 프라임들은 '태양을 파괴하여 에너지를 얻는 기계'들을 사용할 때, 주변 행성에 생명체가 살고 있는 경우 그 기계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폴른은 그 원칙을 무시하고 기계를 사용하려 했으며, 그것이 다른 프라임들이 폴른을 가두도록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fallen은 무너진 원칙과 몰락한 도덕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영화 초반부에서 '옵티무스 프라임'은 죽는다. 싸움에서 패배하고 만 것이다. 패자(敗者)는 옵티무스 프라임인 셈이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서 옵티무스 프라임은 다시 일어서고, 부도덕한 폴른을 응징한다. 더 적당한 '패자의 역습'은 없다. 물론 옵티무스 프라임의 역습에 복수(revenge)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번역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중의성이 번역자들의 노림수였는지 아니면 단순히 복수보다는 역습이 멋져 보여서 선택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본인에게 그 문제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명쾌한 사실이다.
1. 정의는 우리가 지킨다(?)
대개 눈이 아픈 영화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정의는 승리한다.'블록버스터급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은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한데,[각주:3] 이 영화 또한 그 불변의 법칙을 피해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의와 불의는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으로 깔끔하게 구분되어 있다. 폴른을 따라가는 디셉티콘 군단과 그에 맞서 싸우는 옵티무스 프라임의 오토봇 진영.
이것이 전부였다면 이런 이야기를 꺼낼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오토봇과 함께 디셉티콘 군단에 맞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다. 미국인.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동양인은 없다.(뭐, 일단 놀고 있는 곳이 놀고 있는 곳이니만큼 동양 사람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놀이터라는 것 정도로 이해하자.)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중동의 사람들(아랍인으로 통칭되는 것 같지만)이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들은 엑스트라이다. 잉여 역할을 맡는 것이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의 역할이다. 중간에 등장했던 중동 어느 국가(미안. 까먹었다.)의 군대(기껏해야 헬기 두대 -.-;;)는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산산조각나고, 그렇게 무너진 군인들은 미국인 학생에 의해 구조된다.
현실은 신발의거
뭐, 미국이 힘이 세긴 하지만(그래서 못미더워도 미사일로 쿡쿡 찌르기 전에 몸음 움츠려주어야 하지만) 미국이 정의 그 자체인 양 휩쓸고 다니는 모습은 그다지 아름다운 풍경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할리우드와 함께 전파되고 있는 '우왕ㅋ굳ㅋ 미국은 정ㅋ의ㅋ'라는 선전활동에 이 영화는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다.
2. 정의를 지키는 은둔자들
눈여겨볼 두번째 항목은 오토봇과 함께 디셉티콘을 싸우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이 사람들은 숨어서 활동한다. 왜 정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죄다 숨어서 활동해야 하는 것일까? 암행어사 역할이 그렇게 매력적이던가? 영화 맨 인 블랙(Men in Black)에서도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검은옷의 사나이'들은 항상 뒷수습을 하며 사람들의 기억을 지운다. 많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정의의 사나이들은 배트맨처럼 어둠 속에서 그림자를 벗으로 하여 검은 비수로 흑색 밤하늘보다 어두운 악을 처단하고는 암흑 속으로 사라진다. 또, 얼굴을 대놓고 드러내는 슈퍼맨과 같은 정의의 사나이들조차 현실세계에서는 자신의 연인 말고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도록 비밀을 지키는 데 집중한다. 뭐, 자신의 연인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정의와는 거리가 멀지만,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Mr. and Mrs. Smith)의 경우에도 자신의 배우자가 하는 일을 생각조차 못 했던 것처럼.
현실 세계로 돌아와 보자. 현실 세계에서 정의의 가장 가까운 벗은 경찰이다.(물론, 지금의 경찰이 그런지는 매우 의심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모든 정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있다. 정의의 기준이라고 할 법은 폐쇄되어있지 않다. 오히려 만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법을 쉬운 말로 바꾸는 작업마저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정의는 개방적인 것이다. 은폐되어있는 정의란, 적어도 우리의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잠시 공개가 보류되어있는 정의가 존재할 뿐.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는 정의로운 친구들은 우리의 사회가 갖지 못했기 때문에 욕망하는 어떤 것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의의 실현. 정의는 얼핏 보면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기도 하다. 심심하면 들려오는 탈세와 부정부패, 그리고 섬뜩한 살인사건들은 우리가 전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친구들도 평상시에는 일반인에 불과하다
세상은 바르지 못하다. 하지만 정의는 승리한다. 그렇다면 이 상반되는 현상을 잇는 결론은 하나다. 보이는 것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부분의 영화에서 정의로운 자들이 자신의 지위를 숨기는 이유일 것이다. 내가 알지는 못하지만, 정의는 승리하고 있다는 믿음인 셈이다.
또 다른 가설로는 감정이입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영화 속 주인공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자신의 약점이 아닌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보통 즐겁다. 더군다나 그것이 자신에게 유리한 비밀이라면 즐거움은 배가 된다. 사람들이 음모론에 심취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신과 영혼은 보이지 않지만 즐거움을 준다. 보이지 않는 정의. 남들은 모르지만 나는 비밀스럽게 알고 있는 것. 여기에 '비밀스러운 결사단'에 대한 열광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3. 생명은 귀중하다(?)
프라임들이 동력을 얻는 기계는 태양을 파괴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태양이 내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생각해 볼 때 그 발전기(?)는 엄청난 에너지를 손쉽게 제공해주는 꿈의 에너지원인 셈이다. 하지만 원자력처럼 꿈의 에너지원 또한 문제젬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태양이 파괴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이 파괴되어 버리면 그 태양계의 모든 생명체는 무생물로 환원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프라임들은 매우 자비로웠던 모양이다. 생명체가 있는 태양계는 건드리지 않는다니.
그리고 폴른은 그 우둔함(?)을 타파하기 위해 자기가 직접 그 기계를 작동시키겠다고 선언한다. 물론 여섯 프라임들이 그를 제압하고 기계의 전원(?)과 함께 사라지기 전까지 그 계획은 잘 유지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 어찌되었던 프라임들은 대단한 녀석들임에 틀림없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면 다른 생명체를 어떻게든 파괴하려고 안달난 인간이라는 생명체들마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니 말이다. 그래도 그들이 하면 전종의 멸종이 아니냐는 반문에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그거랑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답문을 하기로 하고, 여기에 깔려있는 기반을 살펴보자. 생명 존중이다.
생명은 귀중하다. 존재하기 쉽지 않은 형태의 자연현상이기 때문이다. 마치 탁해져 더 이상 무지개가 뜨지 않는 서울의 대기에 홀연히 나타난 무지개처럼 말이다. 희귀성 때문에 귀중한 예는 수없이 많다. 다이아몬드, 금, 운석, 월석, 화석 등. 하지만 이들 모두가 생명과 동등한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렇게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왜?
생명의 존재는 너무나도 과평가된 현상이다
생명 그 자체는 상당히 희귀한 현상임은 분명해 보인다. 일단 우리 주변의 일곱 행성만 돌아보아도 생명은 우리 주변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주로 쏘아올린 무생물들의 도움을 받아 바라보는 우주에서 생명은 정말 찾기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희귀한 것이 가치있는 것인가? 꼭 그렇지도 않다. 우리는 정신적 돌연변이들이 길거리에 쏘아다니는 것을 절대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각주:4]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크게 세 특징을 가진다. 외부세계에 대해 반응, 에너지대사, 자기재생산. 반응은 말 그대로 외부세계가 변화하면 행동방식을 변화함을 의미하고, 에너지대사는 쉽게 말하면 무언가를 먹고 똥을 만드는 기계라는 말이고, 자기재생산은 어떤 과정을 통해 자기와 닮은 개체를 다시 세계에 내놓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체는 모두 저 조건을 만족한다(비록 바이러스와 같은 몇몇 경우 그 언저리에서 버벅대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생명의 조건을 전부 만족하는 로봇을 말이다. 지구가 멈추는 날(The Day the Earth Stood Still)의 고트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 영화에서 수많은 작은 기계들은 말 그대로 무엇이든지 먹어치우고 자기 자신을 복제해낸다. 우리는 이를 생명체라고 부를까? 아마 '유기물로 이루어져야 한다'라는 독특한 기준을 끌어들여 어떻게든 차별화하려고 할 것이다. 인류학자들이 동물과 인간의 인지능력을 구분하기 위해 이상한 기준을 계속 덧붙이는 것처럼.[각주:5]
가치는 부여된다. 원래 가치는 평가자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왜 생명이 귀중하다고 평가하고 있을까? 말 그대로 우리 자신이 생명체이기 때문에? 뭐, 자기합리화도 나쁘지는 않은 결론일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Matrix) 시리즈는 독특한 일례이다. 물론 여기서도 '정의는 승리한다'는 법칙은 깨지지 않지만, 모호하게 성립된다. 인류와 기계의 휴전은 차라리 '정의는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패배하지 않는다'에 가까워 보인다. 영웅의 서사시라는 구조 때문에 그런 것일까? [본문으로]
문제는 청와대에 하나가 기어들어간 것 같다는 것 정도. 아니, 여의도에도 상당수가 가 있구나. [본문으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동물의 지능에 대한 특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동물학자들은 인류학자들이 인간의 인지능력에 대한 정의를 계속 바꾸어서 어떻게든 동물이 그 능력을 갖지 못하도록 노력하는 것 같다고 읽었던 기억이 남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