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지우는데 사용하는 물건이라는 뜻을 가진, '지우다'라는 단절을 상징하는 어원 때문인지 몰라도, 약간은 슬프게 느껴지는 단어. 난 이런 지우개를 닮고 싶다. 물론, 슬픈 운명을 가진 어느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지우개야말로 성자의 본성을 눈으로 보여주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 지우개는 그 어떠한 것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어릴 적 지우개는 수많은 이름들과 낙서들로 가득 차 있었던 장난감이었다. 하지만 매번 공들여 그렸던 지우개의 낙서라는 이름의 상처들은 어느 순간부터 뭉개지더니, 결국 나중에 가서는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지우개는 마음 속에 무언가를 잘 담아두지 않는다. 또, 이렇게 마음 속에 잘 담아두지 않는다는 성격은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과도 닮았다. 이름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뭉개진 얼룩만 남은 주인없는 지우개가 교실 바닥을 배회하는 장면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1주일에 한번씩은 겪는 일이었다.(지우개를 잃어버린 학생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주인이라는 구속을 버리고 떠나가는 이름 지워진 지우개처럼, 마음에 무언가를 담아두지 않는 사람들은 자유롭다. 나는 어떤 낙서로 상처받더라도 결국 그 상처는 사라져 버리는 하얀 플라스틱 지우개처럼 마음이 바다같이 넓은 사람이, 주인의 이름을 지우고 여행을 떠나는 흰 고무지우개처럼 어디에도 쉽게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또, 지우개는 비밀을 감춰줄 줄 아는 진정한 친구이다. 우리가 지우개를 찾는 때는 실수를 했을 때이다.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필요할 때가 되서야 찾고, 또 필요가 사라지면 가차없이 구석으로 보내버리지만 지우개는 불평 한마디 없이 도와준다. 가출한 아들이 돈이 떨어져 터벅 터벅 집에 돌아오더라도 언제라도 팔을 벌려 맞아주시는 아버지처럼(물론 그렇지 않은 아버지도 있지만 쓸데없는 시비는 피하자.) 지우개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되어주는 고마운 친구이다. 진정한 친구는 세계가 나에게 뒤돌아 섰을 때 나를 향해 서 주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지우개는 언제라도 자신의 편에 서 주는 진정한 친구이다. 또, 지우개는 종이의 아픔을 자신의 살을 깎아가며 가려주고 둘만의 비밀로 간직해준다. 자신의 살을 깎아가면서까지 타인의 슬픔을 위로해줄 수 있는 친구. 난 나의 친구들에게 이런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
지우개라는 녀석, 알고 보면 참 좋은 녀석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차갑기 그지없지만 사실 속은 매우 따뜻한, 속마음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지우개. 연필의 꽁무늬만 쫓아다닌다고 불평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연필을 도와주는, 그런 겉과는 달리 속이 따뜻한 지우개. 난 지우개처럼 넓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고향같은 친구가, 차가와 보이지만 속은 따뜻하기 그지없는 친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