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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20 한 수업시간의 꿈
데카르트는 수학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기하학과 대수학이 하나로 합쳐지는 그 위대한 발견이 겨우 부록 따위로 여겨지는 그 유명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cogito ergo sum". 아무리 고찰해 보아도 고찰하고 있는 어떤 무언가가 존재해야만 하는데, 그 존재가 내가 아니면 무엇이겠냐는 말이다.

물론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는 이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지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하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무언가는 이 감각에 대해 회의하고 있고 또 지금 이 잡다한 생각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그 무언가가 "나"라고 확언하는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그 무언가를 나라고 확언하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등골을 타고 뒷골을 강타했다.

"으앗 차!"

얼떨결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하고 있다. 이거 또 독서실에서 소리지르는 어떤 무개념이 또 나타났다며 성토하는 게시글이 학교 커뮤니티를 도배하겠군.

"쉬잇!"

참 잘도 조용히 시킨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크게 소리지를 줄은 몰랐나 보다. 얼굴에 당당히 당황한 표정을 드러내다니. 목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말했다.

"네가 그렇게 갑자기 차가운 캔을 대지만 않았어도 조용했을 거거든?"

"눈 앞에서 손을 몇번이나 흔들었는데 정신을 못 차려? 도대체 뭣에 그리 넋이 팔린거야?"

"숙제"

책상 위에는 깨끗한 미적분학 책과 공식이 이리저리 흩어진 A4용지가 널부러져 있었다. 벡터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에 써먹는 물건인지 모르겠다.

"이거 기한 지난건데?"

맙소사.

"그보다 빨리 짐 챙겨. 다음 수업 지각하겠다."

"지각하지 뭐."

"지각하면 F인데?"

응? 지각하면 F라니, 그 수업은 화요일에 있는데? 그리고 오늘은 월요일...잠깐. 황급히 손목시계를 보았다. 요일을 가리키는 바늘은 무심히 TUE라는 글자를 향해 서 있었다.

"으악!"

또 모든 독서실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오늘 밤 게시판 다운되겠군.



"42번 또 지각인가? 옥세화 지각..."

"아직 아닙니다!"

문을 박차고 들어서며 헐떡거리는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외쳤다. 시계를 보니 2시 29분. 아직 수업 시작 1분 전.

"...은 아니군. 자리에 앉기 전 30분이 되지 않는다면."

시계의 숫자는 2:29:54. 꽤 많은 계단을 뛰어올라왔던 다리는 내 자리까지 다시 뛰어야 했다. 독서실에서 깨워주는 친절함을 보였던 재현이는 먼저 가겠다면서 같이 가자는 내 절규를 무시하더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 태평히 옆자리에 앉아있다. 병주고 약주고도 아니고 야속한 녀석.

"자, 수업 시작. 294쪽. 3부 열역학이다. 설마 1권 가져온 사람은 없겠지?"

설마가 사람잡는다. 급하다고 집히는대로 들고 뛰어왔더니 2권이 아닌 1권을 가져왔다. 옆자리에선 당연하다는 듯 2권을 꺼내며 날 한심히 쳐다본다. 네가 날 그렇게 놀래키지만 않았어도 제대로 들고 왔을 거거든? 임시방편으로 맞는 책을 가져온 척 1권을 펼친다.

"열역학은 원래 물리와는 전혀 다른 분과에서 시작한 학문이다. 현대 학문 체계에서 초기의 열역학과 가장 가까운 학문은 화학이다. 옛날 사람들은 열의 원인을 칼로릭, 번역하자면 열소,의 운동으로 여겼다는 사실이 이를 잘 드러낸다. 열역학이 물리에 편입되게 된 배경에는 ..."

너무 뛰었더니 졸리다.

"... 물질의 합성비가 ... 원자설이 ... "

눈이 너무 피곤하다. 눈만 잠깐 감자. 잠은 안 잘거다.



깜짝이야. 흰 바탕 위에 검은 글씨가 마구 흩날린다.

'분자 하나 하나의 위치는 완전한 우연을 이룬다. 분자는 상자의 모퉁이에 있을 수도 있고, 한 가운데에 있을 수도 있으며, 벽의 정 중앙에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분자가 한 위치에 모여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개별적으로는 우연에 속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필연인 것이다."'

전공 책을 읽는 기분이다. 내가 이런 책을 읽을 리가 없으니 현실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자각몽인가?

 '갑자기 예전에 읽었던 어떤 작가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그 인터뷰어가 이야기를 쓸 때 어디까지 이야기를 구상해 놓느냐고 묻자 인터뷰이는 이렇게 대답했었다.「커다란 흐름만 잡아 놓고 나머지는 손 가는대로 씁니다. 이야기 자체는 정해져 있지만, 그 순간 순간을 표현하는 단어들은 순전히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적지요. 이전에 실수로 잃어버렸던 원고를 다시 쓴 적이 있는데, 나중에 초고를 찾아서 비교해보니 줄거리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글이 되어있더군요.」 이야기는 필연이지만, 단어는 우연이라. 전체는 필연이지만, 개별은 우연이라.'

그 작가의 인터뷰라는 것, 읽어 본 적이 있다. 뉴먼 로스라는 작가일 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갑자기 날 바라보면서 질문을 던진다. 나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던 나는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거기 멍때리고 있는 자네. 그래서 도입 된 물리량이 무엇이라고?"

다행히 별로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엔트..'

옆구리를 찌르는 손가락에 놀라 얼떨결에 일어서고 말았다. 꿈꾸고 있는데 찌르는 건 뭐람.

"일어서서 대답할 필요까진 없는데 그쪽이 편하다면 편한대로 하도록."

응? 찔린 방향을 쳐다보았더니 재현이가 입을 벙긋거리고 있다. 시간은 가고 있고, 무슨 질문인지는 모르겠고, 벙긋거리는 입을 보니 엔 무엇인지는 모르겠고. 일단은 한 글자라도 시작해 보자.

"엔...트.."

"...로피. 좋아. 졸아도 수업은 듣고 있네. 수업을 계속 진행하지."

얼떨결에 맞추었다.



수업이 끝났다. 다행히 다섯번째 지각은 면해서 F는 피했다만, 다음 번에도 늦지 않으려나 모르겠다. 천천히 독서실로 내려오는데 재현이가 뒤에서 따라잡았다.

"잘만 자던데 대답은 어떻게 또 한거야?"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조금 뜸을 들이고 대답해주었다.

"그냥, 그렇게 대답하면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아리송한 표정의 재현이를 남겨두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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