忘生舞

Writer/Short 2012.09.09 09:00

옛날, 아주 먼 옛날, 어느 마을에 착한 농부 하나가 살았어요. 농부의 아내는 일찍이 하늘로 떠나버렸지만 농부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답니다. 그 딸은 고운 마음씨와 아름다운 용모로 소문이 자자했어요.

 

시간이 흘러 딸이 결혼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 때만 노리던 수많은 청년들이 백리 밖에서도 모여들었지만, 그 누구도 농부의 눈에는 부족해 보이기만 했지요. 결국 그 청년들은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원래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시무시한 가뭄이 찾아왔어요. 논은 자라 등껍질처럼 갈라졌고 산의 나무들조차 넘치는 햇님의 축복으로 누렇게 시들어 버렸답니다. 가뭄은 끝나고 가을이 왔지만, 논에는 벼가 남아있지 않았어요. 농부는 겨울나기가 막막해 논 언저리에 걸터 앉아 한숨만 쉬곤 했답니다.

 

그렇게 하늘을 원망하던 농부에게 한 부자가 찾아왔어요. 부자는 농부에게 쌀을 빌려줄테니 내년에 동등한 양으로 갚으라고 말했어요. 농부는 망설였답니다. 그 부자에게는 나쁜 소문만 가득했거든요. 하지만 농부에게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답니다. 쌀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은 부자밖에 없었거든요.


그리고 다음 해가 되었습니다. 하늘은 작년에 지독했던 가뭄을 가져다 준 것이 미안했었는지 이번에는 엄청난 풍년을 이끌고 돌아왔어요. 농부는 신이 났답니다. 부자에게 빌린 쌀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신이 나 부자에게 갔던 농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어요. 부자는 작년에 빌린 쌀이 있었기에 올해 수확을 할 수 있었으니 올해 수확한 쌀을 전부 가져오라고 했어요.

 

농부는 부자의 마당 한 가운데에 멍하니 무너져 내려 있었습니다. 부자는 농부를 잠시 바라보았어요. 그러더니 부자는 마음을 바꾸었는지 이런 제안을 했답니다. 빚을 반으로 줄여줄테니 딸과 결혼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지요. 부자는 이제 땅마져도 꺼지는 것 같았지요.

 

절망한 농부는 집으로 돌아왔어요. 마음씨 고운 딸은 어두운 얼굴의 아버지를 그냥 둘 수 없었답니다. 딸은 농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요. 계속되는 질문에 농부는 부자가 한 말을 전해주곤 한숨만 쉬었어요. 올해 걷은 쌀을 모두 부자에게 주면 겨울동안 먹을 것이 없었으니까요.


딸은 잠시 생각하더니 단호히 말했어요. 결혼을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딸을 농부는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답니다. 결국 결혼식을 하는 날이 되어 딸은 시집을 가 버렸고, 농부는 매일 매일을 눈물만 흘리며 보냈답니다. 이웃이 매일 와서 밥을 해 주며 같이 먹어주지 않았더라면 농부는 굶어 죽고 말았을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농부 집 마당 한 가운데에 나무 한 그루가 자랐어요. 농부는 눈물을 마시며 자라난 나무를 보며 딸을 닮은 목상 하나를 만들기로 마음먹었어요. 아직 농부는 딸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었지요.


시간이 흘렀어요. 부자는 딸 말고 다른 여자에게 더 눈길이 가기 시작하자 딸을 쫓아버렸답니다. 갈 곳이 없어진 딸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왔어요. 묘하게 가슴뛰게 만드는 농부의 집 마당을 지나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선 딸은 그대로 굳어버렸어요. 거기에는 자신의 모습을 꼭 닮은 목상이 있었고 그 발치에는 끌을 쥐고 쓰러진 농부가 있었거든요. 딸은 급히 농부를 끌어안았지만 아직 따스한 농부의 몸은 숨이 없었어요. 딸은 울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도록 울고 난 딸은 목상에 입을 맞추곤 농부처럼 쓰러져 버렸지요.


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밥을 해 주러 온 이웃의 눈에는 차갑게 식은 농부가 보였어요. 그리고 농부가 만들던 목상도 보았고요. 목상은 아름다웠습니다.


이웃은 농부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는 목상을 가지고 장터에 갔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목상을 누군가는 살 테고, 오랜만에 집에서 쌀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확실히 목상을 들고 다닐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한번씩 돌아 볼 정도로 목상은 아름다웠어요. 이웃은 장터 한 가운데에 목상을 내려놓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목상을 두번 두드렸답니다. 장터의 모든 사람들이 돌아보았어요.


목상은 갈라졌어요. 그러더니 갈라진 표면을 따라 나무가 뱀의 허물처럼 허물어 내렸어요. 허물어 내리고 난 목상은 아름다웠어요. 그 찬란한 색에 모든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했답니다.


목상은 눈을 떴어요. 그러고는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어요. 그리고 나서 목상은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아름다운 춤이었어요. 너무도 아름다운 춤이었기에 사람들은 숨 쉬는 것을 잊어버렸지요. 사람들만 홀린 것이 아니었어요. 지나가던 동물들도 그 춤에 홀려 버렸답니다. 심장들은 뛰는 것을 잊어버렸어요. 뿌리들은 마시는 것을 잊어버렸지요. 모든 것이 고요했습니다.


춤은 부자의 집까지 계속되었어요. 춤이 지나간 자리에는 정적만 남았습니다. 언젠가는 그 정적들도 잊혀지겠지요.


그리고 춤은 영원히 이승을 헤메고 있답니다.




'아름다움이 살인무기가 될 수는 없을까'라는 망상에서 탄생한 설화(?). 미인계와 같이 아름다움이 파탄을 이끄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로 살인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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