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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25. 02:08 Writer

앎의 즐거움

예전에 '스펀지'라는 제목의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던 시절이 있었다. 새로운 지식, 일반 사람은 잘 모르는 지식을 주된 소재로 삼았던 프로그램이라 점차 소재가 고갈되어 인기가 사그러들었긴 하지만 '빛나라 지식의 별!'이라는 문구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나는 관대하다! 빛나라 지식의 별!

이런 프로그램들이 여태까지 많이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앎에서 일종의 즐거움, 그러니까 쾌감을 느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 공부는 지금과 같이 모든 학생들의 적이 아닌 유희의 일종이었다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앎의 즐거움이란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다. 넓은 의미로 살펴본다면 연예인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는 행위도 앎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비록 난 TV에 누가 나오든 '얼굴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에서 멈추지만.

그렇다면 이 즐거움은 어디에서 왔을까? 과제가 너무 많아서 하기 싫으니까 이런 생각만 하게 되는데, 일단 그런 현실은 전부 잊어버리고 이 즐거움의 뿌리를 찾아 삼만리 여행을 떠나보자. 먼저 확실한 사실은 지식이 많은 개체가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글을 쓰는데 무의식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 이 글에 인용된 글에서 말하길 지식보다는 추론능력이 중요했을 것이라고 하지만, 추론은 언제까지나 지식을 추상화하는 연장선에 서 있다. 결국 성인이 추론만 이용해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듯이, 어느 정도 충분한 양의 지식이 축적되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많은 문장을 접할수록 더욱 명문을 쓸 가능성이 높아지듯이, 대체적으로 많은 지식이 축적될수록 추론능력은 발전한다.

그렇다면 이제 진화심리학으로 돌아서 보자.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즐거움으로 기억하는 생명체는 생존에 유리하다. 이건 당연하다. 거식증에 걸린 사람이 오래 연명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연 상태에서 먹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생명체가 연명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수 많은 2세들이 생겨났을 때 앎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2세가 있고 앎에 의욕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2세가 있을 때, 생존에 유리한 2세가 자손을 남길 확률이 높으므로 자연적으로 앎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생명체가 세상을 가득 메울 것이다. 우리는 그 후손이다. 본능적으로 앎의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성 피드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식은 보상을 가져온다. 더욱 많은 지식은 더욱 많은 보상을 가져온다. 용돈을 더 많이 준다고 하면 공부에 열심인 것이 단순한 초등학생들의 세계 아니던가?(비록 많은 초딩들은 화내겠지만) 그런 간단한 사회 말고도 실제의 복잡한 사회에서도 기술, 노하우 등에 대한 지식은 확실한 보상을 가져온다. 괜히 많은 사람들이 자기계발서를 들춰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앎에 대해 보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조건반사라는 것이 생겨나게 된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종소리(지식)에 대해 침을 흘리는(쾌감을 느끼는) 것이다.[각주:1] 앎의 즐거움은 본능적인 데다가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즐거움인 것이다.



'이야기'라는 대상도 이런 관점의 연장선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것, 그러니까 지식을 나눈다는 것이다. 이 논리를 따라간다면,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은 앎의 즐거움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논의까지 하자니 과제가 기다리고 있어서 일단 여기에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쾌감이라는 것을 생각하다 보니 떠오른 것인데, 앞으로 문화산업(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절대로 무너질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늙은이들이나 할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현대 사회는 보다 쾌락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중세 시대에 원나잇이란건 교회 앞에서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존재하기는 하지 않던가? 성에 대한 쾌락이 이렇게 발전(?)했다면, 앎에 대한 쾌락도 또한 비슷한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으리라는 근거는 없다. 거기에다가 앎에 대한 쾌락을 부정하는 사상은 여태 존재한 적이 없지 않던가?

그런데 우리나라는 삽질에 올인하잖아? 우린 안될꺼야 아마
  1. 정확히는 '앎에 대한 충동'이 더 올바를 것 같지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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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08. 9. 19. 18:05 Interests/Photos

도서관

김정욱, Shelves of crystals,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2008

지식의 결정들이 놓여있는 이곳에 올 때마다 난 시간이 정지함을 느낀다.
지묵으로 굳어진 지식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닳아 사라지겠지만, 땅속의 수정들이 자라는 것처럼 이들도 점차 자라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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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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