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9. 25. 22:05 Writer

글을 쓴다는 것

사람들은 글을 쓴다는 것을 종이라는 그릇에 먹으로 정제된 생각을 집어 담는 것으로 생각한다. 분명히 걸러지고 또 걸러져서 잘 정돈된 생각을 담은 글은 향기가 난다. 하지만 낙서처럼 휘갈겨 댄 글들은 시궁창에나 어울리는 글들일 뿐일까? 물론 그런 글들은 대부분 눈이 썩어들어갈 것만 같은 쓰레기들이기는 하지만, 잘 찾아보기만 한다면 가공되지 않은 원석을 찾을 수 있다. 300년간 수학자들을 괴롭혀 온 어느 책 귀퉁이의 낙서가 그러한 원석의 하나이고, 절망에 젖어 길을 걷다가 의자에 걸터앉았을 때 엷은 가로등 불빛에 비친 한줄의 희망적인 글귀가 그러한 보석의 하나이다. 무심코 써낸 글이 꼭 나쁜 것은 아닌 것이다. 생각해 보건데, 생각을 거르고 걸러서 씌여진 글이라도 향기 아닌 향기가 나는 글도 있었다. 결국, 글이 생각을 거를수록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대한 착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무엇이 좋은 글을 만드는 것일까? 그건 생각의 깊이가 아닌가 싶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 그것이 내면화되어 굳어진다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도 스쳐지나간 한 방울의 향수와 같은 진한 향기를 내뿜을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을 아무리 거르고 거르더라도 원래 가졌던 생각이 인분과 같다면 악취를 풍길 수 밖에 없다. 예전에 컴퓨터를 공부하면서 배웠던 GIGO(Garbage In Garbage Out)라는 단어는 전자회로뿐만 아니라 뇌 속의 사고회로에도 적용되는 것이다.[각주:1]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의 깊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의 깊이를 깊게 할 수 있을까?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을 넓히는 것이 답일까? 많은 사람들은 많은 지식이 깊은 사고를 보장해 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생각의 깊이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지식은 분명히 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언제까지나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세계는 마치 흐린 공과 같아서, 그 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공 안에 들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세계에 대한 이해이며, 지식은 이 세계라는 공을 바라보는 시점을 많게 해 주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방향에서 공을 바라본다면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좀 더 자세히 볼 수는 있겠지만, 결국엔 어느 정도 이상에서는 더 이상 자세히 볼 수 없게 된다. 공 속의 안개를 뚫고 그 안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지식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각주:2]

그러면 어떻게 해야 생각의 깊이를 깊게 할 수 있을까? 난 통찰력을 기르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통찰력은 이 안개 속을 뚫고 볼 수 있는 능력과 같아서, 더 적은 지식으로도 흐린 공 속을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통찰력은 지식으로는 깊어지지 않는다. 통찰력을 기르는 방법은 반복적인 사고 뿐이다. 이미 결론내린 사항에 대해 다시 한번 고려해 보고, 여기저기서 틀린 것은 없나 다시 고려하는 것, 이런 것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내는 것.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 사고의 깊이를, 통찰력의 깊이를 깊게 할 수 있다. 수많은 것을 아는 만물 박사더라도 노스님의 통찰력에는 힘을 못 쓰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것이다. 만물 박사는 아는 것이 많더라도 그 많은 지식을 머리에 넣느라고 깊게 사고하는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매일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갖는 노스님의 통찰력과 지혜에 못당하는 것이다.

누구나 글을 잘 쓰고 싶어한다. 그것은 나도 별로 다르지 않아서, 글에 향을 담을 줄 아는 사람들이 부럽기만 하다. 이렇게 글을 잘 쓰려면 깊게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물론 사람은 생각을 줄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존재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도 얽혀있는 인간 모습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늘부터라도 더욱 생각을 부지런히 하는 버릇을 들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1. 여담이지만, 이렇게 많은 법칙이 원래 만들어진 곳 말고도 다른곳에 많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을 보면 '세계는 양파 껍질과 같아서 모든 법칙은 서로를 닮아 있다' 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본문으로]
  2. 르 봉은 그의 저서 '군중심리'에서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많은 지식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믿음일 뿐이라는 것이다.(이를 뒷받침하는 통계적인 근거도 제시되어 있었으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이것을 근거로 르 봉은 의무교육에 반대한다고 했지만, 난 이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의무교육은 원래의 사회에서는 발견되지 못했을 보석을 발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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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 15. 03:04 Writer

버림의 미학

요즘,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예전의 [나무야 나무야]라는 책은 참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이 책 중에는 [버림과 키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서신이 하나 있습니다. 제목에서 내용을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제가 오늘 이 서간을 떠올리게 된 이유는 바로 버림의 아름다움, 그 잃어버린 미에 대한 아쉬움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황금만능주의라는 날카로운 칼에 베일대로 베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만 남은 인간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그 좋았다는 '황금 시절'의 이야기에 불과한, 여유있는 자들의 정신적인 사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이 시대에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욕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되는 시대, 이런 시대에 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비움을 미련함의 연장선상에 두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비움이 현자의 미련함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술잔에 술을 따를 땐 먼저 술잔을 비우는 것이 술과 상대방에 대한 도리이듯이, 무언가로 채우고자 할 때 먼저 빈 자리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 자리가 그릇을 비움으로서 만들어지는 것이든, 그릇을 크게 늘려서 만들어내는 것이든 말입니다. 하지만 그릇을 키우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릇은 그 자신을 이루는 뼈대가 견디지 못할 정도로 비대해지면 결국엔 자신의 과도한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채움의 계교보다는 버림의 지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예전에 법정스님이 전해주신 이야기가 하나 생각납니다. 어느 절의 선사가 버려진 땅을 보고 논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개간에 들일 돈으로 그 갑절의 땅을 살 수 있었지만, 미련하게도 계속 개간을 고집했다고 합니다. 혜월 선사. 이분은 분명히 어리석었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눈으로 보면, 아니 세속으로 물든 시대의 눈으로 보면 그는 경제의 경자조차 모르는 천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리석음 덕에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는 미련한 현자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비움으로서 그릇을 넓힐 줄 알았던 시대를 초월한 현자였던 것입니다.

저 멀리 중동의 어느 모래사막 한가운데에는 사해라는 커다란 호수가 있습니다. 오만하게도 호수 주제에 바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전 바다라는 이 이름이 아주 잘 지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호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바다만큼 커다란 교훈을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제주도처럼 길쭉한 이 바다가 죽음의 바다가 된 이유는 비움의 미학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해에는 물이 요르단 강으로 들어오기만 하지 빠져나가는 곳은 없다고 합니다. 결국 사해의 염도는 세계의 그 어느 바다보다도 진해지고 말았고, 이런 높은 염분을 견디고 살아남은 생명체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답니다. 비움의 미학을, 버림의 아름다움을 잊어버린 그릇이 제 탐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사해의 교훈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비록 미련한 현자의 지혜를 따라가지는 못하더라도, 지나친 욕망으로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 외침이 이 에피메테우스들의 세상에 공허한 메아리로만 남지는 않을지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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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 11. 22:23 Writer

지우개 같은 사람

지우개. 지우는데 사용하는 물건이라는 뜻을 가진, '지우다'라는 단절을 상징하는 어원 때문인지 몰라도, 약간은 슬프게 느껴지는 단어. 난 이런 지우개를 닮고 싶다. 물론, 슬픈 운명을 가진 어느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지우개야말로 성자의 본성을 눈으로 보여주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 지우개는 그 어떠한 것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어릴 적 지우개는 수많은 이름들과 낙서들로 가득 차 있었던 장난감이었다. 하지만 매번 공들여 그렸던 지우개의 낙서라는 이름의 상처들은 어느 순간부터 뭉개지더니, 결국 나중에 가서는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지우개는 마음 속에 무언가를 잘 담아두지 않는다. 또, 이렇게 마음 속에 잘 담아두지 않는다는 성격은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과도 닮았다. 이름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뭉개진 얼룩만 남은 주인없는 지우개가 교실 바닥을 배회하는 장면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1주일에 한번씩은 겪는 일이었다.(지우개를 잃어버린 학생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주인이라는 구속을 버리고 떠나가는 이름 지워진 지우개처럼, 마음에 무언가를 담아두지 않는 사람들은 자유롭다. 나는 어떤 낙서로 상처받더라도 결국 그 상처는 사라져 버리는 하얀 플라스틱 지우개처럼 마음이 바다같이 넓은 사람이, 주인의 이름을 지우고 여행을 떠나는 흰 고무지우개처럼 어디에도 쉽게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또, 지우개는 비밀을 감춰줄 줄 아는 진정한 친구이다. 우리가 지우개를 찾는 때는 실수를 했을 때이다.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필요할 때가 되서야 찾고, 또 필요가 사라지면 가차없이 구석으로 보내버리지만 지우개는 불평 한마디 없이 도와준다. 가출한 아들이 돈이 떨어져 터벅 터벅 집에 돌아오더라도 언제라도 팔을 벌려 맞아주시는 아버지처럼(물론 그렇지 않은 아버지도 있지만 쓸데없는 시비는 피하자.) 지우개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되어주는 고마운 친구이다. 진정한 친구는 세계가 나에게 뒤돌아 섰을 때 나를 향해 서 주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지우개는 언제라도 자신의 편에 서 주는 진정한 친구이다.  또, 지우개는 종이의 아픔을 자신의 살을 깎아가며 가려주고 둘만의 비밀로 간직해준다. 자신의 살을 깎아가면서까지 타인의 슬픔을 위로해줄 수 있는 친구. 난 나의 친구들에게 이런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

지우개라는 녀석, 알고 보면 참 좋은 녀석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차갑기 그지없지만 사실 속은 매우 따뜻한, 속마음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지우개. 연필의 꽁무늬만 쫓아다닌다고 불평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연필을 도와주는, 그런 겉과는 달리 속이 따뜻한 지우개. 난 지우개처럼 넓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고향같은 친구가, 차가와 보이지만 속은 따뜻하기 그지없는 친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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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요즘만큼 전 정권에 대해 말이 많은 정권도 드물 것이다. 경제를 망쳐놨다고 징징대기부터 시작해서 최근에는 집안 결혼에까지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참 오랜만에 보는 전 정권에 대한 과분한 관심이다. 그런데 이 관심이 애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서 나온 것 같아 어째 쫌 씁쓸하다.

정치는 릴레이계주다. 일단 전 사람이 뛰었으면 그걸로 끝을 내야 한다. 어차피 투덜대 봤자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학생이 태어난 집안탓만 하고 공부를 안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집안에 대해 갖는 불만이 자기가 태어난 가정을 바꿔주지는 않는다. 결국 출발선은 자신이 견뎌야 할 선천적인 이익이자 불이익일 뿐이다. 이런 출발선에 대한 불평은 술안주로는 할 수 있을 지 몰라도 공석에서 할 만한 것은 아니다.

정말 전 사람이 못 뛴 것이라면, 전 사람이 못 뛴 것을 직접 뛰어서 증명해 보이는 것이 옳다. 정말 잘 뛸 자신이 있는데 길이 울퉁불퉁해서 잘 못 뛰겠다면, 그자리에서 그만 두길 바란다. 지금 이 정부가 달리는 길은 암벽이 아니다. 평지에서 잘 달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오르막길 정도는 무리없이 달릴 수 있다. 더이상 비겁한 변명은 하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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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08. 8. 28. 23:03 Writer

이단아

흔히들 기계과를 개과라고 부른다. 술을 퍼마시다 못해 개가 되어서 개과라는 것이다(개처럼 술을 퍼마셔서 그렇다는 설도 있다). 어떻게 보면 개과라는 표현은 남자들의 리그인 공대의 놀이 문화는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난다는 슬픈 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단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법칙에는 예외가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이런 개과의 술을 하지 못하는 이단아이다. 소주보다는 맥주를 좋아하고, 맥주도 한잔만 마시면 얼굴이 달아오르는 나는 내가 기계과의 이단아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소주 열병식 들이키는 동기들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주량을 가졌기 때문이다. 새내기 배움터 첫날 8시에 제일 먼저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미 우리과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전설이 되었다.

그래, 난 이단아이다. 물론 그것이 술이 약한 아버지를 둔 유전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원죄는 아니다. 오랜 기억을 떠올려 보건대, 난 어릴때부터 독특하기를 바래왔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이 학원에서 배우는 애들과 동급이 되기는 싫다는 오기로도 나타났었고(결국 다니기는 했다), 친구중 누가 말했듯이 45도 비틀린 시각을 가지게 된 이유인 것 같다. 또, 사상적으로도 이단아가 되기를 바래왔다고도 할 수 있다. 잘 섞이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하는 흙탕물의 진흙과 같은 존재. 평범하면서도 드러나지 않게 독특한 그런 존재. 이런 존재들에게 끌렸던 것은 이단아가 되리라는 복선으로 작용했을 것이고, 장담컨데 앞으로도 이런식으로 독특하게 사고하려는 버릇은 버리지 못할 것이다. 이런 버릇은 결국 모태신앙이었던 나에게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어쩌면 종교라는 금지된 성역에 비판의 발을 들이밀게 된 것은 숙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흔히들 한국이 이처럼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던 이유는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이건 주로 목사들이나 그렇지만... 유럽이 망한 것도 믿음에 금이 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정말 옳은 설명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45도 비틀어 보는 것은 처음부터 다시 보는데서 시작하니까 말이다. 정말 한국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엄청난 성장을 할 수 있었고, 유럽이 세계 열강의 뒷전으로 물러난 것은 믿음을 가진 인구가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일단 내가 생각하는 결론부터 말해본다면, 정답은 '아니오'이다.

일단 옆나라 일본부터 보자. 일본이야말로 한국의 경제성장에 맞먹는 성장을 보여준 대표적인 대조군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후 일본은 말 그대로 '망했다'. 원자탄이 떨어진 히로시마는 쑥조차도 못 자랄 쑥대밭이 되었고, 폭격으로 온전한 너트 하나 찾기 힘들 정도로 공장들은 크게 망가졌다. 이랬던 일본이 지금은 경제대국의 하나이다. 미국의 뒤를 바짝 좇아가는 놀라운 재생능력을 가진 국가인 일본의 종교는 어떨까? 놀랍게도 기독교가 아닌 신토라는 토속종교와 불교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이 믿음의 힘으로 재생했다고 믿기에는 무언가 꺼림칙하지 않은가? 혹자는 일본은 전쟁 전에 기초적으로 쌓인 기술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본의 부흥은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약 1-3백만명(3% 이하) 정도 되는 일본의 기독교인들에 의해 일본이 재생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27%가 넘는 사람이 기독교인 한국은 왜 일본보다 크게 성장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리고 저 멀리 중남미로 가 보자. 여기는 잘 알려져 있듯이 천주교 국가들의 세상이다. 인구상승률이 제일 높은 이유가 교황청에서 피임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라고 읽은 바가 있는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여기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구역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난 아직까지 중남미가 한국보다 살기 좋고 경제도 더 크다는 주장은 들어보지 못했다. 실제인지 아닌지는 숫자를 확인해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GDP로 매긴 순위에서 한국보다 높은 순위를 가진 중남미의 나라는 브라질밖에 확인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보통 '망했다'고 표현하는 유럽국가들은 왜 이리 GDP 순위가 높은지. 이래도 믿음이 경제발전을 보장해주는 확실한 보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어릴적부터 들어왔던 말이 생각난다. 다름아닌 목사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은 '성적을 올려주세요' 이런 기도까지 다 들어주시지는 않습니다." 어머니께서도 '공부하나 하지 않고 좋은 성적을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다'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좋은 성적을 보장해주시지는 않는다고 하셨다. 결국 경제도 같은 것 아닐까? 나는 '경제좀 발전시켜주세요' 이런 기도를 올린다고 경제가 발전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물며 몇장 안 되는 시험지의 작은 숫자조차 허락하시지 않는데 과연 그 많은 지폐의 숫자를 허락하실까?

가끔 폭우가 오면 댐의 수문을 개방하기도 한다. 수문을 열지 않으면 댐이 무너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힘으로 대한민국은 상처를 딛고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수문을 열기 위해 폭우가 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 아닐까? 내가 고등학생일 적에 시험기간에 드렸던 기도는 '성적이 잘 나오게 해주세요'가 아닌 '노력한 만큼 성적이 나오게 해주세요'였다. 노력이 꼭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믿음이 강한 신자라면 한국의 성장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태의 노력에 대해 하나님이 특별히 허락하신 것이라고 믿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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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08. 7. 28. 00:06 Writer

비겁한 변명입니다

한국영화에서 천만관객시대를 열었던 두 영화 중 하나인 <실미도>. 실미도라는 영화를 처음 본 때는 중학교 3학년 졸업직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래 문화생활 자체를 별로 안 즐기다 보니(기껏해야 책이나 읽지) 영화관에서 본 영화는 아니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영화관에서 본 영화는 전 인생을 통틀어 열손가락 안으로 꼽을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뭐, 그것도 일단 내 인생 자체가 매우 짧은 편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말이다. 이야기가 약간 옆길로 샛는데, 영화 실미도에서 두고 두고 회자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설경구가 총을 난사하며 '비겁한 변명입니다!'하고 외치는 장면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 바로 이 장면이야

이 장면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유는 일단 문구가 자극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겁하다와 변명하다 둘 다 강렬한 부정적인 인상을 가진 단어이다. 비겁하다는 것은 정의감 없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겁쟁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단어이며, 변명은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 둘러대기 위한 가림막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단어이다. 이 두 부정적인 이미지가 결합한 것이 바로 '비겁한 변명입니다!'라는 문구인데, 부정적인 이미지가 중복되다 보니 강렬해 질 수 밖에 없고 강렬한 이미지는 자극적이며, 자극적인 이미지는 뇌리에 깊게 남기 때문에 중독적으로 쓰이고 잇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유행이라는 것이 있듯이 이 문구는 이미 유행이 지난 짤방으로 전락해버렸지만 말이다.

오늘 내가 이 오래된 장면을 들고 나온 이유는 몇몇 '비겁한 변명'을 하는 사람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책 좀 읽으라고 할 때 흔히들 하는 말이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말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이 글을 쓰게 된 목적도 이것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서 책을 못 읽는 사람은 책을 읽을 시간이 주어져도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봉사활동을 할 시간이 없어서 봉사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은 책을 읽는 데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부도 똑같다.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공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기 싫어서 안하는 것이다. 물론 성적이라는 것은 이런 자기 노력이라는 단일변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긴 하지만 성적도 마음을 먹으면 어느 정도 이상까지는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도 전교 30% 안에는 들어야 공부 좀 열심히 했다는 말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소극적인 내가 싫다는 것(내가 그렇다)도 다 자기가 적극적으로 행동해 보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다. 눈 딱 감고 실수 하는거다. 실수 한 다음 깔끔하게 잊어버리는 거다. 그냥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못하는거다. 인정하자.

과제가 너무 많아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신문을 못 보겠다고, 나중에 커서 인물이 된 다음에 정치계의 썩은 물을 갈아버리겠다고 말하지 말자. 인정하자. 그건 그냥 정치에 관심이 없는거다. 하루에 5분만 포털 기사 제목만 훝어주어도 요즘 무슨일이 있는지 대충은 알고, 30분만 투자해도 좀 깊게 알 수 있는게 요즘 인터넷 세상이다. 관심이 그냥 없는거다. 인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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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주소를 잊어버려서 그림 추가는 하지 못하겠네요..;;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네티즌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The korean government should focus on the netizen`s opinion(bloggers) in Korea
)

Well, as this campaign is for global community, I'll write this post in english.
I've got the notice too lately...hahaha;;

Firstl of all, I'll make a comment about this governments's policy towards communication.
This government, as Mr. Lee said, expressed this situation as 'lack of communication', which I cannot agree more.
But, we need to 'think' about why this happened.
For a 'communication', mutual interaction is a foundation.
However, this government seems to belive it as a one-way interaction rather than a mutual communication.
Well, I'm not saying that Mr. Lee is not listening at all but he doesn't look like he's paying attention towards what the people are saying.
Please pay some attention. I know it's hard to be up there, but you need to know that the place you're in is a place made to converge ideas.
Remember the saying, 'Great power comes with great responsibility'.

Secondly, I propose a public debate.
I believe that debate is a great arena for communication.
Mr. Lee, if you really want to make a conversation with the public, I belive there is nothing that can be better than a public debate.
Don't just listen from newspapers.
Don't believe it before you see it with your own eyes.
Doubt everything before you believe it.

Well, revising what I wrote, I feel like I said something twice. haha;;
Mr. Lee, if you are reading this post(I think that it's really unlikely), stop saying and start acting.
I believe you'll understand what I'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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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08. 6. 29. 03:18 Writer

復活

『復活』

이슬내린 너의 무덤을 박차고 일어나

굳어버린 너의 비석을 부수고 나가라

싸늘해진 너의 주검을 다시금 일으켜

끓어오른 너의 혈액을 혈관에 흘려라

묶여있는 너의 영혼은 해방을 원하고

고개들은 너의 양심이 자유를 부른다

부활하라
Posted by 덱스터
미리 말해놓고 들어가지만(이것은 섣부른 판단을 방지하기 위함임을 알아두길 바란다.) 나는 촛불집회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물론 나간 횟수는 매우 적긴 하지만 말이다.

재협상이냐 추가협상이냐의 문제는 이미 지나간 듯 하지만 아직도 말이 많기에 끄적여 본다. 난 솔직히 말하자면 추가협상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추가협상이 제대로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알려진 대로 내장 등 SRM과 실질적으로 구분이 불가능한 부위가 전부 들어오게 되어 있으며, 받아온 인증 역시 정부 차원에서 보장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에 믿는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추가협상의 한계가 있기에 재협상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추가협상으로 재협상과 동일한(준하는이 아니다. 동일한이다.) 규제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이 10번이 되었든 100번이 되었든 추가협상으로 지난 정권 정도의 규제를 얻어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추가협상이 이정도의 규제를 얻어올 수 있는 카드냐는 것은 옆으로 치워 두고, 이렇게 추가협상을 여러번 할 바에야 차라리 재협상을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란 말인가. 간단히 재협상하면 될 것을 뭣하러 추가협상을 여러번 하느냔 말이다. 마치 오래된 조립식 컴퓨터의 부품을 하나하나 바꿔서 새 컴퓨터로 바꾸는 것보다 차라리 처음부터 새 컴퓨터를 사면 가격이 더 싼 것처럼, 추가협상을 여러번 해서 이리 덧대고 저리 덧대는 협상보다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재협상이 더 옳지 않느냐는 말이다.

끝으로, 추가 협상이라도 하고 온 것은 잘한 일이기는 하다만(단지 100점만점 10점에서 8점정도 더 올라간 정도이기는 하지만) 과연 미국에 재협상의 재자조차 꺼낸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단순히 무역 보복이 두려워 재협상해보자는 말을 꺼낼 엄두조차 못 냈다면 대통령직을 빨리 때려 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정도의 배짱도 없이 어떻게 한 나라의 대표가 되겠다는 말인가? 설령 꺼내보기는 했지만 씨알도 안 먹혀들어갔다고 해서 바로 포기했다면 한반도 대운하를 추진하려는 근성의 반에 반만이라도 재협상에 쏟아넣으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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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나에겐 친구가 하나 있어. 약간은 웃기는 놈이라고도 할 수 있고, 괴짜라고도 할 수 있지. 맨날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거든. 그것도 똑같은 놈으로 매번 말이야.

어느날 말이야, 아주 맑디 맑은 한여름의 어느날 말이야, 이놈이 멀디 멀은 앞산 위에서 뭉게뭉게 솟아오르고 있는 뭉게구름을 보면서 말하는거야.

"먹구름이 다가오는 것을 보니 소나기가 오겠네?"

난 말했지.

"저게 무슨 먹구름이냐? 뭉게구름이지."

이녀석이 계속 말하는거야. 지딴에는 중학생때 과학공부 좀 했다고 막 말하는거 있지?

"비구름이잖아. 전문용어로 적란운!"

난 하두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툭 던졌지. 나도 중학생때 과학공부 좀 했거든.

"적운이지 무슨 적란운이냐? 선글라스나 벗어 인마"

그러더니 이놈이 갑자기 이렇게 대꾸하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니 안경이나 벗고 말해 인마. 저게 적란운이지 어딜 봐서 적운이냐?"

순간 울컥해서 난 안경을 벗고 말했지.

"자 안경 벗었어. 그런데도 저 구름은 하얗네? 저건 비구름이 아니라고!"

그런데 이놈 말이 더 가관이네.

"너 렌즈꼈지? 다 알아 인마."

난 렌즈는 눈이 아파서 안경만 쓰고 다니거든. 몸 구석구석까지 혈압이 안 느껴지는 데가 없어서 내가 한마디 했지.

"썬글라스나 벗고 말해 인마. 난 안경 벗었다."

그러더니 자기가 말하는 거야. 아주 기가 막힐대로 막히지 않을 수 없더라니깐?

"인마 난 안경 안쓰면 제대로 못보거든?"

결국 난 비구름 갖고 싸우는 것을 때려 쳤지. 이 친구를 어떻게 해야 하면 좋을까?

=====================================================================================

촛불좀비, 친북좌빨의 선동이다라고 하는 놈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보기엔 니네의 논리는 이거야.

정부에 반대하는 것은 친북 좌빨 세력이다->촛불집회 참여자들은 정부에 반대하고 있다->고로 이놈들은 친북 좌빨 세력이다

그러면 내 논리를 보여줄까?

먹지 않으면 죽는것은 돼지이다->촛불집회 참여자들을 친북 좌빨로 매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로 이 사람들은 돼지들이다

자,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이제는 보이지? 이제 이 논리를 깨 볼까?

촛불집회 참여자들은 김일성을 찬양하지 않는다->김일성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친북 좌빨 세력이 아니다->고로 촛불집회 참여자들은 친북 좌빨 세력이 아니다

촛불집회 참여자들을 친북 좌빨로 매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사람의 특징을 가진 생물체 중에 알려진 생물체는 사람밖에 없다->고로 촛불집회 참여자들을 친북 좌빨로 매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람이다

첫 삼단논법에서는 무엇이 잘못된 것이냐면, 가정이 잘못되었어.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친북 좌빨 세력만 있는것이 아니거든.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 줘도 알아듣지 못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정부가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말리지는 않겠어. 난 끊임없이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지만.

하지만 얼토당토하지 않은 논리로 친북 좌빨이라고 한다면 그건 너네들의 한계라는 걸 알아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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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08. 6. 20. 03:01 Writer

천민민주주의?

천민민주주의.... 검색해보니 6월 3일경의 기사가 가장 오래된 기사로 검색되었다.

[李대통령, 지지세력 결집으로 대응해야] 올인코리아, 이동복 안보전문가
http://www.allinkorea.net/sub_read.html?uid=10010&section=section1

자, 이쯤에서 생각해보자. 천민민주주의라는 단어가 과연 옳은 단어인지. 천민자본주의라는 단어는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단어이다. 정확히는 생산 활동을 통하여 영리를 추구하지 아니하고 고리대금업과 같은 자본의 운영을 이윤 추구의 기본적인 형태로 삼는 태도.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가 중세 후기의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자본주의를 지칭한 용어이다.(다음 국어사전 참조, '천민자본주의') 쉽게 말하면 천민자본주의란 '돈이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 기초가 되는 경제'라고 할 수 있겠다. 뭐 일단 천민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말해 두기로 하고, 이제부터는 말할 천민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천민민주주의'. 이름 한번 747공약 뺨치게 잘 지었다. 역시 한나라당은 전문 정치 작명소가 있는 듯하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이름을 잘 지을 수 있을까? 뭐 그건 둘째치고 도데채 '천민민주주의'라는 녀석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검색해봤다. 도대체 천민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어떤 것을 말하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검색 결과 이 근원지는 주성영 의원이 홈페이지에 올린 사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100분토론 후 트래픽 폭주 덕분인지 접속할 수 없었다.(광고가 잘 될 것을 생각하니 부럽기는 하다.) 하여튼 천민민주주의라는 것을 신문 기사들에서는 '소수의 반역자가 민주주의를 악용해 국가 체제를 정복하려는 행위' 정도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정말 그럴듯한 설명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번 촛불집회는 천민민주주의를 뿌리 끝까지 보여주는 상황일까? 천민민주주의라는 단어에 대한 논의 전에 이것부터 정확히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결론은 '아니오' 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탄핵과 하야, 퇴진 등 정권반대 구호는 '정치적 압박'을 목적으로 한 구호들이다. 물론 그 누구는 이런 압박을 말장난이 아닌 실제 생각으로 받아들여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말이다.(실제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주가 되는 것은 아니기에 논외로 하자.) 그리고 이번 촛불집회는 정권에서 국민들이 원하는 것을 충분히 들어준다면 썰물 빠지듯 사그러들 것이다. 지금 약간은 줄어든 촛불집회 인원 숫자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장기전이라 지쳤다고 생각해도 맞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부가 조금은 듣고 있구나 하고 생각해서 안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정권 퇴진이 목적이 아닌 정권이 그렇게 좋아하던 '국민의 머슴'일을 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이 촛불집회의 목적인 것이다. 정작 정권 퇴진으로 이어질 경우는 정부가 국민의 목소리를 지나가던 개 울음소리로 듣는다는 경우인데, 이 경우가 '국가 체제를 정복하려는 행위' 가 되지는 않는다. 헌법 제 1항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정권을 뒤엎는 행위가 과연 민주주의를 뒤엎는 행위인가? 아, 생각해보니 천민민주주의는 '소수의 반대자가 민주주의를 악용해 정권을 뒤엎으려는 행위' 인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놓고 보니 정말 편향된 용어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5공 시절에 대학생들 패던 수준과 다를게 무어란 말인가.

그러면 이제 용어를 분석해 보자. '천민민주주의', 과연 옳은 단어인가? 처음 내렸던 정의인 '소수의 반역자가 민주주의를 악용해 국가 체제를 정복하려는 행위' 에 대해 분석해 보자. '민주주의를 악용한다'라... 이건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다. '악용'은 알맞지 않거나 나쁜 일에 사용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민중들에게서 권력이 나오는 정치 형태를 의미하며, 속뜻으로는 구성원 개개인의 의사를 반영하여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는 정치 형태를 갖고 있다. 그러면 이런 민주주의를 악용한다는 단어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그들이 말하는 소위 '반역자'(그런데 진짜 반역자를 보면 어떻게 까무러칠려고 그렇게 쉽게 그런 단어를 남발하는지 모르겠다.) 들도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가진 것이 이른바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이며, 그 소위 '반역자'들은 충실히 민주주의를 따라주고 있다. 그들이 그들만의 의견을 내는 것이다. 이런 것을 '악용'이라고 한다면, 당신들은 '그 입 닥치라'라고 외치던 짤방이 더 어울린다는 말을 해 주고 싶다. 100만명이라고 해 봤자 대한민국 국민의 40분에 1 즉 2.5%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수이다. 이 소수들은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표출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악용'이라고 단정지으면 곤란하다. 당신과 같은 국회의원들이 국민 혈세로 월급타는 아주 당연한(?)것을 헌법의 악용이라고 한다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천민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존재 자체가 모순으로 이루어진 용어이며, 결코 소위 지식인이라는 계층에서는 사용되서는 안 될 금칙어이다. 앞으로 이 점 유의해서 글을 쓰시기 바란다.

그리고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디지털 포퓰리즘이라고 촛불집회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면을 보고서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모르겠다.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할 때에나 쓸 수 잇는 단어이지, 정치를 '받는' 사람들이 주체가 될 때에는 사용될 수 없는 단어이다. 촛불집회는 엄연히 '정치를 당하는 사람들'인 일반 시민들이 주최가 된 집회이다. 당신들이 '국민이 나를 선택하게 해서' 당선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당신을 선택해서' 당선된 것임을 부디 잊지 않았으면 한다.
Posted by 덱스터

청와대로 청와대로.

이제 이런식으로는 안된다. 청와대로 가는건 이제 그만두는게 좋을 것 같다. 내가 보니 푸른기왓장 아래에 사시는 그분은 귓밥으로 귀를 막았는지 도저히 들을 생각이 없다. 청와대행은 지금으로서는 악수다. 청와대행은 포기하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푸른기와집을 누를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 국회로, 대법원으로 가자. 지금으로서는 푸른기와집을 제압할 곳이 그 두 곳밖에 없다. 그 두 곳만 제압한다면 승리다.

단단히 서 있는 거인을 쓰러트리려면 머리를 가격해도 되지만, 더 쉬운 방법은 무릎을 치는 것이다. 지금이 딱 그 상황이다. 지금은 머리를 공격해 봤자 어깨 위조차 가지도 못할게 뻔하다. 6일이 넘도록 계속 보지 않았는가? 청와대행은 거의 불가능하다. 불가능은 없다 하면서 무대뽀로 진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 간구되어야 한다. 머리가 아닌 무릎을 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으로는 3권분립에서 행정권의 대척점에 서 있는 두 기관, 국회와 대법원이 바로 무릎일 것이다.

단순히 머리만 노리지 말자. 약점은 찾으면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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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08. 6. 6. 18:51 Writer

촛불시위, 그 미래.

미리 밝혀두지만, 난 촛불시위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다.
오히려 여태 있어왔던 정권의 독선적인 행동과 아집으로 가득찬 국정수행에 제제를 거는 것으로 생각하며, 아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 가보지는 않아서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31일에 한번 간 적이 있을 뿐, 그 이후 72시간 연속집회가 어떻게 되어 가는가에 대해서는 더이상 아는바가 없다. 지금 상황에서는 직접 눈으로 본 것만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하기에),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축제가, '당신들의 축제'로 끝나서는 안 된다. 여기서 이렇게 '당신들의 축제'로 끝나서는 다시는 이 축제가 발 디딜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에게는 '우리들의 축제'이지만, 제 3자에게도 '우리들의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촛불집회 반대시위자들.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말라. 그것이 이 거대한 흐름을 조각내버리고자 하는 자들이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광장에 촛불을 들고 모일 권리가 있는 것처럼, 그들 또한 촛불을 들 권리가 있다. 이 권리를 짓밟는 반 민주주의적인 행패를 그들이 원하는 것이다. 정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차라리 공개 끝장토론을 제안하라. 공개 끝장토론으로 끝을 보고, 더이상 그 주장을 할 수 없도록 봉쇄해 버리라는 말이다. 입이 아프겠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여기서 반 민주주의 행패를 부린다면, 우리가 끌어내려는 그들과 같아질 수 밖에 없다.

오히려 그들이 내뱉는 말을 주시해야 한다. 시청 앞 광장에 나선 7만명의 국민들 뒤에는 나서기를 꺼려하는 국민들의 70%가 있다. 아니,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런 만큼 1명의 반대자가 나왔다는 것은 그 한명 뒤에는 나서기를 꺼려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을 우리들의 축제로 불러들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란 말이다. 이 축제는 '당신들의 축제'로 끝나서는 안된다.

오늘 촛불시위가 막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물론 공신력이 매우 떨어지는 동아일보라는 신문이지만, 우리는 그들조차 입을 뻥긋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왜곡에 왜곡을 하더라도 먼지 하나 못 집어내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승리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우리들의 축제로 맺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 아니겠는가?

축제 분위기? 좋다. MT 분위기도 환영한다. 하지만 '당신들의 축제'에서 끝나서는 안된다. 당신들, 아니 우리들이 거리로 나서게 된 데에는 치열한 고민이 서려 있었다. 고삐 풀린 성난 망아지같이 홀로 날뛰는 정권에 다시 고삐를 채우기 위해 치열한 고민 끝에 거리로 나섰다는 것을 난 한치도 부정하지 않으며, 나도 그러했다고 고백한다. 이제는 귀찮더라도 그 고민을 다시 해야 할 시간이 왔다. 어떻게 하면 이 축제를 '당신들의 축제'가 아닌 '우리들의 축제'로 맺을 수 있는지, 치열한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

지금 상황이 물러날 수 없는 고삐풀린 정부와 성난 시민들의 건곤일척이라는 글들을 잘 생각해 보자. 더이상 밀려나면 우리들에게 기회는 없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들의 축제'로 이 축제를 맺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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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요즘 기사들을 보면 시위 양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굳이 내가 자주 들르는 다음 아고라를 제외하고서라도

많은 글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확실히 내가 31일날 밤과 1일날 새벽에 보았던 잔인한 살수는 사라진 듯 하다.

그거야 다시 한번 나가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살수나 과잉진압이 사라졌다는 것은 기쁜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고통은 싫어하지 않는가?

이제는 채증전으로 시위 양상이 바뀌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서로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한 전쟁이랄까? 카메라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제는 싸우는 자들의 싸움이 아니라, 지키는 자들의 싸움이 된 것 같다.

싸우는 자들. 그들은 깃대를 들고 방패를 든다. 주먹을 하늘에 내지르고 곤봉을 허리춤에 차며, 서로에게 의지해 대오를 갖추고 방어구를 착용한다. 대치 상황에서 전방(frontline)에 서 있으며, 그들의 뒤에 있는 자들을 위해 물러서지 않으려 한다.

가장 많은 피를 흘리는 것들이 그들이요, 가장 굴복하지 않는 것도 그들이다.

그렇다면 지키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기계의 눈과 함께 다닌다. 싸우는 자들이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상황을 중계하며, 더 넓은 세계와 그들의 세계를 연결해준다. 그들은 기자들이요, 개인 블로거이며, 메이저 언론들이요, 개인 중계자들이다.

이들은 싸우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의 일부를 바깥 세계로 내보낼 뿐이다. 하지만, 이들의 힘은 싸우는 자들만큼이나 강력하다. 그들은 역사라는 커다란 흐름, 그 거부할 수 없는 물결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시위는 역사의 대결로 흘러가고 있다. 어느 쪽이 이길 것인가는 시간뿐이 알겠지만, 결국에는 옳았던 자들이 승리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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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08. 6. 2. 22:53 Writer

...죄송합니다...

제 학교에 대해서.....

그저 한 구성원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 더 없습니다.

요즘 대학생은 관심이 없다는 말. 많이 들었습니다.

네. 저도 알아요.

저도 그저 관심만 있고 행동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여태 한번밖에 시위에 다녀오지 않았다는 걸.

아직 투표가 완료되지는 않았지만

연장투표라는 건 투표율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짐작은 하시겠지요.

...

입이 열개, 아니 백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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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08. 6. 2. 12:05 Writer

조용히...

조용히..

낡아가는 하모니카를 들고

천천히..

익숙하기만 한 곡조를 뽑는다.

오래 전...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멜로디.

새벽의..

방송시간이 끝난 라디오의 선율.

살며시..

한 가닥, 한 가닥 하모니카에 올린다.

...

세상의 많은 일은 이성으로 유지되고 돌아간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이성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있다.

아니, 대부분의 중요한 일들은 이성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들은 감정으로 이루어진다.

감정이 없는 이성. 한낱 기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들을 욕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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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2008. 6. 2. 11:45 Writer

세상에는 말이지...

이성으로 일에 대처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이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많은 것 같아.

그냥 그들이 그렇게 다투는 것을 보고 왈가왈부하지만 말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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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촛불문화제가 불법시위로 변질?榮募?개인적으로는 변화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본다)소식을 들은건 어젯밤이었다.

당시에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던 나는 당연히 관심을 갖고 시위 현장을 아프리카로 구경(?)하고 있었다.

물론 3시쯤 되서 껐지만 말이다. 10시쯤부터 보기 시작했으니 한 5시간은 본 셈이다.

물론 속보로 다루는 기사가 새벽 1시가 다 되서야 나타나기 시작했고

방송사 어디서도 시위를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것은 당분간 접어두자.

이 글은 언제까지나 문화제에 대한 글이니까.

지금 느끼는 감정은 크게 두가지 정도로 정리가 되는데

하나는 평화적이었던 문화제가 시위, 그것도 불법시위로 변질되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고

(물론 조용히 행진하던 것이 경찰에 의해 과잉진압되었다는 말도 있다.)

나머지 하나는 그들을 그렇게 거리로 내몬 시대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분명히 이번 시위는 참가한 사람들의 잘못도 없지는 않지만

시위를 하게 만든 시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17번째 촛불문화재. 첫번째 가두시위.

전의 16번의 촛불문화제를 겪고서도 도저히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는 정부에 대한 불신, 분노 등 복합적인 감정

이것들이 그들을 거리로 몰아냈을 것이다.

대국민 담화. 대통령께서 반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지를 높게 사겠다만

담화 자체는 반성의 기미를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국민의 대다수가 그렇게 내던 목소리를 괴담으로 치부해 버렸다.

전에 대통령 지지율이 23퍼센트대에서 30퍼센트에 육박하는 수치로 올랐다는 기사를 보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흘려듣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30퍼센트는 당신의 한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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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네, 전 당신들이 산 것의 절반밖에 살지 않았지요.

경험도 반이고, 사고의 깊이도 반이지요.

물론,신념의 깊이에서도 뒤처지겠고요.

하지만, 얕디 얕은 제 정치인에 대한신념은

신념을 부러뜨릴지언정, 굽히지 못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자에 대한 신념도 그러하고요.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면

제 신념을 부러뜨려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요즘 나오는 기사들을 살짝 흩어 보니

국민들이 선동당하고 있다면서요?

좋은 신념입니다. 국민이라는 외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 나가다니요.

그런데 말입니다,

불과 1년이 채 되기 전에는

전혀 반대로 말씀하고 계시더군요.

신념을 바꾸신 건가요?

자발적으로 신념을 바꾸었다면 제가 뭐라 할 입장이 안되지만

제가 보기엔 자발적으로 "권력에 아첨하기 위해" 신념을 바꾼 것처럼 보이는군요.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답장 기다리지요.

08년 5월 3일

갓 대학이라는 곳에 발을 디디게 된 신입생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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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덱스터

지식인은 죽었다.

그중 일부만이 그나마 살아남았지만, 너무 적은것 같다.

지식인은 철장 속의 카나리아가 되어야 한다는 누군가의말이 생각난다.

카나리아는 연탄가스를 느끼면 바로 죽는다고 한다.

지식인은 그런 존재인가 보다.

그 누구보다 먼저 위험을 느끼고, 희생해야 한다는...

이제 카나리아는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

더없이 정부에 비판적이어야 할 언론이

오히려 정부에 아부만 하는 것 같다.

세상을 믿지 못하는 나도 한심하지만

나에게 믿음을 주어야 할 세상이 더 한심하게 느껴진다.

Posted by 덱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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