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9. 11. 08:41 Daily lives

이사 및 근황

0.

새 포닥 자리를 위해 제네바로 이사했다.[각주:1] 런던에서 포츠담으로 건너온 것은 9월 21일이었고[각주:2] 포츠담에서 제네바로 건너온 것은 9월 10일이니 정확히 2년을 지낸 런던과는 달리 포츠담(보다는 Golm)에서는 3년에서 열흘 정도 모자라는 기간동안 지낸 셈이다. 과연 여기서는 얼마나 지낼 것인가...

 

0.1.

포츠담, 혹은 막스플랑크 중력연구소 포츠담Max-Planck-Institut fuer Gravitationsphysik (Albert-Einstein-Institut), Potsdam에서의[각주:3] 3년을 요약해본다면 '포닥을 왜 "박사후 연수"라고도 표현하는가'를 이해하게 된 경험이었다.

 

내 전공을 굳이 따진다면 고에너지물리 계열에 속하지만 포츠담에서 연구원으로 채용된 연구단은 중력파 연구단이었다. 일반상대론적 2체문제에 대한 전문성으로 뽑힌 것. 그래서 거대한[각주:4] 연구단임에도 불구하고 내 세부분야 (scattering amplitudes 혹은 양자장론) 안에서 내가 잘 모르는 주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 논의할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각주:5] 이걸 좀 다르게 말한다면 내 세부분야와 관련해서는 (양자장론의 수학적인 측면 등) 연구단에서 가장 전문가였다고 표현할 수 있긴 한데, 같은 내용의 표현인데도 느낌이 매우 달라진다는 점이 재미있다. 여튼, 이런 연구 상황은 같은 연구소 소속 사람들과 쓴 논문이 3년동안 쓴 논문 전체의 1/4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력파와 관련된 주제에 대해서는 연구단 안에서 이론부터 실험까지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루다보니[각주:6] 관성대로 고에너지물리를 중심으로 다루는 연구단에서만 포닥 경험을 쌓았더라면 절대로 알 수 없었을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예컨대 중력파 데이터 처리의 근간이 되는 파형 모형waveform model들의 고스핀 영역에서 정확도가 감소하는 문제와[각주:7] 같이 실제 중력파 관측과 밀접하게 관련된 주제는 다른 곳이었다면 배우기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속을 옮긴 직후 연구의 방향성을 잡느라고 좀 방황했는데,[각주:8] 중력파 관측과 관련된 다른 주제들에 대한 전문가들과 교류하기 힘든 환경이었다면 아무래도 방황이 더욱 길어졌을 것이다. 뭐, 다른 돌파구를 찾았을 수도 있고...

 

0.2.

여러모로 악명(...)이 있으신 학사지도교수님과의[각주:9] 면담에서 들었던 말 중 기억나는 말 하나는 '하고 싶은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이다. 이번에 CERN으로 소속을 옮겼으니 가속기 물리collider physics와 관련된 주제를 좀 깊게 배워보고 싶긴 한데 (+ 막연하게 생각해둔 연구문제들이 있긴 한데), 미래가 어떻게 풀릴지는 뭐 두고 봐야 알겠지.

 

0.2.1.

사실 그보다 급(?)한건 CERN 계약이 끝나는 3년이 (이걸 하고 나면 포닥 8년차가 되니 좀 많이 길긴 하다...) 지나기 전 주니어 포지션을 잡을 수 있느냐긴 하다. 이건 운이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문제라 뾰족한 수가 없긴 하지만 =_=;;

 

---

 

1.

첫 포닥을 했던 런던 퀸메리 대학Queen Mary University of London과 같이 영국 왕립학회Royal Society에서 뽑는 University Research Fellowship에[각주:10] 지원했다. 공교롭게도 데드라인이 이사하는 날이었던 9월 10일이라 여름동안 휴가를 5주나 내고도 연구실에 매일같이 출근해서 연구제안서를 쓰는 비극(...)이 일어났지만 학계라는 곳이 원래 그런 곳이니 그러려니 하자(...). 뭐 일단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남은 것은 이번 겨울에 있을 1차 결과 발표만 기다리는 것 뿐...

 

1.1.

처음으로 작성해본 연구제안서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몇가지 배운 점이 있는데 나중에 쓸 일이 있을 지 모르니 기록해둔다. 이런건 글로 정리해두지 않으면 금방 증발해버리는 종류의 기억이므로.

 

1.1.1.

자잘한 문법 오류가 있으니 ChatGPT를 써보면 어떻겠냐는 피드백이 돌아와서 약간 자존심이 상했는데, 인터넷에 제공되는 (인공지능 기능이 추가된) 문법검사기에 여태 쓴 연구제안서를 돌려보니 문법 오류는 거의 없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오타가 많았다.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어색한 문장을 지적해주는 기능. 인공지능이 제안하는 문장은 안 썼지만(쓸 생각도 없었지만 애초에 로그인 없이 쓰는 무료버전에서는 제안이 제공되질 않았다) 지적받은 문장을 이래 저래 편집하다 보니 확실히 훨씬 읽기 편한 결과물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LLM이 그래도 쓸 데가 없지는 않군'이란 생각을 했다.

 

여담으로 가장 많이 받은 지적이 '문장이 너무 길다'였음을 밝혀둔다. 반점이 서넛 들어간 긴 문장을 두세 문장으로 나눠보니 확실히 읽기 훨씬 편하더라...

 

1.1.2.

도입부를 좀 더 흥미롭게exciting 만들라는 피드백이 있었다. 약간의 과대광고(...)는 괜찮으며 리뷰하는 패널들 전부 그 정도의 과대광고는 기대하고 있다고(...).[각주:11]

 

예전에 연구제안서를 쓰는 팁을 읽었을 때 '리뷰어가 "이 연구제안서를 채택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데 들여야 하는 노력을 최소화해라(즉, 연구제안서에서 직접 떠먹여줘라)'란 내용이 있었는데, 연구제안서를 제출하고 나서 되돌아보니 이 연장선에 있는 이야기였다. 전 학술분야에서 35명(+a)을 뽑는데 '왜 하필 이 연구가 지원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해당 연구주제를 다뤄 본 적은 없는) 리뷰어에게 좋은 답을 떠먹여줘야(...)한다는 의미였던 셈이다.

 

나는 내가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첫 문장으로 택했는데 (= "강렬한 첫인상을 주자!"를 목표로 한 선택) 잘못된 선택이었나... =_=;; 시간만 알 뿐이다...

 

---

 

  1. 정착은 국경 너머 프랑스 쪽에서 할 생각이기는 하지만 가장 가까운 대(?)도시가 제네바이니 그러려니 하자. [본문으로]
  2. 분명히 이사에 대해 회고(?)하는 글을 썼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블로그에 없는 것으로 봐서는 얼굴책에만 끄적거렸던 모양이다. 한국어/영어 두 버전으로 작성했던 기억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얼굴책에만 남겨둔게 맞는 듯 [본문으로]
  3. AEI(Albert-Einstein-Institut 혹은 Albert Einstein Institute)는 별명이고 포츠담과 하노버 두 곳에 동명의 연구소가 있기 때문에 지명으로 구분한다. 포츠담은 이론 중심, 하노버는 실험 중심. [본문으로]
  4. 내가 근무하는 동안 50명 내외의 크기를 유지했다. Alessandra(디렉터)가 연구소에 자리가 없어서 감당이 안 된다고 사람을 덜 뽑아야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연구소의 그 누구도 그 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 눈치(...)였고. [본문으로]
  5. 긴 통근을 좋아하지 않아서 베를린 훔볼트 대학Humboldt-Universitaet zu Berlin의 양자장론 연구그룹을 필요할 때만 방문했는데, 돌이켜보면 좀 더 자주 방문하는 수고를 들였어야 하지 않았나란 생각이 들긴 한다. [본문으로]
  6. '중력파 연구의 이론부터 실험까지'란 방침은 Alessandra가 처음 연구단을 세울 때부터의 비전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7. 그리고 이 문제는 정밀도가 더 높은 다음 세대 중력파 관측소에서나 측정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상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문제가 실제 측정의 발목을 잡아버린 관측(GW231123)이 올해 7월에 발표되었다. 이와 관련된 연구제안서를 쓰고 있었는데 뽀록(...)이 터진 셈. [본문으로]
  8. (연구소 옮기기 전부터 대략적인 아이디어가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시작할 수 있었던) 연구소 옮긴 직후에 쓴 논문과 그 다음 논문 사이의 간격이 거의 1년이다. [본문으로]
  9. SNS에서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대학원 진학하면서 지도교수를 바꾼 것을 인생의 몇 안되는 로또(...)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본문으로]
  10. 영국에서는 많은 펠로우쉽이 정규 교수직(Lecturer/Senior Lecturer)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로서 기능한다. [본문으로]
  11. 애석하게도 이 피드백을 반영한 버전에 대한 피드백은 받질 못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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